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 시대의 신앙 삿2:6~10 16.01.10.설교 스크랩, 출처
※혹시 짧게 보실 분은 마지막에 '▲3. 믿음의 롤 모델이 필요합니다'부터 끝까지 보세요.
◑믿음의 3세대
여호수아 세대는, 가나안 정복을 했던 세대 여호수아 세대가 한 세대와 두 세대를 내려가면서
신앙의 계승에 실패가 오게 되고, 그것이 사사기 시대를 맞게 됩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참혹하고 어두운 때였습니다.
끊임없이 외세에 시달리게 되는 어려움의 반복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세대계승은 아주 중요합니다.
본문 삿2:7절과, 10절에 여러 세대가 언급되고 있는데,
-첫 번째 세대는 여호수아 세대이고
-다음은 여호수아와 함께 활동을 하고, 그 뒤를 곧 이은 세대가 나옵니다.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의 세대죠.
-세 번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입니다.
본문 삿2:7절에 보면,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믿음의 1세대.
여호수아 세대는, 그야말로 전 과정 속에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가나안을 건너고, 여리고가 무너지고, 또 아이성을 함락하고,
정복의 모든 과정속에 하나님의 생생한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도무지 건널 수 없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간섭과 도우심속에 가나안을 정복하고,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곧 1세대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감속에 뜨겁게 믿음 생활을 했던 세대입니다.
우리 한국도 개척기 시절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1세대죠.
이 시기에는 어렵긴 했지만, 간증이 참 많았습니다. 한국교회 개척기는 눈물과 땀의 역사입니다.
교회 하나 세우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는다면 그 집안에서 축출될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887년에 선교사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한국에서 1년동안 세례받은 사람은 25명이었습니다.
1888년에 한국에서 사역하던 외국 선교사가 자국에 보낸 기도편지에 이런 기도요청이 나옵니다.
'올해 이 나라에 30명의 세례자를 허락하옵소서.'
이렇게 한국교회의 출발은 매우 미미했습니다.
한 해 한국 전 민족에 통털어 선교사들이 기도했던 제목이, '30명의 세례자를 주소서.'
그러다가 1907년에 일어났던 평양의 부흥운동으로 역사의 전환점이 일어납니다.
한국 교회에 큰 부흥기가 왔습니다.
질적, 양적 성장이 가파르게 1907년 평양 대부흥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서 31운동을 기점으로 일제의 핍박과,
625전쟁을 거치는 동안에 한국교회는 매우 어려움을 겪게 되고, 많은 순교자들을 낳게 됩니다.
이 시기에 믿음의 선배들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일제하/공산주의 하에서도 생명을 바치며
신앙의 정절을 지켜왔습니다.
바울사도가 겪었던 것 같은 그 환란과 고난의 가시밭길, 십자가의 길을
우리 믿음이 선조들이, 한국초창기 교회가 겪었습니다.
그 당시는 교회에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감투가 아니고 십자가의 길 그 자체였습니다.
한국교회에 아름다운 새벽기도의 전래는,
우리 선배들이 얼마나 신앙적으로 몸부림쳐 왔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뭐 잠이 없어서 새벽기도를 했던 것이 아니고, 그렇게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던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그런 열정과 순교적 신앙인들이 오늘 한국교회를 낳았습니다.
거기에는 정말 땀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고, 또 피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1세대들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믿는 신앙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정도의 순교자들이
우리 한국교회에 기라성같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믿음의 2세대>가 등장합니다.
삿2:7절에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의 세대입니다.
여호수아 장군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세대가 나왔습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이끌던 역사에 막이 내리면, 그 다음에 또 새로운 막이 오릅니다.
삿1:1절은 ‘여호수아가 죽은 해에’로 시작합니다. 한 시대를 이끌던 지도자가 죽었다는 것은,
그 지도자가 이끌었던 그 시대의 마감을 포함합니다. 지도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이죠.
