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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라 사52:13~15, 53:1~6 2006.12.21.출처
특별히 비범한 사람을 두고 우리는 '놀라운 사람'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영어에서도 이런 표현은 마찬가지여서, '그 아이는 신동이야'라는 말을
'The child is a wonder.'이라고 하는 것이나
우리나라에서 '텔미'(Tell Me)라는 노래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보컬그룹의 이름인
'원더걸스'(Wonder Girls) 같은 것이 그 예입니다.
이런 경우에 '놀랍다'고 하는 것은,
사람을 무슨 간 떨어지도록 깜짝 놀라게 만든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었나?'라고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들 정도로
무언가 엄청나게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완전한 사람'이시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완전한 사람이셨으니 당연히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며,
만나는 사람마다 정말 놀라게 wonder 만든 인물이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성경 말씀은 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사람들이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치 않고 계속 범죄하면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될 날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경고를 계속 보내 주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경고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 결과 이 예언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다와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침략을 당하여
잿더미와 폐허로 변해 버렸고
그나마 살아남은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고의 예언을 그들에게 주셨던 하나님께서는
미처 그 멸망이 다가오기도 전에 소망의 예언까지 그들에게 내려 주고 계셨습니다.
즉 그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결국은 자유를 얻고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
또한 그들이 바벨론으로 잡혀 가게 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말씀해 주셨는데,
특히 이사야 46, 47, 48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회복될 것을 구체적으로 예언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소망은 그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짜 소망은 그들이 단지 바벨론으로부터
그 육신이 자유를 얻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장차 보내어 주실 '그 종 메시아'를 통하여
그들의 전 생명이 구원을 얻게 되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스러운 메시아 구원의 약속이 절정에 달하는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메시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정도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실로 '비범한, 보통 사람과는 너무나도 다른'(extraordinary) 메시아이셨습니다.
바로 이 예언의 약속대로 성육신하신 예수님 탄생의 절기를 맞이하는 오늘 주일에
과연 우리 예수님께서는 어떤 면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신 메시아이시며
저와 여러분은 이런 '놀라운 구세주'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불신자들은 예수님의 생애가 너무나도 비천함에 놀라서
이 구세주를 믿지 않게 됩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를 맞이하게 될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되는데,
그 중에 첫째가 바로 52장 14절에 기록된 대로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라는 반응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왕에는"이라고 번역된 말은 '이전에는'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 이사야서의 본문이 기록된 당시보다 더 먼 과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조금 후에 이어질 15절의 현상이 나타나기 이전에 벌어질 일,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메시아를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순간
즉시 일어나게 될 반응이 이렇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이 14절의 내용은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여 준 즉각적인 반응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라게' 된 것이었습니다. :14
▲이것은 그 메시아의 생애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초라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보통사람들보다도 더 못하게 고난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실망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래도 메시아께서 이 땅에 오셨으면
그 풍기는 모양새에서부터 뭔가 성스러운 것, 휘황찬란한 것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예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다른 아기들과 똑같은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그래도 성자 하나님께서 화육하셨다면 얼굴에 무슨 광채가 난다든지
천주교의 성화에서 흔히 보듯이 그 머리 위에 빛나는 후광 따위라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천만 뜻밖에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온 몸에 피범벅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가 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들은, 즉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처럼 '비하되고 수난당하시는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메시아를 보고서
'머리를 흔들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이사야 53장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이
그런 '무리의 놀람'을 더 자세히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1절에 "1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고 한 것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메시아를 사람들은 좀처럼 영접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라는 것은 바로 그 메시아를 통하여
사람들 앞에 펼쳐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제대로 알아본 사람이 많지 않음을 두고 한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메시아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태도로 맞이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능력을 그처럼 똑똑히 드러낸 메시아의 탄생과
그 일생을 보고서도 그분에 대해서 그렇게도 거부반응만을 보이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너무나도 비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53:2절 말씀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그 탄생부터가 "연한 순"과 같이 지극히 미약하고 천한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것도 태어나자마자 누우신 곳이 말구유였습니다.
그 성장기도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겨우 명맥만 이어갈 뿐 아무 볼품이 없었습니다.
