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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인가 함께인가?

LNCK 2016. 6. 9. 13:49

혼자인가 함께인가          1:24~31, 마18:19~20       16.04.03 스크랩, 출처

    

 

      

어떤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아프리카 부족에 대해 연구하던 한 인류학자가 한 부족에 갔어요.

그러고 아이들을 모아놨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아프리카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구하기 쉽지 않은 딸기를

한바구니 갖다놨는데요, 아주 빨갛게 잘 익은 달콤하고 새콤한 그 딸기를 놓고

, 여기에 딸기 바구니가 있는데, 너희들 저쪽까지 뛰어서 1등하는 아이에게 이거 다 주겠다.

한번 달리기 시합해볼래?”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인류학자가 !” 하고 출발을 시켰는데,

온 힘을 다해서 뛸 줄 알았는데, 아이들이 갑자기 서로 손을 잡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더니 같이 뛰어갔다가, 같이 뛰어옵니다. 함께 손을 잡고 뛰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아니, 1등하는 아이에게 이걸 준다고 했는데, 왜 함께 손을 잡고 뛰니?”

그랬더니 그 아이들이 대답하는 말, 그 부족 언어로 우분투그러는 거예요.

 

우분투라는 말은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다는 거예요.

 

, 너희들 이거 1등한 사람한테 준다.” 고 했는데

그 때 그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가, 나머지 다른 아이들이 다 슬픈데

어찌 나만 기분 좋을 수가 있느냐고 대답합니다.

 

그는, 아이들이 다같이 둘러앉아서 함께 낄낄거리고 웃으면서

함께 그 딸기 바구니를 먹는 모습을 봤어요. 참 아름다운 장면이지요.

 

그러나 어딜 가나 1등 아니면 최고를 따지는 세상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이 시대, 이 문화는

함께라는 단어를 잃어버렸어요. 혼자예요.

 

창조의 섭리는 함께예요.

그런데 진화론은 혼자입니다.

 

왜요? 내가 1등을 해야 되니까 내가 적자생존을 해서 이겨야 되니까요.

진화론은 그렇게 해서 개인주의 사회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나도 모르게 세상은 나를 그렇게 세뇌시키고 있어요.

 

 

혼자 사는현대 사회 현상

 

한국 보건사회 연구원이 2016217일 발표한

<가족변화에 따른 결혼 출산형태 변화와 정책 과제 보고서>를 봤더니

그 안에 이런 내용이 있더라고요.

 

한국의 ‘1인 가구수는 30년 사이에 8배 이상이 됐대요. 거의 10배가 됐대요.

그러니깐 1985661천 가구였는데, 1인가구가요,

2015년 현재 5061천 가구로 증가했습니다. 거의 10배 가까이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것이 가속화 되어서, 20년 후인 2035년에는

1인가구가 2인 이상 사는 가구 수를 뛰어 넘는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혼자 사는 집이, 훨씬 더 많아진다는 거예요.

 

그래서요 혼자를 키워드로 한 책들이 인기를 끌고 있어요.

요즘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들 가운데 제목들, 유명한 사람들이 다 쓴 거죠. 이런 책을 썼어요.

<혼자 있는 시간의 힘>, <고독이 필요한 시간>

<나와 잘 지내는 연습>,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이게 다 책 제목들입니다. 혼자를 긍정적으로 얘기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혼자니깐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혼자 괜찮은 거예요.

그리고 혼자라는 것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얘기를 해주고 있어요.

 

그러나 혼자라는 것은, 만남이 해체되고, 관계가 해체되고, 사회가 해체되는 거예요.

 

여러분 큰 그림을 보면, 우리가 가끔 혼자 되어야 되는 상황들이 있어요.

주님께서도 혼자 기도하셨어요. 혼자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함께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혼자라는 것이 이제는 함께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온 단어가 됐기 때문에

요즘 혼밥족 이라는 말이 아주 흔히 쓰는 말이 됐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요 이런 단어가 있질 않았어요. 근데 혼밥족이 뭐죠?

