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주소서 눅17:1~10 2014/07/27 설교녹취, 출처
※문맥에 따른 성경해석이 돋보입니다.(꼭 보시라는 뜻)
◑서론 / 믿음을 더해 주소서!
본문에서 우리는 모든 성도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중요한 기도제목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예수님께 간청한 제목으로서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주소서!’ 라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주소서!’ 이 기도의 제목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믿음이 더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더 큰 믿음을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내 안에 있는 불신과 의심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고
더 큰 믿음으로 나의 마음을 가득 채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단지 정기적으로 예배에 출석하는 믿음 정도가 아니라,
큰 시련을 당할지라도 능히 이길 수 있는 믿음, 그런 믿음을 더해주소서!
이런 제목이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는 날마다 있어야 할 줄로 압니다.
만일 이런 기도 제목이 나의 마음속에서 사라졌다면
그것은 나의 믿음이 연약해졌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깊은 믿음을 갈망하고
믿음을 더해달라고 기도하는 그런 모습이, 성도들의 기도제목 속에 나타나는 것이지요.
▶또한 ‘믿음을 더해주소서!’ 라는 기도제목은
믿음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께
우리의 믿음을 일으켜달라고 간구하는 제목인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믿음이란 쓰레기 더미에서 저절로 자라나는 잡초가 아니라
하늘에서 자라는 식물로서, 이것은 거룩한 돌보심으로서만 자랄 수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주여 믿음을 더해주시옵소서.’
우리가 노력하는 것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어주셔서
내가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 분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하여 주시고, 더 깊은 믿음으로 나아가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는 히12:2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예수님께 간청할 때
예수님께서 두 가지 말씀으로 이 제자들의 간청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6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해도
이 뽕나무에게 뿌리채 뽑혀 바다에 심겨라 라고 하면, 그 나무가 너희에게 순종할 것이다.’
제자들은 믿음을 더해달라고 간구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간청에
‘너희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라는 표현을 하셨을까요?
겨자씨는 씨앗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앗 중에 하나이죠.
외형적으로는 크기는 작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작은 씨앗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놀라운 생명력이 있는 씨앗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생명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씨앗은 그 안에 엄청난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요.
아무리 작아 보이는 씨앗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씨앗을 창조하실 때 부여하신 ‘생명력’이 씨앗 안에 있다는 것이죠.
믿음은 씨앗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 안에는 처음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믿음 안에 생명력이 있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력이 있다면,
그 믿음의 씨앗은,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절대로 씨앗 하나를 만들 수 없어요.
씨앗의 성분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그 물질들을 모아서 뭉치면
그 씨앗과 같은 성분이 되겠죠?
그렇지만 그 씨앗 안에 있는 그 신비로운 생명력은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신 생명력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선물로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믿음은 기다림으로 완성됩니다> 라는 책 가운데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믿음은 나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나로부터 만들어진 믿음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기적도 없고, 성장도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겨자씨만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성령이 역사하여 큰 나무로 자라게 됩니다.’
믿음은 어떤 외형적인 형태이기 전에 내면의 생명력입니다.
아무리 작아도 순수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력이 있는 믿음의 씨앗 안에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믿음이 더해지는’ 것이란 무엇인가요?
그 믿음의 씨앗에 순도가 100%가 되는 것.
믿음의 순도가 100%로 더 나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사이즈이기 이전에요.
어떤 외형적인, 어떤 활동이.. 믿음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믿음 없는 활동도 많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크게 활동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어요.
믿음이란, 철저하게 내면적인 것이고
믿음의 순도, 그것이 100% 생명력이 있는 믿음이여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더해 주소서’ 라고 기도할 때
내가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의 순도가 정말 100% 인가,
내 안에 믿음의 생명력이 있는가.. 라는 것을 되돌아봐야 하는 것이죠.
만약에 믿음에 순수 100% 생명력이 그 안에 있다면
뽕나무에게 뿌리 채 뽑혀 바다에 던져 심겨라 해도
그 나무가 순종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겨자씨 한 알이 이루는 놀라운 생명력과 마찬가지로, 그 믿음은,
뽕나무도 뿌리 채 뽑혀 바다에 던지게 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1. 믿음은.. 용서가 나타나는 것
문맥으로 본문을 해석하면 ‘뽕나무를 명하여 바다에 던진다’는 말씀은
초자연적 기적을 의미하기 보다는, 용서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해석이 1차적이고, 긴급한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해석은 2차적입니다.
