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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감격과 열 재앙의 상관관계

LNCK 2015. 5. 23. 11:57

구원의 감격과 열 재앙의 상관관계           출11:1~10         15.03.29 출처보기

 

 

 

구원의 감격과 열 재앙의 상관관계

구원의 감격과 열 재앙이 어떤 상관관계 속에 놓여 있는가를 한번 살펴봅니다.

 

대한민국 개신교인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사랑의 교회를 세우신 옥 한흠 목사님이 계십니다.

은퇴도 일찍 하셨고 은퇴하시고 나서도 참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하나님 품에 가셨습니다.

 

그 분이 사랑의 교회 강단을 섬기실 때에 하셨던 설교를 영상으로 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편의 설교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았지만 특별한 설교가 있었는데,

제목도 모르겠고 본문도 모르겠고 따로 노트해 두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잊히지 않는 점은 주제가 그것이었는지 아니면 설교 중에 그러셨던 것인지 절규를 하셨던 적이 있었는데,

 

교인들 속에서 구원의 감격이 사라졌고,

장로나 권사나 새 신자나 할 것 없이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 틀에 박혀서

정형화된 습관적인 교회 생활만 남았다고 탄식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선 제 자신이 쿵- 얻어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교회를 섬기고 있었을 때인데, 교회를 섬기는 입장에서 구원을 얘기하는 것인데,

구원이 무엇이며, 왜 구원의 감격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 같은 경우, 논산 훈련소에서 백 없고 힘없는 상태에서

카투사로 발령 받았을 때의 감격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그 당시에는 백 있는 사람들이나 카투사를 갔기 때문입니다.

미군 부대에 발탁되어도 그런 감격이 있었는데,

어떻게 구원받은 선민이 구원의 감격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도 구원의 감격이 없는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답을 안 주시고

넘어가시는 바람에 그것이 저에게는 화두가 되어버렸습니다.

 

왜 구원의 감격이 없고, 기쁨이 지속되지 않을까?’

 

맨 처음에는 누구에게나 감격이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종적을 찾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옥 한흠 목사님과 더불어서 잘 나가고 있을 때에,

그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목사님께서 우시면서 구원의 감격이 없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감격(感激)이 뭘까요?

사전을 찾아봤더니 두 가지로 이야기 되는데, 마음에 깊이 느끼어 크게 감동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마움을 깊이 느끼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 마음이 깊이 감동하고 마음에 깊이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지요.

 

구원을 받은 것은 은혜로 받는 것이기에 이 두 가지의 의미가 합쳐져서,

구원의 감격은 마음에 깊이 감동하고 감사함이 넘치는 그런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마음이 깊이 감동한다는 것은 마음의 크기를 생각할 때에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전율하는 감동이 위까지 넘쳐흘러서 감사로 표현될 정도가 되는 것으로,

마음이 다른 것으로는 기뻐할 여력이 없을 만큼

구원 하나 만으로 기뻐하고 있는 상태가 구원의 감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 많이 벌면 기뻐하잖아요. 돈이 구원의 감격으로 대체되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돈 많이 벌게 해주셨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병 낫게 해주셨고

다 대체되어 버렸습니다.

 

구원의 감격이라는 것은 구원을 기뻐하기 위해 마음이 다 동원되었기 때문에,

다른 기쁨으로 기뻐할만한 마음의 접촉면이 없어져 버린 상태이고,

선민이라면 이 구원의 감격이 지속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설명 / 구원의 감격 이유

 

본문의 내용은, 열 번째 재앙인 장자가 죽는 재앙이 시작되기 전에 예고를 하시는 장면입니다.

바로에게 경고를 하시고, 이제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게 될 것을 알려주시는 장면인데,

장자라는 것은 가부장 제도의 사회 속에서 말할 것도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이제까지 아홉 가지 재앙이 애굽에서 소중한 것들을 앗아갔지만,

소중한 것의 순서를 매기자면, 각 집안마다 장자처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왕 조차도 맏아들이 세습하게 되어 있는 제도 속에서 살고 있고,

마지막 소중한 것을 가져가실 것이라고 모세가 바로에게 예고하면서,

7절에서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라고 하십니다.

 

개 한 마리도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이 말은 깜깜한 밤중에 개처럼 주변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동물이 없습니다.

