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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LNCK 2016. 7. 26. 21:52

교회란 무엇인가?            2:42-47                   16.07.24.설교스크랩, 출처

 

설교 말씀을 전할 때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며,

교회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공동체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주제의 설교입니다.

 

성령 강림과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하여 탄생한 것은 교회였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이렇게 탄생한 초대교회가 살았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교회의 원형이며 현대 교회가 본받아야 할 교회의 영원한 모범입니다.

이들이 살았고 추구했던 사역이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가 본받아야 할 것은 무엇이고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 잘 새겨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가르침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디다케입니다.

디다케는 교육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선포를 뜻하는 케리그마도 포함됩니다.

 

교회 외부를 향한 가르침이 케리그마 곧 선포요,

교회 내부를 향한 가르침이 디다케 곧 교육입니다.

 

가르침인데 누구의 가르침이냐가 중요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사도들은 구약 말씀을 풀어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처럼 선포나 교육을 하였습니다.

 

이런 사도들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것이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성경이라는 표현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낫습니다.

성경은 문자라는 의미가 강하고 하나님 말씀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소리라는 뜻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무엇인가요?

설교는 성경의 말씀을 풀어서 오늘의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이 오늘날의 교회에서 계승되고 있는 것은 바로 설교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 곧 설교는 하나님 말씀이라 하였습니다.

루터는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은 기록된 성경과 동등하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입과 혀를 성별하시고

그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음성이 들리게 하셨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입으로 선포되는 구원의 교리를

기꺼이 그리고 공손히 받아들여야 한다.”(기독교 강요』 Ⅳ. 1. 5)고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초대교회의 모습이 회복된 것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설교입니다.

중세 교회는 설교가 없었습니다.

단지 성경을 낭송했을 뿐이고 성만찬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교황의 말과 전통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강대상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던 지성소요 또 강림하셨던 시내산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거룩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

그 두려움을 알며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까?

혹시 알량한 자신의 경험이나 정치적 견해를 쏟아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신의 탐욕과 권력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학문이나 처세술이나 심리학이나 경영학이나

세상의 어리석은 지혜나 지식을 늘어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대로 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있는 곳에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기사와 표적입니다.

 

43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사도행전에서는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놀라운 기적들을 전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1:5)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생각과 이성과 경험을 깨뜨리고 침투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놀라게 하고 반응을 일으키고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경험하는 무기력은 설교의 무능력입니다.

아무리 외쳐도 놀라지 않습니다. 변화가 없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기근입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지 않아 무디게 만든 설교자의 잘못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욕망에 타협해서 들을 귀가 막힌 교회의 잘못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물질성과 이성의 완고함에 갇힌 세상의 잘못입니다.

 

설교의 결과가 기사와 표적이지만

설교의 주요 주제 중 하나도 기사와 표적입니다.

 

과학의 시대에, 이성의 시대에, 기사와 표적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고 호응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모든 기적들을 이성으로 설명하려 하였습니다.

물 위를 걷는 기적은 두려워 망상에 사로잡힌 착각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은 서로 자기 음식을 나눈 나눔으로,

병든 자가 낫는 것은 일시적인 호전 현상이거나 우연한 사건이 부풀려진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이 끝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입니다. 이분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성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신앙을 포기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에도 하나님은 기사와 표적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설교는 기적의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이는 어리석은 미신이나 반과학주의를 유지하자는 의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성과 과학도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겸손해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모든 것에 100%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희망을 믿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뚫고 역사하는 하나님의 기적을 믿습니다.

인간이 유치한 단계를 벗어나 성인이 된 오늘날의 시대에도,

이성과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설교는 어리석어 보이는 기적을 선포합니다.

 

공동체성을 지향해야

 

초대교회의 가장 특징적이고 위대한 모습은 바로 45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우리 시대에 자기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는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서로 나누었습니다.

돈 때문에 벌벌 떠는 우리 모습에 비추어 매우 통쾌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공산사회의 원형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위대한 이상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도 자기 것을 바라지 않고,

또 필요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에 상관없이 쓸 수 있다면 세상은 풍요로워질 것이고

또 불평이나 원망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는 없습니다. 인간의 이기적 욕망 때문입니다.

자기가 일한 만큼 대가가 돌아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누가 열심히 일하려 하겠습니까?

공산사회는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완벽한 공산주의가 이루어지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가족입니다.

부모는 새빠지게 일하고도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지 못하는데

자식들은 핑핑 놀면서 통장의 돈을 마구 가져다 씁니다.

사랑 때문에 가능한 공동체입니다.

 

초대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강제로 하면 자기 재산을 결코 못 나눕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사랑이 임하니까 자신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중세에는 수도원이 그랬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갈 때 자신의 전 재산을 헌납하고 들어갔습니다.

 

수도원과 감옥은 모든 권리가 제한을 당하고 일정 지역으로 거주가 제한됩니다.

그렇지만 둘은 천국과 지옥 정도로 다릅니다. 이유는 자율성입니다. 기쁨입니다.

공산주의가 감옥처럼 강제로 하였기에 실패했다면, 수도원은 자발적이었기에 성공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초대교회처럼 물질 나눔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농경 시대처럼 한 곳에 몰려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해서 물질에 더 매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분업화가 되어서 이제는 구호가 정부나 사회복지 제도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소유의 일부를 헌금이라는 형태로 냅니다.

이 헌금이 구제와 선교 사역으로 잘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나눔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재정의 33.3%를 밖으로 내보내기로 비전선언문에 담았습니다.

그렇지만 교회 규모가 작다보니 여전히 교회 자체조직을 유지하기에 급급한 실정입니다.

 

우리의 비전대로, 또 초대교회의 모습처럼 물질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초대교회의 물질 나눔에 들어 있는 정신은 공동체성입니다.

434, 35절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모두가 한 형제자매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 지금 필요한 것이 바로 이 공동체성입니다.

 

최근 문제가 되었던 발언은 어떤 관료가 했다는 민중은 개 돼지라는 말입니다.

1%의 귀족과 99%의 개 돼지 민중, 이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입니다.

공동체가 깨져서 불만이 많고 분열이 심합니다. 위험하고 힘든 사회입니다.

앞으로 통일까지 생각한다면 머리가 아픕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공동체 주의입니다. 민족 공동체성의 인식입니다.

가족 수준까지는 아니더라고 민족은 한 운명공동체입니다.

국가(國家)라는 단어에 집 가() 자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서로가 양보하고 배려하고 나누는 삶이 우리 민족을 행복하게 하고, 민족 공동체를 발전시킵니다.

 

1%99%, 갑과 을, 소유주와 노동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남과 북,

이런 구분의 문제는 서로가 한 공동체임을 인식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초대교회나 가족 수준은 아니더라도 낮은 수준의 공동체성의 회복이

이 민족의 살 길입니다. 공동체 정신, 공동체 규범이 필요한 때입니다.

 

(중략)

 

두려움과 칭송

 

교회가 살아 있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43절입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교회는, 사람들이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칭찬을 합니다.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47)

그 모습이 경건하며 서로 사랑하며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빛이 되지 못하는 교회의 비참한 모습은 이미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5:13)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칭송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밟히는 무익함과 부끄러움이 기다릴 뿐입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이 두려워하는 교회입니까?

아니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그런 미미한 교회입니까?

칭송을 받는 교회입니까? 아니면 모욕을 받는 교회입니까? 두려운 경고입니다.

 

교회됨이 살아 있자 초대교회에는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47절입니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부흥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부흥은 교회가 교회답게 서 있을 때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열매입니다.

 

우리 교회가 초대교회를 모델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흥이 선물로 주어지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