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임재 안에서 I 케네스 배 선교사 I 휄로쉽교회 간증 설교 - YouTube
◈케네스 배 선교사 북한 억류 및 석방 간증 습3:20 2016.10.02.출처
석방후 약 2년 후 시점의 간증 설교 녹취
케네스 배 또는 배준호는 한국계 미국인 선교사이다.
한국 전쟁 이후 가장 오랜 기간인 735일간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으로,
1968년 8월 1일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며 18세 때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2012년 11월 종교 활동을 통한 정부 전복 혐의로 북한 당국에 체포되었다.
2014년 11월 8일에 석방되었다.
◑2005년 중국 <단동 단기 선교>를 가다
할렐루야! 너무나 많은 분들이,
제가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 때 저를 기억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덕분에
제가 무사히 돌아와서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서서
주님께서 (북한에서) 하셨던 일들을 나눌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제가 듣기로 이 교회에서도 수요일마다 정말 어려운, 억압 받는 많은 기독교인들을,
또 우리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해 주실 때, 저를 기억해 주셨다는 얘기를 듣고,
큰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한 번 제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1985년에 미국으로 이민 와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미국에서 마치고 나중에 신학교에 갔고
2005년도엔, 하와이 열방대학에 가서 ‘제자훈련학교 DTS’를 마쳤습니다.
▲이 학교를 통해서 저는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나서 중국에 <단기선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중국에 두 달 동안 선교여행을 하는 도중에, 가게 된 지역이 ‘단동’이었습니다.
단동은 압록강을 끼고 있고, 신의주를 마주보고 있는 도시입니다.
그곳에 갔더니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이 저희에게 북한 분을 두 분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북한 분을 만나보게 된 시점이었습니다.
한 분은 여자 분인데, 약 30대 중반이었고, 이분은 예수 믿은 지 이제 3주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그 분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지금 무엇을 기도해 드릴까요?'
하면서 기도제목을 물어보니까, 그 자매님은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것 보다, 저는 벌써 예수님을 알지 않습니까.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도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야 됩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 믿은 지 3주밖에 안 되신 분이,
예수 믿고 얼마나 필요한게 많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뭐가 필요하겠습니까?’라는 반문에,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또 다른 한 분은 50대 남자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예수님 믿은 지 이제 한 달 되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하나님 믿으시니까 좀 어떠세요?’ 했더니 ‘그 전에는 살 소망이 없었는데,
이제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예수가 소망입니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저는 평생 교회에서 자라났지만, 아직도 그 누구도 제게 ‘예수가 소망입니다.
예수를 가졌는데 내가 또 무엇이 필요하리요?’ 하는 얘기는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압록강을 따라가면 지류들이 있는데,
거기에 쪽배를 타고 북한 쪽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때로는 북한 쪽에 배를 대고, 북한 군인도 만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제가 기도하며 그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간 시간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 그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다 탔는데, 저희를 인솔하셨던 선교사님은 타지 않더라고요.
자기는 안 가겠다 그러시더라고요.
저희가 긴가민가 하는 마음으로 그 배를 탔습니다.
기도하며 탔고, 그러고 나서 한 20분 정도 정말 지류를 따라 가다 보니,
북한 쪽에 배를 대고 조금 기다리다 보니까, 북한 군인이 총을 매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그 친구가 ‘혹시 돈을 좀 가져온 게 있습니까?’ 하더라고요.
총 들고 있는 사람이 돈 달라 그러면 줘야 되는데,
제가 ‘죄송합니다. 돈을 준비를 못했네요’
‘그럼 담배라도 좀 가져왔습니까?’
‘담배도 못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좀 준비한 게 있습니다.’
하면서 빵과 과자, 사과, 미국에서 가져왔던 육포를 내왔습니다.
그러니까 고맙다고 하면서 몇 마디 나누다가 어둠 속으로 그가 사라지는데,
그때 저한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군인이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담배도 아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하나님 아버지께 갈 수 있는 방법은 유일하게 예수님 밖에 없다’
그때 저도 모르게 배 위에 서서, 북한 쪽에 배를 댄 상황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저를 북한과 외부세계를 연결하는 다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고 나서 1년 후에는, 하와이 열방대학에 돌아가서 간사로 섬기다가,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전도여행 팀을 데리고 나와서 중국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2009년, 정식 선교사로 대련에 정착
제가 정착한 곳은 대련이라는 중국의 동북지역의 한 도시입니다.
대련에서 단동까지는 차로 약 4시간 걸립니다.
그래서 많은 선교팀들이 왔을 때,
‘단동을 한 번 가서, 북한 땅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예배했으면 좋곘다’
그래서 제가 많이 모시고 가서, 북한 관련 일들을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1년 정도 지나다 보니, 저희가 단동, 대련에서 ‘제자훈련학교’를 개설하게 됩니다.
‘제자훈련학교(DTS)’는 3개월동안 먹고 자고 하면서 공부하고,
두 달 동안 전도여행을 가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중국인 대상으로 그 학교를 열려고 했는데,
저희가 어디서 학생들을 데려올 수 있을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제가 5개월 동안 먹고 자고 하는 사람들을 광고할 수도 없고,
아직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을 때이니까요.
그래서 저희가 보니까 학교는 시작을 해야 되는데,
3주 후면 학교가 시작되는데, 등록한 사람은 한 명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번에 DTS학교를 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까?’
제 마음에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면 주님께서 학생들을 보내 주셔야겠습니다. 보내주시면 몇 명을 보내주실 것입니까?’
하고 여쭈니, 그러자 제 마음속에 ‘18명’이라는 숫자가 새겨졌습니다.
