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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으로 뚫어진 귀 출21:2~6
서론
출20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받은 율법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하나는 십계명이고,
두 번째로는 민사법과 형사법에 관한 시민법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성막의 건축에 관한 율례들입니다.
출21장부터는 주로 이스라엘 사회를 규율할 민사법, 형사법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그런데 이 시민법의 제일 서두에 다루고 있는 내용은, 히브리 노예의 문제입니다.
왜 히브리 노예제도에 관한 문제를 시민법에 다루고 있을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인권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는 70년대 80년대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할 수 없던 말도 마음껏 할 수 있고, 그 때 누리지 못한 자유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동족들, 바로 우리의 피를 나눈 피붙이요
우리의 동족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가장 가까운 북쪽에 지금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서는 노예문제를 이 시민법의 서두에 다룰 정도로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북한 동포들의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인권이 주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노예가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되었는데
그 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 주인의 종이 된 그런 헌신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권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시고
오늘 우리 사회가 이 인권 문제에 관하여 큰 아픔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먼저 생각하겠습니다.
◑1. 노예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정
히브리 노예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은 오늘날 몇몇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본문을 읽는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노예제도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노예제도가 인간의 악인데 하나님은 그런 제도를 당장에 폐지하라 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해서 노예제도를 이렇게 정규적인 규례를 주시고 법을 주셔서 제정을 하시느냐?”
이런 질문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마음속에는 노예제도라고 하면 아프리카의 노예시장이나
미국 남부의 흑인노예를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 히브리 노예제도는
인권을 탄압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도리어 사람을 구원하고 인권을 보장하는 그런 제도입니다.
▲율법을 보게 되면 히브리인이 동족을 노예로 삼을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출22:3절에 보면 도적이 도적질하다가 걸렸을 때 도적질 한 것을 네 배
혹은 다섯 배로 배상을 해야 하는데 도적이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서 노예가 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노예들은 주로 도적들입니다.
또 두 번째로는 너무나 가난해서 자기 힘으로 먹고 살 수 없을 때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종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레25:39절에 보면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도적질하다가 잡혔는데 갚을 것이 없는 경우, 아니면 굶어 죽게 된 경우의
두 가지가 노예가 되는 경우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두 가지 경우에 노예제도를 허용하시더라도 많은 제한을 두셨습니다.
6년이 지나면 반드시 자유를 주라는 말입니다.
“7년째는 반드시 그를 해방시켜라 그리고 그에게 일을 시켜도 형제를 대하듯이 대할 것이요
또 가족을 대하듯이 대접을 해라.” 이렇게 규정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 노예제도는, 사실은 망한 사람을 살리는 제도요,
일정기간 그에게 회복의 기회를 주는 은혜로운 제도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종을 부릴 때에 종이 아니라
상전을 모시고 있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더구나 6년이 지나서 7년 째 자유를 줄 때에도 빈손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15:12-14절에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도적질 하다가 갚을 것이 없어서 노예생활을 했는데
그를 형제처럼 대하고 칠 년째에는 자유를 주되 퇴직금까지 주어서 내보내라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히브리 노예제도인 것입니다. 얼마나 은혜스러운 제도입니까?
이 히브리 노예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너그럽고 후한 마음을 가지고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되겠습니다.
▲왕상4:1절에 보면 선지자의 생도가 신학을 공부하다가 빚을 지고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내는 어떻게 됩니까? 아들이 둘이 있는데 빚을 준 사람이 와서
“네 남편이 죽었으니 네 아들들을 종으로 삼아야 되겠다.”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빚을 졌을 때 아들을 종으로 삼으라고 하는 것은 율법에 없는 제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경우가 아닙니다.
그런데 벌써 열왕기하에 오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못된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가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서
“선지자여 우리 남편이 신학공부를 하다가 이렇게 일찍 죽어버렸고
공부할 때 등록금 때문에 빚을 지게 되었는데
우리 두 아들이 종이 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엘리사 선지자가 동네에서 그릇을 있는 대로 빌려오라고 해서
그 그릇에 기름을 가득 채워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빚을 갚고
두 아들이 종이 되는 것을 면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열왕기하 4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으로 삼을 수 없는 경우를 가지고
종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시절에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7년째 자유를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면으로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렘25:17절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를 6년 부려먹었으면 그가 아무리 도적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퇴직금을 줘서 내보내기로 했는데 7년째에도 자유를 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칼과 염병으로 치시고
세계 모든 민족에게 흩어 버리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 가운데 큰 죄악이 인권문제를 소홀히 여기고
남에게 줄 자유를 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자유를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남의 자유를 억압하고 주어야 될 자유를 주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도 그의 자유를 빼앗으실 것입니다.