여호수아의 뒤를 이어 다음 세대를 이끈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는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일선에 서지는 않았지만, 곁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지켜 본 사람들이었죠.
그들은 아주 그 생생한 기적의 현장들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영광의 빛의 찬란함이 식지 않은 때였죠.
그래서 그 힘으로 하나님을 여전히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대의 특징이 뭐냐면, 여호수아 세대와는 좀 달랐습니다.
여호수아의 세대에 있었던 감동과 헌신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져 가고 있는 세대.
그들이 신앙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는 문제가 없었어요. 신앙을 잘 지키고 있었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호수아 세대와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이전 세대만은 못했다는 것이죠.
대체적으로 2세대는 뜨거움 보다는, 이전의 신앙을 유지하는데 그칩니다.
이것이 중간세대가 보여주는 특징입니다.
▲믿음의 3세대
그런데 그 다음단계가 문제입니다. 그 지키는, 유지하는 정도의 신앙이
그 다음 세대에 가면 10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세 번째 세대죠.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삿2:10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
그 다음 세대가 아니고, 3세대, 즉 다른 세대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특징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 무서운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물론 종교적인 제도와 제사들, 형식들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외형적인 부분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중요한 대목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 이것이 사사기 혼란의 이유였습니다.
이 비극적 세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일어난 것은, 시간적 갭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불과 얼마전에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들이, 벌써 잊혀진 역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던 그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부모세대가 겪었던 가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자녀들이 흥미롭게 듣지 않습니다.
다 귀찮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에게 홍해 이야기, 여리고 성 승리의 감격을 아무리 이야기해 줘도,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이런 현상이 매우 짧은 기간안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3세대를 보면서, 우리 가정적으로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가정이던지, 복음의 1세대는 뜨거운 감격, 간증,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세대만 넘어가도, 부모의 뜨거웠던 신앙은 희미해져 버리고,
겨우 교회에 출석 정도로만 명맥을 유지해가는 세대가 일어납니다.
연결이 아니라, 단절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단절은 배교와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척초기에는 간증이 넘치고 순수한 헌신과 눈물이 넘칩니다.
어느 것 하나 귀중하지 않는 순간이 없을 정도로, 벅찬 감정이 공동체에 흘러넘칩니다.
그러다가 성장기가 오면, 사람들은 이미 갖춰져 있는 구조안에서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하는 그룹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많고, 뜨거운 분위기에 따라가노라면, 큰 문제가 없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땀 흘릴 일도, 눈물 흘릴 일도, 헌신할 일도 없는
밋밋한 신앙생활을 하는 세대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역사속에 굳어지고 헌신도 열정도 사라져버립니다.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달릴 기도의 제목도, 그럴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교회는 형식화되고 전통적인 교회가 되어버립니다.
◑쇠퇴냐/재도약이냐, 전환기에 선 한국교회
한 교회가 일어나고 쇠퇴하는 과정이 불과 50년도 걸리지않습니다. 100년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교회사를 통해서 입증된 것입니다.
한국교회개척기에는 믿음의 선배들의 피눈물나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사에 유래없는 성장을 계속해 왔습니다.
세계교회는 한국교회의 경이적 성장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1970~80년대 여의도 광장에서 1백만이 모여서 밤을 새워서 기도했던,
거기서 수 없는 선교사들이 자원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때 한국교회는 매우 뜨거웠습니다.
서울과 같은 도시에 밤하늘을 수놓은 것은 교회종탑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교회안에 이상한 기류가 일어났습니다.
1990년대 들어와서 한국교회 성장에 둔화가 오면서, 정체기를 거쳐서
지금은 침체기를 지나서, 쇠퇴기에 이르렀다고들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요? 한국교회가 이제 피우려다만 꽃인가요?
아니면 다시 한 번 회복과 부흥이 이 민족교회 가운데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요?
이 전환기에 오늘 우리가 서 있습니다.
