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은 단지 하나의 죄가 아니라 고전10:1~11 스크랩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준다
고린도전서 10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하다가 멸망 받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은 다 유월절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유월절 피로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은, 구원의 완성이 아닙니다.
유월절 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인데 그 중에 다수가 광야에서 멸망 받았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진리를 바르게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자들 중에 다수가 광야에서 멸망 받았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진리인 구원 받은 사람도 버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림으로써,
자기 몸을 쳐서 버림 받지 않도록 성도들을 이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단순히 견해 차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영혼들을 천국 가게 할 수도 있고,
지옥 가게 할 수도 있는 사활적으로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진리를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전해야 하고
우리 자신들도 이 진리를 아는데서 멈추지 않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네 가지 때문에 멸망 받았는데
1) 하나는 우상 숭배하다가 멸망 받았습니다. 고전10:7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우상 숭배했던 것처럼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하면서도 얼마든지 우상 숭배할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 지옥 가는 첫 번째 이유는 우상 숭배 죄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이 다 우상 때문에 지옥 갑니다.
교회 다니는 크리스천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도
우상숭배를 계속한다면, 이 무리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2) 또 어떤 사람들은 주를 시험하다가 멸망당했습니다. 고전10:8
주를 시험한다는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러면 그렇게 믿어야지.
‘정말 그렇겠는가?’ 그것이 주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정말 그럴까?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인데 행함이 따르지 않아도 상급이 없는 것뿐이지.’
그것이 주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지성적으로 주를 시험하는 것은 오류니까 심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것이 삶으로 이어질 때, 그래서 실제로 ‘그 말씀이 그럴까?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고 지옥에 간다니.’
은혜 타령이나 하고 마음대로 살면 주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주를 시험하는 죄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들이,
신자들이 지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아니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안 믿습니다.
3) 그리고 간음하다가 멸망당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간음하다가 멸망당합니다. 고전10:9
간음하다가도 회개하고 회복되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시지만
많은 신자들이 간음해도 천국 가는 줄 압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지금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까
간음을 계속해도 천국 가는 줄로 생각하지만, 사탄에게 속고 있습니다.
성경은 간음하는 자들이 지옥 간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밝히고 있는 말씀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했다.”고 하시고,
“네 눈으로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려라. 한 눈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
그래서 그것이 상습적인 것일 경우에 그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고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구원론이 무너지니까 자꾸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 신자가 선행으로,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는다고 말하겠습니까?
회개를 외치고 성경대로 행함 있는 산 믿음을 외친 것을 율법주의 이단으로
끈질기게 몰아온 것은 그만큼 결단주의(지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론)가 확산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게 진짜 이단 사설인데 ‘결단주의’가 교계에 확산이 되어 있어서
회개, 행함 있는 산 믿음을 외치면 이상하게 보이고
자기들이 잘못되어 있으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의가 없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는 자에게 따르는 행함인데,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니까 그것을 율법주의로 매도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버젓이 말씀하셨고, 로이드 존즈, 존 스토트도 동일하게 해석하는 내용을 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율법주의로 몹니다. 그것은 결단주의가 퍼져 있어서
그러합니다. 그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아무튼 목회자라도 진리를 버리고 결단주의에 빠지니까
도덕 개념이 사라지고 쉽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결단주의에 빠져서 그냥 천국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무너지는 것입니다.
4)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 받은 이유 중의 하나가
지금 살펴볼 원망입니다. 고전10:10
오늘날 원망을 굉장히 작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좀 의외지 않나요?
우상 숭배해서 멸망당했다는 것은 금방 이해되고,
주를 시험하는 것도 의미를 바로 알면,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고 경고를 받아야 되는데
‘정말 이게 그런 뜻은 아니겠지. 정말 행함이 없다고 지옥 가겠어?’
그런 사고방식들을 신자들이 수없이 갖고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그것이 주를 시험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이 말씀이 진짜인가, 아닌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지옥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간음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빠져 있으면
그것이 마음으로 하는 간음이든, 행동으로 하는 간음이든
그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성경의 명백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원망하는 자들이 멸망당한다니? 이거 어떻게 된 일이냐?’
이것은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고전10:10
원망하는 자들이 멸망당한다는 의미는, 원망은 하나의 죄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회하면 성도들이 두 부류가 있는데, 양과 염소가 있습니다.
양은 감사를 잘합니다. 말씀 들으면 아멘하지 ‘왜 저렇게 설교하지?
왜 저렇게 소리 지르지?’ 그렇게 말 안 합니다. 그런 사람은 염소입니다.
양들은 ‘참 열정적으로 설교하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 열정적으로 하면
염소는 ‘왜 저렇게 설교할 때 인상을 써?’ 하고
양은 ‘굉장히 진지하게 설교하신다.’ 합니다.
또 유머를 봐도 염소는 ‘왜 목사가 가볍고 품위가 없지?’ 하나
양은 ‘우리 목사님은 참 순수해. 권위 의식이 없고 어린아이 같아.
그래서 좋아.’ 합니다.
똑같은 문제를 두고도, 똑같은 말을 들어도
원망하는 사람은 계속 원망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계속 감사합니다.
원망은 작은 것이 아닙니다. 원망은 그 사람이 그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하는 사람은 멸망당합니다.
