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의 완성자 어거스틴 김명혁 목사님 글 인터넷 스크랩
▲서론
어거스틴은 고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을 지혜와 행복을 추구하며
육체의 향락과 이단 사교와 희랍 철학 등에 탐닉해 보았으나
아무 것도 그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어거스틴은 결국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로, 바울 서신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므로, 참된 평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32세 때 무화과나무 밑에서 개종의 체험을 한 이후
76세 때 히포의 감독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가 믿게 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진리 탐구로 평생을 보내며
하나의 포괄적인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수립했다.
‘무지개 색깔’의 신학체계를 수립했다고 하겠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어거스틴은 고대의 모든 신학적 전통을 종합하는 자리에 서 있었으며
중세와 그 이후의 모든 신학 전통을 수립 발전시키는 관문에 서 있었다고 하겠다.
한철하 박사가 지적한 대로 “고대와 중세와 현대를 통해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발견되지 않는 어떤 중요한 사상이 있는지 모를 정도”로
어거스틴의 신학 체계는 다양하고 포괄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어거스틴을 알지 못하고, 고대나 중세나 현대를 바로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의 생애의 하이라이트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출생과 소년 시절
‘어거스틴’은 영어식 발음이고,
가톨릭에서는, 그의 라틴어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서 ‘아우구스티누스’로 부른다.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의 소도시 타가스테 Thagate에서 주후 354년에 출생했다.
타가스테는 북아프리카의 북단 한 고원지대에 놓여 있었는데
칼타고의 행정구역으로 로마의 통치 하에 있으면서도
누미디아 옛 왕국에 소속되어 아프리카의 보수적인 문화전통을 이어 받고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북아프리카 출신의 로마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한 시민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아들에 대한 자랑과 기대가 대단했다.
그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희생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어거스틴은 아버지의 희생적인 노력을 고마워하고 있으면서도
그를 존경하거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세속적 성공에만 관심을 기울였을 뿐
아들의 내면 생활의 진보에는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파트리키우스는 그의 총명한 아들을 칼타고로 보내기에 충분한 돈을 모은 후 세상을 떠났다.
어거스틴이 17세 되던 해였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어거스틴의 생애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경건한 여인이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그녀는 항상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녀를 통해서 당신은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녀의 권면을 거절한 것은, 곧 당신God을 거절한 것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곤 했다.
모니카는 기독교 가정에서 엄격하게 자라났다.
그녀는 인내와 온유의 성품으로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인내와 눈물의 기도로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비범한 삶을 살았다.
모니카는 불성실하고 불같은 성품의 남편에게 즉시 대드는 대신,
조용히 참고 기다리다가 그의 분이 가라앉은 후에 비로소 자기가 정당했음을 설명하곤 했다.
결국 모니카는 인내와 기도와 전도로 그의 남편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할 수 있었다.
모니카는 자기를 오해하고 미워하던 시어머니도, 인내와 온유로 감화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시모와 자부는 놀라운 화목을 이루었다.
모니카는 싸우는 사람들의 화해자로 등장하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고 사랑하게 되곤 했다.
“그녀는 우리 모든 사람을 섬겼는데, 마치 그녀가 우리 모두의 딸인 것처럼 행했습니다.”
모니카는 누구보다도 어거스틴을 깊이 사랑했다.
아들의 영적 생명을 출생시키기 위해 어머니는 해산의 고통을 거듭거듭 겪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되 폭포수 같은 눈물을 끊임없이 흘렸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격렬한 사랑 가운데는
‘세상적인 요소’도 다소 포함되어 있었다. 아들에 대한 애착이 좀 심했던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그 옆에 두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어머니가 그렇지 않으랴마는 나의 어머니는 더 심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자기의 유아시절을 회상하며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것은 천진난만한 아기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젖가슴에 몸을 붙여 게걸스럽게 빠는 아기였다.
자기의 의사가 전달되지 않을 때 분노를 터트리는 아기였다.
“어린 아기가 천진난만하게 보인 것은 몸이 연약했기 때문이지,
그의 마음이 천진난만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시기에 가득찬 어린 아기를 보았습니다.
말은 할 줄 몰랐지만, 다른 아기가 어머니의 품속에 있는 것을 보면
분이 치밀기도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진솔한 마음과 눈과 영혼을 지닌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은 타가스테에서 예민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썼고
다른 소년들을 경쟁에서 물리치려고 발버둥 쳤다.
그는 학교에서 매를 맞는 굴욕을 당할까 봐 애써서 공부했지만,
공부하는 것을 즐기지는 않았다.
어거스틴은 웅변의 대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교육의 내용은 보잘 것이 없었다.
버질, 시세로, 살루스트, 테렌스 등의 이교 작품들을 줄줄이 암기하는 방식의 교육이었다.
이런 마당에서 희랍어와 같은 외국어 교육은 거의 불가능했다.
“내가 소년시절에 희랍문학을 그다지도 지긋지긋하게 싫어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지금도 희랍문학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라틴문학을 그렇게도 좋아했습니다...
애네아스(Aeneas)가 방황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디도(Dido)가 사랑 때문에 자살하고 마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서, 디도를 위해서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거스틴이 받은 교육의 목적은 “화술을 배우는 것,
사람들을 설득시켜 자기의 생각을 따르게 하는 웅변술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교육으로 자기 표현법을 배웠다.
그는 스스로 눈물을 흘릴 줄 알았을뿐더러, 남들을 울릴 줄도 알았다.
그러나 43세의 감독 어거스틴은 소년시절의 교육방식을 이렇게 회고했다.
“오 나의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 그때 나의 웅변이
다른 학우들의 것보다 더 많은 박수갈채를 받은 것이
지금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은 실제로는 모두 연기와 바람뿐이 아니었습니까?”
◑2. 그의 청소년 시절
어거스틴은 참으로 진솔한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그의 출생 때부터 저술 당시까지의
그의 전 생애의 내면생활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묘사한 ‘영혼의 자서전’이었는데,
그는「참회록」을 저술하면서 그 초두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했다.
“그러면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지와 재 같은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사람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긍휼을 바라보고 말씀 드리옵니다”
그는 어둡고 부끄러운 모습을 가리거나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그것이「참회록」의 위대성이었다.
▲어거스틴은 소년 시절의 자기 죄악된 생활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러나 내게는 도적질하고 싶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배고픔과 가난 때문은 아니었고
선행을 멸시하고 죄를 추구하는 강한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어느 날 늦은 밤 소년들과 함께 배나무를 흔들어 배를 도적질한 후
돼지들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오, 하나님! 그것이 나의 마음의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추구한 것은 죄악 자체였고 잘못 자체였고 부끄러움 자체였습니다” (참회록, 2권 4장)
16세의 어거스틴은 정욕의 노예였다.