▲많은 교회학자들과 미래학자들은 "지금 한국교회 10년이 골든타임"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요? 역사를 통해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사사기를 보면서, 귀중한 레슨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사기에는 실패의 역사의 반복입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사사기의 그들은, 그 역사속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혹자의 얘기처럼,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패의 역사를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사사기 역사를, 우리가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사사기를 오늘 아주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서울교회 개척과정에서 한 몇 개월동안, 사사기를 서울의 화요모임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왜냐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사사기와 비슷하게 재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지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모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계승되는데 실패했다는 겁니다.
주일학교가 현저히 줄었습니다. 주일학교가 아에 없는 교회도 많습니다.
부모의 신앙이 자녀에게 전수되지 않는 일이, 교회 안의 중직자들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호주에서 경험한 것은, 앞 세대가 세운 교회당들이, 많이 팔리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한국에서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예배당이 팔리는 것을 저는 이전에 본 적이 없었습니다.
호주의 도시마다 중심부에 가면, 아주 큰 교회들, 너무 잘 지었습니다.
대리석으로 지어서 화려하고, 스테인드글라스에 너무 멋지게 지어진 교회 건물.
신앙의 앞선 세대들이, 헌신하고 귀중한 헌금을 내어서 정성껏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당이, 다음 세대에 술집이나 상가로 팔리고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일부가 아니라 많습니다.
지금 유럽은, 온 세계에 선교사를 보냈던 영국은, 이슬람이 점점 장악해 가고 있습니다.
사실은 유럽 전체가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교회당이 매물로 나오면, 막바로 무슬림이 매입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모스크를 세웁니다.
저는 교회 건물이 팔릴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옛 향수에 젖어 철저히 제도화되고 형식화된 교회는, 생명력을 잃은 죽은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속에서 교회의 영향력은 대단히 미미합니다.
누구도 교회가 이 세상의 역사를 이끌어주리라 기대하지 않는 불행한 현실을
호주에서 보고, 또 유럽교회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무서운 전조를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 성장이나 부흥만을 말할 수 없는, 거대한 세속주의의 시대속에 살고 있습니다.
역사의식이 있는 교회는, 오늘의 교회의 현주소를 읽고, 내일을 준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보다 다음 세대가 더 강력한 세대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요?
우리 교회는 지금 여호수아 세대는 아닙니다. *1세대
그 다음 세대를 이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2세대
그리고 그 다음 세대가, 지금 주류 세대로 부상하고 있는 중입니다. *3세대
◑자 이런 전환기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1. 형식적인 신앙을 탈피해야 합니다.
신앙의 형식화를 경계해야 합니다. 껍데기 신앙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순수성, 진정성, 그 열정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믿음으로 가나안을 정복하고 눈물로 싸워나갔던 그 헌신을
다음세대는 잊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했던 것처럼,
여호수아도 함께 하셨던 것에 대한 그 생생한 간증들을 흘러듣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재현하고자 하는 영적인 몸부림이, 그 다음 세대에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사사기 얼마 후에 사무엘상에 나오는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를 보십시오.
그들 역시 세습받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막에서 먹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제도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제사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을 몰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10, 20, 30년 다녔어도 하나님이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삼상2:12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슴으로 고백되지 않는 종교생활,
매마른 종교적 의식만 남아있는 신자들,
조심할 것은, 나도 모르게 신앙이 서서히 식어져가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에베소 교회는 이런 경고를 받았습니다. ‘첫 사랑을 회복하라’
뜨거웠던 신앙이 식어버린 교회에 대한 무서운 경고였습니다.
이 경고를 무시하면, '내가 촛대를 네게서옮기리라' 다시 말하면 교회를 없애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무미건조한.. 내용이 빠져버린 껍데기만 남은 교회는, 필요없다는 것이죠.
신앙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죽어가고, 자기도 모르게 식어가고, 자기도 모르게 화석화되어 갑니다.
