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마9:21, 빌2:12 출처보기 *관련글 모음 믿음론
▲(구원론에 대한 논쟁이) 6년이 지났는데,
지금은 6년 전보다 더 치열한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6년 전에, 치열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이 이 구원에 관해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치열한 때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구원론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다시 구원에 대해서 심각하게 점검해봐야겠다.
오늘부터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하는데, 제목은 진정한 구원.
이 제목, <진정한 구원>이라고 하면, 잘못된 구원관도 있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오늘부터 제가 <진정한 구원>에 대해서 몇 달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뿌리를 뽑으려 합니다.
저희 교회 성도들이 한 사람도, 이 구원에 대해서 확실하지 않으면 계속 할거란 얘기에요.
지금부터 오늘이 인트러덕션(도입) 시간인데
오늘 제가 몇 분의 글을 읽어드리려 하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잘 들으셔야 해요.
한 사람의 글을 읽을 건데
아더 핑크, 1880년대 후반에 정말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던 목사님입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잘 들으셔야 ‘진정한 구원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여러분의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니구나.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구나. 심오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시기 바랍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구원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믿어야겠다.’ 그렇게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먼저 제가 <아더 핑크의 설교>를 인용하려 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이란 말은 마귀의 듣기 좋은 자장가입니다.
쉽지 않은 구원의 길, 구원 신앙을 갖기가 어렵다는 말을 들으면
깜짝 놀랄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구원 얻기가 어렵다'고 말하면 놀라죠.
그들은 쉽다고 배웠거든요. 구원은 너무 쉽다. 간단하다.
그런데 400년이 넘도록 그렇게 배웠는데
오늘날 우리가 '구원이 어렵다'고 말하면, 깜짝 놀란다는 거죠.
오늘날 거의 모든 곳에서, 심지어 정통주의자로 불리는 사람들조차도
구원이 매우 쉽고 간단한 것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믿고,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면
그것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물질, 아내, 남편을 의지하듯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의 대상을 의지하는(믿는) 것 외에, 죄인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논리입니다.
여러분도 그 전에, 다 이렇게 배우셨죠?
그런데 LTC 교회에 와서는, 그게 아니라고 배워서 놀라셨잖아요 처음에.
놀라서 나간 분도 계세요. 이 교회가 잘못된 교회라고요.
오늘날, 이런 구원관이 만연한 탓에, 거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뭔가 특이하거나 잘못된 믿음을 가졌다는 오해를, 받기가 십상입니다.
저 아더 핑크는. 요즘의 이런 쉬운 구원관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마귀의 거짓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아더 핑크 목사님께서는
이러한 쉬운 구원관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거짓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을 그저 신뢰하는데는, 자연 신앙만으로 충분합니다. natural faith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에게는 초자연적인 신앙이 필요합니다. Super natural faith
예수님은 구원 신앙이 쉽고 단순하다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구원이,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기는커녕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역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대로
그 길을 걸으려면, 온 힘을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젊은 관원이 고민하며 돌아가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보다 쉬운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신학교는 목회자나 전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신앙을 가르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가 이루신 속죄 사역을 믿기만 하면
백만장자든 빈털터리든 누구나 쉽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확신을 심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 분은, 사람으론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타락한 죄인이,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고 진정으로 그리스도 믿는 구원 신앙으로
그 분 앞에 나오는 일은, 오직 창조의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으론 할 수 없으되’ 라는 말씀은, 인간의 의지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직 은혜의 기적만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죽이고, 세속적인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마귀를 물리치고
매일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며, 온유하고 겸손한 신념을 유지하고
믿음과 순종과 인내와 충실을 실천하고, 올바르고도 친절하고 자비롭게 살아가는 것.
쉬워요, 어려워요? (어려워요)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본 받아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것은
타락한 인간 본성에 내재된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매우 간단해 보이는 이유는
이 세대가 구원 신앙의 참된 본질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 신앙의 속성에 관한 성경의 증언을, 옳게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어
거짓 구원 신앙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시대의 통속적인 복음,
이 말은 사람들이 복음이라고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이해의 복음.
이런 통속적인(대중적인) 복음을, 이토록 열렬히 환영하는 이유는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지를 모르는데 있습니다.
구원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 이상의 의의를 지닙니다.
즉 자신의 마음과 삶을 그리스도의 통치에 온전히 복종시키는 것을 포함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구원을 얻었다라는 말은, 내 주인이 바뀌었다라는 말입니다.
내가 구원을 얻기 전에 내 주인은 죄였습니다. 마귀였습니다.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구원을 얻은 다음에, 내 주인이 누구에요? 예수님이에요.
그러면 새로 내 주인이 예수님이니까, 그 분에게 내 모든 삶을 복종하는게
그게 바로 구원받았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근데 주인이 안 바뀌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두 주인을 섬기지 말아라.’
