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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공의회 2

LNCK 2018. 12. 27. 20:33

2023 01 29 주일 2부 말씀 / 사도행전 강해 (55)  / 예루살렘 회의 (2) - YouTube

예루살렘 공의회 2       행15:12~21      *녹취록이 위 동영상과 일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를 살펴보는 중입니다. 
회의 안건은, 구원에 대한 교리였죠. 

'이방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교인들은,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믿음에 더해서 모세의 율법과, 또 할례를 받아야 하는.. 행함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가? 아니다. 
믿음 플러스 행함까지 있어야 된다'는 주장이었죠.

그때 예루살렘 교회(베드로와 야고보)는 누구의 손을 들어줬죠? 
바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에 이어서 또 다른 발언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입니다. 

공동서신에 야고보서가 있습니다.
이 야고보서를 쓴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장로였습니다.        주1) 야고보 장로

오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도, 야고보 장로는 교회를 대변하여 발언합니다. 
그 발언 내용이 14절부터 나오는데요.
이 야고보의 발언도 사실 베드로 사도의 발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야고보 역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앞서 베드로의 발언을 지지합니다. 
그 지지하는 장면이 14절에 나오는데요. 

행15: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여기 시므온이 누구예요? 바로 베드로를 말합니다. 
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이 시므온(시몬)이었습니다.

의장인 야고보가 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을 사용한 것은, 
그 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유대인들뿐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자 그런데 베드로가 말했던 내용이 무엇이죠?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입니다.  :14

여기서 '처음으로 구원받은 이방인'은 바로 고넬료를 말합니다. 
고넬료는 이방인 중에 첫 회심자였죠. 
그 고넬료는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었죠. 

베드로가 전한 복음, 즉 예수를 듣고,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했다는 거죠.  15:7~11

'이방인들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가이사랴에서의 자기의 경험(이방인의 오순절)을 바탕으로 앞에서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의 발언을, 본 회의의 의장인 나 야고보도 지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 역시도 유대인들과 같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성경을 가지고 입증합니다. 
야고보는 단순히 '베드로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생각해. 
베드로가 경험했으니까, 베드로가 권위 있는 사도이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생각해!'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했기 때문에 
베드로를 지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면, 베드로의 가르침이 선지자들의 말씀과 일치하다고 말합니다. 
바로 구약의 아모스서 9:11~12절의 말씀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구약의 아모스서를 가지고 와서, 이제 회의의 의장으로서 결론을 내립니다. 
자 그 부분이 본문 16~17절에 나오는데요. 우리 함께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5:16~17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아모스 선지자는, 남유다 출신이지만 북이스라엘에 가서 예언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주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물론 뒤에 회복도 나옵니다만)
그래서 아모스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먼저는 북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합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한 결과로 망한다는 내용입니다. 
멸망을 당해서, 포로로 끌려간다는 그 내용을 예언합니다.

뿐만 아니라 남유다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데요. 
예루살렘 성전이 박살난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모스서를 읽으면, 마음이 참 힘듭니다. 아픕니다. 
다 깨진다는 심판의 내용이기 때문이죠. 

환상이 나오는데요. 환상이 나올 때마다 다 망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요. 심판 이후에 멸망 이후에,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회복을 시켜 주시고 
다시 확장을 시켜 주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아무리 너희가 심판을 받아 깨져도, 너희들에게는 남은 자가 있다고 하십니다. 
자 그 남은 자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그게 암9:11~12절의 내용인데, 야고보가 그걸 회의석상에서 인용한 거죠. :16~17

그 내용은 한마디로 '예배의 회복입,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죄로 인해 무너져 버린 다윗의 장막,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막을 
다시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다윗의 후손이자, 구약의 장막이 가리키는, 참된 장막의 실체가 되십니다. 
자 그분을 통해서 무너져 버린 다윗의 장막, 죄로 인해 깨어진 깨어진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에돔의 남은 자들을 포함해서 이방인들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다 같이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7절이죠. ↙

15:17 '내 이름으로 일걸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그게 암9:12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 이스라엘이, 많은 이방 열국들을 속국으로 두어 지배하며, 
광대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리라는 예언인데, 
이 사실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왕국이 광대할 것임을 예언합니다.