탄생 직후부터 헤롯의 칼날 앞에 위태롭기 짝이 없는 순간을 겨우 넘겼으며
그 이후에도 모든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나사렛 촌사람으로 성장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생애는 끝으로 갈수록 더더욱 비하의 극한으로 치달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두고 3절에 기록하기를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생애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풍부한 물질적 부요를 쌓아 가고
더 단단한 사회적 정치적 기반을 다져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루하루가 지나가면 갈수록 고통 경험의 숫자만 늘어났고
인생의 슬픔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더 많이 겪으셨으며,
게다가 그 고생스러운 인생의 마지막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실로 인생의 종지부 치고는 최악 중의 최악을 당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예수님의 일생이란 사람들이 흠모하고 따라가기는커녕,
곁에서 보기조차 끔찍한 것이고 참으로 모든 사람이 멸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수의 '무리'는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가 너무나도 비천한 데에 놀라서
이 구세주를 믿지 못해 왔으며 또한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보통 사람들이 흠모하고 따라가고 싶어할 만한
이상적인 인생과는 너무나도 정반대의 생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은 남보다 훨씬 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
더 좋은 차와 집을 장만해 나가는 사람들을 존경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수성가하여 거부가 된 재벌이 무슨 "한국 청년들에게 고함"이라는 책을 쓰면,
너도나도 그 책을 사서 읽으며 어찌하면 자기도 부자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사모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고생하더라도, 나이가 들 때 즈음에는 높은 자리에 앉게 되어야만
사람들로부터 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생리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퇴임하여 자서전을 한 권 쓰면 자동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어찌하면 나도 저렇게 성공할 수 있을까?'라고 하는 사람들의 흠모심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의 생애에는 도무지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흠모하는 명문 가문의 출신, 'KS 마크'를 자랑하는 학력, 나중에 '성공의 비결'
따위의 제목으로 책을 쓸 수 있는 경제적, 정치적 성취 같은 것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인생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이름 없는 한 촌구석에서 태어나셔서
나중에는 사형장에서 처형당하신 일생이었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에게서 아무 "고운 모양도 풍채도" 발견하지 못하고
그들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도 이처럼
예수님에게서 '실망의 충격'만을 받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신 모습을 보니,
내가 그 예수를 믿어도 절로 부자가 될 것 같지는 않고
그 예수를 따라도 절로 높은 사람이 될 것 같지도 않아서
이 메시아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는' 불신앙에 혹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를 '내 욕심의 기대'에 따라서 판단해 보고
'세속적 가치 기준'을 가지고 재어 보니
너무나도 보잘것없고 비천하게만 보이는 까닭에
그 충격으로 인하여 여전히 이 구세주 앞에서 '얼굴을 돌리고' 마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 성탄의 계절에 예수님의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다고' 놀라고
그 생애의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다고' 실망하여서
이 성육신하신 '비하의 메시아'를 멸시하는 '배은의 무리'에게서
속히 그리고 완전히 벗어나는 성도들이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에 놀라서
이 구세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앞서 나왔던 일반적인 반응과는 전혀 다른,
아무도 예기치 못한 뜻밖의 반응이 또한 나타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연이어 예언해 주셨습니다.
그 두 번째 반응이 바로 52장 15절에 기록된 바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후에는"이라는 말은 '이제는'(now)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며
아까 14절의 "이왕에는"(then)이라는 말과 대조됩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메시아를 만난 첫 순간에는
다들 그 메시아의 '상하신 모습'에 놀라게 되지만,
그 후에 오히려 그 메시아 쪽에서 "열방을 놀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놀라게 하시는가 하면 "열왕이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게" 될 정도로,
다시 말해서 온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도 놀라서
다 '말문이 막히게 될' 정도가 될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열방과 열왕' 즉 전 세계와 온 인류가
순식간에 입을 다물게 될 정도로 놀라게 되는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52:15
다시 말해서 그 오실 메시아께서는 여태껏 인류역사에
한 번도 나타나지 못한 너무나도 놀라운 사건을 '보게' 해 줄 것이며,
사람의 귀에 그 어느 누구도 들려주지 못한 소리를 '듣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놀라운 사건과 소리란 바로 '십자가 대속의 복음'이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신 사건은
그 이전까지는 아무에게도 '전파되지 아니한' 또한 그런 까닭에
어느 누구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경천동지의 뉴스였습니다.
그때까지 그저 '내가 특별한 득도를 해서 성인이 되었다.'는 정도의 사람만
만나 보았던 '열국과 열왕'들은,
성자 하나님이면서도 사람의 몸을 입어 세상에 오셨을 뿐 아니라
친히 그토록 저주와 수치의 죽음까지 당하시는 구세주를 보게 되자
그야말로 괄목상대(눈을 씻고 다시 보며 대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수많은 현자들과 교주들의 입에서 온갖 '좋은 말씀'들을 많이 들어왔지만,
'하나님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셨다'라는 복음은
정말이지 그들의 귀에 난생 처음으로 '전파된'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계속되는 이사야 53:장 4~6절까지의 말씀이 바로
그 새로운 '놀라움'을 더욱 자세히 증거해 줍니다.