제가 칠판에 18명이라고 쓰고,
제가 지금까지 만나본 중국 사람의 모든 이름을 칠판에 다 썼습니다.
그리고 한 명 한 명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물음표(?)도 썼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모르는 사람이 올 것이다’ 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이 보내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렇게 3주를 기도했더니 학교가 시작하는 날, 18명의 학생이 왔습니다.
13명은 중국인, 4명은 한국인 선교사, 1명은 한국인 선교사를 따라온 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북한 사람은, 예수 믿은지 기껏해야 한 달 밖에 되지 않았고
이런 상황에서 제가 이 사람을 받아야 될지, 말아야 될지.. 잘 몰랐습니다.
왜냐면 중국사람 대상으로 하는 학교인데, 이 한 분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3중 언어로 학교가 진행되어야 되고,
그리고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생기게 되니까
'예수도 잘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아침 8시부터 밤10시까지 하는 학교를
3개월 동안 견뎌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분이 나이가 50될 때까지 주체사상으로 무장되어서 사신 분이,
과연 이 기독교식 교육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가 그 분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18명을 보내 주신다 하셨고,
그 18명 중에 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상대로 이 분이 굉장히 어려워했고요. 저희도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한 분의 북한 분을 품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고,
함께 살면서 지낸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로, 그가 변화되고 치유되고 회복되며
주님을 알아가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고,
학교과정이 다 끝났는데, 이 분이 돌아가지 않고, 그 외의 성경학교, 선교학교 등
다양한 학교 과정을 마치고,
1년 동안 저희랑 같이 지내다가 ‘이제는 북한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고 얘길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서 뭘 하시겠습니까?’ 했더니,
‘돌아가서 제가 우리 동네에 정말 너무나도 많은 꽃제비 아이들이 있는데,
아무도 돌보지 않습니다. 우리 동네는 우리 지역에는 고아원도 없습니다.
가서 제가 집에서 아이들을 데려다가 기르고 입히고 양육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잘 키우겠습니다.’
집에서 고아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고 축복해주고, 후원해서 돌려보냈습니다.
그것이 2009년도에 있었던 일입니다.
◑2010년 단동 개척
그러고 나서 저희 센터가 (대련에서) 단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2010년에는 이제 그곳에서 진을 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많은 훈련과정을 하는 도중에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바라만 보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했을 때,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셔서 나진 선봉에서 일하시는 선교사님의 초청을 받아서,
제가 북한 땅을 처음으로 2010년, 10월에 가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들어가 보니, 마침 서방 사람들을 위한 관광이 개설되었다고 얘기했습니다.
나진 선봉은 경제 특구로, 많은 외국인들이 와서 투자할 수 있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외국인 관광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중국 사람들 일부와 러시아 사람들에게만 열려있던 관광을,
서방세계, 그 외 누구한테도 열어주었는데,
우리 남한 여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올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람들을 데려올 수 있는데, 데려오되
저희는 좀 다른 관광을 해도 되겠습니까?’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그래서 제가 ‘저희는 우선 학교에 가 보고 싶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도 가 보고, 아이들과 영어로 대화도 해 보고 싶습니다.
한 한 시간, 두 시간 씩 문화교류 차원에서 아이들과 한 마디로 프리 토킹을 해도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그런 외국어를 공부하는 학교가 있다고 하면서,
아직까지는 한 적이 없지만, 열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제가 산에 올라가게 해 주십시오.’
산에 올라가서 나진 선봉을 바라보며 기도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산에 가도록 허락 받았습니다.
장 마당에도 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장 마당이란 나진에 한 집에 한 명씩은 다 나와서 장사를 합니다.
수 천 명이 거기서 일하고 있는데, 거기서 떡도 사 먹고, 물건도 사고,
거기 나와 있는 아주머니들 하고 얘기도 하고, 이럴 목적으로 얘기를 하니까,
‘원칙적으로 관광객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지만, 열어주겠습니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해수욕도 하게 해 달라,
아이들과 공원에서 롤러스케이트도 타게 해 달라 했는데,
제 모든 조건을 수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주 기쁜 마음으로 그 다음날 아침에, 제가 호텔 밖에 있는 뜰을 걷고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내 백성이 눈이 멀어서 그들이 보지 못하며, 그들의 귀가 먹어서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이 봉해져서 벙어리가 되었다.
이제 내가 그들의 눈을 열어서, 내 영광을 보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의 귀를 열어서, 내 음성을 듣게 할 것이고,
그들의 입을 열어서 내 이름을 송축하게 하리라. 내가 그들을 회복하리라.’
2005년도에는 제가 압록강 지류의 배 위에서 서서 저를 사용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는데
2010년에는 북한에 들어와서 나진에서 북한에서 제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주님께서는
여리고 성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민족이 4백년 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이제 광야 생활을 40년을 마치고 요단강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성이 '여리고 성'입니다.
그들이 숫자와 군사력으로 압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그 음성에 순종해서 하루에 한 번씩 그 성을 돌았더니,
일주일 째 되는 날 7번을 돌고 함성을 질렀더니,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린 것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약 3백명 정도의 기도의 용사들을 모집해서
10명 20명 단위로 이 땅(북한)에 와서
그 도시를 다니면서, 산에 올라가서, 학교에 가서, 해변에 가서,
시장에 가서, 기도하고 한다면
과연 여기에 있는 어둠의 장벽이, 영적인 장벽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나진에서 단동에 돌아와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4가지를 하십시다.
첫째는 북한에 가십시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라고,
한 번 보는 것이 여러 선교사님 간증을 듣는 것보다 낫습니다.
가서 직접 보시고, 하나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둘째는 가서 보기만 하지 말고, 가서 기도하십시다.