'에돔의 남은 자'란 암1:11~12에서 심판을 받은 자들과는 달리 
그 심판에서 구원받고 보존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이란 말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 즉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돌아온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도 역시 같은 의미로서 
하나님의 품에 돌아온 이방인들, 곧 구원받은 무리들을 지칭합니다.)

자 그때에는 혈통적인 유대인만이 아니라 
주님을 찾는 모든 이방인들도,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구약 아모스서에 예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야고보가 내린 결론이 무엇이죠?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5:19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은, 
모세의 율법이나 할례를 강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미 구약의 아모스서에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오는 일이 예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니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오는 일에 
자꾸 믿음 외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 외에 어떠한 것도, 그들에게 짐을 지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장 야고보는 이것으로 회의를 끝내지 않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이방인들에게 지켜야 할 규정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이제 이방인 신자들을 향해 말하는 거죠. 
'너희들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 건 아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정이 있다.' 

그 규정은 네 가지인데, 본문 20절에 나옵니다. 

15: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1) '우상의 더러운 것을 먹지 말라'
이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제삿상에 올려진 제사 음식을 먹지 말라는 얘기죠. 

아래 29절에서는 '우상의 제물'로 다시 언급되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관한 논쟁은, 이방 선교 과장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 중의 하나였죠. 

예루살렘 공의회(총회)는 우상의 음식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으나, 
고전8:1-13, 10:27~28, 갈2:11~14에서 바울은 각자의 양심에 맡김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죠. 이 권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음식 섭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로 빗나가는 신앙을 경계하는데 있었습니다.

2) '음행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음행'은, 부부관계 외에 가지는 모든 성관계를 말합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이방 신전에서 일하는, 신전 창기들과 가졌던 관계를 말합니다.

이 당시 이방인들은, 아시다시피, 신전 제사를 드릴 때 음행을 함께 행했습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신전에서 일하는 창기(여 사제)들과 음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음행을 피하라고 말하는 것이죠. 

3)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라'
당시에 우상숭배자들은, 이교 신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희생제물로 바칠 짐승을, 목을 졸라서 죽였습니다. 목을 매달아서 죽였어요. 

그런데 목매어 죽은 짐승은, 피가 바깥으로 빠지지 못해서, 피가 그 사체 안에 있습니다. 
피가 그 안에 머무는 고기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구약에서 금지된 것입니다. (창9:4, 레17:14, 신12:16, 23) 
'목매어 죽인 짐승'은 피가 체내에 남아 있기 때문에 피채 먹지 말라는 것과 동일하죠. 
그리고 구약에서 피를 먹지 못하게 규정한 것은, 피가 생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레17:11

4) '피를 멀리하라'고 말하는데요. 
피채 먹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 규정은, 세 번째 규정과 사실 같은 의미입니다. 

세 번째 규정은, 피를 간접적으로 먹지 말라는 규정이라면,
네 번째 규정은, 피를 직접적으로 먹지 말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피는 생명이라'며, 피를 먹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선지해장국 안에 들어있는 선지를 먹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선지는 소의 피로 만든 음식 아닙니까. 
그런 피로 만든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4가지 규정을, 이방인 신자들에게 지키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이 4가지 규정을 우리가 오해에서는 안 됩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이 네 가지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규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이 네 가지 규정을 콕 집어서, 
야고보가 이방인들에게 지키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자, 이 네 가지 규정은,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같이 유대인들이 끔찍히 싫어했던 일들입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규정은, (음행을 제외하면) 그거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런데 왜 지키라고 말하죠? 
그것은 바로, 유대인 신자들을 고려해서 입니다.

(음행을 제외하면) 그거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유대인 신자들이 끔찍히 싫어했다는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첫 번째 규정인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보십시오.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한마디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먹어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는 건, 우상을 신으로 인정하고, 
그 신을 경배하는 일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지 말라'는 데는,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고전8: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이 말은, 쉽게 얘기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그런데 이런 지식을 다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게 여전히 부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의 양심을 위해서, 그들의 신앙을 위해서... 결국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바로 유대인 신자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 신자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서
(그게 아무 것도 아니지만) 마음에 시험이 들 수 있다면, 그걸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걸 고전8장에서 바울이 언급했고, 
본문 행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의장 야고보 장로가 첫 번째로 권고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조항은, 명령이 아니고 권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관하여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고전8:12~13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게 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상은 그저 나무, 돌, 금속이니까요. 