 

반응한다고 해도 우리로서는 반응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지만,

개는 아주 작은 소리만 들려도 왕왕 짖어대는데,

애굽 전역에 곡소리가 전무후무한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머무는 고센 땅에는

개 한 마리가 혀를 움직이지도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충만한 평강과 평온함이 가득 차리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아홉 가지 재앙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선민 이스라엘로서는

그 감격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흑암이 온 애굽 땅에 덮였는데 고센 땅에만 광명의 빛이 임하고,

메뚜기 떼가 애굽 땅 전역을 갉아먹는데 고센 땅에만 없습니다.

 

모든 재앙이 고센 땅에서만 제어가 되는 이 놀라운 감격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까?

 

, 이 감격이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고 합니다.

 

이제 보겠습니다만, 출애굽 할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사람들로부터 많은 보화를 받아서 나가게 되고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구별하실 때에 이방민족인 애굽으로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질투와 분노와 시기를 보낼 수도 있었는데,

그들이 보화를 내주고 모세를 위대하게 봅니다.

 

모세를 위대하게 보았다라는 것은

모세가 영도하는 이스라엘 전체를 위대하게 보았다는 것인데,

자기들이 노예로 부릴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모르고 함부로 대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세상 주인의 자녀들이고 자신들이 오히려 찬밥 신세였는데,

찬밥 신세들이 주인의 아들을 함부로 대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감격이 우리에게도 있을까요?

 

우리나라를 못 살게 구는 이웃나라들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 이웃나라들에 대해서 열 가지 재앙을 퍼부을 때에 그 감격?

 

그러나 우리나라가 다 선민입니까?

또 우리나라를 못 살게 구는 나라들 중에도 선민이 다 흩어져 있기 때문에

출애굽 때와 같은 식으로 재앙이 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안에서도 선민과 애굽 사람이 구분되고 있는데,

우리는 도대체 이 구원의 감격을 어떻게 해서 얻을 수 있을까요?

 

선민이 섞여 있어서

민족 단위로 대규모의 하나님의 기적적인 재앙의 역사가 일어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태국이나 필리핀, 중국 오지에도 선교사님들이 들어가셔서

한 사람이라도 선민이 있을 것인데, 거기에 열 재앙을 퍼부으셔야 되겠습니까?

 

, 오늘 본문에서 구원의 감격이 없는 이유는

재앙을 못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애굽 사람들에게 임하는 재앙을 보면서

선민으로서의 의식과 자부심을 갖게 되고, 선민으로서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구원의 감격이 없는 이유는 재앙을 못 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고센 땅에 고요와 평안을,

장자가 죽는 애굽의 곡소리와 비교할 수 있었으니

그 감격을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고,

 

메뚜기 떼가 고센 땅을 제외한 전 지역을 휩쓸었으니,

고센 땅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그 구원의 감격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민 됨의 감격입니다.

 

 

적용 / 구원의 감격이 없는 이유

 

구원은 아담 이후에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재앙으로부터의 탈출이 구원의 시작이고,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부터 출재앙하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에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저주 속에서 재앙이 주어져 있는 상태인데,

그 재앙을 지금까지 아홉 가지 측면과, 남은 하나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설교를 하고 계시는 거예요.

아담 이후의 삶은 이러한 열 가지 재앙의 측면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데,

이스라엘은 눈앞에서 그 열 가지 재앙이 보이고 있기 때문에, 무척 감격했을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은 단순하게 출애굽을 위한 보조 수단이 아닌,

하나님께서 영적 진리를 선민들에게 설교하고 계시는 것이고,

선민들에게 구원받은 선민의 위치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시므로

이들에게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감격이 없어요. 그러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요.

 

단지, 구원의 감격만 없을 뿐인지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에서의 재앙으로부터는

빠져 나온 것은 아닐까? 구원의 감격은 없지만 재앙으로부터 빠져나온 것은 아니냐?”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믿는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실제로는 풍요와 다산을 바라고 있는데,

개구리 재앙이 어떻게 청산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그 개구리들이 덮인 침대 위에서 개구리와 더불어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피 재앙은 뭡니까? 내 마음 속에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바로 생명이고, 피가 생명을 상징합니다.

 

내가 사업이나 자식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서

그것 때문에 살고 잘 되면 웃고, 잘 못 되면 근심한다면 재앙을 벗어난 것이 아니기에

구원의 감격이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사업이 잘못 되더라도 기뻐할 정도로 큽니까? 아니잖아요.

