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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더불어 (자립성과 공생성) 3 롬16:1-2 2003.04.14.일부스크랩,녹취
지난 2회에서 <자립성>에 대해, 4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공생성>에 대해서, 4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봅니다 .
◑1. 첫째로 공생은 준법정신입니다 .
법이라고 하는 것은,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한 사회적인 장치 제도입니다.
더불어 살자고 강조 하면서,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교통법규를 지켜야 하는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불어 살기 위함입니다.
-한 번 차선 변경을 할 때, 차선을 동시에 두 개 이상을 못 바꾼다.
-유턴을 할 때는 제일 앞부터 순서대로 돌아야한다..
그런데 유턴을 할 때 어떻습니까? 뒤에 있는 차들이 먼저 돌지요.
여러분들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이웃을 사랑합시다.’ 라고 백 번을 말하면서도,
그런 법규를 지키지 않는다면, 앞에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모든 이야기는, 졸업식장의 송사, 답사와 같이 공허한 메아리로 끝날 것입니다.
진정성이 담기지 않은 말들은, 공기의 진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성이 담겨야 세상을 바꿉니다.
그 진정성은, 내가 먼저 법과 규칙을 지킬 때에만.. 내 말에 담기는 겁니다.
▶제가 한국에서 몇 번 이야기를 했습니다. 크리스천은 정직하게 살아서,
비행기 타면 나눠주는 담요를, 슬쩍 자기 집에 가져오지 말자는 겁니다.
그 후에 두 대학생으로부터,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학생은 여름방학 때 제3국으로 단기선교 여행을 갔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단기 선교팀장이, 항공사 담요를 다 백에 살짝 넣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현지에 도착하면, 리무진버스를 타고 장소와 장소를 옮길 때
오랫동안 버스를 타야 되는데, 하도 에어컨이 세게 나와서.. 춥다는 겁니다.
추우면 미리 유경험자 팀장이, 서울을 출발하기 전에 점퍼를 준비하게 해야지요.
비행기 안에서 항공사 담요를 가져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단기선교 팀들이 다 그 담요를 자기 가방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리무진버스를 타고 옮길 때, 훔친 담요를 덮고 자다가
버스가 도착하면, 내려서, 기타를 치며 예수 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 믿는 것은 무엇이고 선교는 무엇입니까?
법을 지키지 않고 더불어 사는 것은
아무리 전도의 말을 해도, 그것은 진정성이 담긴 참 전도의 말이 못 됩니다.
◑2. 두 번째로 더불어 산다는 것은 예의의 문제입니다.
법은, 더불어 살기 위한 타율적인 제도라면
예의란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한 자율적인 규범입니다.
예의를 갖추지 않고는 더불어 살 수 없습니다.
▶오늘날 각 가정마다, 아이를 한두 명만 키웁니다.
오늘날의 각 가정은, 자기 자녀들의 기를 살려주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인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경험 하셨을 겁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피자 집이라든 가보십시오.
거기에 셀러드바가 있습니다.
다른 식당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그곳에 있는 야채들을, 손으로 짓이깁니다. 아무도 야단치지 않습니다.
자기 부모는 물론이고, 종업원은 야단 못 칩니다.
왜요? 종업원이 고객을 야단치면, 큰일 나거든요. 호통을 당하거든요.
그리고 그 부모가, 다시는 그 식당에 오지 않거든요.
부모부터, 예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예의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자녀에게 마땅히 가르쳐야 할 <공생성>을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작년에 제3국(저계발국) 어느 나라에서, 자체 한국선교사 대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의 선교사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여러 가족들이 함께 많이 모였습니다.
제가 강사로 참석해서 아침에 일어났는데요.
아침 7시부터 선교사의 아이들이, 호텔 복도에서 총싸움을 하며 뛰면서 노는데
온 호텔이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그 호텔 사장부인이 한국 분이었습니다.
그 부인이 특별히 싸게 해주셔서, 그 호텔에서 선교대회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 호텔의 직원들이, 한국 아이들에게 야단을 못 치지요.
자기 사장 부인이 한국인이고, 고객들인데.. 아이들을 제지를 못하는 겁니다.
제가 너무너무 민망스러워서, 마지막 날 그 사장 부인께 사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참 입장이 곤란하셨지요. 그랬더니 이런 말을 합니다.
