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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와 무지개 덮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2

LNCK 2013. 12. 15. 18:25

 

35방주와 무지개 그리고 덮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창9:1~29) (tistory.com)

◈방주와 무지개 덮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2     창9:1~29          ☞ 창세기 설교모음

 

김성수 목사 창35강 후반부 스크랩

 

◑홍수 이후에 안 어울리는 말씀

 

그 하나님의 은혜가 이 땅에 가시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게 될 것인지에 관해

좀 더 구체적인 암시가 본문 창9:4~6절까지에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창9장은 홍수 후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고기를 먹을 때 피가 있는 채로 먹지 말라’↓ .. 이 말씀이 꼭 홍수 후의 시점에 필요했을까요?

필요했으니까 주신 말씀인데,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일까요?

 

(창9:4‐6) ‘그러나 고기를 먹을 때에, 피가 있는 채로 먹지는 말아라. 피에는 생명이 있다.

5 생명이 있는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내가 반드시 보복하겠다.

그것이 짐승이면, 어떤 짐승이든지, 그것에게도 보복하겠다.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에게도 보복하겠다.

6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피를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피는 반드시 피로 갚아야 한다고 천명하십니다.

 

이 말은 복수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 백성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생명에 상응하는 피가 흘려져야 함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우리의 생명과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반드시 흘려져야 함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담아 제사 제도가 주어졌던 것이고

그 제사는 참 제사인 십자가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에 왜 갑자기 피가 생명이라는 말씀이 나오는지 잘 아시겠지요? (창9:4‐6)

 

심판 속에 꽃피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이 무지개로 나타난 것이며,

노아와 노아의 세 아들의 에피소드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이 덮여지는 것입니다.

 

(눅22:20) 20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에, 잔을 그와 같이 하시고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방주로 들어오라

 

홍수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어 안고 자기가 대신 익사함으로

그 품어 안은 백성들을 살려내는 방주와 예수 그리스도를 그려 보세요.

방주는 정확하게 우리를 품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자, 방주로 덮여있는 자들은 절대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KJV성경으로 창세기를 다시 꼼꼼히 읽다가 참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한글 개역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령을 하시는 것으로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KJV에는 ‘들어오라’로 번역이 되어 있지요?

 

사실 거기서 쓰인 히브리어 동사 ‘보’는 ‘들어가다’라는 뜻보다는 ‘들어오다’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일 뿐 아니라

문맥상으로 보더라도 ‘들어오다’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KJV에는 ‘come into the ark’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왜 중요한가하면 하나님께서 방주로 ‘들어오라’고 명령을 하셨다는 것은

그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직접 방주가 되셔서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을 품으시고

저주의 비를 대신 맞아 주시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권고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보’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70인 역에서 헬라어 ‘엘코마이’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 단어가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옵니다.

 

(계22:17) 17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 단어는 주님께서도 즐겨 쓰시던 단어였습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사야서에서도 ‘보’ ‘들어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이렇게 ‘내게로 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600번이 넘게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토록 애절하게 죄인들에게 초청의 메시지를 띄우십니다.

 

그런데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방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한 무리에게 은혜를 부어 당신의 은혜로 그들을 방주로 밀어 넣으시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방주로 밀려들어가게 된 사람들은

반드시 그들의 순종의 행위가 동반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부으셨지만 노아를 반짝 들어서 방주에 억지로 밀어 넣으시지는 않으셨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자 노아에게서 순종의 몸짓이 나왔습니다.

노아가 자기 발로 자신의 식구들을 데리고 방주 속으로 들어 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어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아마 한순간에 노아가 지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멋진 방주를 지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노아를 위해서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으면서 정말 120년간 늘 기쁨과 행복 속에서 방주를 지었을까요?

 

여러분 신앙생활 하시는데 정말 늘 기쁨과 행복만 있던가요?

노아는 방주를 지으면서 수많은 의심과 원망과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왜 비도 안 오는 세상에 이런 커다란 배를 지어야 할까?

이 배를 짓느라 나의 인생은 완전히 고단한 인생이 되어 버렸다.

왜 꼭 내가 이것을 지어야 하나? 사람들의 저 손가락질을 하나님은 왜 안 막아주실까?’ 등등

노아는 수많은 의심과 불평과 원망 속에서 방주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나약한 노아를 통해 하나님은 방주를 완성해 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그 분의 사랑과 은혜를 직접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자

노아는 서슴없이 방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노아가 자기 식구들을 이끌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방주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의 집이나 전답이나 가구들이나 그가 자신을 위해 이 세상에서 아끼고 가꾸었을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걸 다 가지고 방주로 들어갈 수는 없었으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방주로 들어와 있는 자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쌓아두었던

모든 세상의 힘들을 놓아버리는 행위가 반드시 우리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그러한 세상 정욕이나 그 정욕을 채워줄 세상의 힘이 아니라

의로움이나 경건함이나 거룩함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그렇게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온전한 순종이 우리에게서 나오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인생의 시간동안에 열심히 방주를 짓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불평과 원망과 한탄이 쏟아지기도 하지만 끝까지 가보는 것입니다.

