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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의 첫 번째 전환점

LNCK 2017. 10. 31. 10:08

https://blog.naver.com/karamos/220301885459

 

◈인류 역사의 첫 번째 전환점      창11:27~32           2013.04.21.

 

서론

 

노아의 홍수가 일어난 후 인류 역사에는 두 가지 큰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브람이고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관심이 온 인류에게서 한 사람으로 축소되는 전환점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관심이 한 사람으로부터 온 인류에게로 확대되는 전환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축소의 전환점이고, *구심적

예수 그리스도는 확대의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심적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관심이 아브람이라고 하는 한 사람에게로 축소되는

첫 번째 전환점에 관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11장 이후 하나님의 관심은 아브람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집중이 되는 것입니다.

 

◑1. 본문에 나타난 세 가지 사실

 

본문에는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이 나타납니다.

 

▲1. 첫째, 본문에 사람의 이름이 많이 나오지만

 이름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중요성에 따라서 순서대로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데라는 70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창 11:26~28).

 

데라가 70살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고 말합니다.

이상한 것은 한 해에 아들 셋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은 세쌍둥이도 아니고 배다른 형제도 아닙니다.

 70세에 낳은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70세에 낳은 데라의 장남은 하란입니다. 둘째는 나홀이고, 셋째인 막내는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이 막내라는 사실은 11:2절을 보면 나옵니다.

“데라는 205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창 11:32).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죽을 때에 나이가 205세이며

그 때에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셨으며 그때의 나이가 75세입니다.

즉 아브람은 그 아버지 데라가 130세에 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70세에 낳은 사람은 맏형인 하란인 것입니다.

 

그 후에 나홀과 아브람을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26절에는 아브람이 먼저 나오고, 나홀이 둘째로 나오며, 하란이 마지막에 나오는 것일까요?

 

출생순서로 보면 하란이 먼저 나와야 하지만, 거꾸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사람의 이름순서는, 나이 순서가 아닌

그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얼마나 공헌도가 있느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느냐는

구원역사의 중요성을 따라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7절을 보면 아버지 데라는 장남을 일찍 잃었습니다.

그 장남은 죽기 전에 자식들을 낳았으며, 아브람의 조카인 롯과, 나홀의 아내가 된 밀가입니다.

 

즉 이 명단은 단순한 사람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이 구원역사를 베푸시는 데에 중요한 이름들을 열거하고 있고,

그 순서도 중요한 순서대로 기록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를 중요하게 여기실까요?

돈을 많이 버는 사람, 출세하는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 인기가 있는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그 사람이 얼마나 공헌했는가를 보십니다.

 

하나님이 영혼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데에 그 사람이 얼마나 기여했는가에 따라

그 이름이 중요히 여김을 받고 그 순서대로 기록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노아의 홍수가 끝난 후 언제 태어났는가는 창세기를 통해 계산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계산을 해보면 아브람의 아버지인 데라는, 홍수가 끝난 후인 222년에 태어났습니다.

 

데라가 130 세에 아브람을 낳았으니

아브람은 홍수가 끝나고 352년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우스 땅에 살던 욥이라는 사람은 아브람보다 먼저 살던 사람입니다.

이 욥은 하나님을 알았고, 자신의 가족을 위해 제사를 드리던 가족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또한 살렘 왕이던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은 아브람이 전쟁을 하고 돌아올 때에

아브람에게 십일조를 받고 아브람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멜기세덱은 아브람보다도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것을 14:18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욥도 있고, 욥의 친구들도 있고, 멜기세덱도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그들이 아닌 아브람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해 한 사람에게 집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브람이 택함 받고 갈대아 우르에서 나온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인류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인류의 수명이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홍수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백 세를 넘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홍수가 끝난 이후에는 첫 세대가 6백 세를 살았습니다.

두 번째 세대는 4백 세 정도를 살았고,

세 번째 세대는 2백 세를 넘게 살았으며,

네 번째 세대를 넘어 가면서 2백 세 미만으로 살게 됩니다.

