tte[#pg_il_#

분류 없음

거룩하라

LNCK 2013. 8. 23. 13:53

https://blog.naver.com/kaikk/60016327404

 

◈거룩하라       살전4:1~12, 잠5:3~4

 

◑1.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4: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순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신분상, 법적인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성화

 

그 이름에 걸맞게 사는 것은 바로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레위기 20장 26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내게 거룩할찌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성품은 거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해야 합니다.

사랑도 거룩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말도 거룩한 말을 해야 합니다.

노력도 거룩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교제도 거룩한 교제를 해야 합니다.

 

예배도 거룩하게 드려야 합니다. 가정생활도 거룩해야 합니다.

사회생활도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구별됨)은 신자들이 지켜야 할 덕목 중의 덕목입니다.

거룩함은 우리를 세상 사람과 구별시켜 주고,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보증해 줍니다.

 

▲그런데 거룩하게 사는 것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구별됨을 뜻합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완전할 수 있습니까? 이는 불가능합니다.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동적인 상태, 생동하고 역동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거룩함은 “....이다”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될 때 거룩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거룩이란 생각할 수 없고, 하나님을 떠나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거룩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성도의 사랑이 뜨겁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음행을 삼가라.

 

살전4:1~2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바울은 주 예수 안에서 권면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명령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명령은 새로운 명령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전했고 가르쳤습니다

(4:1, 2, 6, 11, 살후2:15, 3:6).

 

또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현재 지키고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살았습니다.

환난과 핍박을 믿음으로 견디었습니다. 목자의 사랑을 고마워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수준으로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높이 평가했고, 그들의 믿음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수준으로 볼 때에 그들의 믿음이나 사랑은 온전치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멀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 많이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더 많이 힘쓸 때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족할 때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자족할 때 성장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또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8~1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단번에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이 예수님의 성품을 덧입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힘써서 영적인 투쟁을 해야 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더욱 힘써하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4:3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검은 옷을 길게 입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사는 것입니까?

웃을 때도 근엄하게 웃는 것입니까? 거룩하게 사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룩이란 구별되게 사는 것입니다.
죄와 구별되고, 세상과 구별되고, 세상의 풍조와 구별되게 사는 것입니다.

 

요즈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합니까?

죄와 구별된, 세상과 구별된, 세상의 풍조와 구별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짝합니다. 물질과 짝합니다. 세상 명예와 짝합니다.

세상 권력과 짝합니다. 탐욕과 짝합니다. 세상의 영광을 좇습니다.

 

 1,200만 명의 성도가 있는데 한국이 이처럼 타락해 있는 것입니까?

왜 이처럼 이혼율이 급증하여 결혼대비 54%가 되는 것입니까?

인하대 구성원이 약 2만명 정도 됩니다.

그 중에 크리스천을 10%만 잡아도 2천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왜 인하대 교정과 인하대 주위에서 매일 술판이 벌어집니까?

왜 인하대 주위가 집 떠난 십대들의 천국이 되는 것입니까?

믿는 사람들이 세상과 짝하고 세상 풍조와 짝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세상과 짝하는 것은 영적인 간음 행위입니다.

 

▲여러분은 세상과 짝합니까? 세상 풍조를 따라 삽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냐, 돈이냐? 하는 갈림길에 놓여 있을 때 무엇을 택합니까?

세상 명예냐, 하나님이냐? 하는 갈림길에 있을 때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당신은 세상의 권세냐, 하나님이냐? 하는 갈림길에 있을 때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성도는 하나님을 택해야 합니다.

 

결혼의 상대도 인간 조건이 아닌 믿음으로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 보전하여 순수한 신앙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하려면 음란을 버려야 합니다. “음란”이란 무질서한 성생활을 의미합니다.

무질서한 성생활은 하나님이 허락지 않은 생활입니다.

 

결혼하기 전의 성관계나 그런 것을 유발시키는 모든 행동이 음란입니다.

결혼한 유부남이나 유부녀가 바람을 피우는 것 음란입니다.

 

혼전순결을 지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의 명령이기도 하거니와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결혼 후에도 외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혼전순결을 지킨 사람은, 결혼 후에도 성적 순결을 지킬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물론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했으나 그 후에 철저히 회개한 사람은,

결혼 후에도 성적 순결을 지킬 수 있습니다)

 

요즘은 음란을 유발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더욱 더 발전해 가는 것이 음란문화입니다.