기도할 때 장벽이 무너져 내리고, 기도할 때 회복과 치유가 일어날 것이며
기도할 때 예배가 살아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교하는 목적은, 그곳에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예배 받기 원하십니다.
여러분, 그래서 제가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예배하십시다.
우리는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우리끼리 가서 북한에서 예배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우리끼리 가서 기도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넷째는, 가서 사랑하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십시다.
우리가 말로 복음을 전할 수 없고, 성경책을 주고 올 수도 없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둠에 가게 되면, 빛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그들이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서 그들에게 웃어주고, 대화하고,
모든 행동에서 그들이 예수의 흔적을 발견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제가 권면을 했더니,
정말로 2011년부터 2012년 딱 1년 동안
17개 나라에서, 300명의 기도의 용사들이 모집되어서, 북한에 (관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중남미, 북미, 유럽, 아시아 다양한 곳에서
300명이 (아마 YWAM) 23번에 걸쳐서
북한에 들어가게 되었고, 제가 18번을 직접 인솔하게 되었습니다.
가서 땅밟기를 하고, 기도하고 했더니, 영적인 장벽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제가 직접 체험할 수 있었고, 놀라운 역사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미국 사람들, 특히 백인들도 많이 인솔해 갔는데
북한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만나고 이런 과정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복도에 이렇게 지나가다보면, 반미교양 포스트 들이 쫙 붙어 있습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을 섬멸하자'
그리고 미국 사람 얼굴에 빨갛게 칠해 놓고, 뿔을 그려놓았습니다.
마귀라고,
그런 포스트들을 보면서, 이런 악독한 무리라고 모든 포스트가 그려져 있는데
저희 미국사람들이 가서 그들 학생들과 같이
한 시간, 두 시간 대화하면, 그런 장벽이 없어집니다.
왜요? 우리도 사람이고, 그들도 사람이니까요.
함께 대화하면서 여러 가지가 풀리는 현상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한 번은 장마당에 나가봤는데
장마당까지 들어오지 못하는 아주 가난한 분들은
장마당 밖에 조그맣게 앉아서 좌판을 파십니다.
채소 몇 가지를 놓고, 그걸 팔려고 20리~30리를 걸어옵니다.
할머니들이 앉아계시고, 어귀에는 뻥튀기같은 강냉이 펑튀기를 파는 분들이 쭈욱 서 있고요,
그 장마당 안으로 들어오면, 조그만 매대(부스)가 있고,
장마당의 실내로 들어가면 점점 점포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장마당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사람들 얼굴 때깔도 좋아지고, 옷차림새도 좋아집니다.
그렇게 어렵게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보고, 만나고, 얘기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제게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영적인 일에는, 영적 전쟁을 강조할 때는
반격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다 보니까 제가 데려간 팀들이 아프기도 하고,
들어가기 전에 팀원이 아프기도 하고,
버스가 타이어 펑크 나서 저희가 기차를 놓친 적도 있고요,
23명이 고속도로에서 차가 (펑크로) 오도가도 못하는데 어떻하겠습니까?
그 외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미국 오하이오 주의 미국 목회자 6분을 모시고,
제가 나진에서 청진으로, 청진에서 칠보산이라는데 까지 가게 되었고,
칠보산 정상에 올라서
이분들이 ‘아, 하나님의 은혜로 어메이징 그레이스’ 찬양하면서 기도하고,
막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역사들이 있었습니다.
미국 목회자들이 육로로 이동해서, 칠보산에 간 것은 그 때가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성령충만해서 내려오는데 운전기사가 졸았습니다.
그러면서 비탈로 굴러서 버스는 완전히 고랑에 쳐박혀서 박살이 났고
그런데 사람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습니다.
조그만 찰과상 정도에 불과한 것이어서 너무나 감사했는데,
그러고 나서 이제 내려가지고, 우리 목회자들이 운전사를 탓하지 않고
‘이 분을 처벌하지 말아 달라. 우리는 괜찮다’ 하면서 그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깜짝 놀라했습니다.
조금 있으니 다른 버스에 거기엔 앰뷸런스가 없으니까
버스에 의사와 간호사들도 오고, 막 난리가 났습니다.
큰 사고가 났으니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아무 의료도구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청진기 하나 갖고 왔더라고요. 그걸로 뭘 어떻게 하려는지...
‘괜찮습니까?’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그 버스에 옮겨타고, 그 다음날에도 차를 타고 가는데
이번에는 불도저가 나타나서 버스를 쳤습니다.
또 버스가 박살이 났습니다.
그런데 또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저희와 같이 다니는 그쪽에서 감시하는 요원 보위부 사람이 한 명 타고 다니는데
첫 날에는 맨 앞에 앉았다가, 버스가 앞으로 굴러서 그가 죽을 뻔 했습니다.
이 사람이 운전사에게 얼마나 화를 내는지..
이튿날에는 겁이 나니까, 버스 맨 뒤에 탔는데,
이번에는 불도저가 버스 뒤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보고 ‘당신들 너무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이틀 동안 제가 두 번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사고가 나도 목회자들이 평안한 모습으로 그들을 대하니
그들이 놀랐습니다.
제가 지난 주에, 오하이오에 다녀왔는데, 그 때 목회자들을 거기서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걱정 근심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자기들 다친게 걱정이 아니라, 그들의 처지가 걱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우리가 미국에 가서도 아무 거론하지 않겠다.
문제 삼지 않겠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랬더니 그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더랍니다.
여러분,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일들이었습니다.
◑2012년, 제가 북한에 18번째 들어갔을 때 억류되게 되었습니다. 12.11.03.
제가 안 해야 될 실수를 하게 된 것이죠.
