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롯의 교훈 (창19:1~38) (tistory.com)
◈롯의 교훈 창19장
김성수 목사 창세기 55강
지난주에는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기며 사는 자들의 말로에 대해서도 나누어 보았고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해서 그 분노의 심판에서 건져지게 되었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인자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삶에서 돌이켜
확고한 신앙 안에서 심판 날을 준비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건져지긴 했으나 후대에게
두고두고 부끄러운 신앙의 선배의 본이 되고 있는 롯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시는 교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54강은 소돔과 고모라 성과 그에 대비되는 새하늘과 새땅을 살펴보았다면
지금 55강은 롯에 대해서, 그와 대비되는 아브라함에 대해 살펴봅니다.
▲예전에 제가 대학 부 때 저희 선배 중 한 분이
본문 창19장의 롯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일단 구원받은 성도는
아무리 불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해도 결국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발표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소돔과 고모라와 롯의 이야기를 기록하여 전해 주신 것은
‘이렇게 살아도 결국 구원은 받는 것이구나.’하고 안도와 함께
계속 부끄러운 성도의 삶을 지속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내 백성들아, 너희가 정말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인지 안다면
롯처럼 살아서야 되겠니?’에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세기 19장의 롯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성도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
확인하고 고쳐내야 할 것들은 과감히 고쳐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창세기 19장에 나타난 롯의 모습을 하나하나 분석해 보면서
성경이 교회에게 주는 메시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롯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세상과 더불어 쾌락을 즐기던 자였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던 롯은, 삼촌 아브라함의 은혜를 입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큰 재물을 모으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먹고살만 해지자 삼촌을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삼촌 아래에 예속되어 있는 한,
자신의 명예나 경제적 이득에 별 도움이 못 된다고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조카 롯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에게 좋은 땅을 골라서 떠나라고 제의를 했습니다.
롯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혜를 저버리고 마치 애굽의 풍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해 보였던
요단 평지를 택하여 떠났습니다. (*소돔성은 사해 남동쪽으로 추정)
그리고는 슬금슬금 장막을 옮겨 쾌락의 도시 소돔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롯은 소돔이 주는 쾌락을 즐겼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섬기던 아브라함의 무리 속에 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약속하심을 직접 보고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롯은, 소돔의 쾌락이 너무 좋아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이들의 대표적인 특징이
세상 힘의 무상함과 세상의 죄악상을 고발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간혹 젊은 청년들이 메일이나 전화로
‘예수 믿으면서 세상에서 잘되고자 하는 욕망을 품는 것이 뭐가 나쁘냐’는 질문을 하곤 합니다.
저는 세상에서 잘되고 싶어 하는 욕망 자체를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왕이면 잘 되세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위에 공고히 서지 못한 채, 세상의 힘을 목표 삼아
하나님조차도 자신의 목적 달성에 이용하려고 하는 자들의 삶 속에서
과연 천국을 증거하고 죄악 된 세상의 실상을 폭로하는 삶이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를 제가 하는 것입니다.
롯을 보십시오. 자기가 좋아서 들어 온 그 땅에 대해 어떻게 악평을 하겠으며,
어떻게 그 속에 사는 이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스스로도 소돔이 주는 쾌락이 너무 좋아 못 견디겠는데
어떻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나안의 복된 삶에 대해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롯은 소돔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돔의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이 되어 성문에 앉을 수 있는 신분이 되었고
그들에게 인정도 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소돔 성의 죄악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설사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코웃음도 안 쳤을 것입니다.
왜 사위들이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겠습니까?
소돔의 심판과 멸망에 관한 롯의 말은 권위가 없었습니다.
사위들이 볼 때 롯의 말은 평소의 그의 말과 행동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사위들이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만일 롯이 평소에 소돔의 죄악에 대해 개탄하며 그 땅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면
사위들은 그의 말을 일단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사위들이 롯의 말을 수용하고 안하고는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위들은 롯의 말을 전혀 진지하게 듣지 않았습니다.