감격없는 예배를 한 두 번 드리다가, 나중에는 예배자체를 아예 거부하게 됩니다.
예배를 갑자기 거부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어느 날, 자기도 그렇게 되는 겁니다.
형식적인 신앙으로는 죄의 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낼 길이 없는 것이죠.
여러분, 오늘 나는 피상적인 신자의 모습만 갖고 있지는 않나요?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경건의 모양만 유지하고 있지는 않나요?
이것이 오늘 전환기에 있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야 할 첫 번째 주제입니다.
▲2.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다 했습니다. 겉모양은 다 갖추었습니다.
어쩌면 더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면, 아니었습니다.
삿2:2절과 3절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척 했지만, 문제는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의 거민들과 타협 compromise 했습니다. 사사기의 매우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타협"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인들이 섬기던 단을 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방 족속과 통혼했습니다.
왜냐면 그 땅의 풍요의 신에 마음이 빼앗겨,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identity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부분적 순종이었지요. 절반의 순종, 절반의 신자, 무늬만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다 해요. 그러나 타협했어요. 그건 사실상 불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겼지만 세상도 섬겼어요.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데,
그들은 겸하여 섬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현실적 이익에 더 눈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조심할 것은 ‘타협’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그 땅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복한 것 같았으나, 그 땅에 동화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현실에 집착하고, 농경문화에 가득한 풍요의 신들을 제거하는 일에, 그들은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타협은 신앙의 우유부단함에서 나옵니다. 서서히 신앙의 색체가 희미해져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말씀의 기준에 의해서 No라고 해야 하는 지점에서 머뭇거린다면, 그것은 타협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문화와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전투적이어야 합니다.
지금 물질주의가 거세게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은 돈이 없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돈이 많아져 가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돈의 힘에 빠지면, 신앙은 그 돈의 힘에 흡수당하고 맙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풍요에 너무 빨리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너무도 어이없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 흡수되어 버리고 나면, 신자로서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말씀의 기준에서 벗어난 세상에서 불편함 없이 살고 있다면,
이미 그는 타협의 길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세상속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우리 안에는 뭔가 갈등이 일어나야 됩니다.
갈등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속화 된 것입니다. 세상에 동화되고 변질되는 과정은,
이런 어이없이 서서히 우리의 삶속에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불순종하지 않습니다.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조금씩 무너지는 것이죠.
주일성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과감하게 빠지지 않습니다.
가끔 빠지는 것이 나중에 어느 순간 죄책감이 별로 들지 않고, 주일성수라는 개념 자체도 없어집니다.
요즘 금요일부터 주일 저녁까지 뭐 캠핑가는 문화, 그래서 주일을 건너뛰는 문화가 많이 생겼습니다.
안식이 필요하고 휴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휴가와 안식의 문화 한 가운데 세속주의가 파고들면서,
우리도 모르게 교묘하게 주일성수의개념이 한국교회안에 매우 많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서서히 무너져 내립니다.
처음부터 죄를 짓겟다고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에 대해 화들짝 놀라죠.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죄가 싫어지지 않습니다. 죄가 우리를 감쪽같이 속이는 줄 모르고 당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세속주의적 위협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세상 문화가 성도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다르게 살기로 결단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놓칠 수밖에 없고,
우리가 놓치는 그 순간 찾아오는 다음 세대의 상황은 참혹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하고, 그 말씀에 어떤 자기 해석도 붙이지 않고, 토도 달지 않고,
전적으로 온전히 순종하는 은혜가 여러분께 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대충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설 곳은, 오늘날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그렇습니다.
대충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설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신앙은 이쪽이냐, 저쪽이냐, 두 분야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강력한 물질주의, 세속주의의 물결 앞에서, 대충 신앙으로 자신을 지켜 낼 수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초에 해야될 매우 중요한 결단이 ‘선명한 기준’입니다.
기준이 없으면, 내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특징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입니다.