그것은 컴퓨터 외장 하드디스크를 제가 기차에서 일을 좀 하려고 가지고 갔다가,
컴퓨터는 중국에다 맡겨놓았는데,
외장 하드는 제가 모르고 새벽에 서두르다보니까
그걸 서류가방에 넣은 상태로 국경을 넘은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제가 6년 동안 사역했던 모든 사역 정보와 선교편지 들과
8천개의 사진과 동영상들이 있었습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서방 언론에서 북한을 취재해서 (부정적인) 다큐로 만들었던 동영상들이
문제가 되어서, 억류된 것입니다.
자 그렇게 되니 저를 처음에는 어디 외딴 호텔에,
산장 같은데 감금해 놓고 취조를 했습니다.
첫 며칠 동안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밤 12시까지 이어지는 취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물고보고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구석에 저를 세워놓습니다.
‘사실대로 말할 때까지 벽보고 서 있는 것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잠도 잘 안 재우고, 그 다음에 밥도 별로 안 주고,
뭐 이러한 어려운 시간들이었는데
그래도 안 되니까 사흘 째 되는 날에는 방 한 가운데 딱 세워놓더라고요.
세워놓고 '자 이제는 카메라가 있는데, 보고 있으니까 움직이지 말라' 하고 나갑니다.
미동도 못하게 5시간 6시간을 제가 서 있었습니다.
여러분, 차렷 자세로 5분 이상 서 있는 것은 참 힘듭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허리도 안 아프고, 다리도 안 아프고,
피곤하지도 않고, 배고프지도 않고, 괜찮은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 정도라면 제가 1~2주간은 더 버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속마음으로는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왜냐면 제가 데리고 들어온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내가 한 실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될 수 있는 상황이었고,
걱정 근심 초조 불안 자책감 '주님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하고 주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6년 동안 보호해 주시고, 3백명이 들어와서도 아무 문제 없었는데,
제가 그 분들에게 이런 것 가지고 다 설명하고 해서 아무 문제없이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어째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주님, 제 실수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주님을 탓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어디 계십니까?'
그런데 갑자기 제가 대여섯 시간을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팔의 손이 따뜻해 지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왼 손을 살짝 펴보니까 뭐가 반짝반짝 금가루 같은 것이 보이더라고요.
그러면서 팔이 다 따뜻해졌습니다.
저도 모르고,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몰라서 서 있는데,
그때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제게 들렸습니다.
‘성령님께서 너의 손을 붙잡고 계신다. 그가 네 발 옆에 서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라고 저버리지 아니할 것이니라.
너희 모든 염려를 내게 맡기라. 내가 너를 돌보리라!’
그때까지만 해도 걱정, 불안, 초조에 쌓여있던 제 마음이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하시니,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아직 저는 억류 3일째이고,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주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하시니 그렇다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며, 평강이 느껴지며
그것으로 얼마나 기쁨이 찾아오는지..
저도 모르게 얼마나 감사하고 기쁨, 평안을 누리면서 저도 모르게 웃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나도 모르게 웃고 있으니까 저쪽 방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야 이거 소용 없어, 저 사람 웃고 있잖아’
들어오더니 ‘가서 자세요’ 그 다음날부터는 세워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그 누구도 해함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 근심하지 말아라. 사실 대로 얘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행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날, 제가 데려왔던 사람들이 무사히 출국한 것을 알게 되고,
제가 자백하겠다고 그랬습니다.
‘저는 사실은 선교사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저는 사람들을 이곳에 기도하고 예배하러 데리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하는 일입니다.’하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쯤 되니까 어느 정도 제 정체를 그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당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한줄 당신이 아느냐?
도대체 당신 혼자서 꾸밀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누가 보냈느냐?’
‘하나님이 저를 보냈습니다.’
‘당신 위에 누가 있느냐?’
‘하나님이 계십니다.’
‘아니, 하나님 말고 또 있을 거 아니냐?’
배후를 대라는 것입니다.
제가 없다고 며칠을 얘기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그 조사관이 들어와서
제가 쓴 선교편지를 탁 내놓습니다.
‘야, 네 배후를 찾았다. 이제 증거가 나왔으니 너는 꼼짝달싹 못 한다.
이 사람이 누구냐?’ 하는데 보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는 대목을 보고서
성은 주씨 인데, 이름은 도대체 뭐냐고 물어왔습니다.
제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했더니 긴가민가 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뭐라고 말하느냐면, 제게
‘당신이 한 행위는 국가전복음모에 해당이 된다’
제가 ‘국가 전복 음모를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의 답이 ‘기도와 예배로!’
‘아니, 하나님을 안 믿으시는데, 왜 기도의 힘을 믿으십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보다 더 믿음이 좋으시네요!’
우리는 ‘기도한다고 통일이 되겠어? 기도한다고 북한이 복음화 되겠어?’ 하고 얘기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말은 못해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기도와 예배로 국가를 전복하려고 네가 획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쯤 되니까, 제가 돌려보냈던 북한 사람을, 그들이 찾아냈습니다.
제가 얼마나 걱정 근심을 했는지요.
하나님께서 아무도 해함을 당하지 않을 거라는 그 약속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분이 들어와서 얼마 안 돼서, 자수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용서를 받고 살고 있었는데, 저 때문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고,
나중에는 제 재판에 증인으로 나왔고요.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분이 어떻게 될지 (해꼬지나 안 당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아니 이 분이 고아원을 하려고 시도하다가 하지도 못했는데,
그게 무슨 국가전복 음모와 상관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아니 이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크리스천이 되어서 들어와서,
크리스천 고아원을 만들어놓으면 애들 10명이 믿을 것 아니냐,
그 10명이 나중에 백명 되고 나중에 만명 되면, 그때는 우리에게 위협이 되겠소, 안 되겠소?’