▶이 말씀 구절만 떼서 보면,
믿음이 가져오는 놀라운 어떤 기적적인 일을 우리는 연상하게 됩니다.
뭍에 있던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서 바다에 던져진다..
자연법칙으로는 있을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이죠.
그래서 ‘아, 믿음은 놀라운 기적을 일어나게 하는구나.’ 라는 해석만
우리가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 그런 놀라운 기적적인 일이 우리에게 필요할 때는
그런 일들을 이룰 수 있는 믿음의 역사가 있죠.
사자 굴에 던져진 사람이, 사자에게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이, 우리 육신의 질병이 나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이, 우리 믿음의 역사를 통해 분명히 나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 바다에 던져 심겨진다는 말씀은
어떤 맥락에서 주어진 말씀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사도들이 왜 예수님께 믿음을 더 해달라고 했는지, 우리는 맥락을 통해 봐야 합니다.
그것은 눅17:1 ~ 4절까지의 말씀이죠.
예수님께서 죄와 용서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짓는 자에게는 징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에게는
하루에 일곱 번 씩이나 회개한다고 하면 너희는 일곱 번 씩이라도 용서해줘라.’
마태복음에서는 ‘너희가 일흔 번 씩 일곱 번 씩이라도 용서를 해줘라.’
7은 완전수, 그것은 온전한 용서를 계속해서 베풀라는 뜻이죠.
그러니 ‘믿음을 더해달라’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요청한 것입니까?
예수님 말씀하신 ‘용서하라’는 말씀과 연결해서 나온 것이지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루에 일곱 번 씩이나 용서하라’는 말씀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의 본성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 믿음의 상태로는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용서를 행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 믿음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주시옵소서.’ 라고 요청한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 바다에 던져진다’는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우리의 내면에
마치 뽕나무가 땅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 용서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미움, 불신, 원망, 상처의 이 뽕나무가
우리 마음 속 깊이 있는 거예요.
이것이 뽑혀 바다에 던져 버려지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우리가 참된 믿음으로 나아갈 때 일어난다는 것이죠.
그렇게 1차적으로 해석해야 되는 것이죠. 용서는 믿음의 문제라는 것이죠.
▶마가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만일 하나님을 믿으면 산이 옮겨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그 맥락도 역시 그 흐름을 읽어보면
용서에 관한 말씀을 이야기 하실 때 말씀하셨어요.
‘누군가 너에게 허물을 행하고 잘못 했다고 회개하고 인정하면 너희가 용서해줘라.’
산을 옮기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요?
인간의 본성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하게 되는 일.
산이 옮겨지는 일은, 외부에서 일어나기 전에
이미 내면에 있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이 용서하지 못하는 ‘산’이 옮겨지는, -막-
이 용서를 가로막은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서 던져지는 거예요. -눅-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요? 믿음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음을 더해주소서.’ 할 때, 믿음이 더 해지면 어떻게 되는가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용서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하루에 일곱 번 씩이나 회개하면 언제든지 나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믿어야, 우리가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만 달란트 빚진 종이 주인의 탕감을 받았지만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았죠. 탕감해주지 않았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못된 사람이기도 하죠.
그러나 그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자신이 1만 달란트,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그런 탕감 받은 은혜를 받았으므로
이제 자신은, 갚을 수 있는 빚(백 데나리온)은 용서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리학적으로 설명해보면
그 종은 주인이 자신을 탕감해주었다는 것을 진짜로 믿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이런 엄청난 빚을 탕감해줄 리가 있어?’
그러므로 그는 용서를 체험하지 못하고, 사죄를 확신하지 못하고,
주인이 나를 정말로 용서했고 탕감해주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이,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우리가 언제든지 하루 일곱 번씩 회개하면 용서해 줄 수 있는 그 은혜의 길,
사죄의 길, 은총의 길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진짜 믿는다면
우리 안에 있는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 바다에 던져질 것이다.. 산이 옮겨질 것이다..