그러나 '내가 우상의 제물을 먹음으로 인해서 내 형제가 실족하게 된다면, 
그건 (형제를 실족시킨) 죄다'  라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그럴 경우, 나는 영원히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야고보의 가르침도, 바울의 가르침과 같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자체는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방인 신자들에게는 먹지 말라고 했죠? 
유대인 신자들이 그것을 끔찍히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결법상 우상의 제물을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이방인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먹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 신자들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당연히 시험에 들었겠죠. 
'역시 이방인들은 상종하지 못할 사람이야, 부정한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앞으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교회를 이루어야 했습니다. 
서로가 한 교회 안에서, 성도 간의 교제를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도 간의 교제가 안 되는 거죠. 식탁의 교제부터가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야고보는, 유대인 신자들의 믿음을 세우는 차원에서 
이방인 성도들에게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고 권고했던 것입니다. 

▲이어서 세 번째, 네 번째 규정을 보십시오. 
세 번째 규정은,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라는 규정이었습니다.
네 번째 규정은, 피채 먹지 말라는 규정이었죠. 

이 세 번째, 네 번째 규정은 사실은 하나입니다. 피를 먹지 말라는 규정이죠. 
왜 야고보 장로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그걸 먹지 말라고 말하죠? 

그 당시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이 그것 또한 끔찍하게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을 배려해서, 먹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죄가 아니라요.

그러니까 이 네 가지 규정을 준 목적이 보이십니까?
이 네 가지 규정 가운데, 음행을 제외한 세 가지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죄가 아닙니다. 

이방인들은 이거를 먹어도, 아무런 양심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죄가 아니니까요. 

먹어도 양심의 자유가 그들에게 있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이 이 네 가지 규정을 지켜야 할 이유가 무엇이죠? 
죄가 아니더라도, 옆에 있는 유대인 형제들의 믿음을 실족하게 만든다면,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형제를 실족시키는) 죄가 되기 때문이죠. 

이방인들이 가지는 양심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믿음을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는
다른 성도의 믿음을 세우는 차원으로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용

여러분 왜 이게 중요하냐면, 오늘날에도 한국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가 
사실 술과 담배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사실 술과 담배는,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본문의 '우상의 제물'과 같이,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여러분 성경에 담배가 나오나요? No
성경에 담배 피지 말라는 말이 나오나요? No 
담배 피는 거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 안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할까요? 
특별히 직분자를 세울 때는, 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을 세울까요? 

왜냐하면, 믿는 우리가 담배를 피우면, 시험에 될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한국 교회 안에, 그리고 한국 사회 안에서는 공식이 있습니다. 
'크리스천 = 금연, 비흡연' 이라는 공식이 있습니다. 
이걸로 세상 사람들은, 크리스천의 거룩과 믿음을 재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불신자들만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우리도 이러한 생각이 다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담배를 피면 거룩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저도 초신자 때, 담배 때문에 시험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초신자 때, 예배를 마치고 나서, 교회 앞에서 제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배를 드리고 나온 사람이, 이제 뭔가를 집으려고 몸을 숙였는데, 
주머니에서 담배가 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제가 아주 초신자였었거든요, 시험이 들었습니다. 
'와 예배를 드리러 나온 사람이, 담배를 가지고 나오네? 
와 어떻게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나서도, 담배를 피울 수 있지? 
야 저 사람은 믿음이 없는가 보다. 가짜 신자인가? 
이 교회는 이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인가?' 이런 시험이 들더라고요. 

여러분들도요 사실 크게 다르진 않을 겁니다. 
만일 제가, 또는 교회 중직이, 오늘 예배가 다 끝났고 상가 앞에서 
담배 피는 걸 여러분이 봤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시험에 들 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안에도, 그런 인식이 사실 있는 거죠. 
'크리스천은 담배를 피면 안 된다'
한국교회 안에, 그 인식이 무의식 중에도 깔려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이 담배를 피면, 불신자들에게도 사실 덕이 되지 못합니다. 
앞에서는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뒤에서는 다 속으로 재단하고 욕합니다. 
'믿는 사람들도 별게 없구나. 하나도 거룩하지 않구나. 우리와 다르지 않구나' 

성도인 우리는, 담배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끊는 게 아니라, 
담배로 인해서 누군가의 믿음이 실족하기 때문에 끊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는
나를 위해서 사용하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믿음을 세우는 차원으로 
언제든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성경이 말하는 바른 신앙의 자유이고, 바른 믿음입니다. 