제가 ‘될 수 있겠죠’ 했더니
‘그 봐요!’
그러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한 것은 크리스천 바이러스를 우리한테 침투시켜가지고
우리의 하나 됨을 깨고, 우리 수령님에 대한 믿음을 깨고
나라를 전복하려고 획책한 일을 한 것이요’
그 얘기를 할 때 그 얘기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제게 들렸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 나라가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게 말한 것은
‘당신은 625 전쟁 이후에 붙잡힌 미국 사람중에서 가장 엄중한 죄를 지은 사람이다.
당신 혼자만 선교한 것이 아니고
당신이 수많은 사람들한테 북한 선교하라고 부추기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훈련시켜서 (탈북자를 북한으로) 돌려 보낸 사람이 많으므로
당신은 형법 60조 위반에, 국가전복음모죄에 해당되어
사형 내지 무기징역에 해당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죄를 낮추기 원하면
배후를 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알고보니까, 제가 YWAM에서 사역하는 것을 알고
YWAM의 창설자이신 로렌 커닝햄 목사님이 제 위에 있다고 얘길 합니다.
‘당신 위에는 로렌 목사가 있고, 로렌 위에는 오바마가 있다’ 그러는 겁니다.
'오바마가 로렌을 시켜서 나를 보내서 테러 행위를 감행하려 했기 때문에
당신은 CIA가 분명하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졸지에 제가 CIA가 된 것이죠.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들 자기들 말로 '품을 많이 팔았다' 그래요
즉 그들이 노력을 동원해서 중국도 보내고, 뭐 조사를 해 보고
제 이메일을 8천개를 다 번역하고, 4개월 동안 수십명이 가서 조사한 후에, 내린 결론은
‘당신 선교사 맞네!’ 였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도 그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이다' 라고 얘기를 하면서
제가 평양으로 가게 되었고 평양에서 사전 심리 절차라는 것을 받게 됩니다.
▲나진에서 평양으로 이동
그것은 예심이라고 합니다.
4개월 반동안 조사를 받고 검사가 들어와서는
최고 검찰소에서 기소가 되어서 이제 재판을 기다리라고 사형 내지는 무기징역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는 중간에 3차핵실험을 하고 대륙탄도미사일을 발사하고
미국과 전쟁을 하겠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때 제가 붙잡혀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테도가 점점 안 좋아지더니 저를 전범으로 처리하여 즉결 처분하고 말겠다는 위협도 하곤 했습니다.
근데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냐면
‘얘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너의 모든 염려를 내게 맡겨라.’
그러면서 제가 이런 조사를 받지만, 거의 하루 종일 혼자 앉아있게 만들어 놨습니다.
하루 종일 앉아있으니까 제가 뭐하겠습니까?
'제가 가져온 성경책 좀 주십시오' 하니 성경책을 돌려주더라고요.
제가 가져갔던 성경책이 지금 들고 있는 이 영어성경입니다.
제 집사람이 나중에 한국어 개역성경을 보내주었어요. 두 가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마 북한에서 평생읽은 성경보다 더 많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잘 안 읽혀지십니까? 예. 성경 잘 읽혀지는 곳을 알려드립니다.
평생했던 기도보다 더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많이 예배하고, 그런 과정속에서 하나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돌보고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루는 제가 앉아있는데 갑자기 먹고 싶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평양냉면이 먹고 싶었습니다. 평양에 왔는데 냉면을 안주더라고요.
그렇다고 제가 손들어서 냉면달라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래서 앉아있으면서 속으로 생각하면서 웃기도 했지만 냉면 주십사고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평양냉면이 나오는 거예요.
그때 청류관이라고 유명한 식당에서 냉면을 받아왔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 다음날에 앉아있는데 김치 볶음밥이 생각나는 것이예요.
근데 뭐 그냥 웃고 말았죠. 근데 그날 저녁에 김치볶음밥이 나오더라고요.
근데 이게 한 두번이면 우연의 일치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지만
4개월 반동안 그런 일이 40번도 넘게 있었습니다.
마치 내가 호텔의 룸서비스 시킨 것 같았습니다.
생각하면 주시고.. 생각하면 주시고..
이러면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 같았어요.
‘얘야 내가 너와 함께하는 것을 네가 아는냐?
너의 세밀한 마음 속의 소원도 내가 듣고 있다.’
주님은 좋으신 분이 십니다, 주님은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어제나 오늘도 영원히 동일하시고
지금 우리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북한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억류 중에 '선교사 사명'을 깨닫다
그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며 그 가운데 지탱하게 해주시는데,
결국은 제가 재판에 가서 15년 노동교화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노동교화형을 받게되자 담당 검사가 와가지고 아주 기뻐해요.
15년 밖에 안받았다고..
'제가 15년도 긴데요' 얘기는 했습니다만은
'그래도 죽지는 않지 안는가.. 집에 갈길이 열렸다'고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더니 교화소는 건강상 이유로 보낼 것 같지 않다 하더니
결국은 교화소를 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사람은 처음으로 교화소 라는 데를 갔습니다.
가보니 ‘외국인 특별 교화소’ 라고요.
그래서 일하는 사람은 30여명이 넘는데, 수인은 저 혼자였어요.
제 말고 다른 수인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리고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주중 6일 동안 나가서 일을 하는데
처음에는 농사일을 했습니다. 콩 밭에가서 콩 심는 것부터 했습니다.
제가 농사를 해본 적이 있어야죠.
그다음에 나중에는 김(풀)이 나오는데, 뭐가 콩인지 김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콩 심을 때는 콩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고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콩 심은데 풀도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는 콩만 심은 것이 아니라, 다른 농사일도 하다가
겨울철에는 석탄도 파고 석탄가루를 재도 내고 돌도 나르고
중노동이란 중노동은 여러 가지를 해보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힘들었습니다.