믿음을 더해달라고 기도 할 때는, 우리에게 이런 믿음을 더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적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사자 굴에 던져지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만일 우리가 이 상황 속에서, 사자 굴에 던져지는, 불 속에 던져지는
그러한 핍박과 곤란과 시련 속에 있다면
‘주여 우리에게 사자의 입을 이길 수 있는 그런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면
그런 기적의 역사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은 무엇입니까.
미움과 다툼과 갈등과 분노의 사자굴이, 더 우리에게는 큰 시련이에요.
그러므로 주님께 믿음을 더해달라고 간구할 때
나의 육신의 본성으로는 이길 수 없는 내 안에 있는 미움, 원한, 불평, 상처의 뽕나무를
뿌리 채 뽑혀 바다에 던져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여 나의 더 큰 믿음으로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용서는 믿음의 문제라는 것이죠.
용서는 그 사람의, 대상자의 회개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믿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뽕나무를 뽑아서 바다에 던진 분들
우리는 성경과 역사에서 이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으로
뽕나무를 뿌리 채 뽑아 바다에 던진 분들을 많이 알고 있어요.
요셉. 그는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가고 구덩이에 빠지고 죽을 뻔하고
억울한 누명을 썼지만, 그는 복수의 뽕나무를 믿음으로 바다에 던져버린 사람입니다.
다윗 그는 사울로부터 여러 번 죽을만한 미움을 받았지만
그러나 두 번씩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사울의 생명을 해치지 않았어요.
그것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분노의 뽕나무, 복수의 뽕나무를
뿌리 채 뽑아 바다에 던져버린 것이지요.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부하들을 죽인 공산단원을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양아들로 삼아
자신 안에 일어날 수 있는 이 복수의 원한의 뽕나무를 뿌리 채 뽑아 던져버리는 역사,
이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 아닐까요?
이것이야말로 믿음이 가져오는 진정한 역사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주소서.’ 라고 할 때는
어떤 나의 믿음을 통해 신비한 기적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사람이 되고, 그런 어떤 차원의 것을 우리가 먼저 생각하지 않고
내 안에 뽕나무와 같이
큰 산과 같이 짓누르고 있는 내 안에 있는 죄의 산이 옮겨지고
미움과 분노의 산이 옮겨지게 되기 바랍니다.
‘바다에 빠져버린다’ 라는 것은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치유되고 변화되는 그런 믿음의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주여 믿음을 더해주소서.’ 라는 그런 사도들의 기도 제목 속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2. 믿음은.. 겸손이 나타나는 것
예수님 말씀에 보면 ‘믿음을 더해주소서.’ 라는 말에 응답하면서
예수님이 주신 또 한 가지 말씀이 있죠.
그것은 믿음이 더해져서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는 이들에게는 더해서
한 가지가 더 있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겸손이 나타나야 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눅17:1~4 : 하루에 7번이라도 용서해라
17:5~6 : 믿음을 더하소서..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가 바다에 뽑히우리라
17:7~10 : 겸손한 종의 비유 .. 이렇게 문맥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이 겸손이 믿음의 중요한 증거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밭을 갈고 양을 치고 돌아왔는데, 주인은 종에게
‘이제 들어와 네가 수고했으니 앉아서 먹어라.’ 라고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도리어 종에게 일을 마치고 방금 돌아온 종에게
‘이제 식사를 준비하고 내가 식사할 동안 너는 시중들어라.’ 하고
또 일을 시킨다는 것이죠.
그렇게 일을 다 시키고 나서야, 그 후에 종에게 먹고 마실 수 있도록 하지 않겠느냐., :8
또 주인은 종에게
‘종이 명령대로 잘 행했다고 해서, 수고했다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이죠. :9
▶이 비유는, 어떻게 하면 종을 괴롭히냐/부려먹느냐 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인이 얼마나 악하고 선한가를 평가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 당시에 대부분의 주인들은 다 그렇게 했어요. 종에게.
인권이 무시당하는 시대에, 종이 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서
주인이 감사한다던지, 쉴 수 있도록 한다 던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또 다른 일을 계속 할 뿐이에요.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주인은 종에게 감사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 종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참된 종의 마음을 가진 종이라면 이렇게 말 할 것이다.. 라고
10절에 말씀 하신 것이죠.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대로 다 마치고 나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눅17:10
▶정리하면,
예수님은 참된 종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제자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주소서.’ 라고 요청했는데
너희가 만일 더해진 믿음으로, 더 강한 믿음으로
1. 하루에 일곱 번 씩이나 용서하는 그런 믿음의 역사를 너희가 체험 했느냐.