정욕의 파도가 결혼이라는 해변에 도달할 수 있었던들 그렇게도 미치게 날뛰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내가 육체의 나이 열 여섯 살 되었을 때 욕정의 미치광이가 나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법에 의해 금지된 부끄러운 짓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나의 부모는 나를 결혼시킴으로 파멸에서 구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내가 웅변술을 배워 설득력 있는 웅변가가 되는데 있었습니다” (참회록, 2권 2장 4절)
▲어거스틴은 17살 나던 해인 371년 칼타고로 갔다. 수사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나는 불륜의 사랑이 가마처럼 들끓고 있는 칼타고로 왔다”고 고백했다.
사실은 어거스틴 자신의 가마가 들끓고 있었다고 하겠다.
칼타고의 생활은 자유분방했고 흥겨웠다. 그는 그곳에서 사랑을 갈망했다.
“나는 아직 누구를 사랑하고 있지 않았으나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내게 가장 달콤한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내가 사랑하는 자의 육체의 쾌락을 맛보았을 때는 더욱 더 달콤했습니다.
나는 그만 내가 추구하던 사랑 속으로 돌진해 버렸습니다” (참회록, 3권 1장 1절)
그 당시 어거스틴은 그의 감정의 고삐를 마음껏 풀어 놓았다.
그는 연극에도 맛을 붙였다.
극장은 “자신의 불행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었고, 자신의 분노에 불을 붙이는 연료로 가득 찬” 세계였다.
그는 무엇보다 연인들의 이별 장면을 즐겼다. “불행한 나는 눈물을 좋아했습니다.
나는 나를 울게 해 줄 그 무엇을 찾아 다녔습니다.
배우의 연기가 나를 기쁘게 했고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참회록, 3권 2장 4절)
어거스틴이 칼타고에 온 첫 해인 371년 말 그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어거스틴의 교육을 떠맡게 될 무렵
어거스틴은 무명의 여인을 정부로 취하는 “이류”(second class)의 결혼을 하고 말았다.
어거스틴은 385년 그녀를 버리기까지 15년 동안 줄곧 그녀와 동거 생활을 했다.
“나는 그 수년동안 정부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와 정식 결혼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나의 정욕이 발동할 때 내가 발견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유일한 여인이었고 나는 그녀에게 계속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자녀 출산을 목적으로 한 결혼 계약과, 욕망의 사랑의 계약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참회록, 4권 2장 2절)
▲한편 어거스틴은 그 당시 율법과 수사학의 대가가 되어 명예를 얻고 있었으며
명예를 즐기는 교만으로 그 마음이 부풀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그가 19세 나던 해인 373년에 그의 생애의 심각한 변화를 경험했다.
그는 처음으로 종교적 ‘회심’(conversion)을 경험한 것이었다.
“삶의 불안을 느끼던 그 때 나는 웅변에 관한 책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대학의 과정들을 밟아가던 어느 날, 나는 시세로의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철학에 대한 권면서였는데 그 이름이 호르텐시우스(Hortensius)였습니다.
그 책은 나의 태도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습니다.
오 주님, 그것은 나의 기도를 당신께로 향하게 했고
새로운 소망과 염원을 나에게 심어 주었습니다.
갑자기 세상의 모든 소망이 무가치하게 보여졌고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면서 불멸의 지혜를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나는 일어나 당신께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는 세속적인 일들을 떠나 당신께로 날아가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충동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희랍어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부르는데
그 책이 그와 같은 사랑으로 나를 불붙게 했습니다” (참회록, 3권 4장 7절)
애지 추구에 불붙은 어거스틴이 지혜를 찾기 위해 관심을 돌이킨 곳이 성경이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실망하고 말았다.
성경에서 고전의 교양미와 세련미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의 라틴어 성경은 수세기 전에 비천한 무명 작가들이 번역한 것이어서
은어와 속어 투성이었다.
게다가 어거스틴이 성경을 읽어 본 바로는,
시세로가 말한 고도의 영적 지혜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구약을 보니 세속적이고 부도덕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적혀 있었다.
신약도 마찬가지였다.
지혜의 화신인 그리스도를 소개하는데 그토록 지루하고 모순된 족보들이 나오다니,
어거스틴의 실망은 대단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성경으로 돌이켰을 때 성경은 시세로의 품위에 비해 아주 무가치하게 보였습니다…
성경은 겸손한 자들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것인데
나는 겸손해지기를 거부하고 교만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참회록, 3권 5장 9절)
더욱이 아프리카 교회는 유별나게 편협하고 보수적이었다.
그 제도와 의식들이 대개 유대인 회당에서 직접 따온 것이었다.
구약과 절반쯤 혼합된 그런 식의 종교였다.
목회자들의 태도역시 마찬가지였다. 포용적이기 보다는 배타적이었다.
감독들은 자기들의 권위에 대한 여하한 도전에도 지나치게 민감했다.
어거스틴은 실망하고 말았다.
◑3. 마니교의 추종자
▲이러한 기독교의 폐쇄적이고 강압적인 환경은
청년 어거스틴을 비롯한 일부 아프리카 교인들의 극단적인 반발을 샀다.
이 즈음에 새롭고 ‘영적인’ 기독교의 강한 조류가
전통교회의 거대한 율법주의에 역류해오고 있었다.
이 새로운 ‘기독교’는 구약을 비 영적인 혐오의 대상으로 낙착시켰다.
이런 ‘기독교’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히브리 선지자들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직접 영혼들에게 말씀하시는데,
그의 고상한 메시지와 그의 지혜와 그의 기적을 통해 말씀하시는 분이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제단은 마음뿐이며, 특히 어거스틴과 같은 젊은이의 마음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이 297년부터 칼타고에 들어와 퍼지기 시작했는데
370년경에는 많은 기독교인들과 지식층 사이에 활발하게 나돌고 있었다.
이 사상은 페르시아의 교주 마니(Mani)로부터 유래하여
로마 기독교 세계로 파급된 이원론적 혼합 종교인 마니교(Manichaeism)였다.
▲마니교는 하나의 절충주의적 종교이며 세계적 종교를 지향한 대담한 종교였다.
