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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위엄을 갖추고

LNCK 2015. 10. 9. 19:30

https://www.youtube.com/watch?v=gCWheMSlxWc

크게 위엄을 갖추고           행25:13~27

 

◑본문 해설

2년 전과 동일한 대제사장의 무리가, 2년 전과 동일한 거짓 모함으로 
2년 전과 동일하게 신임 총독 베스도의 법정에 바울을 고발한 덕분에 
바울은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로마 황제에 대한 상소를 제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황제에게 상소한다고 해서, 황제가 직접 재판하는 것은 아니고, 
황제 직속의 최고 법정에서 상소를 다루었는데,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대개의 경우에 재판은 공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배석자들과 상의한 뒤에, 바울의 상소를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제국의 수도 로마의, 로마군의 보호하에 이르게 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황제에게 상소한 사람은, 황제의 법정에 서기까지, 로마 제국이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제사장 무리의 되풀이된 고발이, 역설적이게도 바울에게 
암살단의 살해 위협에서 벗어나서, 가장 안전하게 제국의 수도 로마에 이르는 길을 
제공해 준 셈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상소를 받아들인 베스도 총독은 
그로 인해 새로운 책무를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바울의 상소와 관련해서, 황제의 법정에 제출할 보고서 혹은 사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25:13절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와서'

며칠 후에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의 분봉왕 아그립바 2세가 
왕비 버니게와 함께 유대지방의 신임 총독 베스도를 문안인사 하기 위해서 
가이사랴까지 직접 찾아왔습니다. 

헤롯대왕의 증손자였던 아그립바 2세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 왕이었음에도 
예루살렘 성전 감독권과 대제사장 임면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을 아나니아에서 이스마엘로 교체했던 사람도, 바로 아그립바 2세였습니다. 
왕비 버니게는 아그립바 2세의 여동생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자신의 숙부를 포함해서 2명의 남자를 거쳤던 버니게는 
본문에서 오빠와 불륜에 빠졌다가, 이후에는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후에 로마제국 황제가 된 
티투스 장군의 정부가 되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뒤에, 베스도 총독이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25:14~16절 '여러 날을 있더니 베스도가 바울의 일로 왕에게 고하여 이르되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내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고소하여 정죄하기를 청하기에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베스도 총독이 부임 직후 예루살렘 현지 시찰에 나갔을 때, 
그곳의 대제사장 무리가 베스도 총독에게, 바울을 고발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 무리는 베스도 총독에게 바울을 정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있지도 않은 바울에게, 유죄를 선고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총독 베스도는, 피고에게 변호할 기회도 주지 않고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은 
로마법에 어긋남을 내세워서 그들을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25:17~21절 '그러므로 그들이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왔으나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내가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리할는지 몰라서 바울에게 묻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일에 심문을 받으려느냐 한즉  
바울은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 주기를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까지 지켜 두라 명하였노라 하니'

대제사장 무리는 가이사랴까지, 총독 베스도를 따라가서 바울을 또 다시 고소했지만 
그들은 바울이 로마 제국의 실정법을 어겼다는 구체적인 혐의나 증거는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강조한 것은, 그들의 종교법과 예수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 지방에 갓 부임한 신임 총독 베스도에게 
유대인의 종교법과 예수 부활은 낯선 문제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확인했던 것처럼, 베스도 총독은 바로 그 상황 속에서 
바울을 고발한 대제사장 무리의 입장을 배려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자신의 입회하에 
유대인 최고의 종교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받을 의사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총독의 제안을 거절한 바울은 황제에게 상소했고, 
총독 베스도는 바울의 상소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잘 된 일이었죠)

베스도 총독이 이렇게 바울에 대해서, 상세하게 아그립바 왕에게 이야기 한 것은,
바울의 상소와 관련해서
황제의 법정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유대인의 종교법을 잘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의 조언을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그립바는 절반 유대계 이기 때문이죠)

25:22~23절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나도 이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베스도가 이르되 내일 들으시리이다 하더라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총독 베스도로부터 바울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그립바 왕은 
자신도 바울의 진술을 직접 들어보기를 원했고, 
총독은 즉각 이튿날에 바울에 대한 청문회를 개최했습니다. 

아그립바 왕과 왕비 버니게, 
아그립바 왕을 수행한 그의 대신들, 총독 베스도와 천부장들, 
그리고 가이사랴 시의회 의원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바울이 불려 왔습니다. 

