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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LNCK 2015. 11. 28. 21:25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1:22-27, 18:9-14, 6:6-8           15.11.22 출처

Without God Before God       *원제목 차라리 바리새인과 세리

 

 

종교적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감옥 속에 있었습니다.

 

20세기 교회와 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신학자 겸 목회자를 꼽으라 한다면

저는 첫 손가락에 본회퍼 목사를 꼽을 것입니다. 1906-1945

 

우리는 본회퍼 목사하면 히틀러에게 항거하다가 39살의 나이에 순교한

기독교 행동가 중의 한 사람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회퍼 목사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깊은 영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때로는 예언자와 같고때로는 깊은 통찰력을 지닌 현자와 같고,

때로는 인간성의 깊이를 이해하는 수도사와 같고,

때로는 인간과 사회 문제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예리한 신학자와 같습니다.

 

그는 독일교회가 국가와 민족에 함몰되어

히틀러를 독일을 구원할 구원자 칭송 하면서 타락된 길을 걷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전쟁놀이할 때 독일병정 흉내를 내면서

하일 히틀러” 하고 경례를 한 말이 바로 구원자 히틀러로 칭송하는 말입니다.

 

타락한 독일교회가 예수님을 구원자로 본 것이 아니라

히틀러를 독일을 구원할 인물로 여긴 것입니다.

 

거룩한 일을 따라가야 할 교회가 범죄자를 응원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범죄를묵인하고 동조했습니다.

 

그는 교회공동체도 자신들의 이익 앞에서 집단적인 범죄를 범하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는 이것은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니라고 선언하면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고백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원래의 자리 섬김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을 말하면서

교회갱신을 말하고자연스럽게 나치에 저항하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결국 본회퍼 목사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나치가 무너지기 3개월 전에 순교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는 기간 동안 여러 편지와 저작들을 남겼는데

지금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특히 1944년 테겔이라는 감옥에서의 경험을 편지로 보냈습니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서 수많은 죄수범부들과 접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강단에서 외치는 소리가 얼마나 공허한가를 깨달았습니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내용들은 보통사람들의 세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생활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받고교회에 등록하고열심히 헌금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한 가운데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는 가히 감탄이 나올 정도로 경건하고 엄숙하고 예의가 바릅니다.

일거수일투족은 거룩함이 몸에 밴 듯한 격식을 따르지만

형식을 빼면 아무 것도 세상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 살인절도잡범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그가 전에 상상했던 것처럼 질적으로 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나름의 성실성존엄성그리고 남을 위하는 인간애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조금도 자기 양보나 희생을 하지 않습니다.

비록 이들은 빵 한 조각을 위해 죄를 지었지만어떤 일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이라도 아낌없이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종교적 경건을 갖추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들을 감옥에서 만났습니다.

 

히틀러가 명령한 유태인 인종 학살을 독일교회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태인이그 죗값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석했습니다.

 

본회퍼 목사는사람 죽이는 일을 정당화하는 거룩한 교회 보다

훨씬 더 도덕적인 죄인을 감옥에서 만난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던 믿음을

세리와 창기에게서 발견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이 없는 것을 발견했고,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때 그 사실을 깨닫고 고백교회 앞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에 포함 된 말 가운데 유명한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다시 말씀 드립니다. *Without God Before God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모순되는 말 같지만 너무도 심오한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말하는 경건한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속에도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수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이 모순을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그래서 본회퍼 목사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라는 뼈 있는 말을 한 것입니다.

 

문제는 본회퍼만 이런 모순을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일찍이 예수께서도 가장 종교적으로 자부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하나님이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종교적인 사람으로부터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들이

훨씬 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않는 사람이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한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 속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반면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죄인의 대명사인 세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종교적인 율법으로 삶을 가득 채우는 사람,

경건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가장 종교적인 사람 속에 하나님 없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죄인의 대명사인 세리의 마음 한가운데 하나님이 계신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본회퍼목사가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종교적이지는 않지만그 삶의 내용을 보면

가장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 설명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한다고 자부하지만

하나님 없는 사람과 하나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마음 한가운데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세리를 비교해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조건으로 비유하는 것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장 깊은 속마음이 드러나는 기도로써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워놓습니다.

 

왜 하필이면 기도의 내용으로 두 사람을 비교했을까요?

 

사실 기도한다는 것은 가장 깊은 마음의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은 마음의 밑바닥까지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성을 알 수 있는 기도로바리새인과 세리의 마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한 사람은 당대에 지성인이요,

종교인이요사회적으로 상류층에 속하는 바리새인입니다.

경건하게 산다고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만일 천국에 단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면 한 사람은 서기관일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리새인일 것이다.”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예수님 당시 세리가 어떤 취급을 받았느냐 하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드렸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 남자들이 세 가지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혈통으로는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을,

-성별로는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을,

-직업으로는 세리가 아닌 것을,

이렇게 세 가지 감사 기도를 매일 드렸습니다.

 

로마의 식민시대를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 세리는 천대받는 죄인 취급의 대명사입니다.

여자의 직업 중에는 몸을 파는 여인과 남자의 직업 중에는 세리를 가장 경멸 했습니다.

 

세리는 죄인이라도 그냥 죄인이 아니라 온 국민의 지탄을 받고 매국노요,

로마의 앞잡이 죄인입니다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우리나라로 비유하자면 일제 강점기의 고등계 형사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비교의 감이 되지 않는 바리새인과 세리,

존경의 대상인 사람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과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비교할 감이 되지 않는 아주 정반대의 사람의 등장시켜

하나님은 과연 누구의 기도를 들으시는가를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으실 것 같습니까?