마니는 그의 고향인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로부터 이원론을 빌어왔고
엘카사이트파와 노스틱파로부터 금욕주의를 빌어왔으며
불교로부터 환생의 교리를 빌어왔고
기독교로부터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 예수 존중을 빌어왔다.
마니는 구원의 메시지가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져 왔는데
이제 마니 자신이 이 모든 선포들을 한 복음으로 종합해서
온 세계에 선포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포르 황제에게 보낸 글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혜와 행위가 하나님의 사자들에 의해서 인류에게 시대마다 주어져왔다.
한 시대에는 부처에 의해 인도에 주어졌고,
다른 시대에는 자라두스트에 의해 페르시아에 주어졌으며,
또 다른 시대에는 예수에 의해 서방에 주어졌다.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이 계시와 이 예언이 하나님의 진리의 사자인
나 마니에 의해 바빌론에 주어졌다.” 통일교의 문선명 비슷하다고 하겠다.
마니의 글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었다.
“나의 교회는 이 전의 교회들보다 우월하다.
이전의 교회들은 특수한 나라들과 특수한 도시 안에 세워졌는데,
나의 교회는 모든 도시 안에 세워질 것이고 나의 복음은 모든 나라에 미칠 것이다.”
▲칼타고에서 마니교를 전파하는 선교사들은
금식과 복잡한 타부들에 매여 창백한 모습을 한 남녀들로 구성된
‘선택된 자들’(Elect)로 주변에 ‘청도자들’(Hearers)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청도자들’은 그들의 영적인 영웅들인 ‘선택된 자들’의 금욕생활을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며 찬탄하였다.
그들은 불가항력적인 신비감을 풍기고 있었고 복잡한 비밀 기도를 하였고
커다란 양피지로 된 마니교의 책들을 지니고 다녔으며
‘빛’과 ‘어두움’이란 용어 밑에 베일로 가려진 깊은 메시지를 넌지시 던지고 다녔다.
그들이 볼 때 기독교 교인들은 ‘반쪽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의 사상 체계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중심인물이었다.
그들은 어거스틴에게 ‘열려진 순수한 진리’를 제시한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결국 마니교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 가운데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교만 가운데 지껄이는 육에 속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입은 마귀의 덫과 같았습니다.
당신의 이름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경의 이름의 음절들을 섞어 만든
마귀의 올가미였습니다. 그들의 입술에는 항상 그 이름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가슴에는 진리가 없는 공허함뿐이었습니다.” (참회록, 3권 6장 10절).
그러나 그 당시 어거스틴에게는
마니교가 그를 줄곧 괴롭혔던 정욕과 악의 기원과
자기 인식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같이 보였다.
마니교는 이 세계 안에는 빛의 원리와 어두움의 원리가 뒤섞여 있는데
악한 것은 모두 어두움의 원리의 소산이라고 했다.
악의 원리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악한 행동을 하게 한다고 했다.
따라서 악행의 책임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작용하는 어두움의 세력에 있다고 가르쳤다.
어거스틴은 마니의 “창시 선언문”을 듣기 위해서 마니교의 비밀 집회에 참석하곤 했다.
“창시 선언문”(Letter of the Foundation)을 듣는 순간 ‘청도자들’은 빛으로 충만해지는
소위 ‘조명’이란 종교 체험을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체험을 겪는 동안 자기 자신의 상태를 예리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마치 깊은 잠 속에 빠졌던 자가 멀리서 들여오는 외침에 잠이 깬 것과 같은 경험이었다.
이렇게 해서 잠에서 깨어난 마니교도는
자기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자기의 참된 정체는 자기의 일부분에 불과한 자기의 ‘선한 영혼’인데
정욕과 격분과 성욕 등으로 발동하는 육체에 의해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본래의 완전한 상태인 ‘빛의 왕국’으로 돌아 가는 것이
인간의 착한 성품의 유일한 소원과 욕망이 된다.
▲마니교도가 된 어거스틴은
전통적 기독교의 편협한 사상들을 일시에 떨쳐버릴 수 있었고
진리에 대한 확신을 소유한 것으로 생각했다.
어거스틴은 이제 보다 엄격하고 ‘영적인’ 생활을 추구하게 되었다.
29세가 된 어거스틴은 아직 육체적 쾌락에 매력을 느끼며 그것을 계속 추구하면서도
때묻지 않은 자기의 선한 영혼을 깨끗이 보존하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죄를 짓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어떤 다른 성품이라는 견해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잘못을 나에게 돌리지 않고 내가 아닌 다른 것에게로 돌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참회록, 5권 10장 18절).
“주여, 나에게 정절과 절제를 주시옵소서. 그러나 지금은 안됩니다.”
(참회록, 8권 7장 17절).
사람은 누구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4. "로마와 밀란으로"
어거스틴이 마니교의 함정에 빠져서 9년 동안 (373-382)
‘마니교의 추종자’로 지냈던 시절을 살펴보았다.
▲어거스틴은 382년에 카르타고를 떠나야만 했다.
그는 마니교에 환멸을 느꼈고,
카르타고에서 난폭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싫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무렵 로마에 있는 어거스틴의 가까운 친구들이 어거스틴에게
‘더 나은 수입’과 ‘더 높은 명예’를 약속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어거스틴이 볼 때 로마의 학생들은 훈련이 잘 된 학생들처럼 보였다.
어거스틴이 로마로 가고자 할 때, 어머니 모니카를 고려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실로 내가 떠나간다는 말을 듣고
죽음과 같은 괴로움에 사로잡혀 해변까지 나를 따라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부여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든지
로마로 가려면 같이 가든지 하자고 애걸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친구가 안전하게 항구를 떠나는 것을 전송해야겠다는 구실을 들어서
어머니를 속였습니다. 나는 이렇게 나의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어머니이신데!...
어머니는 나 없이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지만
나는 어머니를 간신히 설득시켜 그 근처에서 밤을 지내시도록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마침 성 키프리안(St. Cyprian)을 추모하는 강연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 나는 어머니 품을 빠져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계속 기도하시면서 우셨습니다… 바람이 불어 돛을 때렸습니다.
해변이 시야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고향으로,
나는 로마로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참회록, 5권 8장 15절).
▲어거스틴은 ‘영원한 도시’ 로마에서 불행한 한 해를 보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위험한 질병에 걸렸다.
그는「참회록」에서 몹시 괴로운 어투로
그 질병을 어머니 모니카를 버린 죄 값으로 온 ‘질병의 채찍’이라고 했다.