소위 말하면 자기 마음에 끌리는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사람은, 겉모양은 신자라도 ‘자칭 신자’이지,
진짜 주님이 인정하시는 신자는 아닙니다.
자기는 신자라고 하는데, 주님이 그를 신자로 인정해주시지 않습니다.
신자를 ‘사칭’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취향이나 기분대로 신앙생활하지 않고, 말씀의 기준을 정확하게 세우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3. 믿음의 롤 모델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 신앙의 모습은, 우리로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한 가정의 부모의 신앙의 모습은, 영적인 대물림에 결정적 영향을 끼칩니다.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신앙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이 문제죠.
여호수아의 신앙이, 그 다음 세대에서 더 꽃 필수 있어야 되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영적인 대가 끊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죠.
영광스런 십자가의 복음, 그 영생의 복음, 그 예수 그리스도, 내 삶을 한순간에 바꾸어놓았던 이 복음이,
내 자녀에게 계승되지 않는 것처럼 비극적인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앞서 믿음의 선배들이 닦아놓았던 신앙의 유산들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할 전환기적 신자들입니다.
한국교회는 좋은 신앙의 유산들, 모델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고 중에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
공산당에게 두 아들을 빼앗겼고, 마침내 원수를 양아들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
그 외에도 31운동 독립선언문 선서 33인 중에 들어있던 길선주 목사님,
그 외 여러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자랑스런 모델을, 한국교회가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한국교회는 그 순교자의 피, 그 터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여러분, 어떤 분이 태국교회와 한국교회를 비교했는데,
태국은 우리보다 훨씬 더 일찍 외국선교사들이 먼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복음화률이 너무 낮습니다.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역사에 유래 없이 일어난 것 가운데 하나가,
일제시대와 공산치하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북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서 분단될 때 그 피난시절에 생명을 걸고 교회를 지켰던 분들이 이북에 계셨고,
지하교회가 아직도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걸고 피난을 내려왔던 믿음의 사람들이 폭격 가운데서
하나님께 서원하고 믿음을 지키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교회를 세우고, 헌신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전쟁과 공산당의 박해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지만,
신앙 하나를 붙잡고, 혈혈단신 내려왔던 믿음의 선진들,
우리는 옛 세대의 모델을 따르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끝을 보고 있습니다. *그 분들이 한 분, 두 분 소천하고 계십니다.
저는 오늘 1부 예배설교를 듣는데, 원로목사님께서 625를 지나올 때 그 과정,
당시 어린 소년으로서 그 전쟁의 포화속에서 서울에서 온양까지 걸어서 피난갔던
그 전쟁 통의 이야기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키고 신앙을 지켜오고, 생명을 걸고 내려온 오늘의 신앙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세대들이 생명과 맞바꿀정도로 신앙을 지켜왔던 그분들의 신앙이,
이제 점점 한 시대속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역사속에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녀 세대에, 부모의 믿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들은 그냥 믿지 않아요. 보여진대로 믿습니다.
부모가 말하는 대로 믿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냥 교회만 왔다갔다 하면, 자녀들은 하나님을 전혀 안 믿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 신앙에 땀과 눈물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의 신앙에 생명을 걸어야 됩니다.
깊이 없는 기도, 열정없는 찬양, 무미건조한 예배, 헌신 없는 신앙,
그것으로는 다음 세대를 일으킬 수가 없는 거죠.
부모는 자녀세대에게 롤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통치 않게 신앙생활 하면, 다음 세대는 기대할 게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영광스러운 복음을 나의 자녀가 물려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을 뜨거운 가슴으로 전해줄 수 없다면, 내 신앙도 이미 문제가 심각한 상태인 것입니다.
신앙의 형식이나 껍데기를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차하면 좋지 않은 것, 부정적이며 이중적인 태도, 외식적 신앙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고개를 휘저으며 교회를 떠나갑니다.
