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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예배란

LNCK 2015. 3. 12. 09:44

참된 예배란                    창4:1~7 ,  요일3:12              스크랩,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uMgtJxcpzCk

 

자, 아담과 하와가 둘째를 낳죠?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그런데 아벨에 이름은 뜻밖께도 허무 vanity, 먼지, 티끌

아무것도 아니다. 허무한 존재다. 티끌 같은 인생이다.

이런 이상한 의미를 담은, 이름이 되었어요.

 

아벨은 그렇게 그 의미를 부여받고, 이 땅에 태어납니다.

(자 그 이유를 이제 마지막 결론 부분에 가서

왜 그래야 했는가를 이제 조합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두 사람이 직업이 등장을 해요.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어요.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어요.

 

   주일학교를 다닌 분들은 이런 소리를 많이 들었을 거예요.

   ‘어린이 여러분, 왜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싫어했지요?

   그리고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을까요?’

 

   예 맞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피가 없는 제사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희생이 없는 제사를 거절하신 거예요.

그럼 한번 뜬금없는 질문을 해보죠? ‘하나님이 직업 차별자 이십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였어요, 농사꾼이 곡식을 드린 게 뭐가 크게 잘못됐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어요, 양치는 자가 양을 드린 게 뭐 이렇게 잘 한 일입니까?

만약 그런 논리라면, 우리는 직업을 잘 선택해야 될 것 같아요.

 

오늘 열납(기쁘게 받아진)된 제사와, 거절된 제사의 근본적인 차이는

제물 자체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상식적으로 알 수가 있어요.

(나중에,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 소제도 나옵니다.)

 

그럼 어디서, 혼선이 빚어졌을까요?

여러분 성경은 다행이도, 우리에게 두 사람의 예배 자세

매우 중요한 단서 하나를 힌트로 남겨 놓습니다.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에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다.”

 

세월이 지난 후에

이게 십년이 지난 건지, 백년이 지난 건지, 뭐 감을 잡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조금 자세히 들여다봤더니이렇게 해석할 수 있어요.

 

농사에 한 절기가 끝난 후’,

영어성경에도 보면, ‘날들의 끝 날에이렇게 되어 있어요.

 

무슨 뜻인가 하면, ‘어떤 한 절기가 끝난 후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가서 제사를 드렸어요.

 

농사는 물론이고, 양도 치는 절기가 있어요. 그 절기가 끝났다 말이에요.

자 그러면, '세월이 지난 후'를 통해 볼 때,

 

본문의 이 제사는, 감사제사 일까요? 희생제사 일까요?

감사제사예요.

 

희생제사라는 제사는 모세 율법이후에 구체화 됩니다.

그 이전까지 사실 그런 구분이 별로 없어요.

 

제물의 각을 뜨고, 염소를 드리고, 비둘기를 드리고 하는, 구체적인 그런 희생제사는

모세 율법 이후부터 백성들에 의해서 시행되곤 했습니다.

본문의 창세기 때는, 훨씬 그 이전이거든요.

 

그렇다면 농사에 한 절기가 끝난 후라는 이 표현으로 봐서,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가 드렸던, 이 제사는 적어도, 감사 제사라는 성격입니다. 맞죠?

 

   자 그러면, 두 사람이 예물을 드리는 모습을

   조금 더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십시다.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야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보세요. 아벨은 자기도 양에 뭐를 드렸다고 되어있습니까?

첫 새끼’,

 

우리가 2주 전에, 십일조를 설명 드리면서,

첫 것이 히브리인 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는가 공부했어요.

 

첫째는, 모든 것을 대신하고, 나머지 모든 것을 대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장자도 중요하고, 하나님이 애굽의 장자를, 그래서 치신 겁니다.

 

그러면 아벨은, 지금 어떻게 드린 겁니까? 무슨 고백을 담아 드린 거예요?

이 모든 목축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를 이렇게 담아 드린 거예요.  

 

이건 신앙고백의 문제였어요. 여기서 멈춘 게 아니예요.

이어서, ‘첫 새끼와또 뭘로 드렸다고 되어있지요?

 

기름으로 드렸으니

기름으로 드렸다는 말은, 이 양을 잡아 가지고, 기름기 있는 쪽을 잔뜩 잘라서 드렸다.. 그 말이 아니예요.