롯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의 일상의 삶 속에서
이 세상의 쾌락과 만족이 아닌 하나님 백성들의 행복과 만족,
그리고 그들의 지향점을 설명하는 삶을 살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힘과 그 힘들이 공급하는 신기루 같은 쾌락에 젖어 세상과 방불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힘에 매료된 자들의 또 다른 문제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이 너무 좋아 하나님과의 교제를 소원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러한 자들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의 장막에 찾아 오셔서 아브라함과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하셨던 하나님은
그러한 롯의 집에는 아예 가지도 않으셨습니다. (두 천사만 찾아감)
그리고 심판을 경고하기 위해 롯을 찾아간 두 천사도
처음에는 롯의 집에 들어가지도 않으려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가 하나님이 심판하여 멸하실 땅에 거처를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멸하실 세상의 힘의 원리를 자신의 삶의 원리로 삼아 살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 거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역사와 공간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성도가
그에게 주어진 인생동안 이 세상을 떠나 존재할 수 있는 가시적 공간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이 세상에 거처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세상이 거처를 삼고 살도록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롯 안에는 소돔이 들어와 살았습니다. 소돔의 쾌락이 롯을 장악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돔을 떠나면서 그렇게 지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롯의 거처를 혐오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혐오 속에서 가까스로 불타는 소돔을 빠져나오는, 롯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 정말 그 삶이 부러우세요? 사는 동안 자기 마음대로 세상의 쾌락을 좇아 살다가
하나님의 혐오 속에서 하늘나라 가고 싶으세요?
이렇게 성도가 세상의 쾌락과 힘을 추구하고 그 맛을 보게 되면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하기가 아주 힘이 듭니다.
세상의 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실력이 생기기 전에,
세상에서의 성공에 매진하여 그 성공을 얻게 되면,
그 성공이 주는 매력을 이겨낼 장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신앙인으로서의 실력을 키우라는 것이 성경의 권고인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인격과 사람됨 이전에 세상의 성공과 힘을 추구하게 되면
그들은 절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나그네를 대접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삶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그게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에게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도 자신의 성공과 자랑을 위한 도구로 보이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 나그네를 대접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세상의 힘 쫓아다니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내는 데에 힘을 쏟자고 말씀드리는 것이지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 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겔16:49~50) 네 동생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다. 소돔과 그의 딸들은 교만하였다.
또 양식이 많아서 배부르고 한가하여 평안하게 살면서도,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들의 손을 붙잡아 주지 않았다.
50 오히려 그들은 교만하였으며, 내 눈 앞에서 역겨운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그것을 보고는, 그들을 없애 버렸다.
◑2. 두 번째 롯의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의 연합을 깬 것입니다.
롯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아브라함과 신앙의 여정을 함께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롯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떠나 믿음의 교제를 저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교제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를 대항하여 홀로 버텨낼 수 없음을 잘 아시고
서로서로 도와주며 하나님 백성으로 잘 자라나라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엡4:16)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므로, 온몸은 여러 부분이 결합되고 서로 연결되어서,
각 부분이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각 마디로 영양을 공급받고,
그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우게 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교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성도는 절대 독불장군으로 살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 이제 곧 결혼을 하게 될 우리 청년들 몇 명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신혼집을 교회 옆으로 알아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직장과 학교에서 가까운 곳이 아니라 교회에서 가까운 곳으로 집을 옮겨
수시로 교회의 모임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얼마나 기특합니까?
교회는 성도의 영적 성숙에 반드시 필요한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절대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성도가 교회를 떠나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세상 풍속을 좇아 산다면
그의 신앙생활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롯이 바로 그러한 자들의 전형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고후6:14~18)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마십시오.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짝하며,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귈 수 있겠습니까?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떻게 화합하며,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더불어 함께 차지할 몫이 무엇이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떻게 일치하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오너라. 그들과 떨어져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라.
나 주가 말한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18 "그리하여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나 전능한 주가 말한다."
성도는 올바른 교회 안에서 치리와 양육을 받으며 연락하고 상합하며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교회가 아닌 세상에서, 세상과 교제하며 성도의 신앙생활을 올바로 유지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성도가 교회를 등한히 하고 세상과 교제하며 세상에 머물면
반드시 그 세상의 영향에 젖게 되어 있습니다.
롯을 보세요. 천사들이 롯의 집에 들었을 때 소돔 사람들이
천사들을 상관하겠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천사들이 그들의 눈을 어둡게 만들었는데도
그들은 롯의 집 대문을 찾느라 아비규환이었습니다. 그 때 롯의 처신이 어땠습니까?
롯은 그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자기의 두 딸을 성난 군중들에게 주려 했습니다.
