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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부르심 창12:1~9 2013.04.28.
서론
창세기 1~11장과 12~50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구별됩니다.
창세기 1~11장까지를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인간, 죄, 국가, 구원 그리고 가정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정상적이고 견고하게 되려면 창세기 1~11장까지를 사실로 믿어야 됩니다.
불신자들은 이것을 신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1~11장은 신화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2~50장까지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네 명의 족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네 명이 중요한 이유는 이들로부터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셨기 때문입니다.
히11장을 믿음의 장이라고 말하는데, 8~22절까지를 바로 이 네 사람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네 사람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더 중요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름이 두 가지입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도 있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왜 이름이 두 가지냐면 하나님이 이름을 바꿔주셨기 때문입니다.
창17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셨는데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의 이름이고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약성경에 74번이나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은 반복된 부르심이다
창세기 11장 32절과 12장 1절을 볼 때 하나님이 하란에서 아브람을 부르신 것처럼 보입니다.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 11:3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
아버지가 죽은 후 하란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셨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행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행 7:2~3).
아브람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은 하란이 아니라 갈대아 우르입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것이지
하란에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신 것은 본래적인 부르심과 반복된 부르심이 있습니다.
본래적인 부르심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의 70세 되던 해에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는 아버지가 계시니까
아버지를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 먼 길을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란에서 지체를 하니까 75세 되던 해에 하나님이 또 다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 부르시고 순종하지 아니하면 또 다시 부르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택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끈질깁니다.
사람이 불순종하고 지체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좌절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응답하지 않고 지체하면 또 다시 부르시는 것입니다.
요나서에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40일 후에 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원수 같은 니느웨가 망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풍랑을 보내셔서 요나는 3일간 물고기 뱃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3일 후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놓게 되었는데 그때 하나님이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욘 3:1~2).
아브람이 하란에서 지체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체하고 있는 아브람을 계속해서 또 다시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아브람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면
결국 본인이 손해를 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택한 백성들에게 유익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온전한 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여러 번 부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응답할 때까지 우리가 지체하고 불순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부르셔서 구원해주신 그 사랑에 항상 감격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은 풍성한 약속을 동반한 부르심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브람에게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는 부르심에 동반된
하나님의 약속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여섯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아브람 인생의 가이드가 되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행을 가면 가이드가 어떤 곳이 좋은지를 가르쳐줍니다.
여행지가 어떤 곳인지 잘 몰라도 가이드만 있으면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이드가 되어주신다니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시 32:10).
가이드 되신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슬픔이 오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둘러 진을 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각 사람 인생의 가이드가 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육신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겠고
영적으로는 교회라는 하나님 나라의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창 12:2).
아브람은 75세임에도 아직 자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99세까지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나이는 89세였는데
이때 이미 생물학적으로 자녀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막 10:27).
사람이 할 수 없는 것도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으십니다.
제가 막내아들이 보라고 해서 ‘블라인드 사이드’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산드라 블록이라는 여자가 주연으로 나왔는데 이 여자가 나온 영화 중에서 최고로 연기를
잘한 영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내용이냐면 몸집이 큰 흑인 아이가 나오는데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는 마약 중독자라
오갈 데가 없는 아이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이 아이가 셔츠 하나만 입고 돌아다니니까
산드라 블록이 자기 집에 데려가서 재워준 것입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산드라 블록의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되었고
운동에 재능이 있는 것을 알고 미식축구를 하도록 도와줬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아이가 ‘마이클 오어’라는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가 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아무리 운동을 잘 해도 공부를 못하면 안 됩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학점을 받아야 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도 흑인 아이에게 가정교사를 붙여 미시시피 대학에 가게 되는데
미시시피 대학 정문의 돌비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영화의 내용도 훌륭하고 감동적이었지만
대학 정문 앞에 이렇게 위대한 말씀을 기록해놓았다는 것이 가장 큰 감동이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했던 아브람과 사래에게
하나님은 이삭을 선물로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통해 아브람이 이스라엘이라는 대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약속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큰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고 있는 가족 구원, 질병 치료,
사업, 자녀 등의 문제들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와도 포기하지 마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해도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셋째,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네게 복을 주어" (창 12:2).
하나님이 아브람을 대할 때 마다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된 인생입니까?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하나님은 웃으시고 복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 이름을 위대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창 12:2). 하나님께서 바꿔주신 아브람의 이름
즉, 아브라함은 위대한 이름입니다. 왜 위대합니까?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사 41:8).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름 앞에는 하나님의 벗이라는 위대한 수식어가 붙어있습니다.
만약 오바마 대통령이 CNN에 나와서 "내 친구 피영민 목사가 강남에서 목회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저는 하루아침에 유명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친구’라고 부르시니까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 15:14-15).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시니까 아버지의 뜻을 다 가르쳐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다섯째,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 12:2).