저녁 때는 꼼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습니다.
아침마다 전신갑주를 입었어야 됐습니다.
‘주님 오늘 하루 부탁합니다. 내일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를 부탁합니다.’ 기도하고 예배하고 하나님 말씀보고
의지하고 나아가서 일했습니다.
그렇게 두어달 시간을 보내다 보니까 이분들이 점점 더 이상하대요.
미국사람 처음 왔는데, 목사 선교사는 처음 왔는데 당신 좀 이상하다 그래요.
‘왜 그렀습니까?’ 하니
‘우리가 간수고 당신이 죄수인데, 왜 당신이 더 행복해 보이느냐?’
그러는 거예요.
‘그 어디서 기쁨과 그 소망과 그 즐거운 모습이 도체 왜 어디서 나오느냐?’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집엔 가지 못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갑니다. 몸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마음도 어렵죠. 왜냐면 집에 갈 걸로 기대했는데 가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예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그러자 제가 주일날에는 하루를 쉬게 해주는데 쉰다고 쉬는 게 아닌데
앉혀 놓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리고는 텔레비전을 보게 합니다.
자기들 중앙방송밖에 안 나오는데 그게 더 어렵습니다.
그 방송을 참 많이 계속 그들이 하는 것을 보고
교육하는 의미에서 보게 합니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서 그 때는 아주 단순해요.
좀 더 쉬고 싶고, 좀 더 자고 싶고, 좀 더 먹고 싶고.
왜, 배고프니까.
제가 뭐 그런 상황에 있으면서 또 먹고 싶은 것이 생각나게 되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하와이 초컬렛이 먹고 싶었습니다. 너트가 들어있는,
두 번체는 KicKet(쵸컬릿)
세 번째는 Beef Jerky 육포,
네 번째는 Mixed Nut. 견과류,
다섯 번째는 프로틴바, 에너지바가 먹고 싶었어요.
너무 힘드니까 다니면서 일하면서 먹고 싶었으니까요.
근데 북한 교화소에서 하와이 초콜렛이 어떻게 나오겠어요. 생각만 하고 넘어갔죠.
그러고 나서 3달동안 더 일하다가 제가 60파운드 정도가 빠졌습니다.
그리고 영양실조가 되어서 병원으로 실려 가게 되었고요.
거기서 회복하는 치료받다가 두어달이 지나자
저의 어머니가 평양으로 저를 면회오셨습니다.
너무나도 감격적인 상봉이었고 참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지요.
이튿날 저의 어머니가 오실 때
뭘 좀 갖고 왔다고 하시면서 꺼내시는 것이
첫 번째 꺼내신 것이 하와이 초콜렛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키켓이었고요. 세 번째는 비프철크였고
네 번째는 믹스넡이었고 다섯 번 째는 프로틴바 였어요.
먹는 것은 다른 것은 안 가져오셨습니다.
내가 전화도 안했고 편지도 안했고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여러분 지금 여기도 함께 하십니다.
그런 주님께서 ‘야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하십니다.
1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집에 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 앞서 최장기 억류미국인은 5개월을 넘지 않았었습니다.
내가 영양실조까지 걸려서 병원에 누워있는데 도대체 막막하지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게될지..
그래서 제가 그러고 있는데 제가 저의 어머니 편지를 받았어요.
저의 어머니가 이러셔요.
‘예야 이제는 다니엘의 세친구의 믿음이 필요할 때 같다.
우리의 여호와께서 능히 구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할 지라도
그 믿음이 필요할 때라’고 그렇게 편지에 써서 보내셨습니다.
그때 제가 알았습니다.
‘집에 가지 못한다. 아 갈 소망이 없구나.’
사실은 그런 느낌이 있었는데, ‘주님 제가 여기 남기를 원하십니까?’ 물어볼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까봐요. 정말 못 물어봤습니다.
그러다가 몇주를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결국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제 마음 아시지요. 집에 가고싶습니다.
하지만 제뜻대로 마옵시고 주님뜻대로 하옵소서.
제가 집에 갈 권리를 주님앞에 내려 놓습니다.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자 주님이 나직하게 물으십니다.
‘얘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제가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니까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내 어린양을 돌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제 주위에 있는 3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제 주위에 있는데
그들이 저를 억압하고 저들 감시하는 사람들로만 생각을 했지
하나님의 어린양, 잃어버린 양으로 제가 보지 못했던 것을 제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이곳에 죄수로 보낸 것이 아니라 나의 아들로 보냈다.
내가 너를 이곳에 선교사로 보냈다.
네가 어둠에 같혔다고 생각했는데, 빛으로 이곳에 와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일을 행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가 선교사인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 기도했냐하면
‘집에 보내달라, Save me, 살려달라고,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 Use Me’ 하고 기도하니까
주님께서, 그들이 잃어버린 어린 양이요,
하나님께서 애타게 찾는 사람들로
주님께서 제게 보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길을 열어주셔야 하겠습니다.
제가 이분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하니까
주님이 한분 한분의 마음을 열게 해 주시고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을 때는
‘백공삼번!’ 제 수인번호가 1003번인데 그렇게 번호로 부릅니다.
그럼 제가 예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을 때는 한명씩 오더니 ‘목사님 얘기 좀 하자요.’
그럽니다.
자기 가정이야기도 하고, 사는 이야기도 하다보니까
제가 가정 상담을 해주고 있고, 결혼 상담, 예비부부 상담,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도 하면서 점차 점차 그들에게
정말 나라를 뒤집어 엎으려고 미국에 동조하는 정말 나쁜 놈에서
나중에는 그들의 친구가 되어지고, 동무가 되어지고
그들의 목자가 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한 분이 물어요.
