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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숭배 문화

LNCK 2018. 10. 8. 16:49

29 거인 숭배 문화에 젖어 있는 저주받을 교회(III)  (tistory.com)

◈슈퍼맨 숭배 문화                  창6:1~8

김성수 목사 창세기 29강 
원제목 : 거인 숭배 문화에 젖어 있는 저주받을 교회 III      

※오늘날 만연하는 <네피림, 슈퍼맨, 슈퍼휴먼 숭배 문화>에,
교회가 따라가면 안 된다는 주제의 설교문.

.................................


우리는 계속해서 ‘거인 숭배 문화에 젖어 있는 저주 받을 교회’라는 제목으로 
여전히 이 세상의 힘의 원리 속에서 자신들의 행복을 찾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노아의 홍수 사건을 통해 진단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는 심판의 근거 구절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이 세상의 힘의 원리를 
자신들의 삶의 원리로 택하게 되는지를 배웠습니다. 

간단하게 정리를 하자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떠난 인간들은 
저마다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손에 넣고 쌓아 두려는 탐욕에 젖게 되고 

이성에 근거한 성숙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보다는 
감각적이며 외면적인 겉모습의 치장에 매달려 자신을 자랑하고 비교 우위적이며 
상대적인 쾌감을 맛보는 것에 자신들의 시간을 모두 소진하는 우매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죄의 내용이며, 죄의 올바른 정의인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자신들이 스스로를 만족시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조바심 속에서 다른 이들을 착취하고 밟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그 혼란이 다시 원래의 질서 아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저주받을 힘의 원리가 역사를 타고 흘러 내려오면서 
거인(슈퍼맨) 숭배 사상으로, 성공주의로, 물질주의로, 패권주의로, 고지론으로, 청부론으로 
이름만 바꾸어 계속해서 인간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나의 유익을 위해, 다른 말로 상대적이며 비교 우위적인 쾌감을 맛보기 위해 
남을 밟는 세상의 힘의 원리는 어느 때에 잠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현상도 아니고 
인류가 점점 더 타락을 하게 되어 최근의 어느 시점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최초의 인간인 아담 때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인류의 죄의 정체이며 뿌리인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세요.

(창6: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주1) ‘하나님의 아들들’

여기에 나오는 네피림은 거인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네피림을 이해하시기를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에게서 난 자들이 네피림이라고 알고 계신데 
잘 보시면 4절이 ‘당시에 땅에 이미 네피림이 있었다.’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기 전에 이미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네피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네피림의 존재는 그렇게 특이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홍수 이전에는 궁창 위의 물이 지구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유해한 광선들이 모두 차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후 또한 아열대 기후로 
기식(氣息)하는 생물들이 살기 좋은 기후였겠지요. 
그래서 인간들의 몸집이나 체력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좋았을 것입니다. 

요즘 간혹 고대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거인문화나 거석문화의 자취들은 
아마도 홍수 이전의 네피림들의 문화나 문명의 자취일 것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궁금해 해야 할 것은 그러한 거인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들이 누구인지를 궁금해 할 것이 아니라 
‘6절과 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 앞에 
왜 그러한 거인인 네피림과 용사와 유명한 자들이 언급되어 있을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몸집 큰 것이 죄가 아니잖아요? 용사가 되는 것이 죄입니까? 
유명한 자가 되는 것이 죄인가요? 그런데 왜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바라보시면서 
한탄을 하시는 구절 바로 앞에 이렇게 네피림과 용사와 세상의 유명한 자가 등장하는 것일까요? 
본문 5, 6, 7절을 읽으시면서 그것을 4절과 한 번 연결시켜 보세요.

(창6:5‐7)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한탄을 하시고 근심을 하시고 후회를 하셨다는 표현을 한 것은 
신학에서 ‘신인동형(神人同形)적 표현’이라고 부릅니다.  주2)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그럼에도, 그렇게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결코 두고 보실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네피림으로, 용사로, 유명한 자’로 서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한탄 앞에 ‘네피림, 용사, 유명한 자’가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조차도 자기 위에서 끌어내리고 
그 분 앞에서 자신이 ‘네피림으로 용사로 유명한 자’로 서게 되면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죄를 쓸어버리시고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는 새로운 피조물들로 당신의 나라를 채우시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노아의 홍수 사건은 이렇게 1절부터 줄곧 ‘거인 숭배 문화의 심판’이라는 
커다란 주제 속에서 일관성 있게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을 아시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성경의 경고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구원을 받은 교회가 여전히 그러한 세상의 힘의 원리를 자신의 삶의 원리로 
삼을 수 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바로 이 힘의 원리를 부수는 역사인 것입니다. 
제가 다음 주에는 그 세상의 힘이라는 것이 왜 우리 성도들에게 해악이 되는 것인지를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기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드리고, 

