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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벽을 넘어 모든 민족에게로

LNCK 2015. 4. 27. 10:37

차별의 벽을 넘어 모든 민족에게로 140907 (youtube.com)

차별의 벽을 넘어 모든 민족에게로          행10:9~23         

   

저는 이 (백인 교회당이 팔린) 보도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인종차별을 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문 닫게 하실 것이다.

왜 우리가 사는 호주의 백인 교회들이, 지금 문을 닫고 있습니까?

 

흑인들을 향하여 선교하지 않고,

여기에 오는 이 다민족들을 향하여 선교할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는데도,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끼리 예배드리겠다고 하는 동안,

노인네들만 남고,

결국은 무슬림들한테 그 건물을 팔아야 되는, 그런 처지로 지금 가고 있습니다.

 

이 호주에 교회들 가운데, 다민족을 향하여 문을 열고,

다민족 사역을 시작한 교회들은, 결코 문 닫지 않습니다.

백인교회만 그럴까요? 우리 한인교회들은 안 그럴까요?

 

한인들이 아무리 이곳으로 몰려온다고 해도,

우리끼리만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서, 문을 닫고 있는 교회는,

사해바다처럼 언젠가는 죽은 교회가 되고,

결국은 이 땅에서 사라지는, 그런 역사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종종 추천서를 씁니다. 선교사님들을 향한 추천서, 뭐 훈련받는데,

이제 성도님들도 추천서를 가져와서, 제가 쓰는 데요,

그 추천서 항목 중에, 대부분 들어있는 항목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신이 추천한 이 사람이,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가?’

그걸 묻는 내용이 대부분 들어 있습니다. 그 무슨 말입니까?

 

이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냐? 헌신하는 헌신된 사람이냐? 좋은 일꾼이 될 수 있느냐?’

그걸 평가하는 기준 중에, 꼭 평가해야 될 내용이 뭐냐 하면,

 

이 사람이 선교할 사람인데, 이 사람이 모든 민족들에 가서 복음 전할 사람인데,

이 사람에 마음속에, 선교사 될 사람이,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겠다는 사람이,

만약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이 사람은 자격 없다는 뜻이예요.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민족 사역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린빌(지역 이름)로 가겠다고,

하나님 부르심 앞에 순종하고 있는데,

 

이 그린빌을 향하여 가길 원하는 우리 성도님들,

이 예배에 참여하는, 저와 여러분 가운데,

나는 흑인은 안돼, 나는 레바논 사람은 안돼, 나는 무슬림들은 안돼, 나는 인도사람은 안돼 하는

 

조금이라도 저와 여러분에 마음속에,

하나님의 그 마음과는 다른 차별에 죄악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린빌로 보내지 않을 실거라는 것이죠.

 

그리고 거기 가서도, 쓰실 수가 없는, 세계 중에 복이 되는 사람이 될 수가 없고,

세계 중에 복이 되지 못하는, 그런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에게 이 시간, 주신 말씀도 그런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불러서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3년 동안 훈련시키셨습니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증인되는데, 예루살렘부터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모든 민족에게 증인되는, 그 일을 하시겠다고 하셨고,

베드로를 중심으로 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그 일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어떻게 사마리아를 넘어서, 땅 끝을 향하여 가느냐?

근데 피장이(가죽 세공업자) 시몬의 집에 와가지고,

베드로에 걸음이 뚝 멈추어 졌습니다.

 

여러분 피장은, 짐승을 잡아 죽이는 백정과 같은 사람입니다. 부정한 사람입니다.

근데, 그 부정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같이 먹고, 자고 할 정도로 많이 열려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땅 끝까지, 모든 민족까지, 가기를 원하시는데,

거기에 마음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베드로를 바꾸시지 않고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베드로를 변화시키는 장면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어떤 복음입니까?

민족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복음을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맡겨주셨습니다.

 

백인용 복음을 주셨다면, 우린 백인에게만 전하면 끝입니다.

내 민족만을 위한 복음을 주셨으면, 우리 민족만 복음화 시키면 끝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할 일은 없습니다.