언뜻 보면 그가 굉장한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롯이 한 가지 악을 막기 위하여, 또 다른 악을 서슴지 않고 행할 수 있는 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성경이 금하는 남색(롬1:24, 27), 동성애가 이미 만연하게 퍼져있었던 소돔 성에서
롯의 도덕성이 밑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딸들은 어떻습니까? 아버지와 근친상간을 하고, 그 무시무시한 심판의 불을 눈으로 직접 보고
소돔 성을 빠져나오면서도 그들은 손에 포도주를 들고 있었습니다.
롯과 두 딸이 소돔에서 빠져나와 동굴에서 생활할 때, 두 딸이 롯에게 포도주를 먹였습니다.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났겠습니까?
아니 설사 그 포도주가 소돔 성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무서운 심판의 불을 목격한 자들이 포도주를 구해놓고
수시로 마시고 있었다는 것이 상상이 가십니까?
그것은 롯과 그의 딸들이 쾌락의 도시 소돔 성에 살면서
그들의 영적 도덕적 감각이 얼마나 무뎌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악 된 세상을 상징적으로 축약하고 있는 소돔은
하나님마저도 조롱하는 그런 곳입니다.
(창18:20)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 오는 저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다.
(창19:13) 우리는 지금 이 곳을 멸하려고 합니다. 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규탄하는 크나큰
울부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렀으므로, 주님께서 소돔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18:20절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과
19:13절의 ‘그들에 대하여’ 는 둘 다 소유격으로
즉 ‘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 그들의 부르짖음’이라고 번역을 해야 옳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르짖음 들은 소돔 안에 살고있는 어떤 소수의 의인들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소돔 사람들의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어떤 부르짖음일까요?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어? 하나님 네까짓 게 뭐야?’라는 조롱과 경멸의 부르짖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따라서 교회 생활에 충실치 못하고 세상과 어울려 사는 사람들은
그 세상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마저도 우습게 여기고
때로는 하나님께 삿대질까지도 서슴지 않는 자들이 되어 갑니다.
롯이 왜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듣지 않고 그 소돔에서 지체했겠습니까?
하나님을 우습게 아는 세상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롯과 그의 가족들은 소돔 성에 사는 동안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소돔의 죄에 깊이 중독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복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내 백성아 어서 어서 거기서 나와라’하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
(계18:2~4) 그는 힘찬 소리로 외쳤습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도시 바빌론이 무너졌다. 바빌론은 귀신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 되고,
[더럽고 가증한 온갖 새들의 집이 되었구나!]
3 이는, 모든 민족이 그 도시의 음행에서 빚어진 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세상의 왕들이
그 도시와 더불어 음행하고, 세상의 상인들이 그 도시의 사치 바람에 치부하였기 때문이다."
4 나는 하늘에서 또 다른 음성이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 백성아, 그 도시에서 떠나거라. 너희는 그 도시의 죄에 가담하지 말고,
그 도시가 당하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라.
성도는 교회를 떠나 세상과 벗하여 살면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교회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와 함께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신기루 같은 행복을 약속합니다만
절대 세상은 사람들에게 참 행복을 제공해 줄 수 없습니다.
(약4:4)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자꾸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점점 고령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교회를 떠나 세상의 성공을 좇아 온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대견스러워 하십니까? 아니면 통곡을 하십니까?
저는 부모들이, ‘우리 자식이 좋은 직장 얻었다고, 좋은 대학 들어갔다’고 자랑하는 것을 자주 듣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우리 천국 가족들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기도 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저는 이 시대의 부모들로부터 ‘우리 아이가 이번 방학 동안에
‘R C Sproul의 책 시리즈 전권을 다 읽었다’ 든가
‘우리 아이가 자기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복음전해서 결국 그 친구를 전도했다’든가
‘우리 아이가 교회 중고등부 친구들을 위해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고 있다’는 등의 자랑을 좀 듣고 싶습니다.
아이가 교회를 떠나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고 있는데도 공부만 잘하면 된다든가,
좋은 직장만 얻으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롯과 같은 부끄러운 신앙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들의 자식은 반드시 부모와 합작으로 모압과 벤암미를 낳게 될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롯은 마지막 한 가지를 포기할 수 없는 자였습니다.
