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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어두운 데 요3:16, 10:10 편집자 글
부제: 구원론에 관한 나의 전제
오늘날 ‘한 명이라도 더 구원 받았으면..’ 하는 소원으로
조금 민감한 주제인 <구원론>에 대해서,
제가 앞으로 계속 연구해 나갈 <나의 전제>에 대해서, 여러분과 나누기 원합니다.
결론은, 몇 년 후에 나오겠지만, 일단 이런 전제로, 구원론을 천천히 연구해 나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전제를 설정하는 이유는,
앞으로 더 많은 분들의 의견을 청취하여, 잘못된 점은 기꺼이 고치겠다는 점입니다.
◑시중에 나눠진 두 종류의 구원론
-시중에 아주 <쉬운 구원론>이 있고, 아주 <어려운 구원론>이 있습니다.
▶<쉬운 구원론>은
요3:16절, 4영리로 대표될 수 있습니다.
그 외 자주 인용되는 구절은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요5:24,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한 마디로 ‘믿음으로’ 입니다.
믿으면 다 되는데.. 다른 잔소리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주장은, 일면 맞기도 하지만, 많이 틀립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그저 ‘지식적 믿음, 지적 동의’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회개 빠진 믿음’을 맹목적으로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값싼 은혜’를 남발한다고, 공격을 받습니다.
▶이에 반해 <어려운 구원론>은
구약 시절부터 ‘남은 자’는 몇 명 되지 않았거나, 아주 소수였다는 주장입니다.
신약에는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라는데, 그 길은 협착하고, 찾는 이도 적습니다.
‘의인도 겨우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벧전4:18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들어간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눅13:2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는 말씀도 있고요.. 마22;14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히4:1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설교를 참조하십시오.
※<어려운 구원론>을 주장하는 설교 보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구원’은 매우 포괄적 개념입니다. 크게 2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광야 구원’과, ‘가나안 구원’입니다.
▶<광야 구원>이란..
애굽/사탄에서 탈출하고, 홍해에서 세례 받고, 광야에서 죽습니다.
이게 <쉬운 구원>인데요,
구원은 맞습니다.. 출애굽을 했고, 홍해도 건넜습니다.
적어도 지옥은 면했습니다.
그렇지만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광야에서 시험 받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구원의 완성에는 들어가지 못했고, 새 하늘과 새 땅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단 한 가지.. 구원(소극적 의미로서의 구원, 즉 지옥에서 구출, 칭의)만 받았습니다.
▶<가나안 구원>이란
홍해를 건너서, 구원(칭의)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광야에서, 시험/연단/성숙의 과정을 성공적으로 거쳤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가나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모세도 들어갔다고 보면 됩니다. 마17:3
신약적으로 말하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갔고요.
‘구원의 완성’에 이르렀고,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되었고 마5:48
‘주여 주여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로 성숙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예비되어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자요,
‘등불에 기름이 예비된 5처녀’입니다.
▶‘구원’이란 매우 포괄적 개념입니다.
-광야 구원과, 가나안 구원으로 나눌 수 있고
-소극적 구원(구출, 탈출)과, 적극적 구원(천국에 들어감)을 둘 다 포함하고,
-청함을 받은 사람과, 택함을 받은 사람을.. 다 포괄합니다.
시중에 쉬운 구원과 어려운 구원으로 나뉘는 이유는,
‘쉬운 구원’은.. ‘광야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만족하고,
‘어려운 구원’은.. ‘새 하늘과 새 땅’, ‘어린양의 혼인 잔치’까지 가자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더 맞을 것 같습니까?
왜 오해/문제가 생겼느냐 하면,
‘쉬운 구원’은
홍해를 건넌 것을,
즉 믿음으로/세례 받고/칭의를 얻은 것을.. 구원의 끝(완성) 지점으로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쉽게 우리는 칭의/성화/영화로, 구원을 3등분 하기도 하는데,
쉬운 구원은 ‘칭의’에서 끝내는(마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가 남아 있다니까요. 거기서 성화를 거쳐서
가나안/천국의 영화 상태까지 가야..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탈북자가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여기까지는 홍해를 건넌 상태에 비유됩니다. 칭의를 얻은 것입니다.