즉 양다리 걸치지 말아라. 두 주인을 섬기는 건 구원 받은 게 아닙니다.
◑박영돈 교수가 올해 1월달에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제목: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우리 노력으로 구원을 이뤄가라는 행위 구원의 의미를 조금도 내포하지 않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열심히 노력해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이 노력해서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행위 구원자라고 합니다.
벤자민 오는 행위 구원자가 아니에요. 우리는 노력해서 구원 못 얻어요.
이 말은 그 말이 아니라는 거죠.
이 말은, 이미 우리 안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구원을
그 목표를 향해 진행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이루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결론, '마지막 단계로 계속 발전시키라'는 겁니다.
우리 힘과 노력으로 이루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강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우리에게 다 떠맡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처음 구원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 안에서 그 구원을 진행시켜 완성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고
완성시키는 분도 하나님이면.. 이 일을 누가 하느냐는 거예요. 성령님이라는 거죠.
그래서 성령은 아들의 영, 자녀의 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아들의 소원을 우리 안에 심어주십니다.
성령, 아들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며, 그 성령으로 거듭난 증거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증거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는 부분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사무치는 소원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아버지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소원에 온통 삼킴받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진짜 구원 받은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살지 않는다는 거예요.
자신의 욕심을 쫓아 살지 않아요. 나를 구원해주신 그 분의 뜻을 좇아 산다는 거예요.
그 분의 뜻을 이루고자하는 소원으로 사로잡히게 된다는 거예요.
이게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의 증거라는 거예요.
확실해요? 여러분 안에 그런 소원이 있냐는 거죠.
그래서 박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를 오래 믿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
예수를 오래 믿어도 변하지 않고, 복음의 빛을 현저히 가리고 있는 것.
그것은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 풍성한 은혜와 능력을 모두 탕진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에게, 구원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행하는 삶이 없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믿기만 하면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가르침이
한국 교회를 망하게 하고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은 이미 받은 것. 한국의 모든 교회가 가르치는 거예요.
믿기만 하면 구원 받은 거라고 다 그렇게 배웠어요.
저도 그렇게 배웠고 여러분도 다 그렇게 배웠어요.
믿기만 하면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다.. 말씀 드렸잖아요, 구원은 이미 끝났다.
완전히 다 따놓은 거예요 이제는.
우리는 구원을 위해서 애쓸 필요가 아무 것도 없는 거죠. 이제는 뭐만 남았어요?
내가 살고 싶은대로 사는 것만 남은 거죠.
‘믿기만 하면 구원은 이미 가진 것이다.’ 라고 안심시키는 가르침이
한국 교회를 망하게 하고 있어요.
교인들을 신앙의 나태와 방종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바울이 전하는 구원의 진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단적 가르침입니다.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근데 이 가르침이 잘못됐다가 아니라 이단적인 가르침이래요.
한국교회는, 구원론에 있어서, 주류가 이단적 영향을 받고 있어요.
이분 말이 지금 그런 거예요 제 말이 아니라. 제가 과장하고 있나요?
다시 읽어드릴께요.
이런 가르침은, 바울이 전하는 구원의 진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이단적 가르침이며,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마귀도 믿고 떤다고 했습니다.
자신 안에, 구원의 목표를 향해 성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증거와 열매가 나타나지 않아도
예수를 믿었으니, 자신이 이미 구원 받았다고 안심하는 것은, 무서운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의가 되세요? 다시 읽어 드립니다.
"자신 안에 구원의 목표를 향해, 성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증거와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아도 예수를 믿었으니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안심하는 것은, 무서운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이 많다는 거죠.
사탄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이들의 확신은, 자꾸 흔들어대는 반면에
거짓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들의 자기기만은, 더욱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자기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게 하여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한국 교회에 만연한 값싼 은혜의 메시지는
교인들을 진리의 영이 아니라, 미혹의 영이 주는 거짓 확신에 빠지게 합니다.
자신이 구원 받았는지는
그 구원의 목표가 자신 안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분명한 증거와 열매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증거와 열매가 없으면 몰라요.
물론 예수 믿은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는, 이런 증거가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교회 생활을 했어도, 이런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이는.
참으로 구원 받은 사람인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듭났다가도, 심각하게 타락한 교인일 것입니다.
거듭나도 타락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참으로 구원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인지
자신을 돌아보게 해야 합니다.
이 일을 누가 해야 합니까?
목사가 해야 되는데, 안 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교인들을 잠재우고 있습니다.
자신이 구원 받았는지 여부를 심각하게 점검하고 성찰해봐야 할 사람들에게
억지로 구원의 확신을 주입시키려는 인위적인 시도는
사람들을 거짓 구원의 확신으로 세뇌시키는, 마귀의 교활한 수법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도리어 안일하게 사는 교인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보게 해야 한다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조언이 절실한 때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는 건 좋은 겁니다.