“이 나라에 제일 천한사람들이 사는 어떤 지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호텔 종업원들의 말에 의하면,
이 한국의 아이들이, 그 지역의 아이들보다 못하다고 합니다.’
질서의식이 없고, 예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공생성>이 부족합니다.
여러분,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남에게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내 아이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가르치면서
남에게 예의를 범 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바른 예수님 사랑의 사랑일 수 없습니다.
▶제가 작년 캐나다에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입니다.
마침 모 대학 여자무용 선교단이 제 옆자리로 쭉 앉았습니다.
좌석에 앉아서 서로 수다 떨며 얘기하는 것은, 뭐 괜찮지요.
좀 시끄럽긴 하지만, 젊으니까 그럴 수 있지요.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비행기타고 식사하고 난 뒤, 태평양을 건널 때 수면시간이 있습니다.
비행기 창문도 다 닫고, 실내등도 어둡게 합니다.
그 시간에는 모두 의자를 뒤로 제키고, 등을 뒤로 눕힙니다.
저도 그렇게 했는데, 뒤에 앉은 자매가 저를 툭툭 치는 겁니다.
제 의자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자기 다리에 닿아서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럼 자매도 다리를 뻗어라’ 했더니, 자기는 뻗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보니 의자 밑에 배낭을 놓고, 그 위에 자기 다리를 얹고 있었습니다.
‘그럼 배낭을 캐비넷에 넣어라’고 했더니, 자기는 이렇게 쪼그려 앉아야 편하니까
나보고 의자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편하기 위해, 나보고 불편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몇 마디 충고의 말을 해줄까 하다가 ‘말 한다고 듣겠나? 그렇게 자랐는걸..’
내가 얘기한다고 듣겠나..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시집가서 제대로 살 수 있을까요?
이웃은 고사하고, 남편과 아내가 함께 더불어 살 수 있을까요?
▶사도바울이 로마서 16:1-2절을 통하여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자매 뵈뵈를 천거해 보내면서
첫마디로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라’
여러분, 믿는다는 것은, 절대로 함부로 대하는 것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믿는 자 일수록, 예절을 다해야합니다.
왜요? 그것이 더불어 사는 자의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3. 더불어 산다고 하는 것은, 세 번째로 물질의 문제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삶이 함께 더불어 공유 되는 부분이 있는 것이요,
그런데 삶이 공유 되는데.. 물질이 공유가 안 되겠습니까?
더불어 살다보면, 반드시 내 물질이 쓰여 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되는 것은
내게 있는 물질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지요? 그렇지요?
‘하나님 것’이라고 하는 그 고백 속에는, 하나님을 위한 부분이 있고,
타인을 위한 몫이 있고, 나를 위한 몫이 있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십일조 내고 나서, 다 내 것이 아니지요.
그 물질 속에, 반드시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 할 부분이 있음을 알아갈 때
우리는 더불어 공생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살자고 하면서 ‘나는 10원도 손해는 보지 않겠다.’는 자세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얼마 전에 모 언론 기관에서, 무엇을 근거로 조사를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세계 각 나라 별로, 타인을 위해 희사하는 기부금의 액수를 조사해서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1위가 미국인입니다. 1인당 1년에 70만원을 기부했습니다.
2위는 영국인입니다. 1인당 1년에 24만원,
한국 사람들은 등수에도 없고,
일본 사람들은 1년에 5천8백 원으로 나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여러분 간단히 따져보면 알잖아요.
여러분이 교회에 내는 헌금 외에, 더불어 사는 이웃 사람들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얼마나 물질을 공유하시는가 생각해 보시면
이 조사가 터무니없지 않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자매님들께 말씀드립니다. 상처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물질에 관한 한,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여자들은 데이트할 때 돈을 내지 않습니다.
옛날에 경제가 척박하던 시절, 여자가 직업이 없고 돈이 없던 시절에는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진국에서는 계속 남자만 내고, 여자는 계속 당연한 권리로 돈 내지 않고,
얻어만 먹는다? 그것은 여자 스스로 모독이라 여깁니다.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자가 내면 모독스러워 합니다.
이거 고쳐져야 합니다.
