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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너를 인도하리라

LNCK 2016. 5. 2. 19:06

https://blog.naver.com/karamos/80050812488

 

◈정녕 너를 인도하리라             창46:1-7

 

본문은, 요셉의 요청을 받고서, 야곱이 자기 가속들을 다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장면입니다.

이때 야곱은 가나안의 남쪽 끝자락인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중에,

‘애굽에 내려가라’는 하나님 지시를 받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는, 이동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이동했기 때문에 형통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동일하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성경은 이동시 생각해야 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현대인들을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 중에 한 가지는 아마 이동성(mobility)일 것입니다.

우리는 빠르게 이동합니다. 아침에 서울에 있던 사람이 점심에는 부산에 있고

저녁은 광주에 가서 먹고 밤에는 다시 서울에 옵니다. 빠르게 움직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사도 쉽게 가고 이민도 어렵지 않게 갑니다.

우리는 직장 때문에 이민가기도 하고 자녀교육이나 기후, 건강, 가족관계 때문에

다양하게 이주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개척을 하다가 정말 힘들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개척해서 교인이 50명쯤 되면, 그 중에 20명이 이사를 가는 것입니다.

 

다시 50명 정도로 부흥하면 20명 이사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이사를 많이 가서 도무지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오죽하면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에는 ‘이사의 영’이 달라붙어 있으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이사귀신을 물리쳐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창세기 46장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사하거나 이주할 때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는가?

과연 이주할 때에 그 생각 속에 하나님을 함께 넣고 계산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13절에 어느 상인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1년 동안 장사해서 이익을 보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상인들의 본질이요 직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상인들의 잘못은 장사해서 이익을 보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길 때에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이 과연 거기 있느냐 하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상인들의 허물인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허물에 들지 않게 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창세기 46장은 야곱이 지난 22년 동안에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아들 요셉을 만나기 위해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장면입니다.

내세에 천국에나 가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아들 요셉이 살아있고

더군다나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지만, 요셉이 보내준 수레를 본 후에 그는 기운이 소생했습니다.

 

그 수레가 얼마나 좋은 것이었는지 ‘총리가 아니고서는 보내줄 수 없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그리고는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는 마음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소망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앞으로 뭔가를 하겠다, 내가 무엇을 좀 보겠다’ 하는 소망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야곱의 나이가 130인데도 마음에 소망을 갖고 온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게다가 앞으로 5년 동안 흉년이 지속될 것이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는 더 살고자 해도 더 살수가 없는 형편이 겹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지금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그렇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31:1)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애굽에 내려가지 말라는 명령의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도 기근을 피해서 애굽에 내려갔다가

할머니 사래를 애굽의 바로에게 빼앗길 뻔하지 않았습니까? *12장

 

만약에 그 때 할머니를 빼앗겼더라면 야곱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런 위기를 겪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망설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흉년이 들었을 때에 하나님이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창26:2)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 이삭이 블레셋 땅인 그랄에 거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 자신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은 애굽이 아니고 가나안 땅이라는 것을

평생을 걸쳐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애굽에 있는 자녀 포함해서 남자만 70명이 되는 대가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의 경계를 넘어서 애굽으로 가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의 문제는

야곱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중대하고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나 욕심을 따라서,

먹고사는 문제를 따라서 애굽으로 건너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더 분명한 뜻을 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파란불을 보여주시고, 그 파란 불을 따라 가나안의 경계를 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창세기 46장을 통해서 야곱이 이사할 때에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는가를 세 가지 요소로 나누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감정을 누르고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

 

야곱은 먼저 자기의 감정을 누르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한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려서 예배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사할 때에 미신적인 방법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점치는 사람에게 가서 ‘손 없는 날’ 받아서 이사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미신적인 방법을 의지해서도 안 되고 비기독교적인 방법을 의지해서도 안 되고,