그리고 베스도 총독이 바울에 대한 청문회를 개최하게 된 이유를 밝혔습니다. 
25:24~27절 '베스도가 말하되 아그립바 왕과 여기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내가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상소한 고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나이다
  
그에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자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세웠나이다
그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 하였더라'

베스도 총독은 자신이 바울을 심문해 본 결과 
그가 로마법에 어긋나는 죄를 범한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먼저 분명히 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에 대해서 청문회를 개최하는 것은 
바울의 상소와 관련해서, 황제의 법정에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청문회 회장에서 바울이 언급한 진술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행26장)부터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크게 위엄을 갖추고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내용 본문 23절의 증언입니다. 
25:23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접견 장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아그립바 왕과 왕비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청문회장에 나타났습니다. 
우리말 '위엄'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판타시아'는 과식, 허식을 의미합니다. 

분봉왕 아그립바가 유대지방 신임 총독 베스도와의 첫 대면을 위해서 
가이샤라까지 찾아간만큼 
신임 총독 앞에서 아그립바 왕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의도적으로 과시하려 했겠습니까? 

왕복 중에서도 가장 위험스러운 자주색 왕복을 입고 
머리에는 머리띠 모양의 금왕관을 썼을 것입니다. 

왕비 버니게도, 아그립바 왕의 과시에 맞추어서 
자신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왕비복과 왕관으로 자신을 치장했을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을 수행한 그의 대신들도, 화려한 예복을 착용했을 것입니다. 

그들을 맞이한 베스도 총독도, 대 로마 제국의 총독임을 나타내는 
주홍빛 예복을 입었을 것입니다. 

당시 가이사랴에는 로마군 5개 군단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 5개 군단의 우두머리들인 5명의 천부장들도 
빛나는, 번쩍이는 천부장의 제복을 입고 나타났을 것이고, 

시중의 높은 사람들, 즉 가이사랴 시의회 의원들도 
아름다운 예복을 입고 나타났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청문회장은, 저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의 
자기 과시 경련장이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바울이 불려 나갔습니다.

▲지난 2년 동안 가이사랴의 헤롯 궁에 구금당해 있던 바울의 옷차림은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화려한 옷차림에 비교한다면, 누더기 같지 않았겠습니까. 

(2년 동안 구금 당해 있던 바울의 얼굴은 또 얼마나 초췌했겠습니까. 
수염이나 머리인들 제대로 가다듬을 수 있었겠습니까) 꽤 자유가 있었으므로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의 외모는, 키가 작았고, 눈썹은 일자였으며 
매부리코에 안짱다리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보기에 민망할 정도의 외모를 지닌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 보잘 것 없는 바울의 몰골은, 
화려한 옷을 입고 저마다 자신을 과시하는 본문의 사람들과 비교하자면 
마치 걸인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구별된 눈과 마음으로
이 청문회장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십시다. 

저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과 
그들 앞에 불려나온 초라한 몰골의 바울 가운데... 누가 정녕 더 아름답습니까? 
누구에게서 향기가 배어나오고 있습니까? 
누구의 삶이 우리를 감동시킵니까? 

우리가 과연 본받기 원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보잘 것 없는 몰골인 망정, 바울 아닙니까! 

화려한 옷을 입고 저마다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그들의 삶을 한꺼풀씩 벗겨낼수록 
추악한 욕망의 찌든 악취만 진동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몰골일 망정, 바울의 삶은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생명의 향기가 더 짙게 스며나오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이 밑가지의 삶을 산 반면에, 
저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신을 과시하던 본문의 사람들은 
윗 가지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과 사명에 충실했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사명에 역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무는 생명의 질서와 법칙을 거스르는 법이 없습니다. 
오래되고 강한 가지일수록, 밑 가지가 되고 
맨 윗 가지는, 가장 나중에 나온 가장 여린 가지의 차지가 됩니다. 

해가 바뀌면, 새해에 새로 나온 가지가, 다시 맨 윗가지(맨 윗자리)가 됩니다. 

나무의 수령이 높아질수록, 나무가 더 청정한 생명의 그늘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오래되고 강한 나무 가지들이, 이처럼 밑 가지가 되어서 (낮은 자리에 위치해서)
여리고 어린 가지들을 윗 가지로 떠받쳐주는 
생명의 질서와 법칙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오래되고 강한 가지들이, 자기가 오래되고 강하다고 해서 
윗자리를 차지하는 윗가지들이 되려 하면 
나무는 그 가지들의 무게에 의해 꺾여 죽고 말 것입니다. 

또 새해가 되었는데도, 작년의 맨 윗가지가
새해에도 여전히 맨 윗가지 그대로 있다면 
그 나무도 죽은 나무입니다. 