어쩌다가 원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정도 차이만 있지. 상습적으로 원망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족 중에 명목상의 신자, 깨어지지 않고
그냥 교회에 억지로 끌려오는 사람들의 주특기가 원망하는 것입니다.
원망은 지옥 라벨(상표)입니다. “이 사람은 지옥에 속한 사람이다.”
우리 교회의 방침은 간단합니다.
교회에 대해서 건설적인 건의는 할 수 있으나
교회, 목회자, 사역자에 대해서 원망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멀리합니다.
왜 그런가하면 그것은 그냥 원망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끝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시험이 들면 원망할 때도 있지요.
그런 것은 들어보고 달래주지만 그 사람이 교만하고
그 사람이 잘못되어 원망하는 자는 멀리합니다.
그것이 다른 성도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4절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그러고 쭉 원망을 시작합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망했던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섞여 살던 사람들이 탐욕을 품고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염이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원망하는 사람들을 내버려두면
그것이 딴 사람에게 번집니다. 원망 안 하는 사람은 안 할 것 같지요.
그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면 물듭니다.
여러분도 신앙 생활하면서 내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이야기하는 것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벌써 교회, 목회자, 사역자에 대해서 원망한다면
그런 사람은 소외시켜야 합니다.
자기 영혼을 위해서 권면은 해줄 수 있지만
절대 그 사람하고 말을 섞지 말아야 합니다.
전화가 오면 전화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과 만나고 말하면 전염이 되기 때문입니다.
원래 자기는 원망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전염이 됩니다.
그러면 심각해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불평이 아니라
항상 감사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감사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해야 합니다.
원망하는 사람과 말을 섞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교회에 말씀, 성령의 역사, 임재가 있고, 기적, 부흥이 일어나는 와중에서도
멸망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원망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율법을 받아서 선포하고
주님의 영광이 불, 구름 가운데 임하고,
모세를 통해서 광야에서 온갖 기적들이 일어나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만나를 먹고 옷이 해어지지 않았는데,
거기서도 멸망당했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은혜가 넘치고 부흥해도 거기서도 멸망 받을 수 있습니다.
원망하면 그런 곳에서도 멸망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감사하는 형이냐, 원망하는 형이냐?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유다서 14-16에 예수님께서 수많은 거룩한 자들과 재림하시는 것이 나오는데,
누구를 심판하기 위해서 재림하시는가?
원망하는 자들, 불만을 토하는 자들을 심판하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재림하신다고 했습니다.
“원망하지 말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느니라.”
원망을 절대로 작은 죄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회가 완전한 교회가 아니니까 불편한 점도, 고칠 것도 있지만
감사할 점이 얼마나 많습니까? 참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건설적으로 건의하는 것과 원망, 불평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저는 원망, 불평하는 자에게 대해서는 그가 하는 원망, 불평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주의를 줍니다. 잘못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정도의 수준은 아닐지라도 그냥 사소한 원망,
불평이 우리 삶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이 점점 성숙하면 감사가 늘어납니다.
고전10:4절에도 이스라엘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니까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탐욕은 땅에 속한 마음, 땅의 것을 원하는 마음입니다.
돈, 명예, 권세를 포함해서 무엇이든지 땅의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마늘, 파, 부추, 고기. 땅의 것에 관심을 가지고 땅의 것을 원하면 원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늘의 것에 관심을 가지면 탐욕을 품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원망이 사라지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살펴서
회개가 나오고 원망이 사라지고 감사가 나옵니다.
정말 하늘의 것에 초점을 맞춘 사람은 핍박을 받아도 감사하게 됩니다.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에 초점을 맞추면
핍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뛰놀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여러 가지 시험이 오거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이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기 위함이라.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땅의 것에 관심을 갖지 않고 영원한 것에 관심을 가지면
시험이 와도 감사합니다. 여러 가지 시험, 문제, 고통들이 올 때
이것들이 싫은 것이 아니고 ‘비록 고통스럽고 힘들고 어렵지만
이것들을 통해서 내가 변화될 것이니까, 변화되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내가 깨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편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형통하게 사는 게, 문제가 없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문제없이, 평탄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자가 되도록,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데 이 땅에서 사는 목적이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형통하지 않고, 여러 가지 시험이 오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내가 인내를 배우고 그것을 통해서 점점 구비하게 되고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보면 여러 가지 시험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탐욕을 품은 자들은 원망하게 되지만 그 속에 올바른 목표와 관심을 가지고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자들, 탐욕이 아니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핍박을 받아도,
여러 가지 시험이 다가와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원망, 불평은 신앙의 전체적인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 생활하는 사람들을 기적으로 불러내어서
만나를 먹이고 반석에서 물을 내서 먹이고 옷이 해어지지 않고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더위와 추위로부터 보호해주시고
수많은 기적을 보고 있는 중이니 감사하고 찬송하고 경배해야 하는데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은 구약의 욥이 보여주는 것처럼
모든 시험, 환난이 다가와서 모든 것과 건강까지 뺏겨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
나는 하나님을 찬양할 뿐이라.”
바울처럼 매를 맞고 옥에 갇혀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그러므로 원망과 감사의 차이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원망을 회개하고 버리고 감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형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변화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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