롯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돔과 그 속에 있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17절)’은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롯은 그 말씀을 듣자마자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처럼 화급한 때에 롯이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은
롯이 평소에 얼마나 불 신앙적이고 이기적인 생활을 해왔는지를 그대로 노출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머뭇거리는 롯의 팔목을 억지로 잡아끌다시피 하여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런데도 롯은 그 앞에서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19절)’하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처럼 큰 은혜로, 멸망당하는 소돔 땅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롯은 그 하나님 앞에서 또 다시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불에서 건져주신 것은 고맙지만 힘들어서 산까지는 못 가겠다는 것이지요.
나를 산까지 옮기는 것은 하나님이라도 안 될 거라는 것입니다.
▲롯은 하나님께 소돔처럼 평야에 있는 소알로 가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창19:20) 보십시오, 저기 작은 성이 하나 있습니다. 저 성이면 가까워서 피할 만합니다.
그러니 그리로 피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주 작은 성이 아닙니까?
거기로 가면, 제 목숨이 안전할 것입니다."
롯은 지금 하나님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소알은 작은 성이니까 그냥 놔두고 자기를 그 성으로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소알은 소돔의 축소판이었습니다.
롯이 처음 산마루에서 요단 들을 바라보았을 때
제일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곳이 소알이었습니다.
(창13:10) 롯이 멀리 바라보니,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한 것이 마치
주님의 동산과도 같고, 이집트 땅과도 같았다. 아직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소알 또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소돔과 고모라의 아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알은, 롯의 안목의 정욕이 바라본 마지막 초장이었습니다.
롯은 소돔을 떠났을 때, 자신의 꿈과 지금까지의 노고가 일시에 붕괴되는 듯 한 허망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아직도 소알이 남아 있었습니다. 소돔이 없으면 소알이라도
차지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소알은 롯의 야심과 이욕(利慾)의 최후 보루였습니다.
롯이 소돔의 축소판인 소알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는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소돔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소돔 성을 빠져 나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믿음의 눈으로 그 소돔 성이 어떤 곳인지 잘 압니다.
그 소돔 성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도 잘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소돔 성에서 나와 달려가라고 하는 산으로 곧장 달려가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빠져나오기는 했는데 자꾸 미련이 남습니다.
거기서 누리는 쾌락과 행복이 자꾸 반추가 됩니다.
그렇게 옛 사람에 대한 연정이 자꾸 솟아 올라오면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소돔을 대체할 소알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마귀는 아주 가까운 지근거리에 소알을 준비해 놓고 기다립니다.
(창19:20) 보소서 저 성은 도망하기 가깝고
하나님의 약속을 우습게 여겼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지근거리에
하갈이라는 대체품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소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 때
마귀는 우리 곁에 소알을 준비해 놓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작은 성 소알 안에는 큰 성 소돔의 물품들이 고스란히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겉으로는 소알은 작은 성이니까 큰 성 소돔에 비하면
금욕 생활을 하는 것이라 자부하며 스스로를 자위합니다. 아닙니다. 소알은 소돔의 자식입니다.
소알을 버리지 못하면 소돔의 심판이 그대로 임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블레셋 사람을
조금 남겨 둠으로 해서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습니까?
가사 사람들의 후손들에게 삼손이 죽었습니다.
가드 사람들의 후손에서 골리앗이라는 괴물이 나왔습니다.
아스돗의 후예들에게 이스라엘이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우리가 작은 성 소알을 우습게보면 큰 코 다칠 날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남아있는 여러분의 소알이 어떤 것이 있는지 떠 올려 보세요.
마약 중독에서 벗어난 사람이 가끔씩 술을 한잔씩 하면서
‘나는 그 무서운 마약도 끊은 사람이야, 이까짓 술 몇 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한다면
그 사람은 언젠가 다시 마약보다 더 무서운 또 다른 중독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훈련하고 연습하는 삶을 살기로 한 사람이
부정과 편법임을 알면서도 작은 불로소득을 챙기면서
‘그렇게 큰 것을 포기했는데 요정도는 봐 주시겠지’하고 있다면
그는 여전히 소돔의 자식 소알에 머물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폭력적이던 사람이 그 삶에서 돌이켜
이제는 폭언 정도만 하고 있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역시 소알에 머물고 있는 가련한 자입니다.
시기, 질투, 험담, 이간질 등등 우리가 붙들고 있는 소알은 너무나 많습니다.
어서 내려 놓으셔야 합니다. 그게 바로 소돔의 자식들인 것입니다. 다 비워야 합니다.