그 다음에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구속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힘을 
빼 가는 역사’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나로 꿰어서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증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최초의 망상 또한 네피림의 망상이었습니다. 
거인 숭배 사상이었던 것입니다. 나도 네피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왜 하나님만 네피림의 자리에 서냐는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네피림과 용사와 유명한 자가 하나님의 심판에 앞서 언급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교회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가만히 보세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겨우 일 주 일에 한두 번 쓸까 말까한 
예배당을 초대형으로 거대하게 짓는 것이 어떤 생각에서 나온 것일까요? 
큰 게 좋은 것이라는 거죠. 그게 자신들의 힘이 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네피림의 망상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신앙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연예인을 종종 등장시킵니다. 진짜 믿음이 좋은 연예인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요..

이 땅의 힘을 버리고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아야 성도는 행복할 수 있다고 하는 
하늘의 비밀이 선포되어야 하는 교회에서 
왜 정 반대로 이 세상의 힘을 쌓는 방법이 가르쳐 지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는 타락을 하여 스스로 고지 꼭대기로 올라가버린 아담을 
그 고지에서 끌어내리고 
하나님을 고지 꼭대기에 앉혀드리고 그 분께 순종하는 삶에 대해 가르쳐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힘을 이용해서 고지 꼭대기로 올라가라고 
그들의 야망을 부추기는 것이 올바른 교회가 맞습니까? 
그건 다 어떠한 목적 하에 나온 거예요? 그렇게 성경의 진리와 어긋나더라도 
청중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서 그들을 모아 자신들의 세(勢)를 키우기 위한 
네피림의 망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의 설교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로 시작이 되었고 
세례요한의 설교나 베드로의 설교, 스데반의 설교, 사도 바울의 설교도 
‘너희들은 죄인이다. 그러니 회개하고 구원 받아라’였지 않습니까? 

그들의 설교에서 죄인들의 죄가 까발려지고 그 처절한 죄에 대한 긍정 앞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 것 아닙니까? 
어디 그들의 설교에 ‘미래에 대한 긍정’이 들어 있습니까? 

그런데 교회에서는 책망의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긍정적 사고와 성실한 믿음이 이렇게 나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는 
그의 논리가 사람들에게 먹히고 있는 것입니다. 네피림의 망상입니다.

▲제가 매주 팔만 오천 명의 새들백 교회 교인들과 전 세계의 수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의 사이트에 들어가서 
그 분의 설교 제목들을 한 번 적어 보았습니다. 그 제목들이 이러합니다.

‘성경으로 축복받는 방법’ 
‘대인관계를 바르게 하는 방법’ 
‘입술을 다스리는 방법’ 
‘다툼을 피하는 방법’ 
‘인생의 미래를 밝게 만드는 방법’ 
‘돈을 지혜롭게 관리하는 방법’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것인가’ 
‘내가 어떻게 보통 이상으로 살 수 있을까’ 
‘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고독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크레딧 카드 어떻게 써야 하나?’ 

이 설교들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을 하면 무엇이겠어요? ‘인간관계와 성공전략’입니다. 
하나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론들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런 설교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분의 설교들을 몇 편 읽으면서 릭 워렌 목사는 
청중들의 수요를 아주 잘 읽을 수 있는 재주가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설교는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떻게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하며 
행복해 질 수 있는지에 대한 삶의 노하우를 전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은 교양서적이나 재테크 강사들에게 가서 들으세요.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며 
그 완성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는가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전달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은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가?’ 인간론과 죄론 입니다. 
‘그러한 인간들 중에 선택을 받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그 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가?’ 
신론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받은 자들을 어떠한 방법으로 구원하셨는가?’ 구원론입니다. 