▶자매들이, 이처럼 물질에 관해서, 청년시절부터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없는, 선진국에 없는 우리나라 여자들에게 만 붙는
모욕스러운 호칭들이 있습니다.
‘복 부인’
여러분, 어느 선진국 여자들이, 돈을 싸들고 다니면서 투기합니까?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평생 동안 살던 집값이 올랐다는 것과
오직 차액만을 위하여 사고파는 것을 되풀이하는 것은
절대로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수많은 여자들이, 자기 혼자만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익만을 위하여 투기하고 있는 동안에
투기해서 가격이 상승되는 만큼, 그 집을 사야하는 서민들은 울고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투기해서, 여러분들이 하루아침에 전세금 몇 배로 올려서 얻은 돈으로
십일조하고 감사헌금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 때문에 변두리로 쫓겨 나가서
눈물짓는 그들의 마음속에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이 물질이, 나의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참다운 공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보물, 다시 말해서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거기에 물질을 주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공생은.. 결국 마음의 문제입니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내 마음속에 담지 않고서는, 절대 더불어 살수 없습니다.
▶인도에서는 힌두교와 회교도들이 피를 흘리고 싸웠습니다.
그래서 결국 파키스탄(회교)과 방글라데시(회교)와 인도(힌두교)로 나라가 분열되지 않았습니까.
본래 힌두교였던 인도에 서북부 펀잡 지방에 중동지방의 회교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서북부 펀잡 지방에서, 제일먼저 회교도와 힌두교들이 유혈 참극을 벌였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살던 ‘나낙’ 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릴 때부터 두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유혈참극을 보면서
‘우리 싸우지 말자. 힌두교들과 회교도들이 평화롭게 더불어서 살자’
그래서 만든 종교가 시크교입니다.
그 시크교가 지금까지 내세우는 제1교리가, 평화주의인 것이
바로 그 이유인 것입니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서로 받아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치에 동조하는 힌두교도들과 회교도들이
시크교도로 많이 개종을 했습니다.
시크교는, 지금 현재로 2천5백만 명의 신도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크교의 교주인 ‘나낙’의 죽음과 관련된 일화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낙’이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힌두교 출신들과, 회교도 출신들 사이에.. 일대 반목이 일어났습니다.
교주가 죽었을 때, 장례법에 대한 이견이 돌출되었는데,
힌두교 출신 시크교도들은,
‘우리 교주가 죽으면 강가에서 불에 태워, 화장해야 한다.’
회교도 출신 시크교도들은
‘안 된다. 교주가 죽으면 반드시 땅에 매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싸웠습니다. 급기야는 시크교가 분열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나낙’이 두 대표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내가 누어있는 이불 속에, 너희들 양 진영이 백합을 갖다 놓아둬라.
그리고 나와 함께 이불로 덮어라.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어느 쪽이든지, 백합화가 시들지 않고 살아 있는 쪽 의견을 따라라.
그래서 양 진영 제자들이 그대로 했습니다.
나낙이 죽은 후, 그 다음날 방에 들어갔습니다. 이상하게 이불이 평평합니다.
그래서 이불을 들쳐보니까, 양쪽 진영의 백합화는 싱싱하게 살아있는데
‘나낙’의 시신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시크교도들은, 그들의 교주 시신이, 어디 갔는지 아직도 모릅니다.
그 일을 통하여 그 교주가 일깨워 주려고 한 것은 결국 뭡니까?
너희들이 진정으로 마음으로 상대를 받아드리지 않으면
함께 더불어 살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시크교도로 함께 살았는데
마음으로는 여전히 힌두교도요, 회교도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를 보십시다.
우리가 한 교회에서 형제자매 한 지체로 살아갑니다.
성가대도 봉사하고 구역 성경공부도 합니다. 다 더불어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에 딱 이견이 대두 되어보십시오.
순식간에 교회는 갈라집니다. 순식간에 교회는 분열됩니다.
상대의 실상이 드러난 뒤에도, 더불어 사는 것이 진정한 공생인데
서로의 실체가 드러나기 전에는, 공생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부터 등을 돌립니다.