 

아브람은 175 세를 살게 됩니다. 그러면 모세 시대에는 인류 수명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시90:10절을 보면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나옵니다.

 

지금 80세를 넘은 사람은, 큰 복을 받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세 시대에 수명이 그렇게 줄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토대로 죽은 나이를 통해 언제 태어난 사람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욥은 고난을 당하고 나서 고난에서 돌이킨 후에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다고 합니다(욥 42:16).

그러므로 이를 통해 욥은 아브람보다도 더 이전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인간의 수명이 줄게 된 것일까요? 그 원인은 죄가 점점 쌓여가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수명이 줄고 죄 때문에 사망이 오게 된 것입니다.

 

존 위트콤과 헨리 모리스라는 사람이 1961년에 ‘창세기 대홍수’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두 과학자는 노아 홍수 때에 궁창 위의 물이 다 쏟아져

방사능의 유입을 막을 수 있는 덮개가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해로운 방사능이 계속 들어오기 때문에 인류의 수명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과학자가 아니라서 이 이론의 확실성은 잘 몰라도,

중요한 것은 인류의 수명이 줄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수명이 줄어든 것이 죄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좋은 점도 있습니다.

인류의 수명이 줄어들게 되면서 악이 확산되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악인들이 오래 살아 그 악한 영향력을 발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악인들은 일찍 죽어 다행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그 인간 잘 죽었다”는 평가를 들으면

그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악한 인생입니까?

 

이 세상에는 이렇게 빨리 간 것이 세상에 유익이 되는 그런 사람들도 많습니다.

독재자들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끔찍한 곳이 되겠습니까?

 

물론 선인도 일찍 돌아가셔서 안타깝지만, 빨리 죽어야하는 악인이 때가 되어 죽으니

이것을 통해 악을 막는 하나님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노아 홍수 이후부터 아브람이 태어날 때까지 352년 동안

인류의 악이 끊임없이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도 갈대아 우르에 살 때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아브람도 우상숭배를 하던 사람입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수 24:2).

 

데라가 강 저편에서 다른 신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는 갈대아 우르는

그 당시에 달의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본거지였습니다.

데라조차도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는데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데라의 후손들을 보면 다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인 라헬도 자기 아버지의 우상 드라빔을 훔쳐 가지고 나왔습니다.

라헬의 아버지이자 야곱의 외삼촌인 라반도 드라빔을 가리켜 ‘내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만큼 데라의 후손, 아브람의 친척들도 종교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셈의 후손이나 함의 후손이나 우상숭배를 하고 하나님을 향해 배교하는 데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또한 아브람의 아버지인 데라의 후손들도 모두다 근친결혼을 했습니다.

 

아브람은 아버지가 같은 이복누이 사래와 결혼했습니다(창 20:12).

아브람의 형 나홀은 자신의 조카와 결혼했습니다.

형 하란의 딸인 밀가와 결혼한 것입니다. 삼촌과 조카가 부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근친간의 결혼을 허락하셨다고 하더라도

모세의 율법에서 근친간의 혼인은 금지된 죄라고 선포합니다.

 

아브람과 롯의 시대에 소돔과 고모라도 동성연애가 극심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브람까지 오기까지 352년 동안

인류는 종교적인 부패와 도덕적인 부패가 일반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을 택하시고 부르시어 우상숭배를 벗어나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아브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을 택하신 것이 인류 역사의 첫 번째 큰 전환기인 것입니다.

 

◑2 본문의 두 가지 영적 교훈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창세기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장 기본이 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택하신 것, 그 후손과 그의 민족을 택하신 것은 순수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택하신 것은 착하기 때문도 아니고 훌륭하기 때문도 아니며

아브람이 믿음이 좋기 때문도 아닙니다. 아브람도 우상을 숭배했던 똑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장점이나 공로나 능력이나 경건성을 보고 택하셨다면

아마도 욥이나 멜기세덱을 택하시는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도 아닌 멜기세덱도 아닌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숭배하던 아브람을 택하셨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훌륭한 사람을 택하면 자기가 훌륭해서 그런 줄 압니다.