 

근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목숨 걸고 가서 전하라고 하시면서,

 

주님이 주신 이 복음은, 누구도 차별하지 아니하고, 모두에게 전해야 될 복음이고,
하나님께서 차별하지 않으신 사람을, 우리가 절대로 차별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329절에,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에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에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에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을,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 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13절에서는, 우리가 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성령님이 임하신, 그 사건이야말로,

성령 하나님이 차별하지 아니 하시고, 모두를 받아드리신다는,

산 증거인 것을 성령 체험을 통해가지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328절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이니라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골로새서 310절부터 11절은,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복음 안에서, 우리를 새 사람 만들어 주셨는데,

그 새 사람 만드는 일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이 스구디아인은,

그 당시에 가장 야만적인 민족이라고 인정을 받았던, 스키타이족을 가리킵니다.

                              *지금의 터키 동쪽, 즉 중앙아시아 지역에 살았던 부족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느니라.

 

우리에게 주되신 예수님이, 모든 민족들을 차별하지 아니 하고,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신 주님이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믿고 구원 받는 데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율법 외에 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3:21~2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10:11~12절에도,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인종가지고 하나님이, 차별해서 누구는 구원하고, 구원하지 않고,

누구는 복을 많이 주고, 누구에게는 복을 안주고.. 그렇지 않습니다.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 백인이고, 복을 못 받고 저주받은 사람이 흑인이고,

그런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차별하지 아니하고, 모든 민족에게 전할 복음을 맡겨주셨는데,

이 복음 들고 가는 사람이, 차별하니까 누구는 받고, 누구는 못 받는, 그런 일이..

 

누구는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헉헉거리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그 부스러기도 받지 못해 가지고, 굶어 죽어가는,

그 일이 영적 세계 속에서도 일어나는 겁니다.

 

오늘 이 베드로가, 모든 민족을 향하여서 가지 못하는,

그 영적 자리에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안가니까 복음의 행진이 멈춰졌습니다.

 

베드로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잡아먹으라고 하시는데,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 하였나이다

 

하나님은 깨끗하게 해놓고 먹으라 그러는데,

'나는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말하는걸, 속되어서, 더러워서 못 먹겠습니다..'

이렇게 버티고 있어요.

 

근데 참 재밌는 표현이죠.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아예 라는 말을 안 하던지,

주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거예요. 그 분이 시키면 나는 뭐든지 한다는 뜻에서,

로드,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주여해놓고 못하겠습니다. 거부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시인하고, 행동으로는 부인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아멘 해놓고, 삶에 현장에서 전혀 아무것도, 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아무 문제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나는 머릿속으로 다 동의하고 있고, 머릿속으로 다 인정하고 있고, 다 받아드리고 있다.

근데 사는 것 보면, 하나도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에 무지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안다고 착각합니다. 성경을 많이 아니까, 신학을 많이 아니까,

남에게 또 가르치고 있으니까, 나는 그대로 믿고 있다라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건 죽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땐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 나를 바꿀 수 없는 믿음은 가짭니다.

 

베드로가 지금 그런 자리에 있었습니다.

주여!’ 라고 부르면서, 그럴 수 없습니다 라고, 절대적으로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순종하게 되는데요,

근데 바꿔진 다음에도, 이 베드로와 마음속에, 유대인들에 마음속에 있는,

이 율법주의, 인간적인 기준 가지고 사람들을 비교하고, 판단하고, 인정해주고 하는,

이것이 얼마나 뿌리 깊게, 그에게 박혀 있었는가 하는 게, 2:11~14절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 바울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이방인 선교에 대해서, 이제 문을 열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안디옥에 와가지고, 이방인들 많이 있는,

안디옥교회서 같이 앉아 가지고 잘 먹고 있었습니다.

아무 문제없이, 이방인들하고 어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왔습니다. 유대인들이 오니까, 베드로의 태도가 싹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딱 일어나 가지고, 이방인들하고 같이 식사 안 한 것처럼,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가장했습니다.