 

이 말은,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기름진 것을 드렸다’,

쉽게 얘기하면, ‘제일 좋은 부분을 드렸다그런 말이예요. 할렐루야!

 

우리가 부모 밑에 자랄 때, 이런 잔소리 많이 들으셨죠?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예물을 드리는 두 사람의, 분명한 태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설명되지 않는, 삶의 모습이 보여요? 안보여요? (보입니다)

 

가인은 그냥 드렸어요. 제물 자체가 문제는 아니예요.

근데 이 제물은, 어떻게 드렸다고요? 그냥 드렸어요.

형식적으로 드린 거예요.

 

반면에 아벨은,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어요. 제일 좋은 부위를 드렸어요.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아벨의 하나님에 대한 일상적인 삶의 태도가

대번에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유다서에 보면, 가인의 길로 행하여 그랬어요.  1:11

무슨 뜻입니까?

삶의 태도와 방식을 얘기하는 거예요.

 

정리하면,

본문의 두 사람의 문제는, 삶의 문제였습니까? 제물 자체의 문제였습니까?

삶의 문제였어요.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야훼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제 우리가 오늘 설교의 몸통에 해당하는 결정적인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여기 지금 하나님이 안색이 변한 가인을 향해서, 뭐라고 질책을 합니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이 선을 보통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윤리나 도덕적인 잣대로 이해를 합니다.

착한 일을 하고, 의로운 일을 하고, 구제를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고,

자 그렇게 해석을 하니까, 해석이 비틀어지는 거예요.

 

히브리 사람들은 선을 행한다고 할 때,

무슨 뜻으로 그 표현을 하는가를 이해하셔야 됩니다.

 

특별히 이 발언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써, 예배를 놓고 하는 말이예요.

그렇다면 적어도 이 선은, 그런 개념으로 받아드려서는 안 되요.

 

여기서 '네가 선을 행하면', 이 히브리 말은 '바르게 제물을 드리다' 할 때와 동의어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선을 행한다'는 표현과

'예물을 바르게 드린다'는 표현과 같은 어근을 사용합니다.

 

같은 말로 이해합니다. '선을 행했다'는 그 말은, 뭐를 했다는 얘기예요?

'예물을 바르게 드렸다' 그 말이에요.

 

예물을 드린게 중요한게 아니라, 예물을 어떻게 드렸다는 얘기에요?

바르게 드렸다는 얘기에요.

 

   그러면 해답이 금방 나와요.

   이게 제물 문제였어요?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였어요?

 

   그렇습니다. 바로 가인은 하나님 앞에 형식적인 예배자로서는 나왔는데,

   어디에서부터 이미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틀려있는 사람이예요.

   그래서 그런 태도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걸 지적하시는 거예요.

니가 선을 행하면, 즉 바르게 예물을 드리면’,

즉 이면에, '내 질서와 통치 밑에, 네가 놓여진 삶을 살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그걸 지적하는 거예요.

 

▲또한 '세월이 지난 후', '날들의 끝에', '농사에 한 절기가 지난 후' 라는 말은,

예배와 관련해서 발언되어진 말로써,

예배는 종말적 암시를 담고 있는 거예요.

 

그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자 보세요. 농사라는건 어떻게 시작이 됩니까?

심어요, 그리고 경작을 하죠, 자랍니다, 그다음에는 결과물이 나올거예요.

그걸 가지고 누구에게 나갔다는 말이에요?

예배를 드리려고 하나님께 나갔다는 말이에요.

 

그럼 그게 무슨 뜻이 됩니까? 이것은 이 모든 역사도 그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 속에서,

그 분에게로 귀결이 되어질 것이라는 것을, 예배의 의미 속에 담고 있는 거예요.

 

예배는 종말적 암시를 담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매주 이렇게 나와서, 형태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바로 그것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 이 땅의 모든 질서가, 하나님의 통치 밑에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대로 흘러갈 것이고,

모든 역사의 주제자가 하나님이시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역사는 그렇게 끝날 것을 내가 믿습니다.'

 

이게 무슨 자리예요? 예배의 자리를 통해서 확인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예배는 심상치 않은 자리예요.

 

사실. 세상 이들은 고백할 수 없는, 이런 어마어마한 역사와 통치와 질서를

그 분께 인정하고 돌리는 자리예요.

 

그래서 보세요.