로마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스승들을 속이는 습관까지 있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완전한 절망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 해 말에 그는 시마쿠스(Symmachus)의 관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장관(Prefect)이었던 시마쿠스는
밀란 황제의 궁전으로 보낼 수사학 교수 한 사람을 선택하도록 황제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지위였다.
시마쿠스는 이 중요한 직책을 위하여 어거스틴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것은 어거스틴이 시마쿠스 앞에서 너무나 훌륭한 연설을 해 보였기 때문이었고
마니교에 몸담고 있는 시마쿠스의 친구들이
마니교도를 그 직책에 세워줄 것을 요구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로마의 마니교도들은 시마쿠스와 같은 이교도와 함께
기독교회의 세력에 대항하고 있었다.
384년 가을 이교도의 대표격인 시마쿠스가 그러한 중요한 지위에
어거스틴과 같은 반 카톨릭교도를 세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해 초에 그는 황제에게 진정서를 제출한 적이 있었다.
황제가 수 년 전에 로마의 전통적 이교를 폐지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었는데
그 결정을 취소해줄 것을 요구한 진정서였다.
시마쿠스의 진정은 이교에 대하여 관용을 보여 주도록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사람이 그토록 위대한 신비(Mystery)에 도달하는 데는,
오직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이러한 진정은 암브로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암브로스는 밀란의 감독으로서 바로 궁중 세력을 조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소년 황제 발렌티니안 2세에게 직접 편지하기를
황제가 어릴 때 기독교회의 세례 지원자였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여러 나라의 신들은 악마들이라고 말하면서
만일 황제가 시마쿠스의 진정을 받아들인다면
황제의 교회 출석 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결국 시마쿠스는 전통 종교에 대한 과격한 푸대접에 격분한 나머지
어거스틴과 같은 사람을 내세워 황제 앞에서 말할 수 있는 대변자로 만드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었다.
시마쿠스가 본 어거스틴는 철저하게 반 기독교적인 종파의 한 교도이었다.
결국 어거스틴은 시마쿠스의 천거를 받아 384년 밀란으로 갔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밀란은 새로운 관심과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성공의 기회를 의미했다.
한 해 동안 그는 정력과 야망에 불타서 그러한 생활 속으로 투신했었다.
▲그러나 결국 밀란은 그에게 있어서
그 중심에 암브로스를 담고 있는 상징적인 도시가 되었다.
그의 참회록을 보면 카르타고는 그에게 있어서 정욕의 ‘가마솥’이었고
밀란은 카르타고와는 대조적으로 그 자체의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내가 밀란으로 온 것은 바로 암브로스 감독에게 온 것 이었다.” (참회록, 5권 13장 23절).
이 한 마디 말 속에는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요소와 환경에 의해서 떠밀려 다니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384년 가을 밀란에 도착한 어거스틴은 환멸에 빠져 있었다.
과거에 확신하던 것들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환멸과 절망도 때론 필요하다.
이런 형편에서 그는 다시 한번 시세로의 책을 읽게 되었다.
시세로는 철학적인 대화의 형식으로 ‘신학파’(New Academy)의 ‘회의주의’를 소개해 놓았었다.
회의주의자들인 신학파는 우주의 본질에 관한 지식이 쉽게 획득될 수 없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회의주의를 통하여 ‘지혜’야말로
오랜 세월을 두고 추구해야 할 것임을 깨달았다.
마니교는 어거스틴에게 ‘이미 만들어진’ 지혜를 제시해 주었으나
이제 어거스틴은 지혜는 필생의 철학 훈련을 통하여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경우에 따라 그릇된 견해들을 부단히 거부하면서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는 회의주의의 입장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었다.
일단 지혜를 부단한 추구 과정으로 깨달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또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추구할 것이냐 하는 점이었다.
‘신학파’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으로는 평생 진리를 발견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에 진리에 이르는 다른 하나의 길을 줄곧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리켜 주는 “권위”(authority)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거스틴이 밀란 교회의 세례 준비자(catechumen)가 되기로 쉽게 결심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5. “회심1”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밀란으로 온 것은 바로 암브로스 감독에게 온 것이었다.” (참회록, 5권 13장 23절).
이 한 마디 말 속에는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여러가지 요소와 환경에 의해서 떠밀려 다니지만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손 안에서 움직인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데는 여러 가지 도움들이 필요했다.
암브로스, 모니카, 바울 서신, 폰티키아누스, 알리피우스 등이 그런 도우미들이었다.
※암브로스는, 라틴어로 ‘암브로시우스’와 동명이인이다.
▲어거스틴이 384년 가을 밀란에 도착한 후 암브로스를 만난 것은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암브로스는 감독으로서 형식적으로 인사하지 않았고, 아주 친절하게 어거스틴을 맞아 주었다.
“나는 내게 친절을 보여준 그를 처음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밀란의 감독으로 11년 동안 봉사해 오고 있던 암브로스는 키가 작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연약한 체구에 이마가 넓고 얼굴은 길고 침울하며 큰 눈을 가지고 있었고
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어거스틴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준 것은 바로 암브로스의 ‘연약한’ 체구였다.
암브로스는 헬라 기독교 학자들의 전통을 송두리째 섭렵하여
당시 라틴 세계에서 가장 유식하고 초현대식으로 설교를 할 수 있었다.
암브로스는 구약을 마니교의 비판으로부터 변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어거스틴에게 감명을 주었다.
이제 어거스틴은 구약의 족장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암브로스의 설교를 듣고 보니 구약은
진정한 ‘철인들’의 당당한 행진이 기록된 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 모니카가 385년 봄 밀란에 도착하자 암브로스와의 관계가 보다 깊어졌다.
“어머니는 전보다 더 열심히 서둘러 교회에 갔다.
그리고 암브로스의 말씀을 마치 생수처럼 들이켰다.
어머니는 그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사랑했다.
내가 이렇게 마음이 움직이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 그 분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참회록, 6권 1장 1절).
암브로스가 어거스틴에게 미친 영향은
그들이 직접 접촉했던 회수에 비하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컸다.
어거스틴은 한 편지에서 암브로스가 한 말을 기억하며 이렇게 기술했다.
“나는 이 말을 두고 두고 생각하면서, 그것이 마치 하늘로부터 내려온 신탁인 것처럼 취급했다.”
▲어거스틴은 밀란에 있을 때 14년 동안 동거해 온 그의 정부와 이별을 해야만 했다.
모니카가 아들의 정식 결혼을 주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다.
“이것은 나의 가슴을 찢어 유혈이 낭자하게 한 커다란 충격이었다.