혼자 밥 먹는 족속이란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혼밥족에도 레벨이 있대요. 혼밥족의 레벨을 아십니까?

-평민레벨. 그냥 보통 혼밥족은요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 사서

혼자 먹는 사람. 이 사람은 평민레벨이래요. 그 위의 더 고수가 있어요.

 

-고수레벨. 이 사람은 푸드코트에서 혼자 먹는 사람. 고수레벨이래요.

 

-그 위의 단계가 있는데 영웅단계. 영웅단계는요

중국집에서 짜장면 혼자 먹는 사람. 이 사람은 영웅단계랍니다.

 

-그 위의 단계가 있는데 지존레벨입니다.

고기 집에서 여유 있게 등심 1인분 시켜가지고 혼자 잘 먹고 이 쑤시며 나오는 사람.

이 사람은 혼밥족의 지존레벨이래요.

 

-근데요 입신레벨이 있어요. 신의 경지에 이른 레벨.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뷔페식당에서 혼자 밥 먹고 여유 있게 나오는 사람.

이 사람이 입신레벨이랍니다.

 

혼자 하는 것이 이제는 이상하지 않은 그러한 세대가 되었어요.

혼자서 밥을 먹어요.

그러나 밥은요, 혼자 먹는 게 아니예요. 함께 먹는 거예요.

 

김지하의 <밥은 하늘입니다> 라는 시가 있어요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 하늘을 몸속으로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여러분 밥은 같이 먹는 거예요. 함께 먹는 것.

근데 이제는 혼자 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됐어요.

가끔 혼자는 괜찮지만, 매일 혼자는 문제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역사는요 함께할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는, “함께하는 거예요.

진화의 논리는, 나뉘고 혼자가 되는 거예요.

왜요? 적자생존을 이어가기 때문이지요.

 

본문 창세기 126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합니다.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의 형상을 따라 그렇게 됐나요?

아니죠. 누구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나의 모양대로? 아니예요, 우리의 모양대로.

내가 사람을 만들고? 아니예요.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이라 말하신 여기에서 뭐가 나오냐면 삼위일체.

이미 예수님께서도 창조 때에 함께 계셨다는 거죠.


삼위일체가 뭡니까?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보혜사.’ 삼위지만 하나라는 거예요.

이게 삼위일체입니다. ‘우리라고 표현했어요.

하나님도 홀로가 아니라, ‘우리로 함께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요 이 땅에 그분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골1:14~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천지창조 사역에 동참하였다고요.↙

 

1:14-16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예수님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께서 창조한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내가가 아니라 우리,

나의가 아니라 우리의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고 그 사역속에서 함께 했던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주고있어요.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 때도 동역하셨지만, 같은 맥락으로 

창세기 2장으로 넘어가면 18절에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혼자 사는것이 좋지 아니하기에, 아담이 혼자 있는데 좋지 않았다는거죠.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함께 살도록 한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예요.


하나님이 함께 그 일을 하셨고, 또 함께 하도록 그렇게 창조하셨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어요


하늘에 계신 나의? 뭐요? 아니예요...우리.

여러분 기도가 우리의 이런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거죠.


무슨 얘깁니까? '나 혼자를 얘기하지 마라. 함께 가야된다. 아름다운것은 함께 가는것이다.'

그래서 전도서 49절에 보니깐 이렇게 말씀합니다


4: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여러분 함께 가야된다는거예요. 성경은 계속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함께 해야된다.


근데 우리는 어느새 혼자란 단어에 익숙해져있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함께하다가 상처를 경험했거든요. 함께하다가 문제를 경험했거든요.

함께하다가 배신을 경험했거든요. 함께하다가 갈등이 일어났거든요.


그러니깐 난 이제 더이상 그렇게 안해!” 그러고 우리는 혼자가 자꾸 될려고 해요.