겉으로만 본다면 분명히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 상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은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경건한 바리새인의 기도를 듣지 않고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고 그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종교적 경건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종교적 경건만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외적인 경건만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면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구약시대에 예언자들이 외쳤던 피맺힌 절규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드리는 희생제사만으로 만족하시는 분도 아니요,

율법조항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천천의 수양도 아니고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이 아닙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 중심 한가운데 하나님을 모시고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형식과 전통이 아니라 의와 인과 신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말하지만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는 신앙인들이 가장 큰 덕목으로 경건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1:27

 

신앙의 가장 심오한 경건은 사람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랑하는 것 잃어버리면종교는 형식이 됩니다교리는 독선이 됩니다.

 

오늘 바리새인이 바로 사람 사랑하는 것을 잊어버리고종교적 형식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행위에서 나오는 인간의 의상대적 의만 가지고

나는 경건하다.”고 믿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오늘 9절 말씀에 보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의롭다고 믿었습니다하나님이 의롭지 사람이 어찌 의로울 수가 있습니까?

때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는 저 사람보다는 내가 의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 앞에 서고 교회 앞에 설 때에는 상대적인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절대적 의를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로운 분은 누구입니까하나님입니다.

의로운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의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받아 주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서 이 사람은 자기의 의로움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간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그치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9절 말씀에는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자동으로 다른 사람을 멸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바리새인들이 바로 자기를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세리와 창기와 일반 백성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저들과는 다르고저들과는 절대로 상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신자는 하나님을 의롭다고 믿고 나가야 기도 응답이 있고,

하나님의 의로움을 간구해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사람의 의로움을 주장하면 교회의 영적인 질서가 무너집니다.

사람의 의로움을 내세우면 성도들의 관계도 갈라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을 주장해야 신자다운 신자가 될 수 있고,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은 왜 자기를 의롭다고 믿었습니까?

그는 하나님과 앞에 설 때에 도덕적인 기준으로 판단했습니다.

11절에 보면 판단했습니다다른 사람의 됨됨이도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도덕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저는 남의 것을 등쳐먹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저는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저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저는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저는 저 세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잠시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 생각 한번 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이런 기도를 듣고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아마 저는 너 잘났다”,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말 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사람은 하나님의 판단에 맡긴 것이 아니라자신의 판단을 믿고 있습니다.

도덕적 기준으로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기도가 막히고사람들과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사람이 잘 하면 얼마만큼 잘 하고잘못하면 얼마만큼 잘못하겠습니까?

 

또한 바리새인은 종교적인 행동으로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12절에 이 사람은 율법의 조항을 지키고

외적인 종교적 행위를 잘 지키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갔습니다.

 

하나님저는 남들은 일주일 한번 금식하고 하는데 저는 두 번 합니다.

하나님저는 소득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립니다.

이뿐만 아니라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립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자기의 종교적인 행위를 가지고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덕적 기준으로 종교적 행위의 잣대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줄기차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도덕적 기준과 종교적 행위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면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옆집 아저씨는 누가 착한가누가 흠이 없는가이런 눈으로 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아들다운 아들이 제일입니다.

 

허물이 있어도 아버지의 아들입니다죄가 있어도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오늘 바리새인들은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모르고

이웃집 아저씨 앞에서처럼 도덕과 종교적 행위를 앞세워 하나님 앞에 나간 것입니다.

 

여러분그리스도인이라면 토색하지 말아야 하고도둑질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주일 성수도 해야 합니다소득 십일조도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행한다고 해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근본적으로 바리새인이 잘못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들은 하나님이 기준이 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 속에 강조된 것은 하나님입니까자기입니까?

나는 불의하지 않았습니다나는 이레 두 번씩 금식합니다.

나는 세리처럼 불의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는 것입니다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또 바리새인의 기도 속에는 진정한 참회가 하나도 없습니다.

참회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자기를 바로 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영혼의 부딪힘이 없는 사람이

어찌 깊고 깊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의 부족함을 모르는 사람이 열길 물속보다 더 깊은

자신의 인간성을 어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바리새인의 기도 속에는 참회가 없습니다고백이 없습니다.

자기의 죄인 됨에 대한 부딪힘이 없습니다그러니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니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나 세리는 어떠했습니까그는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죄인인 줄 분명히 알았습니다.

자기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사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13절에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기도가 하나님의 의로움을 아는 기도입니다이 기도가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기도입니다이 기도가 응답받는 기도입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세리의 기도를 호흡에 맞추어서

주 예수여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2천년 동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짧으면서 가장 심오한 기도가

주 예수여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 안에 우리의 모든 간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까지 다 들어 있습니다.

 

세리가 죄를 지은 것남의 돈을 떼어먹은 것동족의 피를 빨아먹은 것은 분명히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습니다하나님의 자비를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세리보다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몰랐습니다이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가장 종교적이어서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자부했던 바리새인의 마음 한가운데에 하나님 없었습니다.

죄인이라 비난받아 하나님마저 버렸다고 생각하는 세리의 마음 한가운데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죄인을 사랑하는 길이

바로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종교적 행위에 매이지 말고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전적으로 용서함을 받은 마음으로 순간순간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종교적 허위의식으로 포장된 자신을 깨트리고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사는 비결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그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여

하늘로도 땅으로도 막힘이 없는 형통한 삶을 살아가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