이 상태도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탈출, 구출’이란 의미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중국 땅에 머물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구원의 완성은 아닌 것입니다.
아직 난관이 있고, 시험이 있습니다.
구원의 완성은, 그가 한국에 이르는 것입니다.
-북한 땅을 벗어났다는 의미로서의 ‘구원’
-한국에 도착했다는 의미로서의 ‘구원’
둘 다 같은 말(구원)이지만, 의미가 틀립니다.
북한 땅을 벗어난 것으로만 (그것도 잘 한 일이지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쉬운 구원-
반드시 한국 땅에 도착해야 합니다. -어려운 구원-
◑바깥 어두운 데
▶성경에 ‘바깥 어두운 데’가 종종 나옵니다.
마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저는 처음에 이곳이, ‘지옥’인줄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외국 설교자의 설교를 들을 때, 거기를 ‘지옥’이라 말하지 않더라고요.
이 글은, 제 <전제>입니다. 논문을 쓰기 전에, 어떤 전제를 걸고, 연구를 하잖아요.
저는 여기가 <천국 바깥>이라고 봅니다.
‘바깥 어두운 데’ 이잖아요.
‘어둡다’고 한 것은, 그곳은 광명한 천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말은,
뜨겁고 고통스럽다.. 즉 지옥이라는 말이 아니라,
분하고, 원통하다는 뜻입니다.
왜요?
밝고 광명한, 영광의 천국에, 자기도 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자기는 그 ‘새 예루살렘 성’, ‘그 혼인잔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내어 쫓겼기 때문입니다.
지옥이라면.. 뜨거움의 고통으로,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피 울었습니다.
지옥은 아닙니다.
‘천국 바깥’인 것입니다.
▶잔치 바깥
마25: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바깥이라는 뜻)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미련한 5처녀도,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신자들입니다.
그들은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고요, 처음에는 등불에, 기름도 갖고 있었습니다. 신자였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슬기로운 5처녀는, 잔칫집 안으로 들어갔고,
미련한 5처녀는, 잔칫집 바깥에 처했습니다.
저는 거기가 지옥은 아니라고 봅니다.
‘천국 바깥’입니다. 아래 장소와 같습니다.
마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성 밖
계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여기서 ‘성 밖’을, 저는 ‘천국 바깥’으로 봅니다.
15절의 개, 술객, 행음자.. 들은 ‘신자’들로 봅니다. 세상 불신자가 아니라요.
왜냐하면 16절에, ‘교회’(신자)들에게 증거한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즉 홍해를 건넜으나, 광야에서
성화에 이르지 못하고, 죽은 사람과 같지요.
※위 구절을 ‘성 밖’을, ‘지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천국을 <광야>와 <가나안>으로 나누었듯이
지옥도 <천국 바깥>과 <불못>으로.. 다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곳이 ‘새 예루살렘 성’이 아니다. 아닌 곳은, 다 지옥이다!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성경구절이 또 있습니다.)
◑정리하면
▶‘칭의’구원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시중의 교회에서 전파하는 ‘구원론’은 ‘칭의구원’입니다. 즉 쉬운 구원론 입니다.
애굽에서 탈출했으나, 홍해만 건넌 것입니다.
‘칭의’만 받았을 뿐..
물론 진짜 ‘칭의’를 받은 신자는.. 주님이 성화/영화까지 끝까지 끌고 가십니다.
그걸 ‘성도의 견인’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그 ‘견인’이라는 말이, 견디고, 참고, 인내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광야 생활이지요. 그런데 못 견디고, 끝까지 인내 못할 사람도 있습니다. 왜 없겠습니까.
성화의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통과 못할 사람들도.. 현실적으로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머물다가.. 죽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니까요! 아니, 많을 것입니다.
성화가 좀처럼 안 되어.. 계속 뺑뺑이 돌다가.. 할 수 없이 죽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 밖, 바깥 어두운데, 잔치 바깥’에 처합니다.