나는 정말 그녀를 사랑했는데…”
무명의 여인은 울며 밀란을 떠나 아프리카로 가야만 했다.
“다시는 남자를 알지 않기로 맹세하면서.”
아마 그녀는 어거스틴과 함께 사는 동안 훌륭한 기독교 신자로 생활했을 것이다.
그녀가 그와 같은 서약을 한 것은
세례를 받거나 성찬에 다시 참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386년 여름 밀란에서 마지막으로
플라톤Plato의 철학, 특히 플로티누스의 철학에 탐닉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 철학적 자율성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일종의 플로티누스적 ‘환희’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거기에 안주할 수는 없었다.
이와 같은 고민과 갈등 가운데서 그가 눈을 돌린 곳은 바로 바울 서신이었다.
어거스틴이 성경을 지혜의 권위 있는 원천으로 삼게 될 것이라고 암브로스도 이미 확언한 바 있었다.
386년 8월 아프리카 출신의 친구 폰티키아누스가 어거스틴을 방문했을 때
어거스틴의 책상 위에서 바울 서신이 놓여있는 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어거스틴과 알리피우스(친구인듯)에게 애굽의 수도사들의 이야기와
특히 안토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이것은 폰티키아누스가 우리에게 말해준 것이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동안, 오 주님, 주님은 내게로 얼굴을 돌이켜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셨습니다. …
나는 나 자신을 똑똑히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러나 내가 내 자신으로부터 피할 장소가 없었습니다.…
내 인생의 여러 해가 지나갔습니다.
내가 19세에 호텐시우스를 읽고 나서 12년이 지난 것 같습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철학을 연구하도록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세상의 기쁨을 포기할 것을 연기하고 있었습니다. …
나는 알리피우스를 보았습니다. 나의 표정은 내 마음의 동요를 표출시켰습니다.
나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찌 된 것인가? 이 이야기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 사람들은 우리만큼 교육을 받지 못했는데도 일어나서 천국 문으로 밀어 닥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많이 배웠으면서도 이 살과 피의 세상에서 더듬거리고 있으니…’
나는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우리가 숙박하고 있는 집에는 조그만 정원이 붙어 있었습니다.
나는 내 가슴 속을 찢어대는 고뇌에 밀려 이 정원까지 피해 나오고 말았습니다.
거기서는 아무도 나의 피맺힌 투쟁을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나와 나 자신만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나는 머리칼을 쥐어뜯고 주먹으로 이마를 쳤습니다.
손가락을 쥐어틀며 무릎을 껴안았습니다.
나는 그저 사소한 것 때문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가장 시시한 실없는 일, 과거의 온갖 애착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버리실 건가요? 그러면 이 순간부터 영영 이별이예요.
다시 볼 수 없어요. 이제부터 이런 저런 일을 영원히 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나의 하나님, 그것이 내게 ‘이런 저런 일’이라고 속삭인 것은 무엇입니까?
너무도 지저분하고 부끄러운 일들이오니,
주님, 주의 긍휼을 베푸사 주의 종의 영혼을 그런 일로부터 풀어주소서. …
그리고 다시 절제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 육신의 더러운 속삭임에 귀를 막으라.’
나는 이런 식으로 내 마음 속에서 나 자신의 자아에 관해 나 자신과 입씨름을 했습니다.
그동안 알리피우스는 내 곁에서 내 속에서 일어나는 소요의 결말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영혼이 숨겨진 깊은 부분을 살펴 보았습니다.
나는 내 영혼 속으로부터 부끄러운 비밀을 짜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들을 고스란히 내 마음의 눈 앞에 집합시켰습니다.
그때 내 속에서는 커다란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내 눈에서는 홍수 같은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나는 일어나서 알리피우스 곁을 떠났습니다.
속이 후련할 때까지 울고 부르짖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는 알리피우스에게 방해받지 않을 만큼 떨어진 곳으로 갔습니다.
나는 무화과나무 아래 몸을 던지고
눈에서 강물처럼 흐르는 눈물을 하염없이 흐르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그것은 당신께 드려진 합당한 제사였습니다.” (참회록, 8권 12장 28절)
◑6. “회심2”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데는 여러가지 도움들이 필요했다.
암브로스, 모니카, 폰티키아누스, 알리피우스 등이 그런 도우미들이었다.
어거스틴은 자기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회심의 상황을
그의 <참회록>에서 계속해서 생생하게 기록했다. 참으로 귀한 참회와 회심의 고백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죄의 포로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비통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언제까지 내일내일 하여야 하는가? 왜 지금은 안 되는가?
나는 왜 이 순간에 나의 추한 죄를 청산하지 않는가?’
나는 내내 울면서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가장 비통한 슬픔이 눈물로 쏟아진 것입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나는 근처 어떤 집에서 들려오는 어린 아이의 노래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소년의 음성인지 소녀의 음성인지 모르겠으나, ‘집어서 들고 읽어라,
집어서 들고 읽어라’ 는 후렴이 계속 연거푸 들려 왔습니다.
(Tole, lege, tolle, lege. Take it up and read it, take it up and read it)
그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며 노는 어떤 게임이 있었던가 하고.
그러나 전에 그런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나는 눈물을 그치고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펴서 내 눈이 처음으로 머무는 구절을 읽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일 것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전에 안토니(Anthony)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 봉독 시간에 우연히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그것이 자기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집에 가서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그와 같은 말씀에 의해서 그는 당신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급히 알리피우스가 앉아 있는 곳으로 뛰어갔습니다.
내가 그 곁을 떠날 때 바울서신이 수록된 책을 내려놓고 떠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책을 움켜 쥐고 폈습니다.
나는 조용히 내 눈이 처음으로 닿는 곳을 읽었습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더 읽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내가 그 구절을 읽는 순간 확신의 빛이 밀물처럼 내 마음 속으로 밀려들어오고
모든 의심의 어둠이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 구절을 손가락으로 표시했는지 혹은 다른 것으로 표시했는지
하여간 표시해 놓고 책을 덮었습니다.
알리피우스에게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말했을 때,
내 표정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그도 역시 자기에게 일어난 바를 말해주었는데 나는 그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읽은 구절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얽었던 것보다 더 읽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는 그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했습니다.
이 경고의 말씀을 통해 그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항상 나와 달랐고 나보다 나았습니다.
