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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에비슨 선교사 소개 영상

LNCK 2018. 7. 5. 09:27


https://www.youtube.com/watch?v=1_y83VxF88c
◈[마가특새선교사열전] 올리버 에비슨 선교사 소개 영상            에비슨 선교사 관련글

 

 


1935년 12월 서울역에는 800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75세의 나이로 조선을 떠나는 에비슨 부부를 배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893년 33세 때 조선에 선교사로 건너와 
42년 동안 이 땅에 살면서 제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고 
세브란스 병원과 의학교를 세워, 한국인 의사를 키워낸 올리버 에비슨. 
그는 왜 조선에 건너왔고, 42년이라는 시간을 헌신했던 것일까요? 


1885년 고종 22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으로 세워진 제중원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을 치료하던 의료기관이자, 
선교사들이 모여 한국 선교의 방향을 논하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2대 원장인 헤론이 내한 5년 만에 일찍 세상을 떠나고, 
3대 찰스 빈턴으로 이어지면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1892년 캐나다를 방문한 언더우드로부터 
한국 선교 상황을 듣게 된 에비슨은, 한국 선교를 결심했습니다. 
당시 토론토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교수직을 이어가려던 그에게는 큰 결단이었습니다. 

에비슨 선교사는 조선에 의료선교사로 입국하기 이전에, 
토론토 의과대학 교수로서 5년간 봉직해 달라는 제안을 받게 됩니다.

그는 캐나다에 있었으면, 많은 것을 편안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조선에 (의료선교사로) 가는 것으로 결정을 하게 되죠. 
그때 당시 그에게 3명의 자녀가 있었고, 아내가 넷째를 임신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에비슨이 서울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 후 
궁궐에서 급히 에비슨을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고종이 원인 모를 병으로 발진이 나고, 얼굴이 심하게 부어 있었습니다. 
에비슨은 순간적으로 '옷나무 부작용'이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조선인들이 옷나무 수액을 바른 갓이나 관을 쓴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짐작대로 고종이 최근 새 관을 썼다는 소식을 알게 된 에비슨은 
곧 약물을 발라 발진을 치료를 했습니다. 

다음날 기적처럼 고종의 붓기가 가라앉았습니다. 
에비슨이 명성을 얻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제중원은, 지금의 을지로 입구인 구리개로 이전해 있었습니다. 
처음에 재동에 개인 가옥에서 문을 열었을 때에 비해, *현 헌법재판소 자리

 

 

규모는 5배 이상 확장됐습니다. 
하지만 번성했던 초기와는 달리, 이름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에비슨은 반 국영으로 운영되었던 제중원을 
온전히 해외선교부 소속 민간병원으로 바꿔, 
당시 제중원을 어렵게 만들었던 고위관료들의 횡포를 끊어냈습니다. 
그는 몇 가지 병원 운영 원칙을 새로 세웠습니다. 

1. 약값을 낼 수 없는 사람이라도 진찰을 거부하지 않는다.
2. 비가 와도 진료를 쉬지 않는다.
3. 통역 대신 내가 조선말을 배운다.
4. 방은 청결히 하여 가능한 많은 환자를 수용한다.

1895년 전국에 콜레라가 창궐하자 성공적으로 조치하고 (물을 끓여 먹게 함)
천연두, 학질, 장티푸스, 광견병 등의 치료법을 모색했습니다. 

조선의 열악한 공중보건을 개선해서, 하수시설을 정비하는 등 
전국에 위생관념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우물물을 정화해서 먹을 수 있는 
정수기를 만들어서 보급하는 역할을, 에비슨 선교사가 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우물물이나 물은 반드시 끓여 먹어야 된다'라고 가르쳐주었고,
또 그때 당시에 많은 전염병, 특히 수두,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귀신이 옮겨다 주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그것은 귀신이 옮겨다.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든지 위생관리만 철저히 하면 
막을 수 있는 것임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줬습니다. 

에비슨은 안식년을 앞두고 미국 선교부에 보내는 보고서를 통해서 
조선에 현대식 병원이 시급하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서울에 더 나은 시설과 의료진을 갖출 현대식 병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친구이자 건축가인 고든에게 병원 설계도를 그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고든은 설계도를 무료로 그려주면서, 조선에 현대식 병원의 첫 기부자가 되었습니다. 

1900년 4월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에서 
에비슨은 병원 설립 계획에 대한 연설을 합니다. 

그의 연설은 거기 참석한 모든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특별히 미국 스탠다드 오일의 대주주였던 세브란스가 1만 불을 기부합니다. 
그 뒤로도 계속 기부했죠.