아니 끝까지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끌고 가시니까요.

 

(딛2:11‐13)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12 그 은총은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건함과 속된 정욕을 버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합니다.

 

13 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된 소망을 갖게 합니다.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합니다.'

 

방주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바로 이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방주 속에서 절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수가 없습니다.

방주 안에 있는 자들, 다른 말로 예수 안에 들어간 자들은

그 예수가 사신 삶을 추구하며 그리로 향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방주에는 그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방향키라든지 운전대라든지

돛이라든지 닻이 없습니다.

그냥 예수라는 방주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

방주 안에 들어간 자들의 운명인 것입니다.

 

방주가 나중에 아라랏산에 도착했지요? 노아가 그 아라랏산을 목표로 삼아 방주를 운전했습니까?

아닙니다. 방주가 움직이는 대로 자신은 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만일 노아가 방주가 가는 방향을 바꾸기 위해 이런 저런 꾀를 부렸다면

그 방주가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었을까요?

아니요. 시간만 지체될 뿐 방주는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 성도는 예수가 움직이는 대로 좇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 우리가 갖고 싶은 것, 우리가 먹고 싶은 것, 우리가 좇고 싶은 꿈,

그러한 세상의 비전과 야망을 모두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가 이끄는 곳으로 끌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 자신의 야망을 좇아 자기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려고 하면

시간만 지체되고 매만 많이 맞을 뿐 하나님은 절대 양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목적지까지 이끌고 가십니다.

 

◑노아만 구원받지 않고, 8식구가 함께 구원받은 이유

 

(고후5:17~19)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19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남을 밟고 죽이는

그런 삶에서 돌이켜 자신을 비워 화평과 화목을 전하는 화목케 하는 직책을 부여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다른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방주 안으로 초청이 되어 그 방주 속으로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 주는

은혜와 복의 통로로 사용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분명 노아 한 사람에게 은혜를 부으셨고

그 만을 의로운 자, 완전한 자라 칭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방주 속으로는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가 들어갑니다.

 

(창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그렇지요? 이 구절은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집안의 가장이 예수를 잘 믿으면 온 가족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구원은 가족 단위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의인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함께 방주에 오르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을까요?

분명 1절 말미에 보면 노아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였습니다.

그런데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모두 구원을 받지요?

 

그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의인으로 말미암아 다수에게로 전파되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작은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사람의 온전한 의인에 의해 많은 의인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확장 또한 그러한 원리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이 받은 은혜와 복을 다른 이들에게 흘려 보내주는 삶을 살아서

그 은혜와 복이 다른 이들에게로 전파되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롬5:18~19) ‘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아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른 여러 이웃이 득을 보는 삶 말입니다.

의인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들이 함께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의인들의 화평케 하는 삶, 자기희생의 삶, 은혜와 복의 통로로서의 삶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고 그 삶을 가리켜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현재에서 사는 삶

 

여러분, 성경은 분명 우리 성도는 ‘영생을 얻었다’라고 과거완료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이 땅에서 영생을 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되지요?

그런데 영생은 단순히 긴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했지요? 영생이 뭡니까?

신적 생명을 영생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신적 생명은 어떤 삶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삶이 어떤 삶인지 가르쳐 주시지도 않고

그저 우리에게 살아내라고 강요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럼 이 땅에서 완벽하게 그 하나님 나라의 삶, 신적 생명, 영생을 살다가 가신 분이 있다는 말인데

 

그 분이 누구일까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종국에 살게 될 하나님의 처소로서의 삶을 완벽하게 살다가 가셨지요?

 

그런데 성경은 성도가 좇아 살아야 할 그 하나님의 말씀, 율법의 마침을 사랑이라 합니다.

 

(롬13:8‐10)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9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럼 이제 영생의 정의가 조금 더 좁혀졌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영생을 사는 길은 예수께서 그렇게 사신 것처럼

아버지가 내 안에서 나에게 시키시는 것을 모두 행하는 것인데

성경은 그러한 삶을 한 마디로 ‘나가 아닌 남을 사랑하는 삶’이라 합니다.

 

(요일4:7‐8)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보시다시피 성경은 하나님께 속한 자, 방주 안에 들어가 있는 자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이고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그런 십자가의 사랑을 속성으로 가지고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그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을 좇아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아는 자, 영생을 소유한 자, 영생을 사는 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방주 속으로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흘려보내어

그들을 방주로 초청하는 자들로서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 삶은 나가 아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며, 그 삶이 바로 영생이고,

그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인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우리 주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전부 그렇게 나가 아닌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섬기고 사랑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그 덮으심의 은혜와 무지개의 의미와 방주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지금부터 우리 예수님이 살다 가신 그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살아내십시다.

거기에만 진정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