예배로 시작된 인류가, 계시록에 가면 

천상에 예배가 미리 당겨져서 요한에게 보여집니다. (혹은 현재 천상의 예배 모습입니다)

 

12장로가 면류관을 쓰고 있는데, 그 중앙에 어린양이 보좌에 앉아요.

그러자 어린양을 보자마자, 12장로들이 쓰고 있던 면류관을, 그 분께 벗어 던집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잘나서, 내가 땀 흘려서, 내가 수고해서, 내가 결과를 만든 줄 알았더니,

마지막 역사에 뚜껑을 열고 끝나고 보니까, 어린양의 공로였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언제나 하나님은 '네가 잘했다, 애썼다, 네가 믿었다, 네가 수고했다' 이런 표현을 해왔어요.

그래서 우리가,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잘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천상에 가니까, 그게 어린양의 공로였더라구요.

그래서, 면류관 벗어서,

누구에게 드려요? 어린양께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것을 뭐라 그러죠? 워십. 예배라고 얘기합니다.

예배가 뭐예요? 월스, 가치를 돌리다 그 말이예요. 누구께? 하나님께.

그게 예배예요. 이 땅에 모든 통치와 질서와 가치를, 하나님께 돌리는 확인과 고백을,

이 땅에서 연습하는 거예요. 그게 예배예요. 아멘.

 

   그런데 오늘 가인은, 어디서부터 실패한 자였어요?

   가인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터 어긋나 있는 자였어요.

   그래서 그런 태도에, 예물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아벨은 그 이름 자체가 무슨 뜻입니까? 허무, 나는 아무것도 아니였군요,

   내 공로가 아니였군요, 나는 오늘도 하나님의 통치 밑에, 하나님의 질서 밑에,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게 아벨이예요.

 

이거를 히브리 기자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해석을 해놨는데,

그 부분을 우리가 한 서너군데, 성경을 찾아가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그럼으로써 무슨 증거를 얻었죠? '의로운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

 

근데 아벨이 어떻게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되있죠? 믿음으로!

 자 이제 좀 근본적인 질문하겠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 속에서 생산해 낼 수 있고, 내 속에서 가능성을 추스르고,

내 속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겁니까? 외부로부터 오는 겁니까?’

그것이 복음의 증언이예요.

 

믿음은 절대 내 속에서 생산해 낼 수 있는게 아니예요.

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우리는 파산된 존재였어요.

 

그래서 '복음에는 한 의가 나타나서', 그 의가 누구라고 성경은 약속했습니까?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믿었다 할때는

내가 수사적으로 믿었다 그러지만은, 그 믿음 자체가 누가 주신 믿음이냐면,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지혜를 통해서 주신 믿음이예요.

 

그러니까 이 믿음은 외부로부터 온거예요.

그러면 '아벨이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은 자기 믿음이예요? 받은 믿음이예요? 11:4

받은 믿음이예요.

 

자 볼까요?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데, 그 믿음 자체가 은혜라구요.

그냥 받은 거라구요. 내 속에 가능성을 추스르고, 내 속에서 생산해 낸게 아니라구요.

 

자 다시, 묻겠습니다. 그러면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믿음으로 드렸다는데,

그 믿음은 누구로부터 온 믿음입니까? 하나님의 선물이예요.

그러므로써, 의롭다하는 증거를 받았다구요.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 문제가, 왜 이렇게 샅샅이, 우리가 분석을 해야 되냐하면,

   도대체 아벨은 어떻게 그와 같은 참된 예배자가 되었을까.. 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결론은 뭡니까? "하나님이" 우리를/아벨을 구속하시고, 생명의 눈을 열으셔서,

   생명을 보게 했기 때문에, 참된 예배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한 영혼도, 이 예배자로 예배에 자리로,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이 자리에, 올수가 없는 거예요.

 

이렇게 어마어마하고, 중요한 얘기를, 무표정으로, 들으시면 안 되요.

이거는 들으면서, 주먹을 불끈쥐고,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환희와 감격 속에 들으셔야 되는데, 너무 덤덤하게 앉아서,

뭐 그런가 보다.. 하시니, 하하하 어휴 미치겠어요

 

자 한 군데만 더 확인을 합니다.

요한일서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가인이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살인자입니까?

-그 속에 살인 할 수 있는, 죄가 있었기 때문에, 열매로 살인이 나온겁니까?

전자요? 후자요? 후자입니다.

 

살인을 했기 때문에 살인자가 아니예요.