이론적인 신앙이 아니라, 가슴에 들어있는 하나님을 뜨겁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 세대의 뜨거운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아이들이 보지 않는 것 같지만, 다 보고 있습니다.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 부모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너무도 자녀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부모가 말하는 게 아니라, 사는 것을 보는 거죠.
여러분, 부모 세대가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축복이고 행복인지'
자녀로 느끼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세대가 따라옵니다.
우리 아이의 죄성을 가만히 두면 영적 쇠퇴가 찾아옵니다.
적극적으로 은혜속에서 살지 않으면 곧 냉담해집니다.
여러분, 은혜 받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은혜 쏟는 것은 금방입니다.
은혜를 쏟는 것은, 한 방에 쏟습니다.
신년 특별새벽기도 4주동안 막 매달리고 은혜 받았는데, 며칠 안 가서 확 쏟아 버립니다.
우리의 죄성 때문입니다.
은혜를 유지하는 것, 신앙의 기본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소극적인 신앙생활로는 기본도 유지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세대가, 너무 문화적으로 악한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너무도 우리 시선과 마음을 빼앗는 유혹의 시대, 영적으로 어려운 시대입니다.
여러분, 2016년 연초입니다. 새로운 결단을 할 시기입니다.
우리 앞선 세대에 선배들이 보여주었던 그 올곧은 신앙,
그걸 회복하고, 자녀에게 물려주시길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옛날에는 주일성수도 좀 율법주의적 요소도 있었지만,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주일날 공부도 못하게 하고, '야쿠르트도 토요일날 2개 가져오라'고 그랬습니다.
너무 심할 정도로 강조를 했습니다. 그렇게 올곧은 것, 제대로 신앙생활하려 했습니다.
그게 율법주의로 가면 안 되지만, 철저하게 믿음을 지키려고 했던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건 우리가 본받아야죠.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 개인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민족의 미래 운명을 생각해야 됩니다.
한국교회의 운명이, 민족의 미래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유산은 신앙의 유산입니다.
신앙만 제대로 계승하면, 그 다음은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녀에게 공부를 강조 안 해도, 신앙이 제대로 들어가면, 공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나만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으로 전부가 아닙니다.
자녀들이 더 나은 세대로 일어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예수 모르면 그 인생은 방황하게 되어 있습니다.
입시에 묻혀 신앙은 강조도 못하고 있다면, 심각한 일입니다.
세상적인 것만 강조하다가, 나중에 신앙을 잡지 못하면, 땅을 치며 후회할 일이 오는 거죠.
만사를 제쳐 놓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신앙의 계승"입니다.
우리보다 더 나은 세대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
더 영광스러운 다음 세대가 일어나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일어나지 않는,
하나님을 아는 영광스런 다음 세대가 일어나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인줄로 믿습니다.
▲저희 교회가 지금은 잘 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모입니다.
집회를 해도 그냥 사람들이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역사속에 한 때 좋았던 교회는 언제나 있었습니다. 한 때 좋았던 교회는,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넥스트입니다. next generation 다음 세대입니다.
여러분, 모든 부모들의 열망은, 내 대보다 자녀 세대가 더 융성하고 축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희망합니다. 그렇다면 그 한 가운데 참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참 신앙이 빠져버린 영광스런 세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져주시는 인생이 아닌, 부흥의 세대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려고 하면 우리는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첫 번째는
우리의 신앙의 형식주의를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타협하고 있는 것들을, 우리는 끊임없이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우리의 신앙의 앞선 세대의 롤 모델을 바라보며,
신앙의 채찍질을 하고, 더 뜨겁고 더 열정적이고, 더 건강한 신앙인으로 우리 자신이 서 있다면,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사사기를 보면, 역사는 실패했습니다. 신앙의 계승에는 실패했습니다.