아니예요. 그랬기 때문에 더 우리는 함께 해야 되는거예요.

혼자 할수록 그 인생은 불행한 인생이 되는거예요.



◑역사의 교훈


여러분 어떤 조직과 어떤 나라와 그리고 제국과 이 모든것들 보세요.

제가 역사를 연구하다보니깐요, 역사를 연구해가지고 전체를 보면서

어떤 제국 나라의 흥망성쇠가 어떻게 흥했고 어떻게 망하게 됐는가?


어떤 제국이 망했을때는 제가 보니깐요 외부적인 요인들 많이 얘기합니다.

근데 결국은 내부적인 요인이예요 다. 여러분 내부가 튼튼하면요 외부는 뭐든지 이길수있어요.


저는요 이 역사를 연구하다가 느낀것이 뭐냐면

그 나라가 무너질때는요, 제국이 무너질때는 두가지예요.


하나는 질서가 무너지는거예요.

두번째는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던거예요.


로마를 예로 한번 들어볼까요?

가장 천년 제국을 만든 로마. 어떻게 그렇게 될수있었는가.

가만히 보면 그의 흥망성쇠는요, ‘함께란 단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르더라고요.


로마가 천년을 가고 모든 나라.

뭐 여러분들이 지난주에 진시황 얘기도 했지만요. 진시황 그냥 짧은 나라로 마감하고 말았어요.

근데 어떻게 그렇게 천년의 대 제국을 만들수 있었는가.

그거는요 그 안에 흐르고있는 강물 하나가 있으면 되죠. ‘함께라는 강물이요.

그 강물의 물이 말랐을 때 망하고 말았어요.


왕정과 공화정과 제정 세 시대로 우리가 로마를 이야기하잖습니까?

왕정시대. 왕정시대도 왕이 마음대로 했던게 아니예요.

시민회에서 함께 결정하는것을 왕이 함께 그렇게 갔던거예요.


여러분 로마의 왕정은 독특했습니다. 왕 혼자 밀어붙인게 아니였었어요.

함께 갔던거예요. 그게 왕정이였어요.


그러다가 공화정으로 이제 변화가 됐죠?

그래서 원래는 원로원이라는것도 왕정시대에 그냥 있었던 것이지만은

공화정시대에 아주 그것이 귀족그룹이 됐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집정관이 나오고 거기에서 중요한 요직들을 다 차지하고 그러면서

오히려 공화정 시절에 시민들이 일반백성들이 소외가 된거예요.

그들이 좋은 요직에 갈수도 없을 뿐만아니라, 그리고 그들은 원로원이 될수도 없을뿐만 아니라

귀족들만 그렇게 됐거든요.


그럴때에 로마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 하나가 될수있는 사건하나가 일어납니다.

켈트족이 침입을 한거예요.


여러분 로마에 있어서 가장 망할뻔했던 때가 그때였습니다.

켈트족이 쳐들어와가지고 다 완전히 그냥 뭐 마지막 몇명이 저항을 하다가 도저히 안되가지고 조공을...

뭐 금 주고, 조공을 바치면서 화해를 하고서 이제 이게 망할뻔하다가 간신히 살아나는거예요.


근데 왜 망할뻔 했는지 아세요?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에. 백성들이요,

군인들이 아이 뭐 내가 이렇게 싸워봤자 뭐해? 나는 저 요직에도 못가고, 나는 뭐 그냥...”

그들이 잘못해가지고서 빚을 지게 되면 노예 신세로 전락이 되고 뭐 이런...

그러니깐 싸울 그런 마음을 갖질 않았어요. 그러니 패할수밖에 없는거죠.


여러분 아무리 켈트족이 세다 할지라도요, 내부가 튼튼하면은 다 이길수있었던 거예요.