이미 그 속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긴 사람이에요.

그래서 분노가 그 죄성을 건드리므로, 열매가 살인으로 나온것 뿐이에요.

 

여기 그 정확한 단어 하나를 눈여겨 봐야 합니다. 12절을 다시 보세요.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게 뭐냐?

신앙생활은 우리 속에, 가능성있는 어떤 여지를 개발하고,

어줍지 않응 심리학과 무슨 치료가 들어와서, 그걸 개선해서,

괜찮은 사람을 만들어 가는 싸움이 신앙생활 아니예요.

 

신앙생활은 정확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소속이 바뀐 거예요. 속함이 바뀐 거예요. 위치가 바뀐 거예요.

 

그런자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통치밑에 들어가는 싸움을 하는게 신앙생활이예요.

다윗이 뭐라 그랬어요? 커다란 골리앗과 그 군대를 앞에 놓고, 뭐라고 일갈했죠?

 

'하나님의 군대를 너희들이 뭔데 모욕하느냐?'

이 싸움을 소속의 싸움으로 봤지, 크기의 싸움으로 이해하질 않았어요.

 

이게 결정적으로 골리앗을 무너뜨렸던, 근본적 이유였습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신앙인들에 인식 세계여야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볼때는 전부 골리앗 같아요.

   그리고 그 앞에 우리는 메뚜기 같아요.

 

   실제 민수기에 보면, 백성들이 뭐라고 통곡하며 울부짖어요?

   '우리는 그들앞에 메뚜기 같으니이다.' 그걸 메뚜기 콤플렉스라고 그럽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크기의 싸움으로, 진실을 속여요.

별거 아닌것들이 이래요.

 

그런데 다윗은 정확하게, 그 싸움의 실체를 뭘로 봤어요?

이것이 소속의 싸움으로, 누구의 소속이냐? '여호와의 군대'라는 표현을 해요.

오늘 여기도 뭐라고 그래요. (가인이) 악한 자에게 속하여라는 표현을 해요.

 

우린 누구에게 속한 겁니까? 그리스도께 속하여,

그 분 지위와 질서와 통치 밑에 들어간 싸움이예요. 그게 신앙생활이예요.

 

   여러분 여호수아서는 무슨 리더쉽에 관한 책이 아니예요.

   이기는 전략을 소개하는 전략 매뉴얼이 아니예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질서와 그리스도의 통치 밑에,

   순종하여 들어가는 싸움을 연습하는것이.. 여호수아서예요.

 

뭘 거기서 리더쉽의 비결을 끄집어내고, 쓸데없는 소리를 합니까.

그런 얘기가 아니예요. 사람의 리더십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아벨은 어떻게, 그런 예배를 드릴수가 있었을까요?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자만, 진정한 예배를 드릴수가 있어요    

예배의 자리로 나올수가 있어요. 참된 예배자가 될수 있어요.

 

아무리 예배의 형식을 갖추웠어도, 하나님께 근본적으로 속하지 않는자는,

그 예배는 거절됩니다. 누구처럼? 가인처럼.

 

구약에 보면, 요시아라는 왕이 등장해서 8살에 왕위에 올라요.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서 나이가 좀 먹었죠. 20대 중반인가? 30대 초반인가요? 됐을쯤에,

조상의 길로 따르지 않고, 종교 개혁을 선언합니다.

 

나라가 이꼴이 되선 안되겠다. 그래서 제일 먼저, 말씀 선포가 중단되고,

예배가 중단되었던, 성전청결운동을 벌입니다.

 

여기에 동참한 부하들이 왕의 명령을 따라서 성전을 청소하기 시작합니다.

청소하다가 연보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 책이 발견이 되요.

 

부하가 놀래서, 그거를 왕에게 갖다주고 읽힙니다.

그러자 그 말씀을 듣던 왕이, 옷을 찢고 통곡을 해요.

 

우리가 얼마나 예배가 중단이 되었고, 말씀 선포가 중단이 되었던가? 통곡을 합니다.

그리곤 모든 우상을 척결하고, 제일 먼저 예배의 회복을 선언합니다.

 

자 우리가 중단되었던 예배를 유월절 제사를 회복하십시다.

그래서 찬양대 연습시켜서 찬양대 앉히고, 주보 새로 만들어서,

주보 돌리고, 안내위원 저 입구에 서고, 헌금위원들 딱 가운 입혀서 준비되고,

이제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오랜만에 우리가 중단되었던 예배자로 올라가자.