그는 아무 불안함이나 주저함이 없이 나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내 어머니에게 가서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셨습니다. 자초지종을 다 말씀 드렸더니,
어머니는 승리의 기쁨에 겨워 당신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모든 희망과 꿈이 산산조각이 날 때도 당신의 목적을 이루실만큼
충분한 능력, 아니 그보다 더 넉넉한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나를 당신께로 돌이키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아내를 사모하거나 이 세상에 애착을 두지 않게 되었고
다만 신앙의 규칙에 굳게 서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여러 해 전에 이미 내 어머니에게 꿈을 통하여
내가 신앙의 규칙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은 어머니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어떤 숙원이 이루어질 때 보다 훨씬 더 풍성한 기쁨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내 몸에서 날 육체의 자식들에게 얻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어떤 기쁨보다
더 아름답고 순수한 기쁨이었습니다.” (참회록, 8권 12장 28-30절).
이리하여 어거스틴은 옛 생애에 종지부를 찍었다. 때는 주후 386년 8월 말이었다.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자기의 회심이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라고 기술했다.
“그것은 어머니의 기도 때문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주저없이 인정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진리 발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마음,
그 밖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 밖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 밖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도록 된 마음을 주신 것은 어머니의 기도 덕분입니다.
그렇게 큰 유익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어머니의 기도였던 것을 나는 의심치 않습니다.”
(질서론 De Ordine, 2권, 20장 52절).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눈물의 회개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회심(conversion)의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하고 또 말해도 부족하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회심의 이야기를 잠깐 소개한다.
그는 고행과 선행과 의식과 신비주의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기를 노력했다.
그러던 중 1514년 가을 어느날 비텐베르그 어거스틴 수도원 탑 속에서
‘탑 속의 체험’이라고 불리는 회심을 체험했다.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시22:1 이하의 말씀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시편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묘사한 글이었음을 알았을 때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버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어째서? 어째서?”
다음 순간 루터는 벼락에 맞은 듯한 충격과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 대신, 나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버림을 끊어버림을 당했구나!”
루터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더 이상 무서운 심판주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가득찬 구주의 모습이었다. 루터의 삶은 완전히 바뀌어졌다.
◑7. “기독교적 한거 생활과 세례” *한거: 한가하게 거함, 휴식
회심 후인 386년 여름에 어거스틴은 가슴에 병을 앓게 됐다.
그 “가슴의 병”이 천식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음성도 변했고 웅변가로서의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됐다.
어거스틴이 기술한 대로 가슴은 교만의 안식처로 상징하는데
그 교만의 처소를 내리치는 고통을 당한 것이었다.
결국 어거스틴은 386년 9월 카시키아쿰 시골로 내려가
소위 “기독교적 한거 생활”을 시작했다.
눈 덮인 알프스가 멀리 보이고 연못과 숲에 둘러 쌓인 카시키아쿰의 별장은
어거스틴에게 휴식과 함께 명상과 기도와 대화의 장소를 제공했다.
그곳에서 어거스틴은 6개월간 어머니 모니카와 아들 아데오다투스(‘신의 선물’),
친구 알리피우스, 그리고 그의 제자 리켄티우스 등과 함께
명상과 기도와 대화와 저술에 종사했다.
▲어거스틴은 386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네 권의 책을 저술했다.
「신학파 반박」,「행복한 생활」,「질서론」,「독백론」을 저술했다.
「독백론」(Soliloquia)은 어거스틴과 이성과 대화의 형식으로 저술되었는데
실상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였다.
어거스틴은 「독백론」을 긴 기도로 시작했는데
그는 여기서 하나님과 자신을 ‘알기를’ 소원하며 믿음으로 받아드린 신앙의 조항들을
이성으로 ‘이해하기를’ 소원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하되,
믿음으로 받아드린 하나님에 관한 신앙의 조항들을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어거스틴의 신학활동이 바로 여기 카시키아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387년 3월 아데오다투스와 알리피우스와 함께 밀란으로 돌아왔다.
세례를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3월 10일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부터 세례 지원자들에 대한
암브로스 감독의 엄숙한 교육이 실시되었다.
감독은 주기도문을 가르쳤고 다신론과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엄중한 경고를 했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취하신 방법과 불신자들이 받을 사후 형벌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고난주간에 들어서면서 어거스틴의 가슴은 설레이었다.
4월 22일 목요일이 되자 그날 밤부터 목욕을 금하고 금식에 들어갔다.
토요일에 어거스틴은 성당으로 돌아와 암브로스 감독이 베푸는 축사 안수기도를 받았다.
사탄을 거부하고 자기 일을 거부하고 허영을 거부할 것을 서약했다.
그러고 나서 성부 성자 성령을 믿느냐는 감독의 질문에
어거스틴은 “나는 믿습니다”라고 엄숙하게 대답했다.
부활주일 전야, 4월 24일 밤 어거스틴과 다른 남녀노소의 세례 지원자들은
암브로스 성당의 본당 옆에 있는 세례관으로 갔다.
어거스틴은 커튼 뒤로 가서 알몸으로 깊은 물속으로 내려갔다.
옷을 완전히 벗은 것은 세속적인 것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상징했다.
암브로스는 세 번 세차게 솟구치는 물속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 넣었다.
후에 그는 깨끗한 흰 옷을 입고 촛불이 밝게 켜진 본당으로 들어갔다.
그와 그의 동료 새 신자들은 회중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약간 높은 좌석에 앉았다.
그것은 제단 곁에 있는 것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최초로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다”는 주제, 중생과 부활의 주제,
그리스도의 지상강림으로 인한 영혼의 천국 승천의 주제들이
어거스틴의 머리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387년 4월 25일 부활 주일은 어거스틴의 생애에서 잊지 못할 거룩한 날이 되었다.
◑8. “어머니와 이별”
어거스틴은 이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는 아프리카로 돌아가 그곳에서 주님을 섬기기를 뜨겁게 소원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다.
결국 어거스틴은 387년 가을 밀란을 떠나 로마를 거쳐 항구 도시 오스티아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때 찬탈자 막시무스의 함대가 로마의 항구들을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일행은 며칠 동안 오스티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어거스틴은 어머니와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었다.
“우리는 정원을 바라보는 창문 턱에 기댄 체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어머니와 나 둘이서만 그윽한 기쁨을 나누며….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지혜’를 얘기하면서 그것을 헐떡거리며 사모하고 있을 때
우리는 진심을 기울여 그것을 붙잡았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어떤 소리도 아니요 천사의 소리도 아니요 천둥 소리도 아니요
비유의 어두운 의미도 아닌 바로 그 분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음성만을”
(참회록 9권 10장 23-25절).
그로부터 보름 이내에 모니카는 세상을 떠났다.