근데 그게 다 그냥, 다 뿔뿔이 흩어졌으니까 그때 이래선 안되겠다.” 그러면서

로마가 그 실패를 교훈삼아가지고 로마의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게 소위 말해서 거기에서 유명한 법 하나가 만들어지는데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이라는 법이 만들어집니다.


이 법의 주요 골자는 이겁니다. 일반 평민들이 요직에 올라갈수있고 원로원에 들어갈수있고...

여기서부터 로마의 변화가 시작이 됩니다.


이전에는 완전히 망할뻔하다가 오히려 완전히 다시 강력한 나라가 되기 시작합니다.

함께라는 강물이 말랐을땐 망할뻔 했어요.

그러다가 다시 함께하려고 했을때 다시 강력한 나라가 됐어요.


그러다가 이제 시저에 의해서 제정이되죠.

물론 시저는 최초의 황제가 아니고 그 다음 아우구스투스가 최초의 황제였지만은

그 모든것들을 만든 사람은 시저였었죠.


어쨋든 그 제정시대에 더 강력한 나라가 될수있었던것은

자기가 곧 전쟁했던 나라들, 그 나라들의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줬어요.

그래서 사도바울도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을수있었죠.


시민권을 줄 뿐만 아니라 선거권을 줄뿐 아니라 피선거권까지 줬어요.

뭐냐? 요직에 올라갈수있고 황제까지 될수있는 자격을 준거예요.


, 지금 시대에 예를들어서, 근대사 속에서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시겠어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겼어요. 그래서 패전국한테

, 내가 너희들한테 시민권 줄게. 또 너희들중에 잘 하면 대통령도 돼.”

그런법을 만든 나라가 있을까요? 아니요. 그런데는 없어요.


그러니깐 로마가 대단했던거죠.

그래서 소위 말해서 로마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황제가 되기도 하고요.

여기에 흘렀던 물줄기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함께라는것에서 왔어요.

결국 그것이 말랐을때 로마는 또 무너지게 되는거예요.


여러분 역사가 그렇습니다. 어떤 조직이 그렇습니다.

어떤 나라가 그렇고 제국이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예요.

혼자일때 편할것같죠? 아니예요. 혼자일때 불행한거예요.


지난주에 우리 실버 아카데미를 개강하면서, 제가 개강설교를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백세까지 건강하게 그리고 장수하며 사는 사람의 특징, 예외없는 공통분모가 있는데

그것은 어떤 좋은걸 먹어서가 아니예요. 좋은것보다 더 중요한것, 친구가 있는 사람이예요.

친구가 있는 사람은 끝까지 행복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친구가 없는 사람은 혼자 고독하게 불행하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거는 연명을 하는거예요 연명. 우리가 인생을 연명해서 되겠습니까? 아니죠.


여러분, 함께 할때. 거기에서 늘 제가 얘기하잖아요 그렇죠?


내가요, 백조원을 벌었어요.

그래서 오늘 점심값 내가 천만원짜리 점심을 먹어요.

그런데 혼자 먹는 사람이요, 불행한 인생이예요.


근데요 몇천원짜리 라면 한그릇을 먹더라도 같이 웃으면서 먹을수있는 사람.

같이 울면서 먹을수있는 친구가 있는사람. 이 사람이 행복한거예요.


여러분, 함께라는것이 우리의 인생을 기름지게하고, 빛나게 하고, 우리의 인생을 멋지게 만드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우리가 경험할수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창세기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 그런데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어요.

혼자있는것이 보기 좋지않아서 아름답지 않았다는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은 아름답게 창조하셨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 그래서 우리가 찬양송가에도 이런 찬양이 있어요.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그 아름다운 세상. 하나님이 주신 이 멋진 아름다운 세상.


여러분 어떠한 작가가 어떤 미술가가 어떤 예술가가 어떻게 그렇게 멋있는것을 만들수있을까요?

해질때 한번 보세요. 해질때마다 그 모습이 다 다릅니다.