설교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사를 일관성 있게, 수미(首尾)일관 적으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해진 성경 말씀이 살아서 청중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여 
그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눈에 보이는 자기의 처한 상황들을 보이지 않는 소망을 
의지하여 이겨낼 수 있게 하는 것이 설교여야 합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존재론적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난처하고 곤란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멋지게 반전 시키고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목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도를 그렇게 이끌어 가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많이 모은다는 유명한 사람들의 작금의 설교들은 
보시다시피 이렇게 ‘인간관계와 성공전략’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인간관계와 성공전략’은 제가 대학교 때 들었던 교양과목 이름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라는 대 주제 아래 성도들을 보이지 않는 소망의 나라로 이끌어야 하는 설교가 
이렇게 대학의 교양과목을 흉내 내고 있는 정도의 유치한 지경까지 되어버렸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생활의 노하우를 전하는 곳에 수만 명에서 수십 만 명의 청중들이 
모여 앉아 ‘아멘’을 합창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설교는 인간의 야망을 선동하는 강연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들아 너희들은 죄인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항복하라. 
어서 고지 꼭대기에서 내려와라. 그리고 이 땅에서 눈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라. 
우리 그리로 가자’가 그 주 된 내용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죄가 뭐였다고요? 아담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정상에 서려고 하는 바람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지금 이러한 극한의 경쟁구도 속에서 그 후손들이 발악을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로 그 죄를 저주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예배당에서 
‘여러분 당신들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얼마든지 행복하고 특별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지 꼭대기로 올라가세요.’라는 설교가 전해지고 있다면 
그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겠습니까? 아니면 마귀의 유혹이겠습니까? 

그게 에덴동산의 뱀이 한 말 아니었습니까? ‘하와야 너는 특별한 존재야.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그러니 어서 고지 꼭대기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밀어버려’ 

그건 단지 설교 수요자의 귀만 솔깃하게 만드는 얄팍한 상술에 불과한 마귀의 외침인 것입니다. 
그게 다 무엇 때문이라고요? 네피림의 망상 때문입니다.

멋진 프로그램과 최고의 장비로 전 세계 예배의 형식을 바꾸어 버린 교회가 어디입니까? 
시카고의 윌로우크릭 교회입니다. 저도 시카고 세계 선교 대회나 코스타에 갈 일이 있으면 
윌로크릭 교회에 가서 그 예배 공연을 봅니다. 

제가 왜 예배를 공연이라고 부르는지 가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제가 그 교회의 메인 믹서 바로 뒷자리에 앉아서 그 엔지니어가 가지고 있는 큐시트를 본 적이 있습니다. 
웬만한 방송국 큐시트보다 더 세밀하고 정교하게 짜여 있었습니다. 
몇 초 단위로 끊어져 있는 프로그램은 한 치의 실수나 오차도 없이 
총 감독의 지휘 아래 완벽한 하나의 드라마가 됩니다. 

사람들은 깔끔하고 재미있는 예배에 구름 떼처럼 몰려 왔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목회자들이 그 예배 공연을 배우러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교회 담임 목사인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자신이 주관하는 세미나에서 
충격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그 교회 사이트에 들어가면 지금도 보실 수 있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자신의 세미나에 참석한 전 세계의 목회자와 예배 인도자들 앞에서 
자신의 삼십 년 사역은 실패였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분의 말에 따르면, 소위 열린 예배, 구도자 예배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고 나서 
사람들을 모으는 것에는 성공을 했는데, 
그들이 매주일 예배당에 열심히 모여서 예배를 관람하고 즐기기는 하는데 
십자가로 가까이 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많이 모으는 것에는 성공했는데, 모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일상에서 보여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nothing between services'입니다.

주일날 예배에는 잘 참석하는데 다음 주일 예배 때까지의 그 여섯 날 동안 
성도들의 삶 속에서 성도로서의 삶이 나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아주 용기 있는 고백이지요. 

열린 예배를 만들고 발전시킨 장본인이 자신의 실패를 고백하는 이 상황에 
한국 교회는 아직까지 그 예배의 방식을 못 배워서 안달입니다. 왜 그래요? 
사람들이 십자가고 가까이 가건 말건 일단 많이 모아서 세를 키우려는 네피림의 망상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비단 목사들만의 문제 인가요?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 헌금하고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 구제하고 나를 좀 알아달라고 선교 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건 다 ‘자기 의(義)’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대상입니다.

왜 교회에서도 사람들이 슈퍼맨 흉내를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네피림의 망상에 젖어 있는 슈퍼맨들이 사라진 곳이어야 합니다. 
저마다 낮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 음지에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작은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여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꾸 네피림의 망상을 좇아 슈퍼 휴먼이 되려하면 
그는 결국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이 힘을 좇아 자기 더 강한 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 프랑켄슈타인 아닙니까? 