4절에 기록하기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그의 인생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당하는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있어서
그 "징벌"로 그처럼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그런 십자가의 죽으심을 보고
정말로 놀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까 이사야 52장 15절의 제일 마지막에 예언된 대로 "깨닫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53 :5~6절에 기록하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 예수님의 비천한 죽으심을 보는 가운데 신기하게도
바로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상기하게 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대체 왜 저렇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자처하셨을까?'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까,
갑자기 자기의 인생 속에 있는 하고 많은 문제들 가운데
정말로 가장 큰 문젯거리는 다름 아닌 자신의 죄라는 사실이
문득 깨달아진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정말 가만히 놓아 두면 제 맘대로 돌아다니는 양처럼,
그야말로 자신이 스스로 억제하려야 할 수 없는,
도무지 주체할 수도 통제할 길도 없는 '죄'라는 것이야말로
자기 힘으로는 불치의 병과 같은 인생 최고의 고통거리임을
깨닫게 된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바로 그 예수님의 "찔림"과 "상하심"이,
그 "징계 받음"과 "채찍에 맞으심"이
자신의 죄값을 대신 치러 주시기 위한 대속의 희생이었다는
이 '놀랍기 짝이 없는 복음' 앞에서,
'이전에는'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신비한 위로와 기쁨과 평안을
자신의 인격과 영혼 속에서 '이제는' 난생 처음으로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 대속의 은혜를 정말로 체험한 당사자가 되고 나면
문자 그대로 '입이 봉해질' 정도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전에는 그 어떤 영웅이나 호걸의 생애를 통해서도 도무지 전파되지 않았던 것,
평생에 그 어떤 학자나 현자의 입술을 통해서도 듣지 못했던 일이,
바로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성도의 심령에 보이게 되고 들리게 되고 깨달아지게 될 때에..
그것은 정말 놀랄 수밖에 없는 기적이요 충격적인 경이 그 자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써 체험하게 되는 삶의 "평화"와 심령의 "나음"은
정말로 신비한, 참으로 말이 막히고 숨이 막히는,
본인이 체험해 보지 않고서는 완전히 설명될 수도 없는 '행복한 놀라움'인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이 신기한
십자가 대속의 복음에 놀라본 사람들이며 항상 새롭게 놀라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우리는 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까지 와 주셨다는 사실에서부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우리의 죄를 속하시려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어린 양 보혈을 흘렸네"
더욱이 그 예수님께서 스스로 대속의 어린 양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 앞에서는 너무 놀라서 감격에 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이런 경천동지할 구원의 은혜를 거저 받게 된 놀라움을 생각하면
이 내 한 몸 다 바쳐 충성한다 해도 오히려 부족해도 한참 부족할 뿐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오 놀라운 꿈 정녕 내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 친히 뵈리라"
이 '놀라운 구세주'께서 장차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실 심판주'로 다시 오실 그날에
우리는 그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써 만나 뵙게 되는 '놀라운 소망'까지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하여
이 세상에 '아직 전파되지 못한 것'을 전파해 주시는 복음,
온 인류가 '이전까지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것'을 들려주시는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깨닫고서,
그 '사랑'과 그 '은혜'에 놀라며 그 '평화'와 그 '나음'을 입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본문 52:장 1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보내실 '그 종'이 "형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께서 사람들이
'그 종의 비천함에 놀라서 멸시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역을 끝까지 잘 수행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의 신기한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하신 구속사는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며,
바로 그 메시아를 놀라움 중에서 영접하게 된 성도들이
그 메시아를 '높이 받들면서 존귀하게' 모시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 그대로, 사람들은
우리 예수님을 전혀 다른 두 가지 반응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애의 비천함만 보고 그를 믿기를 거부하는 반면에,
소수의 신자들만은 그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전혀 전파되지 않았던,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복음을 발견하고, 바로 그 놀라움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며 존귀하게 받들면서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놀라게 될 때에도 대조적인 반응이 나타납니다.
강도를 만나면 당연히 놀라면서 도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뜻밖에 찾아와 준 친구를 만나게 되면 놀라면서도 더욱 반갑게 끌어안게 됩니다.
그런데 메시아의 성육신 이라는 이 놀라운 방문을 받고서도
마치 무슨 더러운 사람 곁에 서게 된 것처럼 피하는 어리석은 사람,
무슨 무서운 사람 만나게 된 것처럼 도망치는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겉모양만 보고 그 비천함에 실망하여
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그러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야말로 '뜻밖에 찾아와 준 친구' 이상의 메시아가 아니십니까?
세상의 그 어느 종교인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까지 와 주실 줄'을 꿈에라도 생각했겠습니까?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양심적인 사람이 '성자께서 죄인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해 주실 줄'이야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구세주 탄생'이라는
이 '기쁨의 좋은 소식'에 놀라고 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탄절을 휴일로서는 즐기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상하신 모습'에 놀라서 피하는
불신앙의 '무리' 가운데 휩쓸리지 아니하고,
'열국'의 역사상 전무후무하며 '열왕'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기상천외한 구원의 복음을 전해 주시기 위해 오신
이 구세주의 '놀라운 성육신'을 진정 기쁨과 감격으로써 맞이하며
찬양과 감사로써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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