그러나 아브람처럼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을 택하면

내가 구원받은 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경건하게 살고 있으나

한순간이라도 자신이 불신자들,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보다 나아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전적으로, 100%, 완전히,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래도 내가 무언가 나은 것이 있어서 하나님이 날 구원하시고

나를 천국가게 하시지”라는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망령된 생각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빛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의 은혜를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밖에서 술 팔고, 몸 파는 사람들을 나쁘다고 하지만, 그들이 은혜를 받지 못해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가 없다면, 그들과 똑같이 되었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신앙의 제 1원리인 “내가 구원을 받고 천국백성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사람이 택함을 받는 것은 그 사람이 경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사를 연구해보면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에 중세기에도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로마가톨릭에 대항하고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경건한 사람들을 사용하여 종교개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보면 그저 수도원에서 공부하던 루터, 책을 좋아하던 칼빈을 택하셔서

위대한 종교개혁을 일으키셨습니다.

 

중세기에는 산속에 들어가 기도하는 영권이 많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위대한 능력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쓰시지 않았습니다.

이는 영권의 종들을 쓰시면, 자신들이 경건해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능력을 주시고 지혜를 주셨다는 고백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잘나서 택함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유대인을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구원받고

신앙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사람 숫자의 다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다수결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이 세상에서 다수가 될 수 없습니다.

 

숫자 많은 교회라고 해서 참된 교회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큰 교회보다도 순수한 교회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적인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진실로 예배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즉 사람 많고 능력 많다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택하심’은 육신적, 육체적인 관계에서 저절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람의 육신의 후손이라고 해도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목사, 장로라 해서 자녀들이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니며

목사의 자녀들 중에도 못된 사람들이 있고, 장로의 자녀들 중에도 타락한 자녀들이 있는 것입니다.

목사나 장로의 자식이라 해도 각자가 하나님과 일대일로 신앙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고 환경을 조성해주는 조력자일 뿐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영혼까지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부모를 둔 자식들도 각자가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도리어 훌륭한 부모 밑에 태어나 하나님을 반항하는 자녀는

심판 날에 더 큰 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큰 은혜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구원받은 사람, 하나님의 택함과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의 장소에서 단호하게 나와야 합니다.

 

성도는 우상과 절대 교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귀신숭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한국 문화에 살면서, 명절마다 제사를 지내는 것 때문에 집안에 우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귀신을 숭배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갈대아 우르와 단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에서 나온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란에서도 나와야 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는 800km입니다.

데라도 갈대아 우르에서는 나왔습니다. 맏아들 하란은 죽었고,

둘째 나홀과 아브람 그리고 하란이 낳은 자녀들을 데리고 하란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데라는 800킬로를 걸어와 기진하여 하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데라의 둘째아들인 나홀은 거기가 좋다고 거기 눌러 앉았습니다.

조카인 밀가와 결혼을 하여 하란에 정착한 것입니다.

 

오로지 아브람과 조카 롯만이 하란에서 나와 가나안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우상의 장소이고, 하란은 절반 순종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가나안 땅, 완전 순종, 절대 순종의 장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절반만 순종하지 마시고 절대 순종, 완전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스데반은 사도행전을 통해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고 설교했습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행 7:2).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람아 너는 우상숭배를 하는 곳에 머물지 말고 너의 고향을 떠나고 친척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일 땅으로 가라”

 

아브람은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가나안 땅까지 들어간 것입니다.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니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창17:4).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삭을 주시고 그 후손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도 구원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이 여러분 각자에게 나타나셨습니까?

여러분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셨습니까? 예수 믿으면서도 아직도 점쟁이를 찾고 그러십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그리고 명절이라고 해서 제사지내지 마십시오.

제사는 귀신, 즉 악령이 와서 받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란도 떠나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세상과 교회에 양다리 걸치고 살다보면

아브람 같은 복을 받지 못하고

나홀과 같이 하나님나라에 절대적인 기여자가 되지 못하고,중간 기여자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도 떠나고 하란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