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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과 셋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1 / 김성수

LNCK 2013. 9. 10. 16:32

◈가인과 아벨과 셋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1               창4:1~25, 갈3:16

                                                                                          김성수 목사, 창세기20강a, 출처

 

◑<여인의 후손> 과 <뱀의 후손>

 

▲창4장부터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화염검과 그룹들을 통과하여

생명나무실과를 먹게 된 하나님의 백성 즉 <여인의 후손>의 라인과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떠나간 <뱀의 후손>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 친밀하게 간섭하시며 한 쪽은 저주의 땅으로 몰아가시고

한 쪽은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또한 섬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한 구속사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수많은 아담의 자손들 중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시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대표들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아담과 하와는 거의 천 년을 살았습니다.

그 둘은 천 년을 살면서 계속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창 5:4‐5) “4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5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4절의 자녀를 ‘낳다, 야라드’라는 히브리어 동사가 와우 계속 형입니다.

그 말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수학자가 아담과 하와가 평생 동안 낳은 자식들과 그 후손들의 자녀들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보니 아담이 죽을 때쯤의 전 세계 인구가 10억 명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 때는 전 세계인구가 거의 20억에 육박했을 것이라 발표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사람들의 수명이 거의 천 년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인구 증가율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는 사람은 많은데, 죽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가인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유리 하는 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면 어떡합니까?’라는 질문을 한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질문이 되겠지요?

 

많은 분들이 ‘가인과 아벨 당시의 인구가 달랑 네 명이었는데

또 누가 가인을 죽인단 말인가?’하는 질문을 갖고 계신 것 같은데

그 질문은 우문(愚問)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아담의 후손 가운데

신앙의 대표자와 불신앙의 대표자로 섰던 것이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구의 인구가 달랑 네 명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구백삼십 년을 살았고 가인의 동생인 셋도 구백 십 이년을 살았으므로

가인도 천 년 가까이 살았을 것이기 때문에

가인은 아벨을 죽인 이후에도 수억의 친지들과 함께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자기를 죽일까봐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아담의 후손들 중에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이

하나님께 선택이 되어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아담의 자손들 중에서 선택을 하신

가인과 아벨을 통해 교회에게 전하시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을 보세요.

 

(창 4:1)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

하와가 말하였다. "주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

 

동쪽인 저주의 땅으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동침을 하여 아이를 낳습니다.

첫 아이가 ‘가인’이라는 아이입니다.

 

가인을 낳은 하와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개역 성경의 번역을 보면 마치 하와가 ‘여호와의 도움으로 내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감사의 고백을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말미암아’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I have got a man from the Lord'

'내가 여호와로부터 아들을 얻었다’라는 뜻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아이를 얻었다’라고 번역을 하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위 4:1절은, 창세기 3:15절과 연결해서, 이해를 해야 하는 구절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첫 아들을 낳자마자, 그 아이가

하나님께서 창3:15절에서 약속하신,

자신들을 구원해 줄 '여인의 후손'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맏아들은 ‘여인의 후손’의 라인이 아니었습니다.

 

 

◑기대했던 가인은 <여인의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개념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계속해서 ‘여인의 후손’이라는 단어와

‘뱀의 후손’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쓸 텐데

여러분이 그 개념을 잘 정리를 하고 계셔야, 설교의 이해가 용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후손’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뱀(사단)이 ‘여인의 후손’(예수님)의 발꿈치를 물고(십자가)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고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뱀의 머리를 밟으신 ‘여인의 후손’ 안에 한 무리가 들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따라서 ‘여인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던 교회, 즉 성도도

‘여인의 후손’이라 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작은 예수이니까요.

 

▲(창15:4~5)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5 주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에게서 날 약속의 자손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하늘의 뭇 별들을 보여주십니다.

그에게서 날 약속의 자손 즉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가 그만큼 많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손, 제라’라는 단어가 단수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후손을 자손들이라고 복수를 쓰지 않으시고 단수로 쓰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별처럼 많은 아브라함의 후손은, 단 한 명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신약에서 이 구절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구절의 진의를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구절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갈 3:16) “16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을 하여 주실 때에,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자손들에게'를 쓰시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너의 자손에게’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창세기 15장 5절의 ‘자손’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한 명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 자손 안에 뭇별처럼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도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 영적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창세전에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는 하나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 들어 있는 교회를 지칭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여인의 후손’으로 혼용하여 부르더라도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union with Christ의 개념은

오늘 설교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꼭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은혜로, 믿음으로 선택받은 아벨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을 낳고

그 아이가 ‘여인의 후손’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맏아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크게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아들 이름을 ‘아벨’이라 지은 것입니다.

 

‘아벨’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하벨’은 ‘nothing' 혹은 'vanity'라는 뜻입니다.

전도서에 나오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에 쓰인 단어가 바로 ‘하벨’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라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기대 속에서 가인을 낳은 후에,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잘 드러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아무 것도 아닌 자인 ‘아벨의 제사’를 열납 하셨다고 합니다.