 

옛날에는 책이나 사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텔레비전, 영화와 컴퓨터를 통한

영상매체가 세상을 음란의 광란의 광장으로 몰아넣습니다.

 

잠언 말씀에 음란은 “날카로운 칼에 꿀을 바른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잠5:3~4

먹을 때는 달콤합니다. 그러나 그 끝에는 혀를 베이고 생명이 죽습니다.

그래서 “음란을 버리라”는 말씀을 살전4:3

JBP 성경에서는 a clean cut, 완전히 싹을 잘라버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음란을 버리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4, 5절을 보겠습니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혼인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여겨야 합니다.

남자는 아내를 취하고 이방인들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아야 합니다.

 

히13:4절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요즘 결혼식은 아주 화려합니다. 반면에 혼인에 대해 의미를 모릅니다.

혼인은 나이가 들면 하여야 하는 인생의 통관 절차나 정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혼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 안에서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에덴에서 결혼을 창설하셨습니다. 결혼을 창설하실 때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룰지로다(창2:24)”

 

이 말씀에서 연합이란 단어에 대해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연합이란 영어로 cleave로, 이는 종이 두 장을 아교풀로 딱 붙여 놓은 상태를 말합니다.

 

부부 사이에는 그 어떤 것도 그 사이로 끼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부부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법적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하고,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고, 장래 비전과 소망이 하나가 되어야 하고,

또 방향과 사명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는 무엇보다도 육체적으로 순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합할 수 있게 하신 것,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은 오직 부부 관계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떤 이유라도 이혼을 금합니다. 예수님은 “이러므로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마19:6)”

고 못을 박습니다. 분방을 금합니다. 기도를 위해 잠시 분방했다가도

반드시 합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 진리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에서 이 서신(살전)을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에는 성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비너스가

밤거리에 그녀의 종들을 창녀로 보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에는 “카비리”라는 신을 경배했는데,

이 신은 엄청난 성적 부도덕함을 유발시켰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아내만을 유일한 성의 대상자로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도 그 시대의 영향을 받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음행을 버리고 이방인처럼 색욕을 좇지 말라’고 했습니다. 4:5

색욕은 성욕이 발산되어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는 식욕과 장수욕과 성욕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주신 본래의 목적대로 쓰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본성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절제하지 못하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음행을 버리고 색욕을 좇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난번 매춘부들을 강하게 단속할 때 어떤 야당 국회의원이 매춘을 통제하면

젊은 청년들이 성욕을 발산할 수 없다며 반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인간이 무엇입니까? 본능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본능을 절제할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성도는 음행을 버리고 거룩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초대 성도들은 모든 삶에 있어서 거룩했습니다. 반면 로마 사람들은 거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적으로 문란했습니다. 베스비우스 화산폭발이 있었던 봄페이시에는

동성연애가 즐비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크리스천들은 모든 삶에 있어서 정결했습니다.

 

이를 지켜 본 로마 고관들이 그들을 사위로 삼고 며느리로 삼으면 건강한 가정을 지키고

보전할 수 있음을 알고 너도 나도 크리스천들을 사위로,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의 상류층이 복음화되어 드디어 A.D.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승인한 것입니다.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가 헬레나입니다.

그녀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를 기념하는 성당이 로마에 있습니다.

 

우리가 음란을 버리고 색욕을 좇지 않고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룩은 아무리 십계명을 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힘써 기쁘게 하고자 하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음행과 색욕은 모두가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때, 음행을 하라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지 말라고 해도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창39:9절을 보면 요셉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득죄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때 득죄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써 거룩하게 됨이라.”

 

거룩하여지는 비법이 뭐라고 했습니까? 기도와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도생활을 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요

거룩한 삶에 이르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를 진실로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데 걸림돌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애통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통회하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6,17).”

 

셋째는 세상 풍속을 좇지 않아야 합니다. 레위기 20장 23절을 보면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좇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가나안 족속의 풍속은 온갖 우상숭배였습니다.

우상 숭배는 반드시 성적인 범죄를 가져다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속한 죄악된 풍속을 좇는다면

이것은 큰 죄악입니다. 요한일서 2:15절을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롬12:2).