 

그 자리에 베드로가 함께 앉아 가지고, 이방인들과 식사 잘하고 있던 다른 유대인들도,

베드로가 그렇게 하니까, 다 그렇게 외식하는, 그런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 베드로를 책망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책망합니까?

복음에 진리를 떠나서, 바르게 행하지 않았다.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지 않았다.’

그렇게 책망합니다.

 

복음은 모든 민족들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그 복음하고는 전혀 거리가 동떨어진,

그런 삶을 살 때가 있다는 것을, 베드로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베드로가 이런 태도를 취했습니까?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교제하고 가까이 하는 것은,

율법적으로 위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28절에 그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나중에 순종하고 고넬료 집에 가서,

같이 먹고 놀겠다는, 그거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이 알고, 비난했습니다.

내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사도행전 12장 초반부에, 그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한 사람이 거듭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복음 전하는 그 최전선에 있다고 할지라도,

오랫동안 어릴 때부터, 그이에게 익숙했던, 이 편견과 차별의 벽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요?

 

성령충만함 가운데 있는데도, 그 생각이 바뀌지 않고, 그 옛날 생각에 꽉 매여 있을 때에,

결국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지 못하는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그거 놔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과 한 교회를 사용하시기 전에

반드시 하시는 일은, 그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완전히 바꾸어 놓으신 다음에,

스스로 원하고 소원할 때에,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그렇게 가는 게 아닙니다.

주님 내가 이제는, 내가 과거에는, 절대로 싫어하고, 하지 않았던,

그 일을 가장 먼저 하고 싶습니다. 회개합니다. 거기서 떠납니다.

이제 나를 그일 시키는데, 제일 앞장서서 할 수 있도록 먼저 불러주세요.'

 

여러분 저와 여러분 그렇게 바뀌어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이제 마음껏 쓰시면서, 당신의 역사를 일으켜 가실 것입니다.

 

어떻게 차별의 벽을 허무십니까? 베드로에게 환상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여러분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 마다,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환상을 통해 영의 세계를 보여주시고, 그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마지막 때에, .녀 종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고 예언하셨고,

그렇게 하십니다. 기도하는 시간,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고,

거기에 짐승들이 담겨 있고, 그것을 먹으라고 하는, 그런 말씀을 합니다.

 

이게 환상이었어요. 세 번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건 베드로에 머릿속에서 나올 수 없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헛것을 보았나?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인가? 분별하는 간단한 기준이 있습니다.

 

내가 소원하고 원하던 것을 보면, 그거 다 헛것입니다. 꿈 다 개꿈입니다.

내가 막 거기에, 막 골몰하면서, 뭘 원했는데, 그게 막 꿈에 이루어진다,

그거 다 나한테서 나온 것입니다.

 

이 베드로가 본 것은, 베드로가 상상할 수 없는 거예요.

그 꿈, 그 환상을 보면서도, 아니요 못해요, 못해요, 지금 하고 있는걸,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면서,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못한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환상만이 아니라, 그 환상 가운데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내가 속되다 하지말라.”

 

여러분 직접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도, 긴가 민가 하고 있는데,

성령님께서 또 한 번, 그 마음속에서, 그에게 음성을 들려주시는 내용이 18~ 20절에 나옵니다.

 

고민하고 있을 때에, 누군가가 문 앞에서, 베드로를 만나려고 합니다.

아니 내 집도 아니고, 남의 집에 와있는데, 어떻게 여기 알고 왔는지, 참 신기하죠.

나가기 전에, 만나기전에, 벌써 성령님이 누가 왔는지, 어떻게 해야 될지,

미리 그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내가 보내었다.

 

여러분 어제 묵상한 그 고넬료, 역시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을 통해서,

피장이 시몬의 집에 있다. 정확하게 번지까지 가르쳐 주시면서,

성령님이 인도하셨고, 그가 오기 전에 벌써,

그 일을 시작하신 성령님이 베드로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전혀 모르고, 연결 되어 있지 않다할지라도,

우리 모두를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쓰시려고 한다면,

이 사람 준비시키고, 이 사람에게 말씀하셔서,

그 일을 하나님, 성령님이 원하신때에 이루어지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얼마나 기도하는 세계 속에, 믿음의 세계 속에, 이런 일이 많은지 몰라요.

