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약한 여인들을 사용하셔서,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 출1:16 -설교 녹취-
출1: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여러분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딸들은 왜 살려두라 그랬을 것 같습니까? 큰 위협이 안 되니까요.
창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사라를 데리고 애굽으로 기근을 피해 내려가죠.
아브라함이 '당신의 남편인 남자인 나는 죽이고 여인은 살려 둘 줄 알고
내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때 그 대상국이 애굽이에요.
강한 놈은 밟아서 없애버리고, 여인처럼 연약한 존재들은 자기 소유로 삼고..
이것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근데 지금 바로가 애굽의 왕인데, 똑같은 짓을 하고 있어요.
자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위대한 반전이 있다는 말이에요.
이 구원의 실마리를
일반 역사는 볼 것도 없고, 성경의 역사만 뒤져봐도
이 인류의 구원의 실마리를 누가 풀어가나요?
출1~2장에 보면, 여러분 여인들이 풀어가요.
하찮게 여겼던 여인들이 풀어가요. *산파들, 요게벳, 미리암, 바로의 딸
이게 누구의 방식일까요?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세상이 하찮게 여기는 것들, 지푸라기들, 쓸모없어 여겨지는 존재들...
근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위대하심과, 구원의 섭리는
언제나 그렇게 비천한 여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누구의 몸에서 태어나셨나요?
한 비천한 여인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십니다.
룻과 다말, 이방 여인의 몸에서 구세주의 조상이 나시고,
전부 이것이 하나님의 오묘한 구원의 섭리예요.
이런 일관성 있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크기의 논리, 세력의 논리'에서
이 우상 놀음(놀이)에서 빨리 벗어나야 돼요.
하나님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시고, 인류 구원의 실타래를 풀어 가시는가?
바로가 여자아이는 살려 두라고.. 그 의식 밑바닥에는 어떤 가치관 때문입니까?
이건 전혀 영향력도 없는 존재들,
그저 내 소유물에 불과한 지푸라기 인생들,
실제 여인의 위상은, 그 시대에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하나님의 아이러니입니까!
이런 여인들을 통해서 출2장서부터는
요게벳(모세의 모친), 바로의 공주... 이런 여인들의 스토리를 통해서
구원의 새벽이 열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역사의 먼 동이 터오는 거예요.
세상은 늘 1등만 주목하고, 강한 자만 살아남는 구조 속에 움직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너무 익숙해 있어요.
근데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반대라니까요.
바로가 쓸모 없어서 남겨두고 살려 두라는 그 여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원의 새벽을 열어가시거든요.
자 이제이 여인들의 행동을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누가 이렇게 '용기'를 정의했습니다.
'참된 용기란, 내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대상보다, 더 두려운 분이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두려움에 이렇게 둘러싸여 있잖아요.
미래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고, 나를 물리적으로 겁박하는 어떤 두려움이 있고...
그런데 진짜 용기란, 그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그것보다
더 두려운 분이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 서는 거예요.
이 히브리인들을 위한 산파의 행동이 기초가 어디 있었습니까?
여러분, 바로가 얼마나 절대적인 존재였어요?
바로와 산파의 존재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간극이 큰 대상이었어요.
그런데도 이 히브리인들을 위한 산파는,
그보다 더 두려운 분을 인지하고 있었어요.
천지의 주재자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두려움!
17절을 잘 보시면, 이것이 산파들의 행동, 동기입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큰 일났어요. 산파들은 왕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없었다고 보십니까?
그러면 이 행동은, 자기 목숨을 건 행동이었어요.
이들의 신앙은 대단한 신앙이었어요.
누구의 지혜보다 높은 지혜입니까? :10
바로의 지혜보다 높은 지혜였어요.
그러면 더 궁금해요.
'이 산파들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20절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결국이 산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1: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신적인 존재인 바로가 이 정도 화가 났다면, 이 둘은 죽어야 돼요.
근데 그때 여러분 산파가 딱 두 명이었을까요?
둘이 200만 명 가량 히브리인들을 다 감당하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산파들의 책임자였을 거예요.
1: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니다.
근데 이 산파들의 대답 속에는 거짓을 담은 지혜가 있었어요.
사실은 히브리 여인들이 애굽 여인들보다 건강한 것도 사실이고,
워낙 생식력이 좋기 때문에 그 말은 사실이고
한편으로는 바로에게 거짓말을 했겠죠.
여기서도 히브리 인들을 위한이 산파가, 물론 거짓말을 했어요.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생명을 살리기 위한 거짓말이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옳다' 라는이 정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맞다/ 틀리다' 하는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1:21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여기 '흥왕'이라는 말에 동그라미 쳐보세요. 히브리어로 '아싸'예요.
하나님을 경외했던 여인들의 집안을, 하나님이 흥왕케 하셨다는 거예요.
근데 이 여인들은, 바로의 기준에서는 살려둬도 아무 영향력 없는 존재들이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언제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항상 우리 중심에 이런 주님 앞에 세워진 기준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전능하신 손에 붙들리는
약한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약함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약한 나로 강하게" 찬양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