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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의 임하심과 떠나심

LNCK 2018. 9. 15. 12:45

31 왜곡된 혼인 관계와 심판이 담고 있는 것(I) (창6:1‐8) (tistory.com)

 

◈하나님(의 영)의 임하심과 떠나심      창6:3       설교축약   

 

김성수 목사 창세기 31강 중에서  부분 발췌

 

◑하나님(의 영)의 떠나심.. 홍수 심판을 자초하다

 

(창6:3) ‘주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6:1~2절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해서 닥치는 대로 결혼을 했다고 하는,

이미 일어난 사실에 대한 객관적 묘사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러한 인간들의 행태를 연유로 하여, 분노를 하시는 장면이 3절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서 당신의 신을 거두어 버리시겠다는 무서운 경고를 내리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1~2절이

3절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분노의 원인이라는 것을 거기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의 영’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루아흐’는

‘성령, 영혼, 생명, 생기, 바람’등의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꼭 성령으로만 볼 필요 없고, 삼위 하나님을 모두 지칭하는 말입니다.     주1)

 

그래서 혹자는 이 구절을 이해하기를 하나님께서 분노하셔서 인간들에게서 성령을 거두어

가시는 것으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완전 결별은 아니고요, 그냥 '멀어지심'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지지도, 떠나지도 않으시니까요. 그렇지만 노아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노아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단어(루아흐)를 ‘성령’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생명력’이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교리적 혼란을 막는 차원에서 옳습니다.

 

이 구절에서의 ‘신’을 성령이라고 번역을 하면, 자칫 하나님을 제한적 존재로

오해를 할 소지도 있고, 하나님의 편재성에 흠을 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성령의 장중(掌中)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편재하시는 분이지요.

편재라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계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범신론이란 뜻은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곳에 편재하시며

그 분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경륜해 나가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의 영향력 밖에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존재론적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모든 만물은 성령의 부재 하에 절대

존재 자체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성령에 의해 창조되고 성령에 의해 존재하며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성령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되는 존재입니다.

 

(행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living 기동하며 moving 있느니라 being’

 

이렇게 인간은 존재하기 시작하는 being의 시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신을 힘입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지옥의 구더기까지도 하나님의 장중을 떠나서는 한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성경에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기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처럼 성령 하나님은 인간이 창조되는 시점에서부터

그들이 존재하는 영원까지 모든 인간들과 함께 계십니다.

천국에서는 생명의 빛으로, 지옥에서는 소멸하는 불로, 영원히 함께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6:1~2절에서 언급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혼인 관계를 깨버리는 자들에게서

다른 말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자신의 자랑을 위해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타고 넘어들어 올 수 있는 자들에게서

하나님의 생명력, 즉 ‘복, 바라크’를 빼앗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히 너희에게 머물지 않으리라' :3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어주시는 ‘생명력, 복, 바라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전제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누차 말씀드렸다시피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질서에 순복하는 피조물들에게

당신의 크신 능력과 선한 뜻에 따라 그들을 가장 행복하고 선한 상태로 유지하시는 것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이 세우신 질서에 순복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복, 하나님의 생명력’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복’은 하나님의 뜻에, 그 분의 통치에 순복할 때 주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순종을 해야 하는데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불순종의 자식들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생명력을 스스로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이 땅에 태어나는 타락을 한 모든 인간들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생명력을 잃은 모든 죄인들을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바로 그 죄와 허물로 죽은 자가 되어버린 근본적인 이유가

오늘 본문 3절에 명시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나의 신이 영원히 그들과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그 어구를 통해 또 한 번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모두 죽어야 하는 저주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일련의 무리들에게 그 생명력이 다시 부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저와 여러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분명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세상의 힘의 원리를 좇아 사는

이들 모두에게서 당신의 생명력(복, 성령)을 빼앗아 버리신다고 하셨는데

그 중에서 어떤 이들에게, 다시 그 하나님의 생명력이 영원히 부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하나님의 생명력으로부터 차단이 되었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부어졌던 하나님의 노여움이

그 일련의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모두 해결이 되었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던 삶이 모두 성취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는 이제

‘하나님의 생명력, 복(福)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계20:5,6),

다시 살아난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새 생명을 받은 우리 성도들도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영원히 하나님의 생명력에서 차단이 될 뻔 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는 모든 자들에게서

하나님의 생명력을 거두시겠다는 경고를 6:3절에서 하셨습니다.