◑4. 롯은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여전히 자기 뜻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롯은
끝까지 아브라함의 곁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는 롯에게 경고의 나팔까지 불어주셨습니다.
동방 연합군의 손에 롯을 붙이셔서 그에게 믿음의 행렬인 아브라함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경고를 해 주셨던 것입니다.
포로로 붙잡혀 단까지 갔다가도 구사일생 돌아왔으면, 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롯은 소돔의 마력을 못 이기고, 다시 소돔 성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끝내 롯이 살던 소돔을 불살라 버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롯은 소돔을 그리워하며 아브라함의 곁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굴에서 포도주나 마시며 딸들과 상관하여 모압과 벤암미를 낳아버렸습니다.
후일 모압 여인들은 가나안으로 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혹하여
다산 신인 바알브올을 섬기게 하였고,
벤암미의 후손들인 암몬 족속들은 몰록 신에게 아이들을 제물로 바치는 악습을 자행하는
이스라엘의 대적이 됩니다.(레18:21, 민25, 암1:1)
성도가 세상을 잊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을 벗하여 살게 될 때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멸망의 자식들을 잉태하게 되는 것이고
그 삶은 절대 행복한 삶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롯이 소돔에서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에 올라 앉아 있었으면서도
그 후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벧후2:7)
벧후2: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롯은 소돔을 나와서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재산을 다 불태워 잃어버린 것만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는 것을 직접 보았고,
딸들과 근친상간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자기 딸들이 낳은 자기 자식들을 보면서 평생을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요?
그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롯의 삶을 부러워하시겠습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경고를 감지했을 때,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육욕을 따라 사는 많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롯의 이야기가 경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세상의 힘의 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살아 드리는 것으로 생색이 나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지 않으면 늘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의 행복과 평안과 안식을 위해
‘내 백성아 세상에서 나와 내 말을 듣고 나와 네 이웃을 사랑하는 삶,
나그네를 대접하는 삶을 살거라.’하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창19:30) 롯은 소알에 사는 것이 두려워서, 두 딸을 데리고 소알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서, 숨어서 살았다. 롯은 두 딸들과 함께 같은 굴에서 살았다.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인 롯이 평생을 고통스러움 속에서 두려움 속에서 삽니다.
롯이 두려워서 소알을 떠난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 삶을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설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경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롯의 곁에서 소돔 성의 화려함을 못내 잊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백성 롯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물질주의에 젖어 있는 자들은 저렇게 저주의 소금기둥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17:32)’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롯이 소금 기둥으로 변한 자기 아내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경고를 받았듯이
우리도 오늘 본문의 롯과 롯의 아내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의 경고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롯처럼 하나님의 경고들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간
평생을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살게 됩니다. 어서어서 성도의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지금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잘 살아내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고전10:11~12) 이런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본보기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고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성경의 경고들은 그 어느 것 하나도 경솔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억지로 강압하여 끌고 가시지 않으십니다.
설득하시고, 경고하시고, 책망하시며 그들을 이끌어 가십니다.
▲(창19:27~28) 다음날 아침에 아브라함이 일찍 일어나서, 주님을 모시고 서 있던 그 곳에 이르러서,
28 소돔과 고모라와 넓은 들이 있는 땅을 내려다보니,
거기에서 솟아오르는 연기가 마치 옹기 가마에서 나는 연기와 같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셨던 바로 그 자리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목도하게 하셨습니다. 그 것을 본 아브라함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죄를 철저히 심판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녀들을
주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을 전율 속에서 절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약 30년 전에, 아브라함과 롯의 신앙상태는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은 후에, 끊임없이 성숙되고,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반면,
롯은 세상 소돔의 쾌락을 좇아가고 말았습니다. 30년 후에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신앙생활을 시작했어도,
5년 후에, 10년 후에 두 사람이 도착한 지점은.. 매우 상이하고 다를 수 있죠.
한 사람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가문을 이룬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한 사람은, 롯처럼, 당장은 세상에서 잘 나가는 것 같다가도.. 결국 재만 남게 되는 것을
오늘날 우리도 주위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롯과 그의 가족 그리고 소돔의 멸망 이야기에서
우리는 현재 우리의 신앙생활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것인가를 되 짚어보고
고칠 것이 있으면 즉시 고쳐야 할 것이며
회개해야 할 것이 있으면 즉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