인간은 실패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윗 왕조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그 왕국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약의 교회를 일으키시고,
역사는 끊임없이 발전해 갑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지키고,
그 세대를 온전히 계승하지 않으면, 그 시대는 어두움속에서 불행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우리 교회도, 신앙의 계승에 생명을 거시길 바라고,
무엇보다도 내가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내가 제대로 하나님을 믿고,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모든 관건이요, 가장 핵심입니다.,
어떤 때 사춘기 때는 아이들이 반항도 하고, 세상에 휩쓸리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부모세대가 온전하게 말씀을 따라 살면, 그 자녀들이 방황했다가도
반드시 부모가 가는 그 길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눅15장 탕자의 비유를 좋아합니다. 탕자가 바깥으로 나가서 제 마음대로 자행자지했지만,
결과적으로 나중에는 마음을 돌이켜 돌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버지가 신앙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돌아갈 기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흔들리지 않아야 됩니다. 신앙을 붙잡아야, 말씀대로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 제일 정신으로 살면, 어느 날 방황했던 자녀들도,
그 부모의 신앙의 길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적으로 좋은 신앙의 모델들이 많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저는 우리 원로 목사님을 참 존경합니다. 정말 올곧게 믿음의 삶을 이렇게 살아오신 분이 많지 않습니다.
참 오래 오래 사셔서 우리의 기준이 되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정말 아무 욕심 없이, 생명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을 지켜온
이 앞선 세대들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은, 너무도 축복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신앙의 좋은 모델들이 너무 많은 것이, 우리 교회의 유산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조금도 나태해지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형식화되지 않고,
내용을 가진 진실한 신자로서, 믿음의 정절을 이 시대속에 지켜,
더 영광스런 다음 세대가 일어나는 일에, 여러분들의 가정이, 우리 교회가,
우리 민족이 쓰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요즘 북한의 문제와 또 우리 국내적인 부분, 경제적인 부분도, 지금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다.
IMF보다 더 어렵다는 얘기도 합니다. 샤오미나 이런 중국의 핸드폰, 전자제품이 지금 거세게 들어옵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고요. 이제 우리가 10년 후에 뭘 가지고 먹고 살아야될지 걱정하는 시대입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염려할 것 밖에 없고,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은, 교회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서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온전히 기도하고, 무릎 꿇고,
그동안 경제 성장으로 흥청망청했던 우리의 마음을 좀 더 겸비하게 내려놓고,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고, 겸비하고 회개하면,
세계경제질서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열어주시고,
통일 이후에 우리 민족을 통하여 세계선교를 감당하게 하시고,
중국과 더불어, 중국에 1억 신자들이 있습니다 세계최대 기독교국가입니다.
중국교회는 이미 이슬람 선교를 밀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우수한 영적 지도력을 갖고 있습니다. 신학적 깊이가 있습니다.
중국교회와 함께 힘을 합치면, 이슬람 선교를 마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기는 역사의 마지막 주자로 우리 민족을 쓰시는데,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 그렇게 통일 세대로 쓰실 것을, 저는 기대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책임이 이 전환기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깨닫고,
신년에 분명한 기준을 세우시고, 믿음의 달음박질을 하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이 민족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큽니다.
주의 영광스런 복음을 알게 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사신 우상을 섬기며, 말로 다할 수 없는 인습, 이 민족이 가난에 찌들려 살았을 때,
복음이 들어오고,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신 하나님,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생명을 바쳐 믿음을 지켰던 그 순수한 신앙이,
오늘날 물질주의와 함께 우리도 모르게 함몰 되고, 무너져내리고
한국교회가 쇠퇴기를 맞고 있다는 이 자성의 소리 앞에서,
우리의 개인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게 하여 주시옵시고,
우리의 신앙이 다음 세대에 영광스럽게 전승될 수 있도록,
아니 더 뜨겁게 부흥의 세대가 일어날 수 있도록,
통일의 세대가 온 세계열방에 복음을 완수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마감하는,
위대한 세대가 일어나도록, 하나님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에 다음 세대가 더 영광스럽게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각 가정 가문이, 다시 한 번 더 뜨겁게 복음으로 살아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