마음으로 받아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빌2장5-7,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주님의 마음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뭐지요? 하나님이시지만 그 마음이 먼저 인간을 받아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처럼 되시고 인간과 더불어 계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으라고 하는 것은, 내가 더불어 살기위해서는
주님의 마음처럼 상대를 먼저 내가 마음으로 받아 드려야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들의 영혼의 눈을 감으시고
여러분들의 속을 진리의 빛으로 비추시고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도대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몇 사람이나 들어있습니까?
여러분들과 다른 사람이, 몇 사람이나 여러분들의 마음에 품겨 있습니까?
그 수가 많아질 때에 비로소 공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일화를 말씀드리는 것으로 끝을 내겠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가면,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의 모든 지폐에는 동물의 그림만 그려져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 화폐에는, 역사적인 위인이나 문화제의 그림을 그려 넣습니다.
그것이 자기나라를 홍보하는 방편이거든요.
그런데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폐에는, 짐승밖에 없습니다.
코끼리, 코뿔소, 표범, 사자, 버펄로.. 이렇습니다.
그 땅은 3백 년 동안 화란의 개혁교회 출신, 화란 크리스천들과,
영국 성공회 출신의 영국 크리스천들이 그 땅을 다스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이 보기에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백인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 ‘인종차별’(아파르트 헤이트)을 법으로 명시했습니다.
집단 지역법 : 우리 백인들은 여기서 산다. 그런데 흑인들이 자꾸 들어옵니다.
흑인 너희들, 선 그은 것 넘어오면 죽인다..는 법입니다.
원주민 토지법 : 흑인들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법.
인종 간 혼인금지법 : 유색인종 너희들, 백인과 결혼하면 죽인다는 법입니다.
심지어 연애만 해도, 체포되고 구금되었습니다.
제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한 흑인 빈민촌에서 만난 화란출신 ‘헨리’는
그의 할아버지가 그 지역에 와서, 모든 흑인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으로 학살하고 그 땅을 빼앗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늘 잘 때 총을 들고 잤습니다.
언젠가는 흑인한테 자기는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백인들이 그 땅에서 엄청난 부를 쌓았습니다.
교회에 엄청난 헌금을 하고, 남아공 도처에 개혁교회와 성공회 교회를 세웠습니다.
주일마다 아름다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 지폐에, 얼굴이 들어갈 만한 인물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 짐승 밖에 없는 돈을 보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사람이 더불어 살줄을 모르면, 자기만을 알면, 짐승보다 못한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1863년에 미국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흑인을 해방시키는 법안을 공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100년 동안 흑인들이
제도적으로 법적으로 자유를 누렸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흑인들은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흑인들은 백인과 결혼할 수 있습니다.
50년대 까지만 해도 백인들이 흑인들과 살이 부딪힌다고, 농구 경기도 하지 않았는데
오늘날 미국의 모든 농구 스타들은 흑인들입니다.
적어도 미국에서, 언어로 인종 편견적인 말을 하면, 법적으로 제재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정점에 누가 있는가? 우리가 잘 아는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빈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세울 줄 아는 자립 인이었습니다.
신학박사가 되었습니다.
그 뒤에 그는 백인들에 의해서, 차별 받는 흑인들을 위한 민권운동에,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흑인 민권운동을 위해서 나섰던 흑인들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 실패 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말콤 엑스’와 같이 다른 흑인 지도자들은
모두 백인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흑인들 우리만의 권리를 되찾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 킹’은 달랐습니다.
백인과 흑인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흑인에 대한 인종 편견을 끊는 것은 흑인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흑인을 편견이라는 감옥 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백인들 여러분들의 승리이기도 합니다.’라고 그는 외쳤습니다.
우리 함께 승리 하자고 외쳤습니다.
바로 그 공생의 외침은 미국 백인들의 양심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사람에 의해서 오늘날 흑인은
제도적으로 법률적으로 사회적으로 새로운 대접을 받습니다.
링컨은 군대와 대포를 들고 법령을 선포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자립성과 공생성’으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더 위대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믿음 안에서, 자립과 공생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 되게 하십시다.
바로 그런 우리의 삶을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펼쳐 가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주님을 사랑하는 지체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을 더 중심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주님의 귀한 종들이 머리를 숙였습니다.
주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시어서 여기에 머리 숙인 모든 분들이
날마다 자립과 공생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은총을 더하여 주옵소서.
이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날마다 아름답게 펼쳐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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