 

구원의 감격이 없는 것이고, 구원의 감격이 없다면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처럼 구원의 감격은 재앙을 보는 가운데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재앙 속에 있는 것이 보이는 가운데

내가 재앙을 벗어났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감격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내 마음에는 현재 진행중인 이 편만한 재앙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위치 설정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부산에 가면

일본의 대마도가 보이는 위치가 있고, 안 보이는 위치가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지금 편만하게 현실로 있는데

그 재앙이 재앙으로 보이질 않는 이유는, 위치 설정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재앙이 재앙으로 보이는 위치는 어디입니까?

 

에덴을 상실하고 나서 에덴 밖에서의 삶이 재앙 가운데의 삶입니다.

, 에덴으로 들어와 있지 않으면 재앙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에덴의 삶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마음이 승천하신 주님 따라서 하늘에 올라가서 머물며,

이 땅에서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될 때에 그게 바로 에덴의 삶이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이 땅을 내려다보게 될 때에,

 

이 땅에서 일반 보통 사람들이 태어나서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재앙의 모습으로 보이게 됩니다.

 

내 삶에서 에덴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재앙이 보이지 않지만,

에덴이 회복되면 나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하는 바로 옆의 김 과장이

재앙 가운데 있는 것이 보이게 되고, 거기에서 감격과 동시에 사명이 생기게 됩니다.

 

재앙 가운데 있는 김 과장님을 출재앙을 시켜야겠다는 사명이 생기고

사명은 감격에서 나오는 것이고, 다른 것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으로 인한 난민의 처지라면,

에티오피아의 난민들의 처지는 난민으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모두가 다 식량난에 허덕여서 잘 사는 나라인 미국이나 일본 독일도

다 기근에 시달린다면 그것이 재앙이 아닙니다.

 

그냥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삶의 현실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재앙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스테이크도 먹고 쌀밥도 먹는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있지 않으면

이 땅에서의 삶이 재앙으로 보일 수가 없고,

이 땅에서 보편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재앙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선민으로 받게 된 구원의 감격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아세요.

오늘 본문은 이제까지의 재앙을 결산하고 마지막 재앙을 예고하면서

선민의 위치를 확정하고 있는데,

선민은 구원의 감격에 의해서 사는 사람들이고,

구원의 감격은 재앙을 봄으로 내가 재앙을 탈출했다는 것을 알고 감격해서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을 향해서 나처럼 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하늘에 가 있는 상태였고 이 땅에서 에덴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덴에서 볼 때에는 왕이고 총독이라도 그것이 재앙 가운데 있는 것임을 알았기에,

자기변호를 하라고 시간을 주는데도 자기 자신의 변호를 하지 않고

출재앙 하라며 예수를 전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꼭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구원의 감격을 위해서는 먼저 재앙을 반드시 봐야 하는데

지금 재앙을 보는 자들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재앙을 보면서 구원의 감격을 느껴야 하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민다운 선민이 되면 재앙을 볼 수 있게 되는데,

 

재앙을 못 보고, 재앙을 못 보기 때문에 구원의 감격이 없는 이유는

참 이스라엘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면 되었지만,

지금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브라함의 피가 흐르는 것처럼 마음속에 예수님의 피가 흘러야 하는데,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고백이 생활화되어 있고 그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어느 날 세례 받고 구원의 감동은 종적을 감춘,

옥한흠 목사님의 말씀대로 정형화된 습관적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과,

교회 안에서 오랜 시간을 머무는 자들이 선민이 아니고,

 

교회 안에 머물다 세상 밖에 나와서는 십자가를 잊고 사는 자들은

그야말로 교회라는 조직의 회원이고 멤버일 뿐이지 교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양이 아니고 선민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멤버와 교인은 다릅니다.

 

선민은 교회 밖의 일상생활 속에서 십자가를 생활화 하는 자들로,

그 마음과 생각의 모든 곳에서 주님의 피가 흐르면서

세상에 대해서 내가 죽었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해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로 올라간 마음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믿었으니 잘 했다고 하시며

성령을 보내주시고, 성령께서 감각이 되셔서 하늘과 하나님 아버지를 느끼게 해주시고,

 

하늘과 하나님 아버지를 느낄 수 있을 때에, 이 땅에서 이유가 없는데 기쁘고,

이유가 없는데 평강하고, 안정의 조건도 없고 기쁨의 이유도 없는데 평강합니다.