 

그 말은 그 아벨이 타락 후 둘로 갈라지게 되는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 중

바로 ‘여인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라인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장남과 차남이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여인의 후손’의 그림자로 등장하는 아벨이

가인보다 무엇을 대단하게 잘 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단지 다른 것은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고

아벨은 양을 죽여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벨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입니까?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이 의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의인이 된 것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성경은, 믿음이 인간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엡 2:8)

 

그러니까 아벨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이지

그의 제물이 특별해서 혹은 그 사람이 뭔가 다른 이들과 달라서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열납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요일 3:12) “우리는 가인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동생을 쳐 죽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가 동생을 쳐 죽였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악했는데,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해서 악한 일을 한 것이고

아벨은 선한 분에게 속해서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제물(곡식이냐, 양이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아벨을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기뻐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 4장에 벌써 'unconditional election'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 선택과 유기의 교리를 잘 설명해 줍니다.

 

(롬 9:10‐16)

“그뿐만 아니라, 리브가도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에게서 쌍둥이 아들을 수태하였는데,

11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지속되게 하시며,

12 하나님의 이러한 일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시려고,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3 그것은 기록된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한 것과 같습니다.

14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셨습니다.

16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바로 이 로마서의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창세기 4장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인간 측에서의 어떠한 공로나 노력이나 열심도

하나님께, 내 구원의 근거로 드려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이 타락을 하고 저주의 지옥을 향해 달음박질하고 있을 때에

그들 중 어떤 자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掌中)으로 끌어올리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남은 자’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사 10:20‐23)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저주의 땅인 동쪽으로 쫓겨난 자들 중에 그룹들과 화염검을 통과하여

다시 생명나무실과로 돌아오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 이후에 그 <남은 자의 첫 번째 모델>로

바로 오늘 본문의 아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전부 저주받은 ‘가인’이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같이 다 저주의 땅 동쪽으로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으로 대표되는 그 저주받은 인간들이 드리는 어떤 것도

열납 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열납 하지 않으셨다’라는 단어는 ‘쳐다보지도 않으셨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들이 왕이 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을

쳐다보지도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하늘을 소망하는 자들이 아니고 땅을 섬기고

땅에 노예가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가인을 ‘농사짓는 자’라고 표현을 했는데 그 단어를 원어로 보면

‘아바드’ ‘땅을 섬기는 자’ ‘땅의 노예가 된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땅에 목매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거들떠보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아벨’이라는 남은 자가

생명나무실과를 먹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을 하자마자, 즉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 올리시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남은 자의 이야기를 이렇게 창세기부터 시작하셔서

요한계시록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까지 점진적으로 설명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인의 후손’,

즉 남은 자들을 남겨 가시는 방법이 조금 특이하다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은 자>들을 선택하시는 섭리 *또는 ‘선택’된 자

 

하나님은 인간 쪽에서 기대하고 내어놓는 장자들을 모두 물리시고

기대치 않던 자들을 택해서 남겨 가십니다.

 

▲본문에서도 아담과 하와의 기대를 잔뜩 안고 태어난 장남인 가인을 유기 시키시고

그 부모가 ‘nothingness, vanity'라는 이름을 지을 만큼 기대와는 거리가 먼

‘아무 것도 아닌 자’ 곧 ‘아벨’이

‘여인의 후손’의 라인으로 등장을 하지요?

 

▲뿐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도 장자인 이스마엘이 유기 되고

차자인 이삭이 선택을 받습니다.

 

이삭의 자손은 어떻습니까?

장자인 에서가 유기 되고, 차자인 야곱이 선택을 받습니다.

 

야곱과 에서를 비교할 할 때,

야곱은 에서에 비해 훨씬 유약하고 사기성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을 뱃속에서부터 선택을 하셨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러시는 것 같지 않으세요?

 

▲야곱의 자손은 어떻습니까? 장자의 명분이 누구에게 돌아가지요?

르우벤은 서모를 범했기 때문에 장자 권을 박탈당하지요?

따라서 그는 아닙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대상 5:1‐2) “1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장자 권은 요셉에게 넘어갔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유다와 레위,

그리고 요셉에게 장자 권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창세기 49장을 강해할 때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야곱의 자손들 중에서도 장자가 아닌 기대치 않았던 사람에게 장자권이 넘어갑니다.

 

▲요셉의 자손은 어떤가요?

야곱이 요셉의 장자인 므낫세에게는 왼손을,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대고 안수합니다.

역시 장자권이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넘어갑니다.

 

▲다윗은 어떤가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장자입니까? 이새의 막내입니다.

워낙 어리고 볼품없어서 전쟁터에도 못 나가고 형들 도시락 배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에게는 형이 없었나요? 나단과 압살롬이라는 형이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여인의 후손’의 라인에 장자들이 선택되지 않고

마치 의도적인 것처럼 기대치 않던 사람들이 선택이 될까요?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생각하는 방법을 깨는 모습으로 온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인간들은 구원에 관한 한 절대 기여할 수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다는 것을

교회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에 인간의 행위가 보태져야 한다는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창세기부터 다시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부분을 고린도서에서 이렇게 풀어서 설명을 해 줍니다.

 

(고전 1:26‐29)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27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9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지지리도 못난 사람들만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 측에서의 어떠한 열심이나 공로도 구원의 근거로 택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강조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오늘 본문인 창세기에 벌써 이렇게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