구름이 얼마나 있느냐, 또 습도의 농도가 어떻게 되느냐, 이것에 따라서 매일 해지는 모습이 다릅니다.


여러분 고양시가 좋은게 뭔지 아세요? 해지는게 잘 보여요.

참 복받은 사람들이 고양시에 사는 사람들이예요. 서울에 사시는 분 이사오시기 바랍니다.


해지는것을 볼 수 있다는, 저는 늘 볼때 감동을 받습니다.

이 창조의 섭리가 얼마나 대단한가. 꽃을 보세요.

하나님의 이 아름다움. 그렇죠? 참 아름답게...


근데 진짜 아름다움은 뭔지 아세요?

창조의 진짜 아름다움은 우리의 관계가 아름다워질때. 진짜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거예요.

이게 창조의 섭리예요. 관계가 아름다워지는 때압니다.


전에 제 친구얘기를 들려드린적이 있어요. 제 친구중에 조경하라는 친구가 있어요.

이 친구가 저 고등학교때 친한 친구였었어요.

그 친구의 아버지가 원래 그 당시 한 대학의 학장을 하시다가

그러면서 신학을 공부해가지고 나중에 목회를 시작하셨어요.


동병상련의 그러한 어떤 마음이 있었을까요?

그래가지고 굉장히 가까웠어요.


같이 노래도 사랑을 해서 노래하면서 또 거기 여러가지를 하면서 좋은 친구였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각자의 길로 갔으니깐 헤어졌어요.

저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 친구는 파리로 갔어요.


원래 이 친구의 전공이 수학이였었어요. 하여간 이 친구가 수학을 얼마나 잘하는지

그 당시 <수학의정석 1, 2> 이거 있잖아요? 그걸 페이지까지 다 외우던 친구였었어요.


수학과로 갔거든요. 그래서 이제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나중에 스위스대학의 교수가 됐어요.

그러다가 이 친구의 부전공이 뭐였냐하면 파이낸싱이였었어요.


그게 부전공이였는데 어떤 분이 같이 우리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일하지 않겠느냐.” 제안을 해가지고

어떤 파이낸싱 회사의 부사장으로 갔다가

그리고 다시 자기가 자기 회사를 차렸는데 이게 너무 성공을 해가지고

스위스에서 살고 있는데 스위스대학 교수하다가 그걸 한건데요,

그 스위스에서 가장 성공한 코리안이됐어요.


이 친구가. 정말 오래간만에 만난거예요.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몇년전에 만나가지고서

한참 반나절 그 친구하고 과거얘기 현재 얘기하면서 얼마나 귀한시간을 가졌는지 몰라요.


그러면서 제가 질문을 한번 했어요. “경하야, 네가 사업을 할거라는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고,

그리고 사업을 해도 이렇게 잘 성공할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사업에 성공을 했어?”


그랬더니 이 친구의 대답,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어. 그래서 아름답게 하면 돼.”


굉장히 추상적인 얘기같은데 어떻게 가만히 생각해보면 굉장히 또 구체적인 얘기가 되요. 그렇죠?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어. 그래서 사업도 아름답게 하면 돼.”


이 친구가 또 예술성이있어요.

노래도 잘하고 그 당시 우리학교의 우리 학년의 미술부장을 하기도 했어요.

아름답게 하면 돼.” 그말이 제 뇌리에 아직도 새겨져있어요.


그래, “아름답게...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어.”

그런데 아름다운것 하나가 있었어요. 뭔지 아세요? 혼자있는게 안 아름다워요.

그래서 여자를 창조하셨어요. 아름답게 창조하셨어요.


여러분 진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어떤 좋은 경치의 아름다움보다 비할수 없는 감동적인 아름다움은 뭔지 아세요?

관계의 아름다움입니다.


여러분, 정말 아름다운 경우가 펼쳐져 있다 할지라도

싸우는, 갈등하는 관계속에서는 그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습니다.