 

그런 평강의 상태에서 눈을 떠서 세상을 보니

모든 사람이 재앙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 감격하게 되는데, 거기에 감격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들이 재앙 가운데 있어서 고소하다는 게 아니라,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의 운명은 재앙 가운데 태어나서

재앙 가운데서 살고 몸부림을 치다가 메뚜기 떼의 공허를 느끼고,

 

모든 공허함이 생기게 되는 근본 원인인 흑암 재앙 속에서 살고,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 잃고 생이 끝이나버리고 마는데,

영원한 자기의 생명을 가지고 지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재앙이 보여야 되는데 마음이 천국에 가야만 보이게 됩니다.

 

내가 스웨덴 사람일 때에, 아프리카 난민들의 처지가 재난으로 보이게 됩니다.

스웨덴에서는 아무리 애를 많이 낳아도, 키우는데 돈이 들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다 해줘요. 우리나라에서 애를 못 낳는 이유가 하나 키우는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요?

 

둘이 먹고 살기도 힘든데, 애 하나를 낳아서 먹이고 입히고 교육을 시키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는데,

스웨덴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나라도 자식 재앙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을 때에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못하는 재벌 총수를 바라보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그냥 그 집에는 개구리가 우리 집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있는 것입니다.

그 개구리가 보이면 돈 한 푼이 없어도 감격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십자가 생활화를 꿈도 꾸지 않는 선민이 아닌 사람들의 돈 많은 상황이

전부 개구리로 보여야 하는데, 그렇게 보이질 않으니 무슨 감격이 있겠습니까?

이거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정리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절규하신 이유는, 교회 안에서 구원의 감격이 종적을 감춰서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성화 되고 있었던 당시의 그 교회입니다.

요즘이야 말이 많지만 그 때에는 모든 교회와 모든 목사님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그 교회에 하신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장자가 죽었을 때 애굽에서의 부르짖음이 전무후무할 것이라고 했는데,

교회가 습관화된 생활만 남았다며 목사님께서 소리치며 우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이야기해 주는 것처럼, 재앙을 봐야 구원의 감격이 있고,

나는 재앙이 없는데, 저쪽의 예수님 모르는 사람들은 재앙이 있다는 것을 봐야합니다.

 

그런데 재앙이 안 보이고 지금 이건O 씨가 부러우면 무슨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돈을 못 벌다 조금 벌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감격해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 학, 박사가 있어요.

 

믿지 않은 검사와 결혼 시켜서 사위로 얻은 것을 부러워하는데 무슨 감격이 있어요.

그것들이 다 파리 재앙이고 이 재앙이고 안정된 인프라에 내리는 그런 재앙인데도

그것이 재앙인 줄을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고 몸은 에덴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고 초대교인들이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이 땅에서 한 번쯤 해볼 만한 좋은 일이 많이 있는데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돈도 한 번 실컷 써봤으면 좋겠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봤으면 좋겠고,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학, 박사가 되어 봤으면 좋겠는데

그런 것들을 다 제쳐놓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거기 올라가신 주님께 내 마음도 묶어서 보내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늘로 마음을 택배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셨던 것처럼 하늘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나니 다 불쌍해 보이고 감격이 철철 넘칩니다.

저들은 재앙에 있고 나는 저들이 상상할 수 없는 하늘의 보화를 가졌다고 하는

이 격차로부터 사명이 생기는데, 오순절에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구원의 감격이 없었을까? 재앙을 못 보았기 때문입니다.

왜 재앙을 못 봤을까dy?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있지 않기 때문이고,

에덴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에덴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왜 마음은 땅에서 뒹굴며 땅에서 좋은 것을 찾고 땅에서 기쁠 수 있을까 하고

땅에 묶여 있고 땅에 얽혀있을까? 십자가를 생활화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면서 마음이 풀어지고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로 올라간 마음이 땅을 보면서 재앙을 보고,

재앙을 보고 있는 마음에서 감격이 생기게 되고,

감격이 생긴 마음에서는 사명이 생기면서

사람들을 출재앙 시키는 역사가 예수님 오실 때까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도 오늘의 사건이고 십자가도 오늘의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출애굽 때의 구원의 감격을 내 것으로 삼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아버지!

당연히 있어야 될 감격과 당연히 지속되어야 될 감격이 종적을 감춘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이 간단한 사실을 반복함을 통해 에덴을 회복하게 하시고

에덴에서 보이는 재앙을 통하여 감격을 갖게 하시고, 이 감격으로부터 사명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