힘은 세고 덩치는 큰데 괴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정해 주신 자리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타고 넘으려는 용사들, 유명한 자들, 네피림들은 전부 프랑켄슈타인 들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이웃 앞에서 나를 드러내려 하는 자들은 모두 
프랑켄슈타인 같은 저주 받은 괴물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는 자신을 숨기고 자신을 비워 상대방이 빛이 나게 만드는 
십자가의 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슈퍼맨으로 살다 가셨나요? 
이리 날고 저리 날아서 복음을 전하다 가셨습니까? 

그 분은 메마른 땅을 한발, 한발 걸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가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기 위해 슈퍼맨이 되라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마귀가 주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날아보라 하지 않습니까? 
네가 슈퍼맨인 걸 보이라는 유혹이지요. 주님은 안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러한 방법으로 생육되고 번성되는 곳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저마다 슈퍼맨이 되어 
다른 이들 앞에서 개폼을 잡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어요. 

(고후5:12)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또다시 우리 스스로를 치켜 올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대답할 말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보세요. 성경은 외모로 자랑하려는 자들에게 경고를 하지 격려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교회 안에서 외모로, 세상의 힘으로 자랑을 하려는 자들을 미워하십니다. 
그들은 심판의 대상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숙되어져 가는 자로 
열심히 지어져 가면 되는 것이지 날개를 달고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나를 보라’라고 외치는 슈퍼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프랑켄슈타인이라니까요?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느라, 자신의 자랑을 위해 다른 이들을 시기하거나 
질투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그들의 발을 닦는 섬기는 자리로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네피림의 망상을 버리세요. 어디로 날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 형제자매들 앞에서 네피림으로 서려고 하지 마세요. 용사로 서지 마십시오. 
유명한 자 되려 하지 마세요. 용사는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출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부디 용사가 되고자 하는 네피림의 망상에서 벗어나 용사이신 여호와 앞에 납작 엎드려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제게 말씀 하옵소서’라는 
겸허한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잘 실천하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한 길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세상의 힘이라고 하는 물질과 명예와 건강을 주시거든 
청지기로서 그것들을 잘 선용하세요. 하나님의 뜻과 심중을 헤아려 그 것들이 필요한 곳에 잘 전달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은 산상수훈의 복 있는 가난한 자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내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그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것을 맡아서 필요한 곳에 전달하는 청지기로 선다면,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부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은 쥐꼬리만 함에도 그 것들을 자기만을 위해 움켜쥐고 있는 자들은 
주님께서 경고하신 심령이 부유한 자인 것입니다.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늘귀를 낙타 만하게 만들던가 아니면 유전자 조작으로 바늘귀보다 작은 낙타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은 보이는 것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재산이나 명예나 외모나 건강 등으로 믿음의 경중을 재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오해 속에서 세상의 힘을 쌓아 나를 증명하려는 고단한 삶을 살고 계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어서 빨리 그 곳에서 나오셔서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온전히 소망하십시오.

(고후4:18)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고후5:7) ‘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이지, 
보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게 신앙인의 올바른 삶의 자세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며 잠간 지나가는 
보이는 것들을 초개(草芥)처럼 여길 수 있는 그런 당당함 말입니다. 
왜 눈에 보이는 것 앞에서 주눅이 들어 스스로 우울해 하십니까?

제가 판단하기로는 자본주의와 밀착되어 있는 오늘날의 교회들은 
소유욕과 신앙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그것은 세속화된 기독교의 허위일 뿐입니다. 

아니 그건 자학(自虐)입니다. 여러분은 날카로운 예언자적 통찰로 
그 기독교의 허위를 꿰뚫어 보실 수 있는 실력을 키우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아름다운 소망을 이 땅의 천박한 부(富)로 대표되는 세상의 힘과 바꾸시면 안 됩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찌 된 것이 현진건의 소설 제목처럼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부(富) 권하는 사회’ ‘힘 권하는 사회’가 되어 버린 듯합니다. 어딜 가도 ‘부자 되세요’ 
‘힘을 가지세요.’ ‘고지 꼭대기에 올라서세요.’라는 설교와 권고 일색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유한 삶’ ‘힘 있는 삶’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잘사는 것은 돈이 많고 힘이 많은 이들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잘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돈과 힘이 많다고 ‘저 사람 참 잘살아’라고 말씀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이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 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 분을 섬기는 데 투자되는 것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이 세상의 힘들을 하나하나 놓고 
그 분에게 자신의 삶 전체를 드리는 삶으로 인도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오늘 날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가 거기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에 성실하게 응답을 해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힘을 쌓아주는 엉터리 무당종교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444444

우리 성도는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성숙을 향하여 계속 달려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향하여 달리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힘을 빼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인식하셔서 그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세요. 그게 우리의 살길이며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거인이 되려 하지 마세요. 사람들 앞에서 용사 되려 하지 마세요. 
유명한 자 되어 자기 영광을 드러내려 하지 마세요. 그게 다 네피림의 길이요,
홍수심판을 스스로 자초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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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6:2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이라는 학설입니다. 
실제로 구약에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기가 된 곳이 있지요?