진짜 아름다움은 뭔지 아세요? 관계의 아름다움이예요.


혼자있는것이 아름답지 않으셨어요. 보기에 좋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함께 하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어요. 이게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예요.


다시 우리가 거기로 돌아가야되요.

알아요. 왜 혼자 그러고 있는지. 같이 있다가 상처를 경험했잖아요. 내 마음이 멍들기도 했잖아요.

같이 있다가 배반을 당하기도 했잖아요. 같이 있다가 그 문제를 만났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아니야! 이제 같이 안해!”...

아니예요. 그래도 같이 해야 되는거예요.


그 상처, 그 아픔, 그 문제는 관계의 문제는 뭘로 풀수만 있는지 아세요?

관계로만 풀수있는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세요. “절대 혼자가 되면 안된다. 함께해야된다.”


마태복음 1819절로 20절의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여러분, 그렇게 우리는 놓았던 손을 다시 잡아야되요.

가장 아름다운 창조의 아름다움으로 돌아가는 그 비결. 우리가 관계가 아름다워지는거예요.


내가 다시 그 손을 잡는거예요. 그리고 함께하는거예요.

거기에서 인생의 진짜 의미와 가치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기적이 무언지를 우리가 경험할수있는거예요.


그리고 진짜 감격은 우리가 멋진 경치를 경험하는 감격보다 더 큰 감격은

우리의 관계속에서 우리가 하나되어서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이게 정말 감동이고 감격인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세요. 세상은 혼자가 되라고 얘기하지만 아니다. 함께해야된다.”

오늘 주님의 음성을 들을수있는 귀한시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김승기 선교사님의 찬양을 들으시겠습니다.

 

<Sermon Song -김승기 선교사>

 

참 아름다운 창조의 세상은 함께 손잡는 세상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 약속하셨죠

 혼자는 외롭고 힘든 인생. 함께 두손을 잡아줘요

 사랑으로 안아줘요 아름다운 세상. 함께 멋진 인생 만들어가요. / 


 참 아름다운 창조의 세상은 함께 손잡는 세상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 약속하셨죠

 혼자는 외롭고 힘든 인생. 함께 두손을 잡아줘요 /

사랑으로 안아줘요 아름다운 세상. 함께 멋진 인생 만들어가요

 사랑으로 안아줘요 아름다운 세상. 함께 멋진 인생 만들어가요.

 

아멘, 하나님 우리의 고백입니다. 결단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앞에 올려드립니다.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함께 할건가? 정말 중요한 얘기를 나누려고해요.


어떻게 함께 할껀가? 두가지를 포기해야되요.


첫번째, 열등의식을 포기해야됩니다.

여러분, 우리를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것은 열등의식이예요.

열등의식은 나를 교만하게 만들고요, 열등의식은 내가 시기하고 질투하게 만들고요,

열등의식은 내게 상처를 가져다줍니다.


여러분 내가 다른사람보다 더 많은 상처를 가진다. 왜 그런지 아세요?

자신의 열등의식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열등의식이란것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사울을 보세요. 대단하지 않았습니까? 왕이었어요. 근데 그 열등의식때문에...

만약 다윗을 껴안았다면, 다윗의 손을 잡았다면, 그의 인생이 얼마나 멋지게 세워졌을까요?

그 열등의식이 결국 비교의식을 갖게 되고, 그리고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싸웁니다. 죽이려고 합니다. 결국 그의 인생은 혼자가 됐어요.

다윗과 함께 손을 잡았다면 얼마나 기가 막힌 인생이 됐을까요?

국 혼자가 됐고 정말 불행한 인생으로 마감하고 말았어요.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너무 견딜수가 없었어요.

여러분 그의 열등의식이, 그의 인생에 잘못된 불행한 결론을 만들었다는거예요.


여러분 열등의식을 포기해야됩니다. 여러분 제가 늘 얘기하죠, 상처는 누가 주는게 아니예요.