기독교는 자유를 원합니다. 나의 자유뿐만 아니라 남의 자유도 원하는 것이
참된 기독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렇게 인권을 중시 여기고
자유를 중시 여기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사시고,
그 심정으로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인권문제가 핵심은 아닙니다.
본문의 핵심은 7년이 되어서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자유를 원치 아니하고 스스로 노예가 되겠습니다.
주인이 좋아서 내가 주인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결단하는 경우라는 것입니다.
이 노예가 처음 노예로 들어올 때 가족이 있었으면 7년이 지나면
가족이 같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보니까 총각으로 왔는데
젊을 때 실수는 한번 했지만 사람 됨됨이가 괜찮아 보이면
자기의 여종을 붙여서 장가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여종의 소유는 주인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노예가 와서 주인이 붙여준 여종과 살고 자식을 낳았으면
그 자식도 주인의 소유가 됩니다.
그러므로 7년째 자유를 얻어 나갈 때에는 부인과 자식은 놓고
자기 혼자 자유를 얻어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 노예가 “나는 주인을 사랑하고 내 처를 사랑하고 내 자식을 사랑해서
내가 이제부터는 주인의 종이 되어 영영토록 주인을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경우에는 평생 그 주인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일 때 주인에게는 약간의 공개적인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를 재판장에게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그 종은 재판장에게 자기의 의사를
분명히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면 재판장은 그를 데리고 문이나 문설주에 데리고 가서
송곳으로 그 귀를 뚫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문설주에 귀를 대고 뚫었다는 것은 영영히 주인의 종이 되겠다는
공개적인 의식인 것입니다. 자발적인 의사로 이러한 의식을 거치면
히브리 종은 영영히 주인의 종이 되어 주인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19세기에 미국의 노예를 해방한 유명한 대통령 이름을 아시죠?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그는 1861년부터 65년까지 남북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서 미국의 노예를 해방했습니다.
그런데 링컨 대통령이 하루는 노예시장에 나갔습니다.
노예시장에 한 젊은 처녀가 주인에게 몹시 학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링컨은 값을 흥정해서 그 젊은 여자를 종으로 샀습니다. 그리고 같이 길을 갑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말합니다. “여자여 그대는 이제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놀라서 잠시 가만히 있더니 이렇게 물어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무엇이나 말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링컨이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또 묻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링컨이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노예는 또 묻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뜻입니까?”
링컨이 마지막으로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가도 좋습니다.”
그러자 노예가 된 여종의 눈에서 눈물이 맺힙니다. 그리고는 링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시니
그렇다면 나는 내게 자유를 주신 당신을 따라가서 당신을 평생 섬기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히브리종의 자발적인 종이 되는 과정과
똑같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2. 스스로 노예 되는 경우
스스로 노예가 되는 사람은 여섯 가지를 분명히 선언해야 합니다.
1) 첫째는 그 선택이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5절에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이것은 진심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강요나 협박에 의해서 종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는 주인과 처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노예가 된다는 것을 스스로 선언해야 되는 것입니다.
1960-70년대에 유명했던 가수 최희준의 노래 중에 “맨발의 청춘”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 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사랑만은 단 하나로 목숨을 걸었다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마라
그대는 태양처럼 우러러 보는 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줄 날 있으리라.”
길거리 깡패도 사랑에는 단하나의 목숨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우리가 길거리 깡패만도 못하면 되겠습니까?
깡패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데 우리는 무엇을 걸었습니까?
우리는 사랑 때문에 자발적인 종이 되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가를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3) 세 번째로는 주인이 준 축복에 감사해서 스스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도적질하다가 노예가 되었으니 장가나 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 주인이 결혼도 시켜주고 아이도 낳고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은혜에 감사해서 주인을 영영히 섬기겠다. 감사가 원인이 되어야 합니다.
4) 네 번째로는 공개적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그냥 은밀한 곳에서 나는 종이 되겠습니다..