(욥1:6)  6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보시다시피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르지요?

(욥38:6‐7)  6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7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

하나님의 천지 창조 전에 이미 창조된 자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보고 기쁘게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이겠습니까? 천사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의 하나님의 아들들도 천사들일 것이라고 여러 학자들이 주장을 했습니다. 
philo나 josephus, Martin Luther등이 그러한 주장을 한 분들입니다. 

저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나요?

(마22:29‐30)  2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예수님은 분명 천사들은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육신이 있는 존재들이 아니고 영적인 존재들이라 
그들에게는 결혼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이 땅에 내려와서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합니까?

뿐만 아니라 만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들이라면 
최후의 심판의 모형으로 주어진 노아의 홍수 심판이 
천사들의 타락에 의한 것이 되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천사들의 타락 때문에 주어지는 것인가요? 
아니죠?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인간들의 타락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심판의 모형인 노아의 홍수 때 ‘땅에 기식하는 모든 것들’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만일 천사들의 타락 때문이라면 천사들만 모조리 죽이시면 되지 않아요?

2) 두 번째 학설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라는 학설입니다. 
Augustine이나 Jerome 그리고 John Calvin이 그러한 학설을 지지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이 주장했던 학설이기에 
오늘날 가장 널리 지지를 받고 있는 학설입니다.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인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혹해서 
그들과 마구잡이로 결혼을 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주장이지요. 

거의 대부분의 주석서들과 강해 서들이 이 관점에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학설에도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타락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노아의 홍수 심판은, 최후의 심판의 모형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최후의 심판이, 창세 전에 택해진 하나님의 백성들의 타락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성도의 견인 교리가 완전히 무너지게 되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도 크게 금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래서 저는 2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이 땅에서 세상 것들을 의지하며 
그것들을 힘으로 삼아 살아가는 자들을 대표했던 이 땅의 왕들이라고 봅니다.

성경에는 이 땅의 왕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자주 표현을 합니다.
신정(神政)국가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왕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왕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재판장(출21:6)이라고 번역을 하기도 하고 
왕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편 2편을, 이스라엘 왕의 대관식 때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공부한 것처럼 시편 2편은 예수님을, 그리고 있는 메시아 시편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시편 2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의 명칭을 
왕에게도 스스럼없이 갖다 붙였습니다. 

(시2:6‐7)  6 "내가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나의 왕'을 세웠다" 하신다.
7 "나 이제 주께서 내리신 칙령을 선포한다. 주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왕이 대관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아들을 낳은 것으로 표현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왕의 개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자신이 스스로 자기 삶의 왕이 되어 살겠다고 하는 자들의 
모든 악한 꿈이 집약된 자리가 왕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스스로 왕이 되겠다는 인간의 악한 의도가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인간 세상의 왕입니다. 

따라서 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은 세상의 것들을 힘으로 삼아 기고만장하고 
살아가는 모든 타락한 인간들의 대표요 상징인 세상 왕들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최후의 심판의 근거가 딱 들어맞게 됩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이 세상 것들을 힘으로 삼아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불순종의 죄를 짓는 모든 죄인들을 향해 
쏟아 부어지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은 사실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2) ‘신인동형(神人同形)적 표현’
여러분이 이러한 표현들을 성경에서 읽으실 때 주의하셔야 할 것은 
성경의 그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역사(歷史)를 인간의 언어적 영역으로 옮겨 놓은 것이지 
하나님의 능력의 결함이나 어떤 행위의 사후 처리를 놓고 고민하시는 나약한 하나님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러한 하나님의 한탄이나 근심이라는 표현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신론(理神論)이나 자연신(自然神)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말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어 놓으시고 절대 타자로 저 멀리서 인간의 삶에 전혀 관계하시지 않는 분이 아니라 
지, 정, 의를 지니신 인격체의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세워 놓으신 계획을 후회하시고 한탄을 하신다면 
그 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잖아요? 하나님도 실수를 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한탄과 근심과 후회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너무 사랑하기에 그 사랑하는 자들의 죄악을 보시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성경에 간혹 그러한 신인동형적 표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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