자기가 받는거예요. 자기가 해석해서 받습니다.


, 제가 예를 들어서 저 때문에 상처를 받은 분이 많이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왜요? 아무한테도 여러분들이 얘기 안했지만, 지나가다 저한테 인사하는데

제가 인사를 안 받은 경우가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옛날에 어떤분은 제가 세번 그분이 저한테 인사했는데 제가 못받았으니깐요.

여러분 제가 어떤 얘기를 했을때 왜 목사님이 저런 얘기를 하지?” 하면서

상처를 받은 그런 경험도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여러분이 저한테 말을 안 했을뿐이지 그런분이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잘 보세요. 그러면 제가 상처를 주려고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상처를 주려고 제가 그렇게 말했을까요? 아니예요. 절대 그렇지 않았어요.

저는 상처를 주려는 의도는 가진 적이 없어요. 근데 어떤 이는 상처를 받는거예요.


무슨 얘기인지 아세요? 상처는 자기가 받는거예요.

건강한 자아상이 있으면은요 상처 절대 안받습니다.


그래서 치유해야 될것은 그 열등의식이예요.

상처, 자꾸 관계가 깨지고... 왜 그런지 아세요?

그 열등의식 때문에 그런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포기해야 될것, 그 열등의식이예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창조하셨는데요?...

나를 만드신바라.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바라.’ 포이에마 라고 말하고 있잖아요.

즉, 걸작품이라. 나를 그렇게 만드신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비교해요. 아니예요. 비교처럼 참 불행한 인생 없어요.

예를들면 상품은 비교하는거예요. 걸작품은 비교하는게 아니예요.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거예요. 비교하니깐 스스로 자기가 비참해지거든요.

그러니깐 자기를 비참하게, 나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니깐

누구 한마디래도 그걸가지고 이상하게 해석을 해요. 그래가지고 자기가 상처를 받는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앞에서 성숙한다는 의미가운데 가장 중요한것은요, 내 열등의식을 제거하는거예요.

오늘 이 시간에 정말 우리의 기도가 그 기도가 되는, 하나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탄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열등의식을 물리쳐주시고 완전히 내 안에서 깨끗하게 치유해주십시오.”

그런 기도를 드릴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다른집 애가 대학에 합격을 했어요. 근데 우리 애는 떨어졌어요.

그때에 진짜  건강한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요, 그걸 박수쳐줄 줄 알아요.

근데요 아니 가만있어보자, 쟤는 붙었는데 넌 떨어졌어?”

아니예요. 지금은 떨어졌지만요, 나중에 보세요. 떨어진 애가 더 잘될 수 있어요.


여러분 그거 가지고서 자꾸 비교하고, 스스로 상처 받을 수 있어요.

그건 왜 그런지 아세요? 건강한 자존감이 없기 때문이예요.


실제로 떨어진 애가 훨씬 더 잘되는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대학시험에서 떨어졌어요.

여러분 다른 사람이 잘되는것 박수쳐줄수 있는사람이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사람이예요.

그 사람이 같이 갈수있고, 그 사람이 행복이 뭔지를 경험할수있는거예요.


그때 박수 못쳐주면은요, 스스로 고립되고 그리고 혼자 아파하고 상처받고

그래서 우리가 우리안에 지워져야 될것. 완전히 제거될 것은 열등의식이예요.


그 열등의식을 포기할수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가 포기해서 되는게 아니라 하나님, 그렇게 나를 만들어주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거예요.


두번째는 기득권이예요.

열등의식을 포기해야되고 기득권을 포기해야되요.

내가 가진 기득권. 그걸 포기할줄알아야되요.


여러분, 내가 가정에서 아니면 내가 직장에서, 내가 있는 그곳은 내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이 있어요.