하는 것은 안 됩니다. 공개적으로 제사장에게 가서 자기 귀를 뚫고
사람들 앞에 만천하에 공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는 것을 공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10:32절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당신 예수 믿으세요?” 라고 물으면
담대하게 “나 예수 믿습니다!” 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저는 어디 가도 “나 목사입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목사 아닌 척하면 그 동기가 좋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가든지 공개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임을 드러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자발적인 종이 되는 것도 공개적인 의식을 거쳐 하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종이 되는 사람은 주인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언약하는 것입니다.
5) 다섯 번째로 자기 귀를 뚫는다는 것은 내가 주인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듣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6) 여섯 번째로 자발적인 종은 그 미래를 완전히 주인에게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조건이 되어야 자발적인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종은 영영토록 주인을 섬기는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3. 성도가 얻는 자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인간의 자유 가운데 저차원적인 자유,
즉 육신의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육신적인 자유, 정치적인 자유는 수준이 낮은 저차원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고차원의 자유, 영적인 자유에 대한 모형인 것입니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자발적으로 범죄한 이후에 이 영적인 자유를 상실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을 때에 자기의 자유를 행사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를 행사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의 자유를 잃어버린 사건이 된 것입니다.
인간은 그 이후로 모든 영적인 자유를 상실했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자유행동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인 자유는 상실했습니다.
마귀의 종이 되었고 죄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과 신학을 바르게 구분하려면 ‘자유 행동자’와 ‘자유의지’의 개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유행동자이지만 영적인 자유는 상실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33절에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자유, 고차원적인 자유를 말씀하시는데
유대인들은 저차원적인 육신의 자유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은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요8:36절에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예수 믿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유는 무슨 자유입니까?
영적인 자유입니다. 우리는 마귀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지옥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죄책감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높은 고차원적인 자유라는 말입니다.
고로 예수 믿는 사람은 지옥으로부터 자유케 된 것입니다.
지옥가기는 다 틀린 존재가 되었고, 천국 갈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고차원의 영적인 자유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영적인 자유를 얻은 존재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획득해 주신 영적인 자유,
이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이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가?”입니다.
갈5:13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를 주시고 우리는 그 자유를 사용해서 자발적으로
다시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서로를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헌신과 그런 섬김이 은밀한 데서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잠깐 하다가 성질나면 사표 던지는 헌신이 아니라
영영토록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귀를 뚫으셨을까요? 여러분 예수님이 귀를 뚫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종이 되셨습니까? 시편 40편 6절에 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신다는 말은 영어로는 “my ears you have pierced”입니다.
“당신이 나의 귀를 뚫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귀를 뚫은 그런 종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100% 순종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고, 사람들의 발을 씻기고, 사람들의 종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여러분의 귀를 뚫으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가리켜서 화재보험 기독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옥불이 무서우니까 예수를 믿어두자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화재보험 이상인 것입니다. 지옥불에서 해방된 것으로
그것으로 종치고 막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유, 예수 믿고 얻은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께 우리의 귀를 뚫어서 하나님의 종이 되고,
서로 서로를 섬기는 종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미국 가수 밥 딜런이 부른 노래 가운데 "Blowin' in the Wind"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they call him a man”
이것은 “사람이 사람다워지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하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1963년도에 이 노래로 스타가 되었던 이 사람은 나중에 예수를 믿었습니다.
약간 신비주의적인 기독교에 가담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그는 인생 후기에 복음성가를 많이 불렀습니다. 그의 부른 노래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You're gonna have to serve somebody,
Well, it may be the devil or it may be the Lord
But you're gonna have to serve somebody.”
(당신은 누군가를 섬겨야 합니다. 그 누군가는 악마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둘 중 누군가는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를 얻었지만 이 자유는 완전한 자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자유는 누군가를 섬기는 자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내 귀를 뚫지 아니하고,
지옥의 두려움에서는 해방되고 싶지만
하나님께 내 귀를 뚫고 싶지는 않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귀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참 자유를 주셨음을 인해
스스로 귀를 뚫어 순종하며 하나님이 섬기는 종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귀 뚫음이 없는 기독교, 지옥불은 면제 되었지만,
예수는 믿기는 믿지만 예수를 위한 헌신과 순종이 아무것도 없는 기독교,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재앙이고 이 사회의 모든 비극의 원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영적인 귀가 하나님에 의해서 뚫려지는
그런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