▲여러분 술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술 문제는 골치가 아픕니다.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는 말만 있지, '술 마시지 말라'는 말은, 
사실 성경적 근거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 잠23:31절 보면,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반짝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독주를 뜻하는 듯 합니다)

그런데 또 예수님도 포도주를 마신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당시 문화로, 음료로 마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식 때도, 떡과 포도주로 하잖아요. 성경에는 포두즙이 아니라, 포도주입니다.

그런데 사회적 인식은 어떠냐 하면,
크리스찬은 거룩한 사람인데, 그 거룩함에 표시가 
금주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든지, 성도든지, 교회와 사람들에게 덕이 되기 위해서 
술을 절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술 먹는 것이 덕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믿음을 실족하게 만듭니다. 
자 그래서 제가 술을 마시지 않는 이유도 이런 이유입니다. 

저 역시 과거에 술을 마셨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서는 술을 끊었습니다. 그 이유는,
술 자체가 죄라고 생각해서 끊은 게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가벼운 술은, 죄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덕이 되지 않기 때문에 끊었습니다. 

먼저는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덕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맨날 술이나 마시네' 
'하나님의 믿는다는 사람이, 힘들면 기도하는게 아니라, 술을 먹고 들어오네?' 
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덕이 안 되는 거죠. 그들이 실족하는 거죠.

불신자들에게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친구들이
얼마나 술을 강요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도가 술을 먹으면, 그 앞에서는 좋아합니다. 
그런데 돌아가서는 다 욕합니다. 
'믿어도 별거 없더라...' 합니다. 

오히려 술을 끊었을 때, 그들이 우리의 믿음을 인정해 주더라고요. 
이것이 제가 지금도 술을 마시지 않는 이유입니다. 

저는 술을 마실 양심의 자유가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술 자체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저는 누구보다 선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시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의 믿음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제가 섬기는 우리 교회와, 또 한국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궁극적으로 저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게 싫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여러분들에게 제가 권면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에서 대표기도 하시는 분들은, 
그분들은 술을 마시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술을 마시는게 아직까지는 덕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바깥에서 술을 마시는데도, 교회 안에서 대표기도를 한다면,
세상 사람들에나 교인들에게 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찬양인도자도 마찬가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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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장로
원래 야고보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은 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육신의 형 아닙니까. 
육신의 형을 메시아 라고 믿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오빠나 형이, 자기를 가리켜 메시아라고 말한다면 
처음부터 믿어지겠습니까? 
한 집안에서 같이 태어나고 또 같이 자라면서, 같이 먹고 같이 놀고 같이 지냈던 형, 오빠가 
자기를 가리켜 메시아 라고 말한다면 믿어지기보다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그랬겠죠. 
야곱은 예수님을 그저 육신의 형으로만 인정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메시아 라고는 믿지 않았던 거죠. 

자 그랬던 야고보가, 예수님을 따르는 신실한 제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심으로 가득 찼던 동생 야고보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 장면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고전15장은 유명한 부활장이죠. 
특별히 3절부터 보면, 부활을 목격한 증인 리스트가 나옵니다. 
그 증인들의 목록을 보면, 거기에 동생 야고보가 나옵니다.

고전15:4~8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__________야고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7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거죠. 

분명히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걸 봤는데,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때 야고보에게 확실한 믿음이 생긴 거죠. 

'아 예수님이 단순히 육신의 형이 아니라, 하나님이면서 사람이신 메시아가 맞구나.' 
이때부터 야고보는, 예수님을 자기의 육신의 형이 아니라, 자기의 구주로 믿고 따랐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의 별명은 '낙타 무릎'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거죠. 
그리고 야고보는 굉장히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누구보다 율법을 잘 지켰고,
성품도 온유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그런 굉장히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야고보는, 지금 예루살렘 교회를 대변하는 권위있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