오늘날 ‘칭의=구원의 완성’인 것처럼,
단순 논리로 가르치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칭의는 시작에 불과하지, 구원의 끝/완성은 아직 창창하게 남아 있습니다.
▶박영선 목사님 설교를 들어보니까.. (아래에 나옴, 클릭!)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즉 구원/칭의를 받은 후에
성경의 가르침은,
광야 40년을 통해서, 환란과 연단을 받아서,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것인데, 롬5:3절
자기들의 이해/오해는
구원은 받았으니까, 이제는 번영하는 쪽으로 나아가자.. 하고 있답니다.
아닙니다. 홍해를 건넜으면, 칭의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구원이기는 합니다만, 시작에 불과하지 아직 완성은 아닙니다.)
광야에서 환란을 통해서 성화되고.. 나중에 천국에서 완성/영화됩니다.
그런데 홍해만 건너 놓고서, 마치 구원의 완성에 이른양, 자신 만만해 한다는 것이지요.
명백한 마귀의 미혹 가운데 있습니다.
▶목표를 높게 잡는 것이 안전합니다.
'어려운 구원'에 목표를 두면.. 혹시 미끄러지더라도 쉬운 구원(성 바깥)에 이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쉬운 구원'에 목표를 두다보면.. 혹시 거기도 미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70%, 믿는 사람(개신교/가톨릭/정교/성공회/ 그 외)이 30%라 봅니다.
그 믿는 사람 중에 또 쉬운 구원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80%, 어려운 구원에 이르고자 애쓰는 사람이 20%라고 봅니다.
그러면 전체 인구로 따지면 아주 낮은 %이지요. 정말 '좁은 문, 좁은 길'이 맞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쉬운 구원'(홍해 건넘, 칭의, 광야 구원)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어려운 구원' (요단강 건넘, 가나안 구원, 새 하늘과 새 땅, 혼인 잔치, 구원의 완성, 하나님 형상의 회복,
히브리서의 안식에 들어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을 목표로,
광야의 환란 시험을 통해서, 더욱 <성화>에 이르시기를.. 그래서 <영화>로 결론나기를 축원드립니다.
................................ 더 생각할 문제 ............................
▶<어려운 구원론>을 가르치는 쪽에서는
<쉬운 구원론>이 .. ‘아직 구원 받은 게 아니다’ 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랬고요!
용어 구분적 문제이기는 하나, ‘구원 받은 것은 맞습니다.’ 라고 봐야 합니다.
다만 엄격하게 말하면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는 못했다’입니다.
▶<쉬운 구원론>이.. 칭의에 이르는 것인데,
칭의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자기가 구원 받았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회개 없는 믿음/지적 동의/결단주의 ... 이것에 의해 결신한 분들은
<쉬운 구원, 칭의>마저도, 아직 못 받았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자기가 받고 싶어서 다 받는 게 아닙니다.
물론 자기가 원해야 하지만,
그것 플러스 하늘에서 그를 구원해 주셔야 합니다.
이때는 반드시 신비한 내적 변화(중생)가 따릅니다.
그게 없다면.. 글쎄요.. <쉬운 구원>마저도 아직 못 받은 것입니다.
▶그럼 당신은 ‘연옥설’을 주장하는 것입니까? .. 라고 누가 제게 질문하신다면
저는 ‘바깥 어두운 데’라고만 했지, ‘연옥’이란 말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둘이 비슷한 점이 있으면서도, 또 미세한 차이점도 있다고 보거든요.
‘연옥’ 말고도,
죽은 아기들이 가는 ‘림보’인가, 그런 곳도 천주교에선 믿습니다.
어떤 미국 복음주의자, 아주 제일 인정받는 분에게, 기자가 질문한 걸, 인터넷에서 들었습니다.
‘무고한 갓난아기가 죽었는데, 어디에 간다고 보십니까? 지옥 간다고 보십니까?’
그 목사님(John P.)은 이렇게 답하시더라고요.
‘내가 모르는 방식, 하나님만 아시는 방식으로 그를 구원하리라고.. 저는 그렇게 봅니다.’
무조건 다 지옥에 간다고 보지는 않는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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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글바깥 어두운 데 (구원론에 관한 나의 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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