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이상재 선생, “신앙으로 구국운동” 선각자 펀 글
최근 (2002년) 개봉돼 인기를 끈 ‘YMCA야구단’은
1905년 결성된 황성 기독교청년회 야구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당시 YMCA에서 나라의 자주성 회복과 민족 계몽을 위해
맹활약하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월남 이상재다.
그는 기독교인이면서 늘 두루마기를 입고 다닌 민족주의자였고
민족의 큰 스승이었으며, 늘 유머와 웃음이 가득해 주위의 존경을 받았다.
YMCA 명예총무 전택부는 “이상재는 은둔과 순국을 겸비한 참된 선비였고
기독교인으로서는 예언자와 제사장의 모습을 함께 갖춘 이상적인 신앙인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상재는 1850년 10월25일 오늘날의 충남 서천군에서
가난한 선비인 이희택씨와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상재가 기독교를 처음 접한 것은
1894년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하게 된 박정양이 그를 1등서기관으로 부르면서다.
그의 나이 38세가 되던 때였다.
그는 워싱턴에서 “무엇이 이 나라를 이렇게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미국이 신봉하는 종교에 궁금증을 갖게 됐다.
시간이 나는 대로 공사관 근처의 교회를 찾아갔지만
삼강오륜으로 굳어진 그의 머리로는 당장 기독교의 교리를 납득하기 힘들었다.
1902년 수구파들이 조작한 개혁당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간 이상재는
거기서 비로소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다.
우연히 감방 벽틈에 끼여 있던 마태복음 5장과 산상수훈을 발견,
읽고 또 읽으며 이상재는 변해갔다.
이제껏 민족운동을 해오면서 하늘에 부끄럼없이 당당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으나
성경을 공부할수록 자신의 부족함과 죄많음이 절실히 깨달아졌다.
1904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특사로 이상재는 석방됐다.
이상재는 언더우드 목사를 가장 먼저 찾아갔다.
“진정한 애국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기독교 신앙으로 정신무장을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때는 독립협회도 깨지고 정부도 친일파들의 소굴이 됐다.
이상재는 나라의 운명을 구할 것은 기독교뿐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언더우드와 아펜절러 등 선교사들이 황성기독교청년회(YMCA)를 창설했다.
동지들과 연못골교회(현 연동교회)에 입교한 이상재는
YMCA를 통해 구국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57세에 YMCA 종교부 간사로 취임한 것이다.
이때까지 기독교인이란 대개 천민 아니면 평민들이었다.
이상재를 비롯한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대거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은
조선 기독교의 지평을 넓힌 사건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뻬-스볼 팀’이 결성된 것도 이때였다.
이상재는 일제의 회유에는 언제나 성경으로 응대했다.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한다” 이 말에는
‘일본은 결국 저절로 망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신중함과 우둔함을 구별해 전략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1927년 민족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한 신간회가 창설됐다.
그러나 신간회 회장으로 두달을 채 못 채우고
1927년 3월29일 78세를 일기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장례 행렬에는 무려 10만명의 국민이 따랐고
YMCA를 비롯한 243개 사회단체들이 주도한 사상 첫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신간회는 1931년까지 전국 134개 지회에 10만여명이 참여하는
유일한 범민족단체로 존속했다.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월남 사후 35년, 광복 17년 되던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