9일간 병상 생활을 하는 동안 모니카는 간혹 눈을 떠서 자기 아들을 축복하고,
어거스틴에게서는 평생 싫은 소리 한번 듣지 않았다고 말하고,
나비기우스(어거스틴의 동생)에겐, 이제는 남편 파트리키우스 곁의 고향 땅에
묻히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내 손으로 어머니의 눈을 감겨드렸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슬픔에 가슴이 매였습니다.
하마터면 눈물이 펑펑 쏟아질 뻔 했습니다.
모친이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내 아들 아데오다투스는 통곡했습니다.
나는 이제 모친이 주는 커다란 위로를 잃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내 영혼은 상처를 입고 내 생활은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과거에는 모친과 내가 한데 엉킨 생활이었기에…
아데오다투스가 진정하고 울음을 그쳤을 때
에보디우스(Evodius)는 시편 찬가를 들어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온 식구들이 화답하며 찬양했습니다. 한쪽에서 장례식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친구들과 이런 저런 말을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참회록 9권 12장 31절).
“모친의 시신을 매장하던 날, 나는 눈물 없이 장지를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날 종일 속으로 무거운 슬픔을 참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내 고통을 치유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치유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문득 목욕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 비통한 슬픔이 마음 밖으로 땀방울처럼 흘러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을 잤습니다. 그러나 깨고 나니 조금도 슬픔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뒤에 나는 차차 조금씩 주님의 여종에 대한 과거의 감정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친이 주님과 대화할 때 얼마나 경건했는지를 기억했습니다.
모친이 나와 대화할 때 얼마나 부드럽고 자상하셨는지를 기억했습니다.
그런 기억을 되살리면서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얻었습니다.” (참회록 9권 12장 32-35절).
그리하여 모니카는 오스티아에 묻혔다.
어거스틴과 에보디우스는 로마로 돌아가서 항만 봉쇄령이 철회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388년 말에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로 돌아갔다.
◑9. 카르타고로 귀환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으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 ‘참회’의 어거스틴(386년 8월)!
세례를 받아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으로 태어난 ‘환희’에 넘친 어거스틴(387년 4월)!
그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서 주님과 동족들을 섬기기로 결단을 했다.
복음을 제일 먼저 고향에 돌아가서 이웃과 동족에게 전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이었고 사도들이 실천한 방법이었다.
길선주 목사는 평양에서,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에서 처음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사랑하는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영적 교제의 ‘기쁨’을 누렸고
또한 어머니와 이별하는 극도의 ‘슬픔’을 경험했다. (387년 말)
‘참회’와 ‘환희’와 ‘기쁨’과 ‘슬픔’은 어거스틴 신앙에 거름과 자양분이 됐다.
이제 어거스틴은 388년 고향 카르타고로 돌아왔다.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
어거스틴의 일행이 388년 말경 카르타고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카시키아쿰의 은둔자들이 아니었고
신앙 공동체의 삶에 뛰어든 ‘하나님의 종들’(Servi Dei)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 어거스틴의 출생지 타가스테(Thagaste)에 가서
‘하나님의 종들’로서의 사역을 시작했다.
그들은 그 지방 성직자들의 예방을 받았고
어느 경건한 관리의 집을 숙소를 정해 존경 받는 생활을 하게 됐다.
선량한 기독교 평신도들은 그들에게 기도 요청을 하곤 했다.
어거스틴이 내세운 이상은
“은둔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deificari in otio)이었다.
타가스테에서 그는 아프리카 교회의 조직된 생활을 밀접하게 접했다.
밀란에서는 이방 나그네였지만 여기 타가스테에서는 지역 공동체의 주민이었다.
이곳 기독교 교회는 강력한 대적들에 둘러쌓여 있었다.
이교도들, 마니교도들, 도나티스트 분열주의자들이 기독교 교회의 대적들이었다.
기독교와 최고의 이단으로 통한 마니교 사이의 알력은 심각했다.
이런 환경에서 저술된 어거스틴의 마니교 반박서들은 분명히 ‘교회론적’인 저술이었다.
마니교를 반박한 그의 창세기 주석도 그가 최초로 발간한 ‘교회론적’인 팜플렛이었다.
그는 그것을 간결하고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문체로 썼다.
「참된 종교에 관하여」(De vera religione)란 책은 그의 입장을 약술한 명저인데
그는 로마니우스와 같은 상류층 마니교 동조자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 세심하게 집필하여 출판했다.
▲어거스틴이 타가스테에서 2년간 지내는 동안 의미심장하고도 신비스러운 변화가 있었다.
어거스틴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창조일들(Days of Creation)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의 마음 상태를 그대로 비추어 주었다.
그는 여전히 ‘궁창의 빛들’과 그것의 ‘영적인 의미들’을 명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육체를 떠난 명상의 생활은 이내 아주 공허하게 보였다.
이러던 중 죽음의 사건이 그의 삶에 개입됐다.
가장 친한 친구 네브리디우스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아데오다투스가 죽은 것이었다.
사망 일자는 모른다. 이 이중적 죽음의 충격은
어거스틴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공백 중의 하나가 됐다.
그의 대화록 「주인에 대하여」(De Magistro)에서 아들 아데오다투스는
흡사 그의 아버지 어거스틴과 같았다. 지적이고 세련되고 유능했다.
어거스틴은 그가 쓴 마지막 책에서 아들을 잃은 슬픔을 나타내고자 시세로의 귀절을 인용했다.
과연 시세로의 말은 모든 아버지들의 심정일 것이다. 시세로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모든 일에 있어서 나보다 뛰어나기를 내가 바라는 유일한 인물이다.”
어거스틴은 이런 슬픔과 공허함 때문에 더 활동적인 생활로 줄달음쳤던 것 같다.
어거스틴은 수년 전에 그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는 슬픔을 경험했고
지금 또다시 가장 사랑하고 아끼고 자랑하던 아들과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는 슬픔을 경험했다.
네브리디우스는 어거스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달콤한’ 친구였고 고향 친구였다.
그는 어거스틴을 따라서 카르타고를 떠나 밀란까지 갔었고
다시 어거스틴을 따라 고향 타가스테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삼중적 슬픔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그 슬픔이 그로 하여금 주님을 위해서
동족을 위해서 온 몸을 불사르는 헌신의 삶을 살게 만들었다.
▲결국 어거스틴은 조용한 명상의 삶 이상의 삶을 살기를 소원했다.
그래서 아프리카의 신앙 공동체들을 책임지는 활동적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391년 그는 완전히 달라졌다.