이런 의심이 참된 확신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혹 자신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게 아닌지 두려워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은 참된 신앙의 핵심 요소입니다.
이것이 없을 때 더 이상 진정한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원도 없습니다. 성화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참된 경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에
이 두렵고 떨림이 사라지면서, 온갖 부패와 방종이 밀려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방자하며, 경박하기 짝이 없는 목사들, 교인들로 큰 군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구원이란 무엇인가?
오늘부터 우리가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가? 우리가 구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어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구원'이란 단어의 뜻부터 알아야 합니다. 왜냐면 이 용어가 정확한 정의 없이는, 이게 뭔 이야긴지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진정한 구원을 이야기하려면, 구원이 뭔지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구원이란 말은요 굉장히 간단한 단어에요. 구원은 건져낸다는 겁니다. Rescue,
건져낸다는 뜻이에요. 그게 구원이에요.
그러면 구원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 포인트는,
어디에서 비롯되느냐. 어디에서 구원을 얻었냐는 거예요.
어디에서 어디로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셨느냐는 거예요.
이게 정립이 안되면 구원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이 부분에 대해서, 지난 20세기까지 가장 위대했던 설교가,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구원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아무리 떠들어도 아무도 안 믿어주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유명한 분을 인용하면, 다들 그러는구나 하는거 거든요.
▲찰스 스펄전 목사님께서 마태복음 9장 21절을 본문으로 이렇게 설교하셨어요.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관한 설교를 들을 때
그 구원이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구원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구원의 본질은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구원의 본질은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구원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요? 죄로부터.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
구원의 본질은,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계속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거룩하게 만드시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셨음을 뜻한다.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 나는 구원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죄 가운데 살고 있는데, 어떻게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으면서
구조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동상에 걸린 사람이, 혹독한 겨울 바람에 얼어가면서,
추위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
그 분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우리가 치명적인 질병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질병에서 우리를 치유하시고
그 손으로 우리를 만지시며, 내가 원하는 이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그 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진정한 구원을 이해하려면
구원의 본질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알 때만
진정한 구원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께 과거에 이렇게 설명했어요.
성경을 보면 구원은 세 가지 시대를 말한다. 과거, 현재, 미래.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디에서 구원을 얻어야 하는가를,
어디로부터의 구원인가를 알 때만 가능하다는 거예요.
죄에는 세 가지 육성이 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죄는 반드시 대가,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 다음에 죄는 힘이 있다.
죄는 죄 짓는 사람들을 종으로 사로잡고
그 죄로 인하여 고난당하게 하고 고통당하게 하는 막강한 힘이 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세 번째는 죄 그 자체, 죄라고 하는 존재 그 자체.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죄의 형벌인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셨다.
이걸 다른 말로 신학적 용어로 칭의, 이렇게 말하죠. 기억나세요?
그런데 우리가 사망으로부터 생명을 옮겼어요.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았어요.
그러나 여전히 나는 죄의 세력과 싸우고 있잖아요. 내 안의 죄성과 싸워요, 안 싸워요?
내 안에 있는 악한 심성이 있어요, 없어요?
구원을 이미 얻었어요. 죄의 형벌인 사망으로부터.
그러나 내가 계속 구원을 이뤄가요. 계속 죄와 싸우는 거죠.
안 싸우면, 이길 수가 없죠.
그 다음에 난 정말 죄가 없다는 세상에 살고 싶어요, 아멘.
주님 다시 오시면 죄 자체로부터의 구원을 받는 거예요.
다시는 죄가 없는..
그게 구원의 완성이죠. 그걸 우리가 장차 얻을 구원이라고 하죠.
그걸 다른 말로 신학적인 용어로 '영화' 그러죠. 이해 됐어요?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을 얻었어요, 칭의.
죄의 세력과 싸우면서 구원을 이루는 게 성화.
주님 오실 때 죄 자체로부터의 구원, 영화. 쉽죠?
▲그런데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신학적인 이야기를 할께요.
우리가 죄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죄,
우리가 죄의 결과라고 말할 때 아담이 죄를 지었어요.
그 결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즉시 아담이 죽었나요? 잘만 살더구만. 오래만 살더구만.
몇 살까지요? 구백 살 넘도록 살았어요. 그런데 뭐라 그랬나요?
'네가 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아담이 범죄한 즉시, 그 죄의 직접적인 결과는 사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는 것입니다. alienation, separation from God
그것이 죄의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간접적인 결과에요.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깨진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뜻이에요.
그게 칭의에요. 관계가 회복된 것은 직접적 결과에요.
우리가 죄의 직접적 결과로, 하나님 관계가 깨지는 것처럼
구원을 얻은 직접적 결과로, 관계가 회복된 게 구원이에요.