 

(창6:3) ‘주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120년이다.’

 

▲그런데 즉시 심판을 하지 않으시고 120년간의 유예기간을 두십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그 분의 깊은 은혜를 또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120년간 방주를 짓게 하시고 그 120년 동안을

인간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로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 말미가 인간들의 날 수가 120년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때부터 인간의 수명이 120년이 되었다’고 이해를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아닙니다. 11장에 보면 홍수 후에도 노아 후손들의 수명이 500살 가까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120년은, 노아가 방주를 지으며 세상에 심판을 선포한

그 기회의 날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20년 동안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3절 한 절에 전체 역사의 개괄적 내용이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역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벌써 끝장이 났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도 이렇게 지속이 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노아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창조 질서를 뒤엎어 버린 인간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자기 자랑과 힘의 과시’를 인생의 목표로 삼아 시집장가 가고,

소도사고, 아이도 낳으면서 그렇게 살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렇게 끝까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스스로를 위해서만 사는

자들을 모조리 심판해서 멸하실 것을 노아의 홍수를 통해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마24:37~43)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 가고 시집 가며 지냈다.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이 모습은 지금 최후의 심판 때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노아의 때도 똑같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로 데려감을 당하는 이들과 음부에 버림을 당하는 사람들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두십니다.

데려감을 당하는 사람은, 똑같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하나님 나라를 준비했던 사람이고

버려둠을 당한 사람은, 일상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이 땅의 힘을 좇아 살던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무슨 명령을 들었어야 순종도 하고 불순종도 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노아의 시대에도 복음을 전하셨나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벧전3:19‐20) ‘그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20 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감으로써 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이 구절은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후에 지옥으로 내려가서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력으로부터 차단이 된 지옥 같은 세상에서

우리 주님께서 노아를 통하여 또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에도 구원 얻은 자들이 겨우 여덟 명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고려시대, 조선 시대에 태어났던 우리 조상은

복음도 못 들어보고 지옥에 간 것인가?’라는 우문을 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창세 이후로 계속해서 당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자연을 통해, 우리 인간들 속에 남아 있는 구조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양심을 통해’

인간의 죄악상과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계속해서 외치셨고 지금도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롬1:18‐20)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의

온갖 불경건함과 불의함을 겨냥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19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분명 심판의 유예기간을 주셨고,

그 유예기간 동안에 그들이 저주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복음을

전해 주셨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120년간의 유예기간인 것입니다.

 

◑노아가 받은 은혜

 

그러면 노아는 그렇게 모두가 하나님을 등지고 그 분의 말씀을 우습게 여길 때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 심판의 날을 준비할 수 있었을까요?

 

노아는 날 때부터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까?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입니다. 그 확실한 답이 오늘 본문 8절에 나와 있습니다.

 

(창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뭔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심판의 날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노아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그 저주의 심판 속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했으면

그 저주의 물속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었던 똑같은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자

그가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자가 되더라는 것이지요. 창세기 6:9절을 보세요.

 

(창6:9)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8절에서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진술을 하고

곧바로 노아는 그 은혜에 의해 의롭게 살았다고 9절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 나라로 입성하게 되는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게 된다는 것을

창세기 기자인 모세는 여기서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에녹처럼

영원한 죽음과는 아무 상관없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동일한 어구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고요.

 

에녹과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던 자들이고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모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멸망 속에 꽃피는 은혜의 이야기를 가리켜

우리가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은혜의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1. 창1:2(수면 위 운행 신) 과 신32:10~12(독수리 날개)

 

먼저 창세기 1장으로 가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는 사건에서부터 출발을 하겠습니다.

 

(창1:2‐3)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보시다시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세상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였습니다.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을 하셨고

흑암 속에 빛이 생겨났습니다.

 

이 첫 창조는, 그 자체로서 완전한 목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들이 거할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 창조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새 창조를,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으로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신 것이고요.

 

그러니까 ‘창세기의 첫 창조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

그리고 교회의 탄생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우리 성도들의 복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정확하게 같은 이야기를

점진적이며 반복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몇 가지 증거를 대 드리겠습니다.

 

(신32:10‐12) ‘주께서 광야에서 야곱을 찾으셨고, 짐승의 울음소리만 들려 오는 황야에서

그를 만나, 감싸 주고, 보호하고, 당신의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다.