여러분 나는 기도를 지금 시작했는데,

바깥에 우체부가 벌써 그때 기도를 시작한 그때에 와가지고,

내가 기도한 그것을 배달하려고 하는, 그 자리에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성령님은 내 필요를 기도하기 전에, 알고 계시기 때문에,

벌써 기도하기 전에 그 사람 시켜가지고, 나한테 필요한걸 보내게 하신거에요.

 

선교에 현장 속에서, 사역에 현장 속에서,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걸 보여 주시려고 하는 거예요.

 

사람의 일은요, 다 내가 섭외해야 되요. 내가 다 준비해야 되요.

이 사람 저 사람 찾아 다니면서, 이것도 필요하니까,

이것 좀 도와 달라, 언제 해 달라..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요,

인간이 좇아 다니면서, 걱정하고, 도와드려야 할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거부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막아서고 있어도,

하나님이 하기를 원하신다면, 그 인간에 생각 바꾸어서,

그 사람 변화시켜서,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를 순종함에 이르는 자리에 서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신 건,

환경과 사람을 통해서 확인 됩니다. 내려가 보니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고넬료가 보내서 왔습니다. 들어보니까, 사람을 통해, 환경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시고 말씀하시고, 성령으로 인도하신 것이 맞구나..

 

결국 이 앞에서, 베드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있었고,

자기 나름대로 주관과 생각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고,

인도해 주실 때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게 믿음입니다.

 

우리 과거에, 인종차별 주의자일수 있어요.

예수 믿기 전에도 그렇고, 예수 믿은 다음에도, 절대로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왜 자녀들 이런 민족, 한국사람 아닌 건 못줘, 이런 사람일수 있지만,

 

주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면, 과거에는 인종차별 주의자였고,

나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불순종에 자리에 있었지만,

그걸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더 적극적으로, 내가 몰라서 그랬다고 하면서,

앞장서서, 모든 민족을 향하여 나가는 그런 자로, 베드로처럼 바뀌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했고, ‘바로 이튿날 일어나서, 함께 가니라.’

저희 중앙장로교회가, 이 중앙교회 함께 속한, 저와 여러분이

이 베드로에 변화를 함께 체험하는 자리에, 서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그렇게 모든 민족들을 향하여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그렇게 차별하지 않으시고, 이 천국 복음을 듣고,

하나님 나라에 잔치에 참여하는, 그 영광스런 특권을 허락해 주셨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인종차별에 대해서 보여주는, 그 동영상 가운데,

실제적으로 일어났던 이야기를 가지고 만든, 동영상 하나를 보았습니다.

 

브라질 TAM이라는 항공사가 있습니다.

그 항공사에서, 실제로 일어난 내용을 가지고, 그 영상을 만들었는데요.

50대 여성이 비행기를 탔습니다. 근데 옆자리에 딱 보니까, 흑인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화가 난 표정으로, 앉아 가지고는, 스튜디어스를 불렀습니다.

스튜디어스가 뭘 도와 드릴까요?하고 물으니까, 보면 몰라요.

내 옆에 흑인 남자가 앉아 있잖아요. 나는 이 흑인하고는 못 앉겠어요.

다른 자리 주세요.’ 스튜어디스가 이 사람을 진정시킵니다.

 

지금 자리가 다 차서 바꿀 수가 없지만,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몇 분후에 스튜어디스가 다시 왔습니다. 그리고 대답합니다.

기장님하고도 의논을 해가지고, 확인을 해보았지만,

이코노미 자리에는 빈자리가 없습니다. 일등석밖에는 빈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희 항공사는 보통 같으면, 승객을

이코노미 석에서 일등석으로 자리를 옮겨드리는걸 잘 안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항공사 손님이 어떤 불쾌한 사람 옆에 안도록 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여자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막 짐 챙겨 가지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이 스튜디어스가 말했습니다. 흑인 남자를 향해서

손님 짐 챙겨가지고 일등석으로 가시죠.’