구원을 얻은 이후에, 그동안 깨어진 관계로 인해서 망가졌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회복해가는 과정에 있는 거예요. 이해되시나요?
저주 받은 이 세상, 죄악된 나의 속성, 내 욕심, 내 자아,
이런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뤄가게 하는 것.
이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짐으로 말미암아 망가졌던
모든 2차적인 결과들을 회복하는 거예요.
그걸 다른 말로 성화라고 하는데, 우리가 점점 주님과 닮아가는 과정.
하나님과 관계는 회복됐지만, 여전히 내가 주님과 닮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게 구원의 2차적인, 간접적인 결과입니다. 이해 되시죠?
▲우리가 이것을 잘 이해한다면 '나는 구원을 얻었으니 끝이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더 핑크도, 박영돈 교수도 그렇게 얘기했지만
구원의 본질에 관해서 이해를 잘못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가 이 진정한 구원에 대해서 배워보려고 하는데
이해가 좀 되세요 오늘? 확실히 되세요? 밖에 나가서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너희 교회 잘못됐어 행위 구원론자 아냐?'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어요?
죽을래 너? 이렇게 하지 마시고. 차근차근히.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도 그렇게 배우고 그런 줄 알았는데, 하나님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더라.
그러면서 친절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말씀을 해야합니다.
모르면 관둬. 그렇게 하지 마시고. 네?
▲오늘의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죄와 싸우면서 우리 안에 있는 거룩을 이뤄가는 성화의 과정에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이 육신을 어떻게요?
벗어버리고 영광의 몸을 입고 우리는 죄 자체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것입니다. 그게 영화. 아멘.
그러면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과거에요, 미래에요, 현재에요? 현재.
과거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적이 다 있죠. 이것은 지나간 일.
미래에 다시 오실 우리 주님. 다시 만나서 영원히 살 거예요.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미래의 일이에요.
그런데 지금, 오늘, 내일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문제는. 거룩함을 이뤄가는 거잖아요.
이게 우리가 해야될 일이잖아요. 이게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을 말씀.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두렵고 떨림입니다.
두렵고 떨림 없이 우리는 구원을 이뤄갈 수 없습니다.
두렵고 떨림이란 것이 뭘 의미하는지 우리가 앞으로도 자세히 보게 되겠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열쇠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는가.
어떻게 이뤄갑니까. 오늘, 내일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어떻게요?
바로 본문 말씀에 해답이 있어요.
항상, 복종하라. 항상 복종하라. 항상 복종하여
Always obey. only by obedience. 순종함으로 우리는 구원을 이뤄갑니다.
내 삶의 현장 속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이 없다면, 나는 구원을 이뤄가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라, 하나님 말씀을 두려워할 줄 알아라.
그 분의 말씀이 두려운 줄 알아라. 그 분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라.
그 분은 그 말씀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다. 그 분 앞에 우리는 반드시 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그 분의 말씀을 언제나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을 한 장으로 요약하면 순종이다. 바로 그 이야깁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게 뭐에요.
나는 너희가 생명을 얻기 원한다. 생명이 순종입니다. 불순종은 사망이다.
내가 어떻게 순종하며 어떻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사랑하는 것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성경 다입니다. 66권 알아서 뭐하게요, 지식 가득 채워서 뭐하게요.
결론은 나온 겁니다. 구원을 이뤄가야 되는 구나. 내가 다 이룬 것이 아니구나.
이뤄가야 되는 거구나. 그게 날마다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게 생명을 얻는 길이구나. 그게 좁은 길로 가는 거구나.
이게 성경 전부라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얼마나 순종이 중요합니까.
그동안 우리는 순종을 무수히 강조해왔어요. 근데도 말씀에 순종이 잘 안돼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들. 제가 이번에 인천에 가서
이런 설교를 했어요. 사도 바울이 위에서 나를 부르심도 나로 하여금
그 상을 향해 쫓아가게 하지만 그 분이 나를 붙잡은 게 있다.
하나님이 나를 먼저 콱 붙잡은 게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는 거예요.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나를 확 붙잡았는데
그 분이 나를 붙잡은 것을 나도 붙잡으려 쫓아간다고 하잖아요.
나도 붙들기 위해서 좇아간다. 그 사랑을 나도 붙들기 위해서 좇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붙드신 사랑은, 문제가 없어요. 결코 변치 않아요.
내가 그 분을 붙드는 사랑에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 나도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붙들려 쫓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이 구원을 이뤄가는 것입니다.
그럴 떄 우리는 좁은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 성도들은 이 길 끝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순종은, 선택이 아닙니다. 순종은 명령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선택하라. 명령입니다.
좁은 길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명령입니다.
너의 구원을 이뤄가라. 명령입니다.
그렇게 살 때 주님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넘어져도 일으켜 주시고
또 가게 하시고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타자 J.H.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