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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2장, 모든 것이 나를 해롭게 하는가

LNCK 2014. 1. 1. 18:40

https://blog.naver.com/karamos/220309859637

 

◈모든 것이 나를 해롭게 하는가    창42:36~38          2014.05.25.

 

서론

 

창세기 42장에는 대단히 중요한 원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36절에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야곱의 ‘숨이 끊어질 듯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외치는 부르짖음’입니다.

특별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라는 말씀은

‘모든 것이 나를 향해 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주변 동서남북과 가정 안팎을 불문하고 아무런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도 야곱이 느꼈을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는 되는 일이 없고, 왜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대적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지요.

또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를 해롭게 한다’고 느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실망에 좌절한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해롭게 하도다!”(Everything is against me!)라는 고백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신자들에게는 합당한 말입니다.

불신자들은 모든 것이 그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잠깐 실족해서 이런 말을 한 거죠)

왜냐면 그가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도, 나중에 보면 그것은 해로운 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정말 나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연합하여 해가 되고 대적이 되기 때문에

자기가 서 있는 위치가 대단히 불안정하며 스스로 위험한 상황을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신자의 상황은

불신자들과 같지 않습니다. 로마서 8:31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라틴어로 ‘Deus pro nobis!’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어로는 ‘God is for us’ 즉,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주시기 때문에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확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무엇이 사랑이냐고 묻는 사람들은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하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더 우리를 사랑하셔야 됩니까? 하나님이 진정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편이 되어주시고, 우리를 위하십니다. Deus pro nobis!

 

롬8:38~39절에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천사들도 어쩔 수 없고 마귀와 귀신들도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덤벼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해칠 수 없고,

우리를 대적하고 해롭게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해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은 창세기 42장을 중심으로 해서 이 진리를 증명해보고자 합니다.

 

◑1. 야곱의 현재적 느낌 : 모든 것이 자기를 해롭게 한다  (잠시 실족한 것입니다)

 

야곱은 모든 것이 자기를 해롭게 한다는 이유가 있는 현재적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의 안팎 상황은 유익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야곱의 바깥 상황은 기근이 있습니다.

 

온 땅에 사람들이 다 굶어 죽어갈 엄청난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두 번에 걸쳐 꿈을 꾸게 하신 것처럼, 7년 동안 기근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7년 동안 흉년이 온 것입니다.

 

오늘날 흉년이 1~2년만 지속되어도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7년의 흉년을 누가 버텨낼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이겨낼 수 없는 극심한 기근이었습니다.

 

41:57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42:2절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애굽 전역을 넘어 야곱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도 극심한 기근이 임하여

야곱과 그의 가족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야곱의 상황이 지금 애굽에 가서 양곡을 얻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기 상황임을 의미입니다. 이처럼 야곱의 바깥 상황은 온통 죽을 일뿐입니다.

 

▲그런데 야곱 내면의 상황도 바깥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온통 슬픔뿐입니다. 요셉을 잃은 지 2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도 아들을 잃은 슬픔에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37:35절에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요셉을 잃고 나니 마음이 아파서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낫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은 지 20년이 지난 후에, 야곱의 마음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 행하는 길에서 재난이 그 몸에 미치면

너희가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창42:38).

20년 전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야곱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나이가 130세입니다. 머리색은 다 희어졌습니다.

그런데 20년 전에 아들을 하나 잃었는데 이번에 막내아들을 또 잃게 된다면

나는 이 흰머리를 가지고 음부에 내려가는 것이 낫겠다는

마음 속 깊은 슬픔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8절에 “야곱이 가로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내 아들은 데려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무슨 말입니까?

베냐민은 내 아들이고 너희 열 명은 내가 낳았지만 내 자식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첫째아들 요셉도 잃었는데

막내 베냐민마저 잃게 되면 어떻게 살아가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굶어죽을지언정, 베냐민을 형들과 함께 애굽으로 보낼 수 없다는 진심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이러한 야곱의 감정을 공감하시는 분이 없습니까?

그러나 야곱이 느끼는 감정은 결코 과장되거나 누군가로부터 비난받을 일도 아닙니다.

우리가 야곱과 같은 상황이라도 똑같은 고백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야곱이 가진 느낌은 올바른 감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현재만 보고 땅만 볼 줄 알았지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야곱은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하늘을 보지 못했습니다.