또 자신의 감정을 따라 결정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이어트를 하기로 결정하고 차를 운전하는데, 도넛 집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합니다. “주여 오늘 내가 도넛을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이 도너스 집 앞에 자동차 주차장에 빈 공간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했는데 정말 주차장에 빈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30분 뒤에 입에 도넛을 가득 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도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내 이 블록을 아홉 번 돌았더니

드디어 아홉 번 만에 주차장에 빈자리가 하나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셔서 도넛을 먹게 하심을 이제야 알게 되었나이다.”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때 자기 욕심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또 어떤 사람은 이사를 갈 때 “주여 내가 이사를 갈까요 말까요?” 하면서

성경을 펴니까 마게도냐 사람들이 “이리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는 말씀이

사도행전에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사를 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런 것은 대단히 미신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예배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마음에 평강이 오는 쪽으로 결정을 해야 됩니다.

 

감정을 따라 움직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감정을 따라서 모든 행동을 한다면

집안에서도 많은 부부사움을 할 것입니다.

감정 따라서 성질나는 대로 행동하고 교회에서도 성질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자기의 감정에 어긋난다고 싸운다면, 그런 가정은 어떻게 되겠으며

그런 사회는 어떻게 되겠으며, 그런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감정 따라 사는 사람은 신앙도 어리고 인격도 어린 사람입니다.

감정을 조절하고 절제하고 누르고 하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신앙이 성숙된 신앙입니다.

 

▲야곱은 자기감정을 누르고 있습니다. 야곱이 지금 살고 있는 곳은 헤브론입니다.

가나안 땅은 맨 북쪽이 단이고, 맨 남쪽이 브엘세바이기 때문에

헤브론에서 애굽으로 가려면 브엘세바를 거쳐야 합니다.

 

대한민국 영토를 가리킬 때에 ‘백두에서 한라까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

‘단에서 브엘세바’라고 하면 가나안 땅 전체, 이스라엘 땅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의 마라도와 같이 이스라엘의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는 브엘세바는

애굽으로 넘어가게 되는 남방경계선 네게브 사막지대에 있는 남방도시입니다.

 

브엘세바에서 야곱은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브엘세바는 할아버지의 추억, 아버지의 추억, 자신의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브엘세바는 남방에서도 사막지대이기 때문에 우물 때문에 싸움이 많은 곳입니다.

아브라함 때에 블레셋 왕 아비멜렉의 종들이 와서 우물을 가지려고 다투고 하니까

양 일곱 마리로 그 우물을 완전히 차지하고 서로 맹세를 합니다.

그래서 ‘브엘세바’, 맹세의 우물, 혹은 일곱 개의 우물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우물이 된 것입니다.

 

또 아버지 이삭 때에도, 브엘세바에서 우물 가지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삭이 우물을 파니까 아비멜렉의 종들이 쫒아 다니면서 이삭을 괴롭힙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이 브엘세바에서 드디어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고 우물을 가지고

서로 싸우지 말자 해서 ‘맹세의 우물’인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아버지 이삭에게 나타나서 축복해 주셨습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창26:24).

 

브엘세바는 할아버지의 추억도 있고 아버지의 추억도 있을 뿐 아니라

야곱 자신에게도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여기가 바로 자기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사기를 쳐서 장자권을 빼앗은 곳이고,

자기 아버지에게 염소털로 사기를 쳐서 형이 받을 모든 축복을 빼앗은 곳이며,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형에게 쫒길 때, 야곱이 밧단아람을 향해 출발했던 곳이

브엘세바 바로 이곳이었던 것입니다.

 

나이 130살이 된 야곱은 이곳에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마음속에 만 가지 감정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허물도 많고, 감사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곳은 우리 아버지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축복하신 곳이다’

하는 기대와 소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야곱은 ‘이제 내가 빨리 애굽으로 내려가서 내 아들 요셉을 봐야 되겠다’는 감정도 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심었던 에셀나무도 보았을 것이고,

아버지가 파놓은 우물도 가서 한번 마셔보았을 것입니다.