성경은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라 했습니다(약4:4).

 

성경은 우리가 경건치 않은 것들과 이 세상 정욕을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늘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였습니다(딛2:12).

 

넷째는 우리 몸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레위기 20장 25절을 보면 우리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이는 전인격의 정결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것, 주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경건과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순결은 생명과 같습니다. 그런데 대개 순결하면 자매들만의 대명사로 여깁니다.

그러나 순결은 남녀 모두를 포함하며 형제들도 마음과 몸을 순결하게 해야 합니다.

 

▲음행과 간음과 육신주의의 물결이 탁류처럼 흐르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본인은 물론 가정을 순결하게 지켜야 합니다.

 

가정생활은 하나님의 기업을 잇는 그릇입니다.

부부가 순결하고 정상적일 때 가정이 튼튼하게 되고,

가정이 튼튼할 때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게 되고,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랄 때 사회와 국가가 건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는 것, 생활하는 것 등

모든 것에서 깨끗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8,9).”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b).”

우리는 모든 면에서 참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부부와 가정이 순결하고 거룩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더럽힐 때 엄히 심판하십니다.

본문 살4:6~7절을 보면 ‘음란과 색욕을 좇을 때 하나님은 신원(보복, 심판)하십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음행을 하는 자들에게 상당한 보응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보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병 STD 입니다.

요즘 AIDS도 음란과 색욕으로 인해 생기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살4: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우리가 음란을 좇는 것이 심각한 죄인 이유는 음란을 좇는 것은 성령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버린다는 것은 내팽개쳐 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버림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얼마나 마음이 쓰리고 아픕니까?

 

하나님이 이런 아픔을 당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내팽개쳐 버린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내어버리고 내팽개쳐 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죄를 짓는 것입니까?

 

세상에 은혜를 배반하는 죄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음란의 큰 죄를 행치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진노하시고 영원한 유황 불못에 내던지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둘째, 형제를 사랑하라

 

살전4:9~10절을 보겠습니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주위 마게도냐의 모든 형제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섬기고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더 많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더욱 많이 행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고갈되는 것이 더욱더 솟아납니다. 그리고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더 많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보세요.

바울은 그냥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형제 사랑을 하라고 했습니다.

형제는 부모의 피로 맺어진 사람들입니다. 형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가 형제 관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맺어진 절대적인 형제관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서까지도 함께 살아야 할 형제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들끼리 경쟁하고 시기하고 서로 불신하고 미워하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시기하고 경쟁하고 불신하고 미워하면 좋아할 사람은 오직 사단뿐입니다.

사단이 역사하면 사랑의 공동체가 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되 피차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벧전1:22).

형제 자매를 사랑하되 일절 깨끗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딤전5:2).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은 자기 사랑입니다(딤후3:1). 자기 밖에 모릅니다.

아내나 남편을 부를 때에도 자기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수고와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11~12절을 보겠습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이는 외인을 대하여는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조용히 자기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 바쁘면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할 수 없습니다.

여기저기 다니며 시어머니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사람이 바쁘게 일하지 않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일에 쓸 데 없이 참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일을 만드는 사람들(busybodies)이라고 했습니다(살후3:11).

그리고 헬라 사람들은 일은 노예나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노동을 신성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소명으로 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되 자기 일을 자랑하고 떠벌리지 말고 조용히 하여야 합니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고 소명의식을 갖고 기쁨으로 일해야 합니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할 때 다른 사람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

오히려 넉넉한 삶을 살게 되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손님을 대접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여 아브라함의 가정처럼 넉넉하고

풍성하게 손님을 대접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12개의 캠퍼스에 스탭을 파송하여 지원하기를 기도합니다.

물질은 움켜쥐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섬기고 베푸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거룩은 음행을 버리고 색욕을 좇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가정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가정을 귀히 여기고 거룩히 여기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사랑이 식어가고 자기 사랑만 하는 이 시대에 피차 뜨겁게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을 소명의식을 갖고 조용히 열심히 일하기를 바랍니다.

 

'분류 없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9. 기독교 승리주의   (0) 2013.08.23
▣11.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  (0) 2013.08.23
▣13. 내적 치유  (0) 2013.08.23
▣14. 리더쉽, 목회자  (0) 2013.08.23
▣15. 말씀  (0) 2013.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