그걸 과감하게 포기할줄 아는 사람이, 손잡을 수 있고, 함께 가는 인생을 살아갈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서 가정에서 그러는거예요. 가정에서 아버지의 기득권이 있어요.

내가 이럼에도 아버진데...” 그러고 있으면요, 그 가정은 깨지는 가정 되는거예요. 그렇죠?

그 기득권을 포기할때.. 온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자 보세요. 제가 우리교회에서 내가 그래도 담임목산데...” 맨날 그러면서 다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교회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될 겁니다.


그래서 저도 스스로 하나님앞에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내가 가진 기득권을 다 어떻게 내려놓을까요..”

내가 그 기득권 붙들고 어쩔줄 몰라하고 있을 때, 우리 교회가 어떻게 될까요? 안 되는 거예요. 그렇죠?

저의 기도제목이기도 해요. “하나님, 그 기득권 내려놓게 해주세요.”


여러분 누군가가 여러분 스스로 나는 기득권이 없는데...”

아니예요! 우린 자꾸 어떻게 뭐 대통령이니 국회의원이니 그 기득권 내려놔야돼.” 하는데 아니예요!

우리의 삶속에서 내가 붙들고있는 기득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걸 내려놔야 되요.


여러분 우리의 삶속에서 가지고 있는 그런 기득권, 내 위치, 지위. 아니면은 돈, 물질...

여러가지 있을 그 기득권들이 있어요. 그걸 과감하게 포기할때.. "함께, 더불어"가 이루어집니다. 


   “내가 이래뵈도 아버지인데...막 다그치잖아요?

   아버지의 권위만 가지고 그렇게 하잖아요? 그렇게하면 아이들이 엇나가죠.


   그런데요 근래에 이런 얘기 많이 듣는데요.

   대학생 자녀가 잘못된 거예요. 엇나가는거예요.

   막 다그치기만 하고 아버지 권위를 가지고만 그렇게 하다가 어느 순간에 깨달은거예요.

   ‘, 내가 너무 얘를 이해를 못했구나.’


   그래서요, 그 아이의 생각 밑으로 내려간거예요.

   그리고 그 아이한테 그 아버지가 처음으로 이런 얘기를 해요.

   “내가 미안하다. 네 마음이 어떨지 모르고 아버지라는 것 하나 가지고서

   너한테 그렇게 대우했던 것 미안하다. 용서해 달라.”


   근데요, 그 자녀가요 오히려 그래 이제 알았어요?”

   그러는게 아니라 아버지를 꽉 껴안으면서 자기가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그 아이가 변화되는 이야기를 들을때 얼마나 감동적이게 되는지요.


우린 너무 자기 기득권을 가지고 요구를 합니다.

내가 그래도 이건데. 내가 남편으로써 이런 대우를 못 받네. 내가 아내로써 이런 대우를 못 받겠느냐.

내가 자녀로서, 내가 아버지로서...” 


 아니요. 내가 우리의 삶속에 우리는 그것을 자꾸 쥐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힘든거예요.

고립되는 거예요. 외로운 거예요.

그걸 내려놓을 때 우리가 함께 손을 잡을 수 있어요.


▲마치는 말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함께 가야된다.”

그래요. 근데 막연하게 함께 갈 수 없어요. 두 가지를 포기해야 되요.

우리 열등의식을 포기하고, 우리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됩니다.


어쩌면 그것이 양극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양극은 또 하나로 만나요.

오늘 내가 가진 그것이 무엇인가? 각자가 다를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열등의식을 포기하고, 우리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우리의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주면서 같이 갈수 있는 그 길.

우리가 그 꿈을 꾸고, 그 비전을 갖고

많이 소유하느냐, 더 많이 내가 더 많은 숫자를 갖느냐에 우리의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 내 비전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 마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가운데,

너무 놀라운 은혜들을 경험하게 될거예요.


함께 이제 손을 잡고 함께 가는 꿈을 꾸는, 저의 삶도 우리 모두의 삶이 될수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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