죽은 나무는 결국엔 썩어져 없어질뿐 
다시는 생명의 그늘을 제공해 주지 못합니다.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윗 가지가 되려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디에서든 자신이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주장하면서, 윗 가지로 군림하려 한 적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복음의 증인으로서, 복음 위에 사람들을 세워주는 밑 가지로 일관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는 곳에는, 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고, 
비록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몰골일 망정, 그의 삶 속에서는 생명의 향기가 진하게 스며나왔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자기 자신을 과시하던 본문의 사람들은 
윗 가지를 지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높은 윗가지가 되려 하거나, 
현재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윗 가지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고수하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대립, 분열, 다툼은 
모두 윗 가지가 되려는 사람들로부터 야기됩니다

가지가 위에 굴림하는 윗 가지로 계속 남아있게 되면, 
나무의 생명은 왜곡되고, 부정당하고, 죽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미 나무의 질서와 법칙에서 벗어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울처럼 밑 가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달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주의입니다. 
특히 내년 2017 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인지라 
한국 교회에서는 벌써부터 개혁이 화두입니다. 

누구보다도 목회자들이 먼저 주님 앞에서 부단하게 자기를 개혁해 가야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어서,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도 없습니다. 

교인들 역시 주님 안에서 자신을 스스로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처럼 윗 가지가 되려는 자기를 부인하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밑 가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신을 과시하던 본문의 세도가들처럼 
윗 가지가 되려는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교회와 사회를 허물어뜨리기 마련이지만 

비록 보잘 것 없는 몰골일 망정 
바울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밑 가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교회도, 사회도 청정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좋은 교회는 밑 가지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그래야 생명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교인들의 신앙이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깊은 나무로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5개의 성가대가 있습니다. 
그 5개의 성가대를 위해서 5명의 지휘자들, 4명의 오르가니스트와 2명의 피아니스트들 
그리고 솔리스트 들이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그분들에게 사례비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그분들 역시 다른 교우님들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로 
교회를 위해, 교인들을 위해, 주님을 위해, 자원봉사하고 있습니다. 

요즘 2016 한국 교회에서 지휘자와 오르가니스트는 매달 사례비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 엄청난 기득권을 포기하고, 교인들을 위한 밑 가지로 교인들을 섬긴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봉사인지 모릅니다. 

제가 신학교 가기 전에 사회생활을 할 때, 
당시에 출석하던 교회의 재정을 책임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 재정을 관리하면서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 중의 하나는 
부흥 강사, 그리고 성가대 지휘자, 피아니스트, 솔리스트에게 사례비를 지불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거의 모든 부흥회의 주제는 동일했습니다. 
부흥 강사들은 오직 주님을 위해,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온전히 바치라고 강조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렇게 설교한 부흥 강사는, 부흥회가 끝나면, 의례 막대한 금액의 강사비를 받아갔습니다. 
불과 며칠 설교하고, 당신이 목회하는 교회의 한 달 분 사례비를 
강사비로 챙겨 간다는 것은,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가 된 후에 지금까지, 타 교회나 외부 모임에서 집회를 인도하거나 
설교를 하고 사례비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말씀을 깨닫는 은혜를 그저 주신 것은 
그 은혜로 저더러 돈을 벌라 하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그 은혜를 
다른 사람과 그저 나누라 하시는 명령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성가대 지휘자, 피아니스트, 솔리스트 들에게 사례비를 지불하는 것도 
제가 이해하지 못하기는 매 한 가지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찬양을 담당하는 레위인을, 회중들이 생계를 책임져 주었던 것은 
그들은 문자 그대로 풀타임 사역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도, 단지 전문 음악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지휘자, 피아니스트, 솔리스트들이 사례비를 받아야 한다면 
교회 장식을 위해서 봉사하는 전문 미술인도, 
교사로 봉사하는 전문 교육인도, 
주일 봉사 대가로 돈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1988년에 주님의 교회 개척 목사로 목회를 시작한 저는 
첫 번째 성가대 지휘자와 반주자에게 사례비를 받지 말라고 간절한 심정으로 당부했습니다. 

제가 자칫 크게 오해받을 수도 있는 그런 당부를, 그 청년들에게 했던 것은 
그 두 청년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청년들의 봉사가, 하나님께 진정한 봉사로 드려지기를 원했습니다. 
단지 전문 음악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세상에서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주일 봉사를 돈과 맞바꾼다면, 
하나님께서 이미 대가를 챙겨 버린 그런 봉사를, 과연 열납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교회가 전임 교역자들에게 사례비를 지불하는 것은 
전임 교역자들은 세상의 직업을 갖지 않고, 교회를 위해 풀타임으로 사역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풀타임 교회 음악 사역자로 봉사하지 않는 한, 
사례비를 받지 말라고 간곡하게 당부했던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그 두 청년들은 제 제안을 기꺼이 수용해 주었습니다. 
그 청년들 덕분에 제가 주님의 교회 10년 목회를 하는 동안에 
5개 성가대의 지휘자, 피아니스트, 솔리스트들도 
모두 교인들을 위한 밑 가지로 교인들을 섬기며 아름답게 봉사했습니다. 

