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계19:15-16 김성수 목사님 계시록85, 86강 출처
19:15 그의 입에서 날카로운 칼이 나오는데, 그는 그것으로 모든 민족을 치실 것입니다.
그는 친히 쇠지팡이를 가지고 모든 민족을 ‘다스리실’ 것이요, 또는 '돌볼'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하신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실 것입니다.
19:16 그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왕들의 왕', '군주들의 군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종말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첫 번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었고,
-두 번째 이름은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이었고
-세 번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이름 <만왕의 왕, 만주의 주>에 관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15절의 내용은 우리가 이미 다 공부한 내용이기 때문에 넘어가겠습니다.
◑구원 계획의 완성인 ‘왕’
▶16절을 보시면 종말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만 왕의 왕, 만 주의 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쓰인 ‘바실류스, 큐리오스’는 ‘통치자, 다스리는 자,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지난 수요 성경 공부 때 에베소서 전체를 review 해 드렸지요.
그 때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뭐라고 했습니까?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20-22)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하나님은 바로 이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 주고 있지요?
우리가 창1:28절(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스리라)을
단순히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문화 명령이라고만 알고 있지요?
그러나 이 명령은 단순히 아담에게 주신, 문화명령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국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미리 예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이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무산되었지만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이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될 것임을 성경 전체가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니까 여러분이 창1:28절과,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창3:15절을 연결시켜 보세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품에 품고
만물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실 거라는 것을 미리 계획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계획이 2천년 전 십자가에서 영적으로 이미 완성이 되었고,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 계시록 19장에서 가시적/현실적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품에 안고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언약을 완성시키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와 함께 왕 노릇 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실패한 창1:28절의 명령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품에 안고 십자가 안에서 완성해 내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왕 노릇은
종말에 가서 가시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현실 속에서의 왕노릇 – 비움과 섬김의 왕노릇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은 지금도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와 있으며
우리는 이 역사와 시간 속에서, 이 물질 세계 속에서 이미 그 왕 노릇을 하고 있어야 함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의 왕 노릇은 누차 설명해 드렸듯이
내가 어떤 존재 위에 군림하는, 이 땅의 아담들이 만들어 놓은 왕의 개념과
완전히 반대의 왕 노릇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왕 노릇을 하다가 가셨습니까?
(빌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모습으로 원수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일회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의 삶 자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담고 있는 내용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바로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와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나’라는 거짓된 자아를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을 공격하고 통제했던 그 육적인 ‘나’를 해체시키고,
다른 이들을 위해 내가 희생하여 그 상대방을 살려내고,
그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게 만드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쾌한 종노릇이 바로 ‘하늘나라의 왕 노릇’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를 비워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꿇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왕 노릇입니다.
▶요한복음 13장으로 가볼까요?
하늘의 왕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왕 노릇을 하다가 가셨는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요13:4-5,13-15)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 모습이 바로 히브리 종의 모습, 이러한 일은 노예의 일 중에서도 아주 치욕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같은 히브리 노예들에게는 이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 말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우리가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그렇게 원수의 발까지도 성심 성의껏 닦아주시는,
다른 이를 섬기는 종의 모습이 바로 하늘의 왕이 담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직접 그러한 하늘 왕의 모습을 본보기로 보여주시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분의 나라에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 할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너희도 바로 이 종의 삶을 살아야 하며, 반드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종으로서의 왕
▶그것을 이해한 사도들은, 그 주님의 말씀대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종으로서의 삶을 열심히 살아 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내용을 자신들의 삶으로 살아낸 것입니다.
(고후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그렇지요? 이렇게 예수께서 나의 주인,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을 한다는 말은,
곧 그 예수를 위해 내가 다른 이들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라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종’이 되는 연습을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종, 내 이웃을 섬기는 내 이웃의 종’ 말입니다.
▶고대시대의 노예들은, 모두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일반 백성이나 귀족, 왕족들이었습니다.
그렇게 귀하게 살던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살던 ‘습관, 성격, 자유민의 정신’
이런 것들을 박살 내 버리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문적으로 노예를 길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둘라 고게오’였습니다. 그 단어가 고린도 전서에 나옵니다.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여기서 ‘쳐서 복종하게 하다’라는 단어가 바로 ‘둘라 고게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 위해, ‘둘라 고게오’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부자가 되거나 가난하게 되는 것, 병에 걸리거나 병이 낫는 것,
유명해 지거나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이런 것은 신앙생활과 전혀 함수 관계가 없는 것들입니다.
신앙생활의 열매는 ‘여러분의 육이, 그 거짓 자아가 얼마나 죽었느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변해있는가가 바로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사랑과 화평과 온유와 절제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이 다 뭡니까?
모두 다 하나님과 내 이웃을 섬기는 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입으로, 자기 안에서는 그러한 열매가 분명히 나타났다고
수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
(갈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여기서 ‘예수의 흔적’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는 ‘스티그마타 투 큐리오 예수’입니다.
‘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로마시대 이전, 그러니까 헬라나 그 이전의 폴리스 시대 때는
노예들의 인권이 상당히 보장이 되었었습니다.
여러분이 ‘노예’ 하면 무조건 사탕수수 밭이나 목화밭에서 죽어라고 일만 하는 쿤타킨테를 떠올리시는데
당시 고대 시대의 노예는 그렇게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음악 하는 사람들, 미술 하는 사람들, 연극인’, 이런 예술 하는 사람들과
‘의사, 상담가, 가정교사’ 이런 사람들이 모두 노예였습니다.
◑적용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내 이웃의 유익과 성장을 위해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을
신학에서는 ‘기독교인의 자유’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전에는 마귀의 손 아귀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진심으로 나 이외의 존재,
즉 하나님과 내 이웃을 위해 살 수 없는 존재였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어서
자유롭게 나 이외의 존재를 섬기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자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 그렇게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시고 가셨는데
왜 그러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이렇게 드뭅니까?
오늘날의 기독교는 오히려 이 육적인 ‘나’를 펄펄 뛰며 살아나게 만들어 주는
이상한 잡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온통 ‘나/자아’뿐입니다.
‘나의 구원, 나의 행복, 나의 감격, 나의 부유함, 나의 유명세, 내 병의 치유’
여기에 어디 아무 대가없이 나를 죽여 다른 이의 유익을 추구하는, 종의 모습과 섬김의 모습이 있습니까?
교회는 바로 그 기독자의 자유를 훈련하고 연습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내가 옛 자아의 성품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건’
이러한 것들을 경험케 하시면서 나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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