복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아브람 때문에 우리까지 복 받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다 복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양심적으로 살면서 복음을 증거하면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다 복을 받게 됩니다.
반면에 화의 근원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을 빌려주면 갚지도 않고
자신은 한번도 사지 않으면서 매번 밥을 얻어먹는
그래서 만나면 피하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거리를 유지하게 되는 사람이 되면 되겠습니까?
만나면 항상 행복해지고 복이 되는 그런 사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 모두 여러분을 통해 복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셉을 만난 보디발의 집안이 복을 받았고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세워져서
애굽은 7년의 흉년 가운데 살아남았습니다.
다니엘을 등용한 바벨론도 다니엘의 지혜로 큰 복을 받았고
믿음 있는 계집종을 만난 문둥병자 나아만은 병을 치료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여섯째, 특별한 보호의 약속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3).
우리가 세계역사를 보면 기독교를 핍박하고 저주했던 나라치고 잘 된 나라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를 환영하고 축복하는 나라는 대부분 다 잘삽니다.
오늘날 한국의 분위기가 자꾸 교회와 목사들을 나쁜 쪽으로 몰아갑니다.
이것은 마치 한국을 망하게 해달라고 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목사들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도 있고 허물도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복의 근원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향해 완전하지 않다고 욕을 퍼붓고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초래하는 행동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여섯 가지 약속을 의지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들어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도록 격려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생각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 3:14).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임한 줄로 믿습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람에게 믿음의 반응을 일으키는 유효적인 부르심(Effectual Calling)이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종류의 부르심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부르심’ 과 ‘유효적인 부르심’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일반적인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한 자를 부르시면 반드시 믿음이라는 반응을 이끌어 내십니다.
이것을 ‘유효적인 부르심 Effectual Calling’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때 눈으로만 봐서는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이 시험에 봉착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족속은 노아가 저주한 함의 후손인데, 그들이 그 땅에 이미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과 그의 가족들로는 그들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이 가능해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이 들어간 곳은 세겜 땅입니다. 세겜은 선생이란 뜻을 갖고 있는데
당시 이방 종교의 제사장들이 선생 노릇을 하면서 예언하던 곳이었습니다. 소위 신탁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람의 믿음을 격려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창12:7).
아브람이 하란에 있을 때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 땅을 네게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의 방문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주님의 방문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20세기 초 영국 웨일즈에 큰 부흥이 일어났는데 그 부흥은 한 장돌뱅이로 말미암아 일어났습니다.
장돌뱅이는 평생 봇짐을 지고, 지역 장을 돌면서 물건을 팔러 다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장사를 하다가도 12시만 되면 교회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안녕하십니까?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70세가 넘은 이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가친척도 없고 친구도 없었던 그가 늘 웃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봤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하는 말이 12시만 되면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인사하고 가셔서 너무 즐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무 기쁜 나머지 다른 환자들을 전도하기 시작했고, 그 병원에 큰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외롭고 슬프고 괴로워도 죽지 마십시오.
주님이 한번만 방문해주시면 문제는 다 해결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 땅을 네게 주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전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보여도
아브람은 내 생애 중에 안 이뤄지면 내 후손 세대에라도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 땅에서 장막을 치며 생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아브람의 믿음대로 하나님이 이루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상 살아가면서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 5:7).
눈으로 볼 때는 어려워 보여도 믿음으로 하나님이 나의 가이드가 되시고 나를 복주시며
나를 복의 근원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고아의 아버지’라는 조지 뮬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힘으로 가능한 일에 대해서 믿으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불가능한 일에 대해서 믿으라고 요구하신다.”
지금 필요한 것이 있는데 자신의 힘으로 얻을 수 없다고 해서 포기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문이 있게 되면 해결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가나안 땅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화되었습니다.
여호수아 때의 가나안 땅은 천국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애굽은 마귀의 상징이고 광야는 세상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방황하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것은
마귀의 종 되었던 사람이 세상에서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아브람 때에 저주받은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던 가나안 땅은, 세상의 상징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세상을 상징하는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하나님이 이 땅을 주실 것이고, 내 생애 중에 이 땅을 주시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위해 천국에 본향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 11:9~10).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6).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아브람의 생애 중에 자기 부인이 묻힌 땅 밖에는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다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위해 더 좋은 본향을 예비해주셨다고 믿고 나그네처럼 살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여행하는 순례자입니다. 여기서 영원히 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순례 길 끝에 돌아갈 본향이 없다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돌아갈 본향이 없어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면 얼마나 슬프고 괴로운 인생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갈 본향을 준비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국에 틀림없이 들어갈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보통 일입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고 복의 근원이 되어 살면서 믿음을 행사하여
예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