130살 노인인 야곱은, 자신의 평생을 브엘세바에서 회상하면서 자기의 감정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감정을 정리하며 살 필요가 있습니다.

한번 원수 되었다고 영원히 원수 삼을 것 없습니다. 영원히 원수 삼으면 어떡합니까?

감정을 정리해야 합니다. 미운 사람들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사람을 미워하면 하나님은 얼마나 나를 미워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정리하고 감정을 따라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므로 나의 허물을 고하고

“하나님이여 내 인생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야곱은 ‘내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과연 잘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야곱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창46:2-3).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시자 야곱의 마음속의 두려움은 없어지고

이제 애굽으로 이사가도 되겠다는 평안한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직장을 옮기든 주거를 옮기든 무엇을 옮기든 간에 먼저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야곱처럼 직접 나타나서 “너는 그곳으로 이사가라” 하시면 좋겠지만

우리가 다 야곱이 아니고 우리가 이런 경험을 다 하지 못한다면

기도 중에 성령께서 내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쪽으로 가면 됩니다.

 

불안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이런 것이 있을 때에는 그쪽은 안 가면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주할 때에는 기도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6:8~27절까지 야곱의 아들들과 손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읽을 때 심각하게 읽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습니다.

왜 이런 것을 기록해주셨을까요?

 

하나님의 뜻은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 집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말씀하셨고

그것은 야곱의 가족(집단)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통해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시지만

집단인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도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선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힘을 모아서 선교하는 것이 더 강한 힘을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신앙생활하지 말고,

모여서 교회를 이루어 함께 힘을 합쳐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가족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라

야곱이 요셉을 만나서 목을 어긋맞겨 안고 울고 이야기 합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창 46:30).

 

야곱의 가정에 이주가 야곱이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할 정도로

가족간에 있던 모든 문제가 풀리는 유익을 주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간 나이가 130살입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17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래서 147세에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야곱이 소천할 때 요셉이 야곱의 눈을 감겼습니다.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함으로 말미암아 가족들의 신앙이 크게 되었고

가족들이 모두 유익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양질의 자녀교육을 위해서 한국을 떠납니다.

한국의 교육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가고 일본, 호주, 뉴질랜드로 가고

심지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찾아갑니다.

 

저는 양질의 교육을 위해서 자녀를 보내는 사람을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녀교육을 위해서 부부는 갈라져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와 아버지가 갈라져 살게 되고 부부가 나뉘어 살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새로운 문제요인으로 등장하였습니다.

 

가족은 가능한 같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가정이 무조건 합하여 함께 사는 것입니다.

아예 독립해서 살 수 있는 그런 자녀가 아니면, 가정은 같이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공해도 가정이 실패하면 그 사람의 영혼은 공허합니다. 남는 것이 없습니다.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대선에서 경선을 치른 사람이 폴 통가스입니다.

그는 메사추세츠주 상원의원을 지냈습니다. 나이 마흔도 안 되어서 상원의원이 되었는데

임기를 마치고 1984년도에 몸에 가벼운 병이 들어 짧은 시간을 집에서 요양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딸이 3명 있었습니다. 요양 중에 딸들과 이야기하고 놀기도 하고

팔베개하고 잠도 재워보면서 가정의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딸들이 어릴 때에는 가정에 함께 있는 것이, 상원의원이 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유력한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1984년도에 상원의원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출마 선언이, 상원의원 열 번을 한 것보다도 그를 더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폴 통가스가 상원의원에 출마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자녀와 가정을 위해서 상원의원을 포기했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게 되었고 목사님들도 설교할 때마다

이 사람의 예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미국의 상원의원이 되는 것보다 내 자녀들, 나를 닮아서 참 못생긴 자녀들,

그 자녀들이 더 귀중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내 처, 내 남편이 억만금보다도 더 귀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정을 떠나서 어디 마음 둘 곳이 있겠습니까?

가정을 떠나서는 사람 마음 둘 곳이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