야곱이 모든 것을 응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나를 대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는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2. 야곱의 결국 : 모든 것을 유익하게 되도록 하나님이 일하고 계셨다

 

우리는 이미 완성된 창세기를 읽고 있기 때문에 야곱의 결국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 유익하게 되도록 일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대적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야곱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야곱이 많은 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130세의 나이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든 상황이 나를 대적한다며 불평하던 사람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애굽 총리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총리는 하는 일이 많아서 힘들지만 총리의 아버지는 하는 일이 없습니다.

엄청나게 좋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130세에 애굽 총리의 아버지가 되고 고센 땅을 할당받아

거기서 마음껏 목축을 하고 평안히 지내게 되었습니다.

또한 잃었던 아들의 아들까지 보고 130세부터 야곱이 눈을 감던 147세 때까지

17년 동안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노인이 되었습니다.

남들은 다 굶어 죽어도 야곱과 그 가족은 실컷 먹고 누리는 복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정말 야곱에게 모든 상황이 해롭기만 했던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유익하게 되도록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기근이 나쁜 것인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기근 때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기근이 아니면 요셉이 총리가 될 일이 없습니다. 기근이 임했기 때문에 요셉의 능력이 나타나

누구도 가질 수 없었던 큰 권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야곱과 그 아들들로 7년 기근 중에서도 얼마든지 먹여 살릴 수 있는 실력자가 된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기근 때문에 요셉을 찾아오게 되었고

요셉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꾸었던 꿈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현재에서 기근은 분명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미래적 관점에서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 없었던 것입니다.

야곱에게 최고의 유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베냐민이 애굽에 내려가야 했던 것도, 야곱은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이 요셉에게 도둑으로 몰려서 요셉의 종이 되어야 했고,

가나안 땅에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상처나고 삐뚤어진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요셉에게 범한 잘못들에 대한 대가를 이제야 치르게 되는구나’하며

회개하고 관계를 개선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역기능 가정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이루는 영광스러운 가정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들이 요셉에게 절을 했던 일과 막내아들 베냐민이 애굽으로 내려가야만 했던 일들이

야곱을 괴롭게 하신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도 야곱을 위해 일하고 계셨던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나?”

“왜 내게만 이렇게 어려운 일이 일어나나?”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모르시느냐?”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든 태도와 감정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나를 해롭게 한다는 잘못된 느낌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유익하도록 일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3. 야곱과 그 아들들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치유과정

 

야곱과 그 아들들의 허물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치유의 방편은 무엇이었습니까?

7년 흉년의 기간 동안 애굽 주변의 나라들도 다 흉년이 들게 되었고,

사람들은 모두 다 요셉에게 와서 양곡을 달라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가운데 남자 열 명이 와서 자기에게 무릎을 꿇는데 얼굴을 보니

자기 형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미 20년 전의 일이었고 요셉도 애굽에서 오랜 세월동안 고생해서

얼굴도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알현하는 현장도, 서로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대에는, 높은 사람의 얼굴을 함부로 쳐다보지 못하고, 보통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했죠.

그러니 더더욱 형들이 요셉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옷도 화려했고요.

 

요셉은 형들의 언어를 다 알아 들을 수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고 옆에 통역관을 세웠습니다.

42:23절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 들은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요셉이 통역관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열 명의 형들이 요셉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을 때,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묻고 싶은 것이 많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요셉은 그들을 시험을 합니다.

요셉이 형들을 시험한 방식은 20년 전에 자기가 당했던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20년 전 당시 17세였던 요셉은 형들에게 아버지의 스파이로 몰려서

벌겨벗겨진 채 구덩이에 던져지게 되었고 겨우 목숨은 부지하여

은 20개에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스파이로 몰려 억울하게 구덩이에 들어갔었고

결국 은 20개에 노예로 팔렸었는데, 요셉은 이 방식을 거꾸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형들을 스파이로 지목하였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주의 종 우리들은 십이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말째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42:12~14

 

너희가 모두 정탐꾼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20년 전에 형들에게 스파이로 몰렸기 때문에

요셉도 형들을 스파이로 몰아세운 것입니다.

 

당시 애굽 사람들은 앗수르 사람들이나 헷 족속을 원수로 생각하였는데,

그래서 그들이 보이면 일단 스파이로 의심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형들은 변명을 합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들입니다.