 

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새끼들 위에서 퍼덕이며,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12 주께서만 홀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 다른 신은 옆에 있지도 않았다.’

 

지금 이 구절은 모세의 노래의 한 부분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지신 사건을 가리켜

황무지에서 건지시고 독수리가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는 것처럼 그들을 인도하셨다고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쓰인 ‘황무지-토후 에레쯔’라는 단어가 *신32:10

성경의 다른 곳에 똑같이 쓰인 곳이 있는데, 거기가 창1:2절입니다.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여기 보시면 ‘땅이 혼돈하다‘라는 부분이 있지요?

바로 그 단어가 ’토후 에레쯔‘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읽었던 신32:11절의 ‘독수리가 새끼 위에 너풀거리다’라는 어구에서

’너풀거리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라하프‘도

성경의 다른 곳에 단 한 번 나오는 데, 그 단어도 창1:2절에 나옵니다.

 

거기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는 구절에서

거기서 ‘운행하다’라는 단어가 ‘라하프’입니다. *hover, 선회하다

 

천지창조 때 쓰인 단어들과, 이스라엘의 출애굽에 쓰인 단어들이 정확하게 같습니다.

모세라는 저자는 모세 오경을 쓰면서

천지 창조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묘사를 함으로ㅆ

하나님의 천지 창조가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해 내시는 새 창조를

미리 힌트하고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1)

 

예레미야서에도 보면, 이스라엘이 빠져있는 죄악 된 세상을 지칭할 때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렘4:23)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이렇게 창세기의 첫 창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이 처해있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구원의 이야기를 함의하고 있는 ‘새 창조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창1:2절과 출14:21(홍해 갈라짐)

 

조금 더 확실한 증거를 대 드리지요.

그 창1:2절의 장면이 출애굽기에서 판박이처럼 나타나는 곳이 있습니다.

 

(출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 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입니다.

물 위에 ‘바람’ ‘루아흐’가 운행을 하자

저주의 바다가 마른 땅이 되는 장면입니다.

 

창1장에서, 셋째 날의 창조를 통해서는 저주의 바다가 모두 물러가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징인 마른 땅이 드러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그 속에서 읽어 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가로 막고 있는 저주의 바다 홍해 위에

‘루아흐’가 운행을 함으로 마른 땅이 드러나게 되는 홍해의 갈라짐은

삼위 하나님에 의해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는 것을 모형처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이 처해있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구원의 이야기를 함의 하고 있는

새 창조(구원, 새하늘과 새땅)의 그림자라는 것을 이제 확실하게 이해하시겠지요?

 

▲창1장의 안식일과 신명기의 안식일 (같은 맥락의 반복)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주시면서

한 번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를 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셨으므로 안식을 지키라고 첫 창조의 이야기를 근거로

안식일을 지키라 명령을 하시지만 (출20:8‐11, 출31:12‐17)

 

신명기에서는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 낸 하나님이므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십니다.(신5:12‐15)

 

거기서도 우리는 천지창조와 출애굽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안식’이라는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다른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그 자체가 온전한 목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힌트하고 있었던 것 (모형)인데,

 

그것이 힌트하고 있는 것은

삼위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될 어떤 무리에게

빛을 비추셔서 그들을 빛의 나라로 이끌어 내시는 새 창조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렇게 구약에서 그림으로 보여 주었던 새 창조의 이야기가, 신약에서 (원형으로) 밝히 드러납니다.

에베소서 2장으로 가보지요.

 

(엡2:1‐5) ‘1 여러분도 전에는 범죄와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그 때에 여러분은 범죄와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우리도 전에는 그들 가운데서 모두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바라는 대로 행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5 범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해가 가시지요?

이렇게 허물과 죄로 죽었던 불순종의 상태,

다른 말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건져 내실 것임을

성경은 천지창조에서부터 차근차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1:2절(수면 위 운행 신)과 구름기둥

 

그렇다면 우리가 조금 전에 함께 읽었던 신명기에서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이끄심을

‘황무지에서 보호하시고 독수리가 새끼 위에 너풀거리는 것 같은 이끄심’이었다고 묘사를 했는데

과연 모세는 어떠한 모습을 보고 그렇게 묘사를 한 것일까요?