‘목사님, 목사님처럼 하나님 믿으면 뭐좀 생기는 것이 있습니까?’
라고 묻더라고요.
‘생기는게 있으니까 믿지 그냥 믿겠어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고
공급하신 것, 보호하신 것..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좋네요, 우리는 자력갱생하라고 하는데, 당에서 주는 게 없어요.
근데 기도하면 주신다니 부럽습니다’고 했습니다.
또 한 분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목사님, 교회에 하나님 믿고 교회가면 뭐 좀 갖다 바쳐야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한 분은 혜택을 물어보고, 한 분은 대가를 물어보더라고요.
제가 ‘물론 십일조도 있지만 그보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고 이야기 했습니다.
제가 2년동안 그곳에서 못가고 있으니까
2년을 있으니까 한 젊은 친구가 저한테 이렇게 얘기해요.
‘아 하나님이 살아있대매, 하나님 살아있으면 왜 아직 여기 있소?
기도하면 들어준다며?’
그래서 제가 이랬어요.
‘하나님의 계획이 다른 것 같다고 그 계획속에는 선생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니면 어떻게 하나님이야기 듣고 세상 밖에 있는 이야기 듣겠냐고..’
그랬더니 맞대요. 평생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첫 한 달동안 조사받을 때, 한 사람이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내가 하느님이라는 말은 들어봤습니다.
왜냐면 길일성이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을래면 조선의 하느님을 믿으라고 말한 것이 있어요.
하느님은 들어봤는데 예수란 말은 처음들었소.
그 예수가 중국에 사냐 조선에 사냐?’ 이렇게 물어보더라고요.
근데 이 분은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평양대학 나왔습니다.
농담하는 게 아니예요. 들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게 지금 북한의 현실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100년 전에는 동방의 예루살렘이었던 그 평양에서
이제는 예수의 이름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2500만 우리 동포들이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여러분 물어보십시오. 탈북해 오신 분들에게 예수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젊은 사람일수록 더더욱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것이 북한의 참혹한 실정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저한테 이런 예화를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제가 이 예화는 바로 인도에 있는 선교사님이
미국에서 인도에 가서 사역을 하는데
그 마을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고 굉장히 말이 어려워서
배우기가 너무 어려워서 제대로 복음도 못 전하고 수년을 있다보니까
10년까지 기다려 주다가 파송교회에서 불러 들였습니다.
실패한 선교사로 돌아가게 된 것이죠.
그 후임으로 젊은 선교사를 보냈더니
이 선교사는 언어에 특출한 재능이 있어서
3년 되니까 아주 언어를 잘하게 되어서
이제 모든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제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믿을 사람 손드세요!'하고 이야기 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설명을 잘못했지' 하고 해서 다시 한번 설교를 하고
'이제 이해되셨지요? 예수 믿을 사람만 손드세요!' 하니까
또 다른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드는 것이랍니다.
이분이 화가 나서 '예수를 알긴 알고 손을 듭니까?' 하니
그 부락의 촌장님이 손을 드시더니
‘예수님께서 우리랑 10년간 사셨었습니다!’
그 예화를 북한에 있을 때에 감옥에 있을 때에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렇구나! 이분들은 예수란 말을 들어 본 적도 없고
또 앞으로 내가 떠난 후에도 예수를 들어볼 수 있는 길이 없을 수도 있는데
내가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수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떠나간 자리에 그들에게 예수의 흔적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말로는 전할 수도 없습니다. 왜? 그들이 위험해 지니까요.
‘하지만 주님, 제가 이들에게 작은 예수가 되어줘야 되는 것!’
정말 하루하루를 잘 살 수밖에 없었고
기도하고 의탁하지 않으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과정속에서 ‘주님, 행하시옵소서.’ 기도하고 말씀 보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면서 나중에 그들에게 생활 기록부가 있더라고요.
그것을 보니 이렇게 썼어요.
‘성실하고 근면하고 고지식하다.’
감사했었습니다.
근데 1월 중순에 교화소에 가서 석탄을 퍼고 있었는데 연락이 왔어요.
이틀 후면 이제 미국에서 특사가 온다고
‘이젠 집에 가는 구나!’ 너무 좋아서 다 인사했습니다.
‘이제 집에 갑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제가 노래까지 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어져야 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이분들이 뭐라하느냐면 ‘야 슬픈노래 하지마라 가긴 어딜 가니?
좀 있자, 말동무되니 좋은데 뭐 벌써갈려고 해? 1년 반밖에 안되었는데!’
그러면서 서운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빨리 가야 빨리 또 돌아옵니다.’
‘다음번에 올 때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축복이 되어서 들어오길 소망합니다.’
그런데 2틀 후에 오겠다는 특사는 오지 못했습니다.
취소된 것을 알고 낙심이 되었죠.
하지만 주님께 제가 권리를 내려놨지 않습니까?
권리 포기는 매일 해야되는 것이더라고요.
한번으로 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알았죠. ‘이제는 한미군사훈련도 있고
최소한 6개월은 가지 못하겠구나!’
저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 같았습니다.
‘6개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복음의 빚진 자로서 나갈 수 있을까?’
밤에는 정말 칠흑같이 어둡습니다. 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근데 자는 게 아닙니다. 앉혀 놓습니다.
일하고 와서 굉장히 힘든데 의자에 앉아있을 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러면서 그때 밤마다 많은 찬양을 했어요.