1년 전만해도 그의 죽어가는 친구 네브리디우스를 보려고 여행하는 것조차 거부했던 어거스틴이
언덕길을 넘어 옛 항구도시 히포로 발걸음을 옮겨놓은 것이었다.
히포(Hippo)는 1000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아프리카 북부의 항구 도시로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200여년 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로마식 생활양식에 영향을 받았다.
5~6천 여명이 앉을 수 있는 극장이 세워졌고 커다란 공중목욕탕이 세워졌고 신전이 세워졌다.
히포에서 어거스틴은 신앙공동체를 조직하고, 항구적인 행위규범에 입각한 대인관계를 수립하며,
많은 다른 사람들의 영적인 안녕을 책임지고,
그들에 대해 실제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섬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의 은거지에 모여든 열성가들의 그룹은 서서히 어거스틴을
그들의 ‘영적인 아버지’로 여겼고 그곳은 하나의 ‘수도원’형태를 이루게 됐다.
그는 수도원에서의 삶이 성경 읽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성경을 통해 영적 무장을 할 때
아프리카 교회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391년 봄 히포에 도착했을 때 어거스틴은 중년에 접어든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새로운 정복의 땅을 더듬어 찾고 있는 사람이었다.
◑10. “히포의 감독”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으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 ‘참회’의 어거스틴(386년 8월)!
세례를 받아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으로 태어난 ‘환희’에 넘친 어거스틴(387년 4월)!
그는 388년 고향 카르타고로 돌아왔다. 하나님의 종으로 동족들을 섬기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과 친구를 잃는 슬픔을 경험했으나
그 슬픔은 그로 하여금 주님과 동족을 위해서 온 몸을 불사르는 헌신의 삶을 살게 만들었다.
그는 3년 후인 391년 새로운 신자들과 제자들을 찾으려고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역사적인 항구 도시인 히포로 왔다.
어거스틴은 396년 히포(Hippo)의 감독으로 선출됐다.
감독으로 선출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주인이신 하나님을 거스를 수 없어 감독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어거스틴이 히포에 도착하여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36년 후 교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하나님의 은혜로 감독이 된 나는
여러분 중에 많은 분들이 아시는 대로 이 도시에 올 때는 청년이었습니다.
나는 수도원을 세울 장소를 찾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의 형제들과 같이 살기 위해서였지요.
나는 이 세상에서 모든 희망을 포기했었습니다.
내가 어떤 인물이 될 수도 있었지만,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현재 감독직에 있습니다만 감독이 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죄인들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집에서 초라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나는 내가 교인들을 다스리는 자들과 동등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성찬식에서 나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낮은 자리, 구석진 자리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감독직을 두려워했습니다. 나의 명성이 하나님의 종들 사이에 퍼지면서부터
나는 감독이 공석인 지역으로는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행여나 감독으로 뽑힐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감독이 되지 않으려고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높은 직책에 위험하게 있는 것보다
낮은 자리에서 구원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말씀드린 대로 종이 그 주인을 거스를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 도시에 들어올 때 친구를 만나 그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수도원에서 함께 살고 싶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미 감독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꼼짝없이 잡혀서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 후 신부의 자리에서 여러분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설교, 355권 2장).
▲어거스틴은 설교와 목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의 감독 저택을 중심으로 수도원 운동을 일으켰다.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어거스틴은 그들에게 가난과 독신의 생활을 할 것을 서약하게 했고 엄격한 규칙생활을 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경만을 가르쳤다.
그 당시 사회는 사치와 낭비가 심했는데 어거스틴은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구제를 강조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기도 했고 방문자들을 친절하게 대접하기도 했다.
어거스틴은 때로 부자들을 향해 설교를 하기도 했다.
그는 엄격한 수도원 규칙을 만들었다. 채식을 하게 했고
여자들이 남자 수도원을 방문하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
어거스틴은 의인 아벨이 죄를 범했을 수 있었다면 무슨 죄를 범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마 너무 크게 가슴을 흔들며 웃었던지,
자기를 잊고 너무 장난을 쳤던지, 사과를 너무 많이 먹었던지
그래서 너무 많이 먹고 소화불량에 걸렸던지 그런 일들이었을 것이다” (자연과 은총, 38권 4장).
그러나 어거스틴의 수도원이 애굽의 수도원처럼 지나친 금욕주의로 흐르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책을 읽고 연구를 하고 그리고 학문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몰려들어 더 큰 집을 지어야만 했다.
남자 수도사들이나 여자 수녀들을 모두 하나님의 종들(servants of God)이라고 불렀다.
▲어거스틴은 히포에서 수도원 운동뿐 아니라
저술과 신학 활동을 하면서 76세가 되던 430년까지 34년간
하나의 ‘포괄적인’ 기독교 진리의 체계를 수립했다.
그는 여러 가지 이단들과 극단적 기독교 사상들과 싸우며
하나의 ‘포괄적인’ 복음적 기독교 진리 체계를 수립하는 등
기독교계에 위대한 공헌을 했다.
그가 평생 싸워야 했던 이단은 마니주의와 도나티스트주의와 펠라기안주의였다.
어거스틴은 마니주의와 싸우면서 모든 피조물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는 이미 392년 8월 그의 옛 친구 마니교도 포투나투스(Fortunatus)와
공중목욕탕 홀에서 공식논쟁을 벌였다.
많은 청중 앞에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나는 과거에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지금은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내 의견이 옳은지 그른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포투나투스를 할 말이 없는 지경까지 몰아세웠다.
포투나투스는 영원히 그 도시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심을 강조했다.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악은 어떤 절대 악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의지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 분파운동과 싸우면서 교회론과 성례론을 정립했다.
어거스틴은 이미 394년에 “도나티스트 반박의 ABC”란 노래를 만들어 그들을 비판했다.
그 노래는 단순한 음률에 맞춘 노래로서 매 절이 알파벳 글자로 시작하여 다음과 같은 후렴귀로 끝났다.
“평안을 기뻐하는 너희여 지금은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때로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보편 일체성(one)과 함께 거룩성(holy)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교회 안에는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또한 펠라기안주의와 싸우면서 인간의 전적 타락과 아울러
하나님의 전적 은총을 강조하는 은총론을 전개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초자연적 은사를 부여 받아 창조되었으나
타락함으로 그 은사를 상실했다고 했다.
인간은 아담의 죄의 유전을 받아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은총에 관한 어거스틴의 견해는
후에 종교 개혁자들 특히 칼빈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