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예루살렘을 향하여

LNCK 2016. 5. 28. 23:06

◈예루살렘을 향하여               눅9:51            출처보기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9:51



◑서론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것이 주님께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셨을까요?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가볍고 즐거운 여행이 아니라, 왜 굳게 결심하셔야 했을까요?


실상 예수님께서는 이 때뿐 아니라, 예루살렘을 계속 의식하시며 길을 가시고 계셨습니다.


“...이 비유를 드신 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데다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눅 19:1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 서서 걸으시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다(눅 19:28)”,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시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눅 19:4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점점 다가가시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유는 거기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어떤 운명을 감지하시고 그 길을 결연히 맞이하시려는 책임감있는 모습입니다.


“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에 관하여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인자가 이방 사람들에게 넘어가고, 조롱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침뱉음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눅 18:31-33)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의미를 분명히 밝히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눅 18:3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삶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묘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그 길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시길 원하십니다.


◑1. 하나님의 섭리에 이끌리는 삶: 하나님을 향한 존재의 정체성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눅9:5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길이었습니다. 승천하실 기약이 차갔기 때문입니다.


첫째, 여기서 “승천”이라는 말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의 길을 하나님께서 받아 올리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승천”이라는 말의 원어인 '아나렘피스 received up' 의 뜻은

취하여짐, 또는 받아 올려짐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9장 31절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신다는 것과 의미는 같은 것입니다.

별세 (엑소더스) 즉 출애굽처럼 이 세상을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즉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을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으로 여기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하나님을 향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떠나있던 하늘로 복귀하는 길이었습니다.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의 관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당하는 죽음의 고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는 과정일 뿐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해 친히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의 생애를 다 마친 후에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받아 올려주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라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요일 3:1-2).”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먼 나라에서 실패하고 낙심한 탕자가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께서 기쁘게 맞아 주시고 품에 안고 사랑하시고 높여주신 것처럼

우리의 죽음의 길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것은 예수님은 본향을 하늘에 두고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 이 말은 우리의 존재가 본래 하늘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늘로 돌아갈 존재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삶의 자리가 이 땅이지만, 그분의 본질은 하늘에 속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신성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 땅을 살아도 하늘의 신분을 결코 망각하지 않으시고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가까워짐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다윗도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시 73:25)”,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 39:7)”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


당시에 최고의 자랑인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이었지만,

그의 진짜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천명하였습니다.


우리는 땅에 실지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고전 7:22-23)”


여러분은 어디에 닻을 두고 사십니까? 본향이 어디입니까?

그 여행 중에 기약이 차가는 것을 느끼십니까?

나그네와 행인같은 인생이라고 신약의 저자들은 인생을 규정짓습니다.

셋째, 기약이 있는 인생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땅의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보내는 기간이 정해져 있어서 점점 차오른다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넘치면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약이 있는 이 땅의 삶을 사셨습니다.

영원히 이 땅에 거할 것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낼 수 없는 최선의 일정을 사셨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기약이 있습니다. 이 땅의 생애란 결코 영원한 것이 못됩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결국 주님께서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끌리는 삶으로 바라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당하는 현실의 고난과 미래에 닥칠 고난들이

하늘나라로 가는 길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는 것과

본질적으로 우리가 하늘에 속한 존재하는 것을 잊지 않게 한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 땅의 인생에는 기약이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기약이 차가면, 우리는 결국은 하나님께서 돌아갈 인생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정한 기약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인간에 대한 책임감에 이끌리는 삶: 이웃을 향한 책임적 존재로서의 정체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눅9:51b


둘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은, 인간을 향해 나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책임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은 인간의 죄를 친히 짊어지고

그 아픔을 대신 당하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년 유월절 어린양들, 무수한 양들이 죽임을 당하는데

이제는 단번에 영원히 속죄를 이룰,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천상적인 존재의식이

결코 무책임하게 세상을 비관하고 포기하는 것으로 변질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런 세상에 대한 책임감이 그 죽음의 길에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셔야 할만큼,

우리의 죄에 대한 처리의 문제가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이 구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처리하기 위한 길은, 예수님마저도 굳게 결심하셔야 가실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는 너무 죄에 대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시기에

당연히 자동적으로 용서하시는 분으로 쉽게 넘어갑니다.


하지만 죄의 처리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죄를 자백하면 그만이지만, 주님은 그 죄사함을 위해,

우리가 저지른 실수의 책임을 지기 위해 굳게 결심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야만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신 것에서 예수님의 단호한 책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츨라프 하벨은 해방된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세계적인 유명인사로 발돋움 한 사람입니다.