너희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주변에서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런 믿음의 체험을 너희가 했느냐.
2. 만일 그랬다고 할지라도 너희는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겨서는 절대 안 된다.
너희가 위대한 것이 아니다. 너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그저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너희가 하루에 일곱 번씩 용서하는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그런 위대한 용서를 했느냐.
손양원 목사님이 주님 앞에 서서 ‘주님 저 잘했죠?’ 하셨겠습니까? (아니죠)
틀림없이 이렇게 고백했을 거예요.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의 완성이다. 믿음은 겸손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믿음, 큰 믿음, 주님께서 더해주시는 믿음으로, 위대한 역사를 이루고
심지어 놀라운 용서와 위대한 헌신을 했다고 할지라도
너희들 마음속에는 조금도, 하나님이 마치 자기에게 빚진 것처럼,
하나님 제가 이렇게 위대한 큰 헌신 했는데
‘하나님은 저를 안 봐주십니까?’ 그런 하나님께 대한 섭섭한 마음, 분노,
그런 마음이 아니라..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진짜 믿음이 더해지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우리에게 날마다 믿음이 쌓인다면
우리의 마음은 점점 낮아지는 겸손으로 나아가야, 진짜 믿음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때로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믿음이 강해진 것 같은데
가만히 보면 믿음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집이 강해지는 경우가 많아요.
믿음과 고집은, 조금 유사한 면이 많아요.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다.’ 엄청난 자기 확신을 가지고 나가죠.
때로는 우리가 믿음이 강해진 것 같은데
교회 안에 갈등과 대립이 있는 것을 보면, 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끼리 싸워요.
믿음이 약한 사람은, 나는 예수님도 잘 모르고 교회도 잘 모르고 그러니까
강하지 않아요.
믿음이 강해졌다고, 더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왜 대립이 일어날까요?
믿음처럼 보이는 고집이 숨어있기 때문에. 그것은 교만이 숨어있는 거예요.
믿음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교만이 더해질 수 있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역사,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 바다에 던지는 그런 역사를 체험한 이가
한 순간에 교만해질 수 있다는 거예요.
분명히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 교만해질 수 있다는 거예요.
어떤 믿음의 역사도 체험하지 못하고, 변화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교만해지지 않아요.
영적 교만은 1단계의 믿음의 역사를 체험할 때 교만해집니다. 자기 확신을 가져요.
‘나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야. 나는 어떤 시련도 이길 수 있어.
나는 어떤 사람도 다 용서할 수 있어.’ 분명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종의 고백으로, 낮아짐의 고백으로, 겸손의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믿음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후퇴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는 고백으로 나아갔을 때만이 그것이 믿음이 더해진 것입니다.
▶왜 이런 종이 되어야 할까요.
이 종은 그냥 종이 아니라, 우리는 구속 받은 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었다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떠한 위대한 섬김과 믿음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겨도 하나님의 은혜는 다 갚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저 우리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하는 거예요.
어떠한 섬김으로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면서 섬긴다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엄청난 상이기 때문에,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는 고백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왜 우리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해야 할까요.
우리가 아무리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갈2:20절에 마지막에 어떻게 고백합니까.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다.’
믿음이 더해질수록, 더욱 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거예요.
‘내가 위대한 믿음의 역사를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이루신 것이다.
나는 그저 쓸모없는 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셨을 뿐이다.’
이것이 믿음이 더해진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더해질수록 더 낮아지고 겸손하고,
그렇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거예요.
▶정리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주시옵소서.’ 라는 요청은
용서할 수 없는 나의 마음이 무너지고,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지고 산이 옮겨지는,
그런 역사,
은혜 안에 용서하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안에 변하지 않았던 성품이 변하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더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내가 변화 되었다고 해서
또 내가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겸손하고 낮아지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가 위대한 성인이 되었다고 간증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있어야 될 자리, 변화되어야 할 모습일 뿐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런 겸손한 믿음의 사람, 그런 겸손의 종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주소서.’ 라는 사도들의 요청 속에 담긴 내용입니다.
이러한 기도제목을 날마다 품고 날마다 믿음이 더해지는 귀한 역사를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