그렇게 해서 조선에 첫 현대식 병원이 건설되었습니다. 
1904년 9월 23일, 남대문 밖 복숭아골에
지상 2층, 지하 1층, 40병상 규모의 세브란스 병원이었습니다. 

고종의 주치의로서 궁중을 드나들었던 에비슨은 
당시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백정도 똑같이 치료했습니다. 

백정의 아들인 박서양은, 후에 세브란스가 배출한 조선 최초의 외과의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국경과 문화, 교파와 신분을 넘어 겸손히 환자를 섬겼던 그의 말과 행동은 
우리에게 진짜 의사, 진짜 선교사의 모델을 제시해줍니다. 

33살 젊은 나이의 한국에 와 75살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조선인의 상처를 싸맸던 에비슨의 삶이 소외되고 병든 자들과 함께하시며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생각하게 만듭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nNDwyA3J0U
◈병든 자와 함께, 에비슨 선교사

1885년 고종 22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으로 세워진 제중원.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을 치료하던 의료기관이자 
선교사들이 모여 한국 선교의 방향을 논하던 전초기지 였습니다. 

하지만 2대 원장인 헤론이 내한 5년 만에 일찍 세상을 떠나고 
3대 원장 빈턴으로 이어지면서 제중원은 (운영 능력 부실로) 위기에 처하고 합니다. 

1892년 9월, 당시 캐나다를 방문한 언더우드 로부터 
한국 선교 상황을 듣게 된 올리버 에비슨은
한국 선교를 결심했습니다. 

토론토 대학교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직을 이어 가려던 그에겐 
큰 결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에는, 토론토 대학의 의과 대학에서 
5년 동안 교수직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이미 허락을 받아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약학의 대가 였습니다. 
이미 자식이 셋이 있었고, 넷째를 뱃속에 임신하고 있을 때.. 
1893년 조선에 들어온 것입니다. *32세

구한 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40년 이상을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의학교를 본격적으로 운영하고 
한국 현대 의학과 병원의 기틀을 마련한 에비슨. 

반 국영으로 운영되던 제중원을, 온전히 해외선교부 소속 민간 병원으로 바꾸어
당시 제중원을 어렵게 만들었던 고위 관료들의 횡포를 끊어 냈습니다. 

1895년 전국에 콜레라가 창궐하자
에비슨은 성공적으로 조치했고 
천연두, 학질, 장티푸스, 광견병 등의 치료법을 모색 했습니다. 

조선의 열악한 공중 보건을 개선해서 하수도 시설을 정비하는 등 
조선에 위생 관념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 였습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우물물을 정화할 수 있는 
그러니까 최초의 정수기 같은 것들을 만들고 
모든 음식을 끓여 먹으라고 계도하고, 
특히 콜레라나 수두 같은 이런 병들이, 귀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기가 위생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라는 것을 널리 알렸습니다. 

무엇보다 1900년 4월, 뉴욕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에서 
에비슨은 현대식 종합병원 설립의 필요성을 알립니다.

거기서 기업가 세브란스의 지원을 받아 한국에 종합병원을 설립한 것은 
한국의 의학 발전을 이루는 데 기여할 뿐 아니라 
선교에 대한 (전도에 큰 영향 없다는) 편견을 없앤 중요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거기서 의과 별로 모아서 병원을 운영한다면 훨씬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하고 
강연을 했는데, 
'그것이 전도 하고는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우려에 의한 많은 반대를 받았습니다. 

에비슨은, 자기가 짓는 병원은, 최첨단의 현대식 병원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전도 활동이 제1 순위로 진행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서상륜 같은 사람도, 그 세브란스 병원의 전도사로 활동을 했죠.
 

고종의 주치의로서 궁중을 드나 들었던 에비슨은 
당시 자기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백정도 똑같이 치료 했습니다. 

후에 박성춘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백정의 아들 박서양은 
세브란스 가 배출한 한국 최초의 외과 의사가 됐습니다. 

국경과 문화, 교파와 신분을 넘어 겸손히 환자를 생겼던 그의 말과 행동은 
우리에게 진짜 의사, 진짜 선교사의 모델을 제시해 줍니다. 

에비슨이 처음에 제중원에 부임해 왔을 때 
기존의 제중원의 관리(의원)들이, 
굉장히 고개가 뻣뻣하고 환자들을 홀대하는 것을 보고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절대로 함부로 다루지 말 것을 병원의 규칙 제1번으로 정했습니다. 

또한 에비슨은 일제로부터 탄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차 한국은, 한국인 의사들이 나와서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을 돌봐야 한다'는 그런 각오로 
그는 후학들이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32살 젊은 나이의 한국에 와 1935년 12월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조선인의 상처를 싸매던 에비슨의 삶이 
소외되고 병든 자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더욱 생각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