그는 체코 국민에게는 이미 극작가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

소련 전체주의의 권력에 대항해서 진실을 말한 작가였습니다.


77헌장 운동의 초대 대변인이자 반체제 인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정체성 문제의 열쇠를 책임성에 두고 있으며

“인간의 비밀은 책임성이라는 비밀이다”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책임성은 정체성을 확립한다. 그러나 정체성 때문에 우리가 책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책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정체성을 갖는 것이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의 저자 어네스트 헤밍웨이.

그는 훌륭한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멋진 수염을 기르는 사나이로도 유명했습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위스키 회사 간부가 헤밍웨이를 찾아왔습니다.

헤밍웨이는 강하고 대담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 사냥과 낚시를 유달리 좋아했지만

술은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에,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조금은 의아해했습니다.


비서를 따라 들어온 손님은 헤밍웨이의 턱수염을 보고는 매우 감탄했습니다.

"선생님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턱수염을 가지셨습니다.

우리 회사에서는 선생님의 얼굴과 이름을 빌려 광고하는 조건으로

4천 달러와 평생 마실 수 있는 술을 드리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헤밍웨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 정도의 조건이면 훌륭하다고 생각한 위스키 회사 간부는 기다리기 지루한 듯 대답을 재촉했습니다.

"무얼 그리 망설이십니까? 얼굴과 이름만 빌려 주면 그만인데…."


그러자 헤밍웨이는 무뚝뚝하게 말했습니다.

"유감이군요. 전 그럴 수 없으니 그만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헤밍웨이의 완강한 말에 당황한 손님이 돌아가자, 비서는 왜 승낙하지 않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의 무책임한 말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야. 얼굴과 이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회사에

내 얼굴과 이름을 빌려 준다면 어떤 꼴이 되겠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맛없는 위스키를 마시며 나를 상상한다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일이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이름과 전 생애를 세상에 어떤 것에도 쉽게 맡겨서는 안됩니다.

오직 우리를 위해 철저한 책임감을 느끼시고,

기꺼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 땅을 살아가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이런 이웃을 위한 책임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 그 사람만이 분명히 그 만큼의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책임감의 크기만큼 그 사람의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나 혼자 천국 가는 생애가 아니라, 나 혼자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땅히 이웃을 위해 책임을 지고, 고난당할 각오를 하고 사는 것입니다.


카네기는 '실패한 사람들의 10가지 공통점'에서

그 첫 번째로, “모든 책임을 남에게 전가한다.

이런 사람은 남에게 핀잔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핑계를 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책임 전가의 논리는 있으나 책임 공유의 윤리는 없다.

누가 우리 시대를 책임져야 하는가요?


책임전가의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이웃의 죄를 담당하는 남다른 책임감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독특한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고 주님처럼 책임감을 짊어지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3. 자신의 목적 지향적인 삶: 사명감에 집중된 정체성
  

“굳게 결심하시고” 눅9:51b


셋째는 자신을 향해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분은 스스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이기적 본능을 극복하고

본래적 인간성 즉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구현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회복된 인간의 모습, 진리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유일한 승리자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주님의 삶은 굳게 결심하시고 사는 삶입니다.

여기에는 삶의 진지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신 것을 통해서

이처럼 삶의 진지성을 고려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 삶의 길이 얼마나 무거운 걸음인지를 아셨습니다.

그것은 인생전체가 예루살렘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 분의 삶은 철저하게 목적 지향적이었습니다. 한눈팔 겨를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굳게 결심했다”는 말의 헬라어는 “스테리조 아우토스 프로소폰”

그 뜻이 "얼굴을 움직일 수 없이 확고하게 고정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삶의 방향을 어떤 일정한 곳으로 향하도록 움직일 수 없이 세팅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실제 어떤 것도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그 걸음을 비켜가게 하지 못했습니다.

부모 형제들도 그 길을 말리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자기들이 의도하는 성공지향적인 세상 원칙으로 예수님을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베드로가 그 길을 말릴 때, 그는 심각하게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아셨지만, 그렇게 그 길을 한 걸음씩 가기로 결단하신 것입니다.


자기의 삶에 어떤 것도 주도적으로 끼여들 여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자신의 사명지향적인 삶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는 하루하루의 일상의 소일거리가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속량하신 값진 생명으로 주어진 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그런 종류의 가벼운 생을 살 수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분명한 사명감을 가지고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사는 이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살고 싶어하던 내일의 하루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은 남들이 우습게 여기는 정도의 가벼운 삶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생명을 이해한다면,

결코 이 세상의 하루하루를 방향 없이 배회하며 천하게 넘길 수 없습니다.