 

무엇을 보았으니까, 하나님의 현현을 그렇게 묘사를 했을 것 아닙니까?

광야에서 밤낮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한 것이 무엇입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지요? 그러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무기나 방패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현(顯現)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함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에서는 삼위 하나님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으로 묘사가 되었다면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시는 출애굽 사건에서는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삼위 하나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묘사가 된 것입니다.

 

(학2:5)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맺은 바로 그 언약이

아직도 변함이 없고,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으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의 신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다고 하시지요?

하나님의 신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처럼 덮어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광, 그 분의 현현을 구름과 불,

그리고 소리로 묘사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을 한 곳 보고 가지요.

 

▲창1:2의 임재 와 에스겔 성전의 임재

 

(겔10:3~5) ‘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의 오른쪽에 서 있고,

안뜰에는 구름이 가득 차 있었다.

 

4 그 때에 주의 영광이 그룹들에게서 떠올라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갔고,

성전에는 구름이 가득 차고, 안뜰은 주의 영광에서 나오는 광채로 가득 찼다.

 

5 그리고 그룹들이 날개치는 소리가 바깥 뜰에까지 들리는데,

그 소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과 같았다.’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을 구름과 광채(빛)

그리고 날개소리 같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구름과 빛, 그리고 소리로 묘사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현현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물리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빛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새 창조의 주체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시105:38~39) ‘그들의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저희가 그들을 두려워함이로다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 불로 밝히셨으며’

 

여기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독수리가 날개로 그 새끼를 덮는 모양처럼

이스라엘을 구름으로 덮으시고 불로 밝히시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요?

 

▲노아홍수 후의 무지개 와 계시록의 무지개

 

그러한 구름과 빛의 모습, 새 창조의 하나님의 모습은.. 노아의 홍수 사건에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식구들을 은혜로 구원하신 후에

그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는데 어떻게 주십니까?

 

수면 위에 바람(르와흐)이 불어 물이 감하고,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이 드러납니다.

창1:2절과 출애굽기의 홍해 사건(물 밑에서 땅이 드러남)에서 본 장면이지요?

 

그리고는 그들 앞에 무지개를 보여주십니다.

무지개는 무엇과 무엇이 만나서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구름(수증기)과 빛의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무지개는 단순히 약속의 징표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현으로 노아와 그의 식구들 앞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주의 물로 세상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다 쓸어버리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신 당신을 무지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지개는 창세기 1장 2절의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의 다른 모습이며

출애굽 광야에서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또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께서 무지개를 밟고 서신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4:3

예수님과 무지개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창1:2 와 행2장 성령의 임재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현현인

구름과 빛과 소리가

신약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지요? 오순절 날 다락방에서요.

 

(행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바람(루아흐), 소리, 불.. 다 나오지요? 이 장면이 어떤 장면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이 완성이 되고, 구원받은 교회가 탄생하는 장면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원형

창세기의 첫 창조, 출애굽 등의 사건으로 점진적으로 계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형

 

자 지금 창세기 1:2절의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에서 시작해서

사도행전의 마가의 다락방까지 왔습니다.

 

여기까지 이해가 가시지요?

성경은 지금 한 이야기를 여러 모양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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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그렇다면 왜 창1:2절에서 창조에 앞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을

삼위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이라 했을까요?

‘하나님의 신‘은 성령 하나님만을 지칭하는 것 아닙니까?

 

창세기의 첫 창조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을 모형으로 담고 있는 것이라면

그 일을 계획하시고, 실행에 옮기시고, 적용을 하시는

삼위 하나님이 수면 위를 운행하고 계셨어야지요.

 

창1:2에서 ’수면 위를 운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신‘은

단순히 성령 하나님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이라 번역이 된 ‘엘로힘 루아흐, spirit of god'이라는 단어만 보면

그냥 그 단어는 성령 하나님만을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만 잘 생각해 보세요.

 

성령 하나님만 영이신가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모두 영이십니다.

성자 하나님도 성육신하기 전에는 영이셨습니다.

 

’엘로힘 루아흐, 하나님의 신’이라는 단어는, 성령 하나님만을 지칭할 때도 있지만

삼위 하나님을 모두 지칭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엘로힘 루아흐’는 삼위 하나님이라 해석을 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일관성에 비추어 볼 때 적합한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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