우리가 원래는 열둘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없어졌고, 막내는 집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양곡 얻으라고 열 명인 우리만 보내었습니다. 우리는 신실한 아버지의 아들들입니다”

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을 스파이로 간주하고 그들을 3일 동안 감옥에 구금하였습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구덩이에 들어갔던 것처럼

그들도 아무 죄가 없지만 3일 동안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일 후 요셉이 가서 다시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 말째 아우를 데리고 오면 너희가 스파이가 아닌 것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 형들이 “괜히 말째 아우 이야기를 해서 사서 고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 가운데서 둘째 형인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 놓고

아홉 명의 자루에 곡식을 가득 채워서 그 곡식에 곡식 값으로 낸 은돈도 집어넣고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가서 풀어보니까 은돈이 그대로 다 있는 것입니다.

 

스파이라 하니 무엇이 떠올랐겠습니까? “우리가 요셉을 아버지의 스파이로 몰았도다.”

감옥에 들어가니 무엇이 떠올랐겠습니까? “우리가 억울하게 요셉을 구덩이에 집어넣었도다.”

자루에 있는 은돈 때문에 무엇이 떠올랐겠습니까? “20년 전 우리가 요셉을 은 20개에 팔아먹었도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하면 그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그것과 거의 동일한 장면을 연출해 가시면서 스스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숯불 곁에서 예수님을 세 번 저주하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갈릴리로 가서 똑같이 숯불을 피워놓고

떡과 생선을 굽고는 베드로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숯불 곁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몇 번 물어 보셨습니까? 세 번 물어보셨습니다. 숯불 세 번하니까 떠오르는 것은

닭 울기 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자신의 잘못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드디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42:21~22

 

20년 전에 저질렀던 죄가 생각난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죄를 잊지 못합니다.

30년 전에 10만원 떼어 먹은 거 잊어버리셨습니까?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양심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30년 전에 저질렀던 허물이 잊혀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죄가 우리를 끝까지 추적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양심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20년 전 요셉을 팔고 괴롭혔던 사실들이 생각나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였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형들이 드디어 하나님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줄 알고 서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것을 다 알아 듣지 않았습니까? 요셉은 그들의 말을 전부 다 알아듣고

그들을 떠나 방성대곡을 합니다.

 

‘형들이 나를 팔아먹은 것이 죄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고 있구나!’

실컷 울고 다시 돌아와서 말을 합니다.

 

“시므온만 결박하고 너희는 돌아가라! 그리고 가서 말째 아우를 데려 와라.

그러면 스파이가 아닌 것을 인정해 주겠다.”

그리고 많은 양곡을 주고 양곡 값으로 낸 은돈도 자루에 같이 넣어서 보냈던 것입니다.

 

▲야곱은 열 명의 아들을 보냈는데, 아홉 명이 돌아와서는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인질로 잡혔고

이제는 내 아들, 막내아들 베냐민마저 뺏어가려 하느냐며

모든 것이 나를 해롭게 하고 있도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야곱을 괴롭히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지나면 이렇게까지 하신 이유를 야곱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복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을 (회개를 통해) 치료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결론

 

스펄전 목사님은 창세기 42장을 설교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사가 뼈를 자르고 칼로 살을 가를 때는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치료하고 살리려는 것이다.”

 

의사가 암 환자에게 칼을 댈 때, 환자가 “왜 이러십니까? 날 죽이려 하십니까?

내 몸에 절대로 칼을 댈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의사를 믿고 몸을 맡기면 칼을 대서 암을 제거하고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 삶에는 감사할 일들과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칼을 대야하는 어려움이 찾아올 때도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에 찾아오는 어려움은 의미없고 잔인하기만 한 고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횡포를 부리고 괴롭히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치료하시고 복을 주시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Everything is against me!”와 같은 불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말은 성도들의 언어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Who can be against me? 누가 나를 대적할 수 있으랴?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데 누가 나를 대적할 수 있으랴? Deus pro nobis!

하나님이 나를 위하고 계신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말을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왜 야곱은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있습니까?

야곱은 형 에서의 눈을 피해 밧단아람으로 갈 때 만났던 벧엘의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 28:15).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잠시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불평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어 천국에 들어갈 의를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복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42장의 모든 사건을 한 구절로 요약하면 로마서 8:28절이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좋은 일이 더 좋게 되고 나쁜 일도 좋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좋게 됩니다. 합하여 선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능력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지겠습니까?

그것은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아버지시요, 전지하신 아버지시요, 지혜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무궁한 지혜로 우리의 미래와 영혼에 유익이 되도록

우리의 삶에 때로는 복을 주시고 고난도 보내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 편이십니다.

 

시119:71절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든지 우리를 나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