못마땅했던 다른 많은 승객들이, 함께 박수를 치고,

어떤 사람은 막 일어나 가지고 박수를 치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우리가 당한 일이예요. 멸시받고, 천대받는 것들,

이 지구촌 어디에 그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는 백성들, 가난하기 짝이 없는 백성들,

지금 아프리카에 소말리아보다도, 더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있는 저희들.

여러분 온 세계에 선교하는 대국이 되게 하시고,

이 호주 땅에 와가지고, 여기에서 복음을 전하며, 선교한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125년 전에, 한국은 호주의 선교 대상이었습니다. 125년이 지난 다음에,

이 호주 백성, 이 교회들을 통해, 호주 선교사님을 통해서,

복음 받게 하신 저희들이, 기도 받게 하신 저희들이,

황송한 대접을 받고, 이 땅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는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는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에 사람이라,

약속에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든지,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피로 값 주고 저와 여러분들을 사신 거에요.

예수님이 이 일을 위해, 생명을 버리신 거에요.

저와 여러분들, 그 천국에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받아 드려주신 거예요.

 

주님은 십자가에서 거절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바꾸신 거에요.

그 천국 보좌에, 영광스런 자리에, 대신에 저와 여러분들을, 앉혀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로마 교회에 성도들을 향하여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그렀습니다.

 

우리에게 전달된 복음은, 세상이 천대하고 멸시하던, 한국 민족을 당당하게,

하나님이 백성 되는, 그 자리에 세워주신, 열방용 복음이었습니다.

 

그 백인들이 와서 생명을 잃어버리면서, 우리를 위해 수고한 것은,

그들만 듣고 구원받기에는, 너무 너무 엄청난 복음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생명 살리는 일을 위해서, 한국 땅에 건너와서,

자식을 죽이고 자기의 죽음까지 다 내려놓으면서, 전하게 한 복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에 심정으로,

이제 이 그린빌(외국인이 많은 지역)를 향하여 나가야될 자리에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자라.’

 

훼방자요, 핍박자였던 바울이, 은혜로 값없이 구원받았다.

나 같은 죄인이 없고, 나 같은 죄인의 괴수가 없는데,

누구를 차별해서 내가 못가겠느냐.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요,

하나님이 나를 차별하지 않은, 이 은혜를 받았을 때는,

그 사람에게 차별받았던 상처, 아픔 이거 다 녹아내리고,

 

이제는 누구를 향해서든지, 원수를 향해서든지,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든지,

미워하는 사람이든지, 환영하는 사람이든, 거절하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모두를 향하여서 복음에 빚진자로서, 나가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그 자리에 설수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구원해주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격 있어서요?

우리 행한 대로 갚으신다면, 거절당했고, 망해야할 저희들인데,

예수님 사랑 때문에, 있는 모습 그대로, 성형하고 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화장하고 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것 바꾸고 오면 내가 받아 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 있는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이스. 예수님만 있으면, 우리는 의롭고 완전한 자입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다 하나로 만드셨고, 평등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받아주셨으니, 담대하게 주님의 보좌 앞에 그대로 나갈 수 있고,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품고, 이 복음으로 녹여낼 수 있는,

그 영광스런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를 받아주신 그 상에,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는, 주님에 그 은혜를,

이 한 주간 동안 착한 사람이든지, 나쁜 사람이든지, 어떤 인종이든지,

성격이 어떻든지 관계없이, 주님이 받으라고 하는,

주님이 손 내밀고, 모든 사람들을 이제 나는, 주님의 그 무한한 사랑 안에서,

다 받아 드릴 것이고, 그들을 축복 할 것이고, 그들을 섬기겠습니다.

 

주님 저를 써주십시오. 제가 그 미워하는 자리에 제일 앞장섰던 사람인데,

이제는 사랑하는 자리에 제일 앞장서겠습니다.

차별하는 자리에 앞장섰던 잔데, 이제는 섬기는 자리에 앞장서겠습니다.

그 모습으로 십자가를 향하여,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향하여 함께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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