당시 그 청년 지휘자가, 지금 우리 교회 창립 이듬해부터 
우리 교회의 음악감독과 2부 성가대 지휘를 맡고 있는 박집사님입니다. 

박집사님이 우리 교회 철학과 정신에 동의하는 지휘자,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 
솔리스트들을 영입함으로써, 우리 교회에서도 그분들이 
교인들을 위한 밑 가지로서 교인들을 아름답게 섬기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저와 연관을 맺은 
적지 않은 한인교회 지휘자와, 오르가니스트들도 
우리 교회처럼 사례비를 받지 않고, 교인들을 위한 밑 가지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약 30년 전에 한 청년이, 한국 교회에서 당연시 하던 기득권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부여해 주신 달란트로 
교인들을 섬기기 위한 밑 가지로 살아가는 삶을 실천했을 때 
그 밑 가지에 뒤이어, 계속 아름다운 새로운 밑 가지들이 이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창립 초기부터 '밑 가지 됨'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해 왔습니다.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분란은, 따지고 보면 
교인들이 교회밖 세상 사람들처럼, 윗 가지가 되려 하는데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전문적인 달란트를 받은 사람일수록 
신앙 연륜과 연령이 깊어지고 높아질수록 
더더욱 다른 사람을 높이기 위한, 밑 가지로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가 세속화 되어버린 이 암울한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삶으로 실천해야 할 개혁 정신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우리 교회 상임위원회에서는 
우리 교회가 창립 초기부터 추구해왔던 정신, 
즉 교회 봉사자의 봉사 정년을 만 70세로 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결의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사람들 눈에 보이는 봉사의 정년을 만 70세로 명문화 한 것입니다. 

그 결정의 토대 역시, 교우님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역사가 오래된 교회에는 20~ 30년씩 혹은 그 이상을, 한 부서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거의 평생을 한 부서에서 수고하고 애써 온 봉사자들인데 
바로 그분들이, 다른 사람들의 봉사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분들 자신들도 모르게, 그분들이 윗 가지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평생을 수고하고 헌신한 우리의 봉사가 
그렇게 비성경적으로 끝나서야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봉사는 자아실현이나 자기 가치 구현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님을 본받은 자기 희생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희생의 정점은, 다른 사람을 위한 밑까지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마음껏 봉사할 수 있도록, 든든한 밑 가지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봉사, 
젊은이들이 할 수 없는 봉사, 
젊은이들이 참여할 수 없는 시간대의 봉사에는 정년을 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를테면 토요일에 교인들이 보지 않는 가운데 
모든 예배 처소를 청소하는 관리팀의 봉사, 
-상을 당한 교인들을 찾아가서 위로해주는 상조팀 봉사, 
-그분들을 위해 조가로 봉사하는 조가단(성가대) 등 그런 봉사에는 임기가 없습니다. 
그런 봉사야말로 밑 가지 됨의 아름다운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연도별 장례 건수를 보면 
2011년 90건 
2012년 96건 
2013년 120십 
2014년 132건 
2015년 115건 
2016년 올해에는 지난주까지 134건입니다. 

작년 한해를 제외하고, 매해 장내 건수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한 달에 평균 14건의 장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조팀의 봉사자들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백발의 어르신들이 상을 당한 교인들을 찾아가서 
등을 쓰다듬어 주며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백발의 어르신들이 장례식장에서 조가로 봉사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밑 가지의 삶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장성한 믿음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밑 가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밑 가지가 되어주는 어른들이 있는 곳에는, 개혁은 저절로 수반됩니다. 

교회에서마저 밑 가지의 삶을 훈련하지 않는다면 
가정에서 밑 가지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윗 가지를 고수하려 하면 
어른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노인이 될 따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심에도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희생하시어 
우리를 위한 생명을 밑 가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생명을 밑 가지 위에서 이렇게 생명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녕 그분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신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어느 가지를 지향해야 할 것인지, 
윗 가지인지, 밑 가지인지.. 
어느 가지의 삶을 살아야, 주님의 짧지 않은 손이 우리를 책임져 주실 것인지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