돈을 벌어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좋은 직장에서 승진하고,

사람들에게 자랑스런 인물이 되는 정도의 삶으로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의 숙연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이 얼마나 중차대한 것이었는지, 아버지의 장례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9:59-60).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는 사람에게도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라고

경고하실 정도였습니다(9:62).


주님은 우리의 생애가 주님처럼 철저하게 자신의 사명에 집중되길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더 깊은 숭고함과 사랑과 애정이 깃들여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스 기니스의 저서,「소명」에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이들이 가끔 그것에 다시 직면하기도 한다.

   인생은 결국 무엇인가? 지금까지 이룬 성공은 진정한 성공인가?


   그 성공은 다른 것들은 희생시키면서 이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가?

   크든 작든 온 세상을 얻었지만 우리의 영혼을 싸구려 값에 팔아넘긴 채

   정곡에서 빗나가는 인생을 살지 않았는가?


   워커필시 (Walker Percy)가 썼듯이 “당신은 만점을 얻고도 인생에서 낙제할 수 있다.”

여러분은 최종적인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요 13:1)”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찼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때 더욱 굳은 결심을 하신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인생관 속에서 삶의 진지성이 나옵니다.

슈바이처 목사가 그렇게 자신의 세상적인 모든 영광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아프리카로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하게 종말론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결국은 돌아갈 인생이라면, 굳게 결심하고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생은 얼마든지 자신을 허비하고 인생을 가볍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결국을 아는 사람은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더구나 주께서 내 생을 값지게 하시려고 어떤 대가를 치루셨는지 안다면

삶을 가볍게 소진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웃고 즐기는 농담 속에도, 영화를 보고 음악을 감상하는 순간순간의 작은 행복 속에도,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던 주님의 무거운 발자국이 닦아 놓은

고결한 무게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결단하신 주님의 발걸음 소리를 마음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과 함께 하나님이 부르신 자신만의 소명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오스 기니스의 저서,「소명」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소명(calling)’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한다는 진리이다.


▲결론
유명한 악성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은 32세가 된 해에  

자신의 운명을 슬퍼하며 하일리겐슈타트라는 도시로 요양을 떠납니다.

서서히 나타나는 귓병 때문에 괴로운 나날들을 그곳에서 보내게 됩니다.


거기서「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라는 글을 씁니다. 이 유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지난 6년 동안 나아질 것이란 희망 속에 살아왔다. 하루하루 절망의 연속이었다.

나는 귀머거리가 되고 말았다. 잠시 후면 나는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오 하나님이여! 불우한 인생을 마치기 전에 온전한 기쁜 날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단 하루만이라도 기쁨을 만끽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힘을 다해 작곡한 이 음악들을 단 하루만이라도 깨끗한 귀로 들어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의 기도는 처절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서를 써 내려가면서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음악에 대한 열정을 깨닫습니다.


“내가 죽음을 생각했을 때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나를 붙들었다.

문득 하나님이 내게 명령하신 일을 다 끝내기 전에는 이 세상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내 손을 통해 태어나야 할 음악들…. 그것을 생각하며 나는 지금 비참한 삶을 견뎌 내고 있다.

나는 하루하루 내 마음에 인내를 새로 쓰고 있다.

거침없이 나를 위협하는 운명이 내 삶을 끊어 버리는 순간이 오더라도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아! 사람들은 언젠가 깨닫게 될 것이다.

비참한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고도 음악가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몸부림친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또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기처럼 불행한 어떤 사람(베토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위안을 얻게 될 것이다.


나의 예술 열정이 활활 타오르기 전에 죽음이 닥쳐온다면,

그 운명이 아무리 무자비할지라도 나는 그 운명과 맞서 싸울 것이다.

언제든 나는 용감하게 그 운명을 맞이하리라.”


그는 드디어 고통을 이겨냅니다.

그 고통 중에서 작곡한 교향곡 2번은 고통의 그림자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너무나 맑고 깨끗하고 밝다는 사실 앞에 오히려 신비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 후 그는 24년 동안을 귀머거리로 살면서 계속 작곡 활동을 계속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교향곡 제9번은 '기쁨의 송시' 라는 시를 작곡한 것입니다.


이 곡이 처음 연주되었을 때 이를 들은 모든 청중들은 다 함께 일어나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은 그 소리를 듣지도 못한 채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악보를 넘기며

빙그레 웃고만 있었습니다.


열렬한 환호성도 그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귀는 남이 들을 수 없는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는 기쁨의 노래를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