찬양을 하면서 특히 많이 한 찬양이 ‘내 영혼이 은총 입어!’ 라는 찬양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렇죠.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환난과 고난 속에 있더라도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동행하시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제가 ‘초막이나 궁궐이나’ 대신에 ‘감옥이나 병원이나’
'주 예수를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많이 불렀습니다.
왜 그랬냐하면, 이분들이 안 듣는 것 같지만 다 듣고 있고
안보는 것 같지만 다 보고 있습니다.
나지막하게 하는 찬양이 교화소 전체로 산골에 있기 때문에 퍼져 나갑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어떻게 이 상황에서 이러한 찬양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그들이 이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석방되어 집에 갈 때, 교화소 소장님이 악수를 청합니다.
딱 한마디 하더라고요. ‘또 봅시다!’
교화소에 교화인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라고 그러면서
눈물이 글썽글썽하는 것을 보면서 참 감사했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와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집에 온 것은 너무 감사한데
그들을 생각하니 목자가 양들을 버려 놓고 온 기분이다. 맘이 슬프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주님은 날마다 만나주시고 그곳에서 역사하셨습니다.
하시만 어렵고 힘든 시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딱 2년째 되는 날이 된 11월 2일 날 검사가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 집에 못 가! 앞으로 13년 남았어.
아무도 당신을 기억하지 않고, 미국정부도 당신 버렸으니까
집에 갈 생각하지 말라’고 하고 갔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번만 하면 족한데 매주 토요일마다 와서 합니다.
이제 제가 하도 그렇게 이야기 하기에 제가 이분 별명을 정해 놓았어요.
‘Mr. disappointment. 미스터 실망’
매일 와서 실망스런 말만 하잖아요.
우리가 전신갑주를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
우리 주위에 이런 사람이 와서 계속 이런 말을 하면
마음이 낙심이 되어요. 실망스런 말을 들으면 실망이 되고
나중에는 소망을 잃어버리고 절망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다음 날 저한테 보내주신 편지들을
450통이 넘는 편지들이 저한테 전달되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You are not forgotten. 당신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세계 수 십 만 명의 사람들이 저를 위해서 서명운동에 참여하고
기도해 주시고 함께 하는 것을 제가 알기 때문에 그렇지,
‘내가 이분의 말을 들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람들의 말을 들을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고 날마다 다짐해야 했습니다.
◑드디어 석방
2014년 11월 3일 월요일, 억류된지 딱 2년째 되는 날
새벽에 주님이 날 깨웠습니다.
그러면서 스바냐3:20절 영어로 말씀하셔서 영어성경을 펼쳐보니까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I will bring you home. (NIV)
*개역, ‘내가 너희를 모을지라’
그게 11월 3일인데, 금요일 11월 7일에 특사가 왔고요.
11월 8일에 제가 미국의 집에 왔습니다.
▲집에 오는 비행기에서 이 얘기를 하니까, 이분들이 깜짝 놀라요.
‘우리가 11월 3일 월요일 날 워싱턴 DC를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북한 교화소에서 제게 말씀하시던 그 시간에
미국에선 비행기를 보내시고 계셨지요.
비행기에 저를 석방시키려고 20명도 넘게 타고 왔더라고요.
제가 엇그저께 여기 메릴랜드에 와서 다른 교회에서 기도모임을 인도했는데
저를 데리러 오셨던 특사 중에 2번째로 높으신 백악관에 계시는 분이 오셨습니다.
그가 뭐라 말씀하시는 줄 아십니까?
‘당신이 나온 것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나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행하시겠다면 하십니다.
집에 돌아올 거라면 집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이제는 오바마대통령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근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계신 모든 성도님들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상황도 아십니다. 여러분의 어떤 어려움도 주 앞에 맡기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함께하십니다.
제가 배운 것은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도
그 때가 주님께 시선을 고정할 때이고 그때가 주님을 신뢰할 때이며
그 때가 주님을 사랑할 때입니다.
그 때가 주님께 순종할 때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제가 한 가지 늘 생각하고 있는데, 북한에서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진심은 그 어디서나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나아갈 때
그들의 마음이 열리고 녹아져 내려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집에 돌아오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를 잊지 않았다. 세상이 너를 잊지 않았고
내가 너를 잊지 않았다. 이제 내가 한 것을 전하라!
왜냐면 내가 이 백성들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의 눈물을 보았고 그들의 신음을 들었고
내가 이제 그들을 곧 회복하리라. 그러면서 그들을 잊지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제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수많은 분들이 저를 모르는 분들이 길거리서 알아보고
제가 기도했다고 말하시는 분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래서 만약 정말 수 년 후에 통일이 되어서 북한 성도님들을 만날 때
우리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형제님 자매님, 제가 (동포들과) 함께 서있었습니다. 제가 잊지 않았습니다.
제가 기도했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우리한테 요구하시고 원하십니다.
이 일에 동참하시기를 오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선교는 장난이 아닙니다.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선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교를 통해서 주님은 역사하고, 주님의 일들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오늘 이 시간 저는 돌아왔지만 이제 주님께서 다시 복음의 현장으로
저를 보내셔서 이제 제가 한국으로 다음 주에 나가서
이제 부터는 하나님께서 잊지말라고 했던
우리 북한에서 나와 계시는 탈북민들을 위해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의 북한 밖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수많은 분들 기억해 주십시오.
북한에 억류된 우리 임현수 목사님을 포함해서 선교사님들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 죽어가는 동포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기억할 때 그들과 함께할 때,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시간을 통해서 주님이 행하시고 놀라우신 분이시며
신실하신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이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여기 있습니다. 무관심한 저를 용서하시고
제가 함께하기를 원하오니 제가 기억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다리가 되겠습니다. 그들을 함께 섬기겠습니다.
라고 결단하는 저와 우리 모든 성도들 되길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