해서 우아한 옷을 차려입고, 입에는 웃음을 걸고, 쫙 올라가는데,

 

이 때 하나님께서, 눈물의 선지자라고 별명이 붙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으로 임하셔요. 너는 지금 가서, 반드시 그 예배하러 올라오는 유다 백성에게,

내가 네 입에 준 이야기를 꼭 메시지로 선포해라.

너희는 이곳을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그런데 여러분, 앞뒤가 안 맞죠? 지금 모든 예배의 준비를, 완벽하게 지금 끝내놓고,

오랜만에 예배회복을 위해 성전으로 우아한 차림과 웃음으로 올라가는 유다 백성들에게

예레미야가 선포합니다. 너희는 이곳을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6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무슨 얘길까요?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을까요?

예레미야를 통해서, 형식적이고 형태를 갖춘 예배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먼저 고치랍니까? 삶을 먼저 고쳐라.

 

예배의 형식은 붙들고 있으면서, 여전히 거짓말하고, 여전히 간음하고,

여전히 사기치고, 여전히 도둑질 하면서, 너희는 절대 그런 예배처소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그런 거짓말을 믿지 말라.

 

8절을 또 볼까요?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도다.”

 

9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10절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절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집이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이 일갈을 누가 또 인용을 하셨습니까?

예수님도 성전 척결을 하시면서, 이 본문을 인용하세요.

 

너희가 이 집을 강도의 굴열로 만들려느냐. 삶은 고쳐지지 않은 채,

형식만 붙들고 있는 예배, 거짓말 하지 마라. 이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속지 마라. 그 얘기예요.

 

무슨 예배가 아울러 중요하단 얘길까요? 우리가 삶으로 드리는 예배.

 

그래서 로마서 12장에 보면, 뭐라고 그랬어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여러분 왜 산 제사로 드리며, 왜 몸으로 드려야 할까요?

산 제사는 무슨 제사의 반댓말 입니까? 죽은 제사의 반댓말이예요.

 

구약의 모든 제사는 제물을 잡아 죽여서 드리는 제사였어요.

근데 그 제사의 특징은 뭐예요? 그 제사는 드리면, 또 죄 짓고 와서,

속죄를 해야되는 제사였어요. 그래서 죽은 제사예요.

 

그런데 그 죽은 제사를 끝내기 위해서, 영원한 제물로, 자기 몸을 드리신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린 다시는 죽은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어요.

 

이제는 우리에게 무슨 제사가 남았습니까? 산 제사가 남았어요.

근데 그 산 제사는, 뭐로 드리랍니까? 몸으로 드리라는 거예요.

 

왜 몸으로 드려야 될까요? 삶으로의 예배를 얘기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저 문을 나서면, 6일의 삶에 예배의 현장이, 기다리고 있어요.

 

   훌륭한 군인의 복장은 어떤 복장일까요? 버클이 번쩍이고,

   바지의 날이 서 있고, 군화가 반짝이는, 모자가 팽팽히 챙이 세워져 있고,

   그런 복장이 군인의 훌륭한 복장일까요?

 

   진정한 군인의 복장은, 팔꿈치에 피가 베어있고,

   잔등에 허연 소금기가 덕지 덕지 굳어져 있고, 무릎팍이 까져서 피 범벅이가 되있고,

   온 몸에는 상처투성이에다가..

 

, 여러분들이 이제 이 형태적인 예배를 마치고, 저 문을 나서서,

캠퍼스의 현장에서, 일상의 현장에서, 직장의 일터에서 사노라면,

엄청난 골리앗들이, 어둠의 권세 잡은자들이, 여러분들을 공격합니다.

 

그 예배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공격할겁니다. 그 때 버텨야되요.

피를 질질 흘리면서, 싸워야 되요. 무너지지 말아야 되요.

 

그리고 그 피가 덕지 덕지 묻은 상처난 얼굴로, 주일날 만나서,

살아남은 전우끼리에 간증과 감동을 나누는 게, 바로 이 예배의 자리여야 되요.

그게 아벨의 제사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우리 오늘 저 문을 나설 때, 나는 공로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 대장되신 그 분이, 우리의 싸움을 함께 해주실 것을 믿고,

오늘도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자리로 나가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