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히 물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십시오 눅5:16, 마13:23 스크랩, 출처
원제목 : Slip Away and Be with God (O)
Pray and Be Alone With God (X)
무엇이 기도로 극복될 수 없는 것이란 말입니까?
제게 대답해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철의 장막 (구소련)’도 하루 만에 없애버리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한 민족을 한 시간만에 회심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 부르짖으십시오!
그분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셨습니다.
저는 여기에 관한 많은 구절들을 모았습니다.
제가 몇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이해하시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께도
너무나도 중요했다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하시도록 말입니다.
그렇다면 더 없이 연약한 우리에게는
기도가 얼마나 더 중요하겠습니까!
얼마나 우리가 기도에 더 의지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것이 제가 첫 번째로 여러분이 알기 원하는 것입니다.
눅5: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아시다시피 우리는 종종
우리가 크게 즐거워하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억지로 해야하는 것과 부딪힐 때
우리는 거기서 슬며시 사라져 버리려고 애씁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고된 직장의 일을 피하기 원할지도 모릅니다.
야구게임을 보기 위해 슬며시 사라져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일찍 직장에 나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
슬며시 남들 눈에 안 띄게 그 자리를 빠져나오곤 하는데요.
이렇게 사람들이 어떤 자리에서 슬며시 남들 눈에 안 띄게
빠져나오는 것은, 뭔가 자기가 더 좋아하는 일이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슬며시 빠져나오셔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적한 광야로 나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역으로, 힘든 일과로 지치고 힘들 때는
슬며시 빠져나와야 합니다.
지치고 힘들고 짜증이 날 때는 슬며시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한적한 기도의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내가 피할 그 한 분이시고
그 분은 내가 안식하는 처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기도가 나에게 고역이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예수님께서
인적이 드문 광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눅5: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예수님이 광야로 들어가셨음을 주목하십시오.
여러분, 세상은, 심지어 교회들마저
너무나도 소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너무나도 분주하고 소음들로 가득 차 있어
모두가, 특히 여러분 중 목회자들은
더더욱 슬며시 물러가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광야로 가는 라이프스타일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여러분을 찾을 수 없는 곳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당신의 하나님’(개인적으로 만나는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매우 주의하십시오.
때때로 여러분이 책들을 항상 가지고 다니지 않도록 말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지 적절한 주석, 적절한 해석,
연구해야할 대상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으셔야 할 대상’으로서 그 분은 무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슬며시 물러나곤 하셨습니다.
마13: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누군가는 이런 의문을 가집니다.
‘왜 예수님이 그렇게 많이 기도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그분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잖아!’
우리는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여러분에게, 그 질문의 어리석음을 제가 말해보겠습니다.
그저 이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분께서 항상 슬며시 물러가사
하나님과 홀로 있기를 원하셨던 것은
단지 그분께서 아버지를 사랑하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왜냐면 그분께서 아버지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눅6:12~13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2.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여러분께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정말 어려운 결정을 하셨던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 온 밤을 지새며 기도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No 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여러분께 말할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는 지금 예수님보다 더 강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예수님도 중대한 결정을 앞두시고 밤새 기도하셨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건 예수님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곧 그리스도께서 슬며시 물러나사
거기서 온 밤을 기도하시며 보내셨다는 것 말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12제자로 선택되어야 할 사람을, 올바르게 선택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그렇게 많이 기도하지 않는 것을 보니
우리는 아마 예수님보다 더 우월한가보죠?
▲마26:36절을 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누가 겟세마네를 잊을 수 있습니까?
누가 그 장소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분께서 거기서 무릎을 꿇고 오래 기도하셨을 때
전쟁은 거기서 이미 끝났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마귀와의 영적전쟁은 앞서 거기(기도의 자리)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속에 있는 죄성 등 얼마나 많은 블레셋인들을 우리가 견뎌야 합니까?
그 땅에 머물러있는 것들
그것들은 우리에게 가시와 같습니다. 삿2:3
왜 그렇습니까?
왜냐면 우리는 그 문제에 맞서지 않기 때문이며
주님께 나아가 승리가 쟁취될 때까지 씨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그 문제를 맞서지 않기 때문이며
주님께 나아가 승리가 쟁취될 때까지 씨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동산에서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것을 뚫고 분투하심과
기도와 승리를 쟁취하심으로 이기셨습니다.
“이런 종류는 오직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 나가느니라” 마17:21
저는 이 구절을 단지 마귀들과 연관짓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수많은 산들, 여러분의 삶에는 수많은 장애물들,
여러분의 삶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탈선하게 하고, 멈추려고 하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 중 몇몇은 그저 상담하는 것으로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그분께서 여러분을 건져내실 때까지
여러분이 하나님의 존전 앞에 엎드리는 것으로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사람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삶 모든 면에서 그것을 보이셨습니다.
눅18:1절에서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눅18:1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바로 거기서 그분께서 기도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것을 요약하길 여러분이 원하십니까?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자, 여기 있는 여러분 젊은이들을 위해...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길 원합니다.
전 오늘날 수 많은 젊은이들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글쎄요, 사실 저는 기도하는 특정한 시간을 갖지는 않는데요.
전...전, 아시다시피, 저의 하루 동안에, 하나님의 임재 같은 종류의 것을 더 연습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제가 가는 그 은밀한 장소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제가 어떤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젊은이들이여.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길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은밀한 기도에 많은 시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능력, 기도의 삶을 살고 항상 아버지와 말하는 능력,
그것은 이것들로부터 태어납니다.
주님과의 은밀한 시간,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의 단편들,
기도 가운데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며 낙망치 말아야합니다.
기도를 시작하는 것은 결코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깨달으셨습니까?
여러분은 보좌 앞에서 수 많은 탄원을 시작했습니다.
질문은: 여러분은 그것들과 씨름하며 애써 전진했습니까?
여러분은 붙들기 위해 맹렬히 밀고 침노하였습니까?
여러분은 계속 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여러분의 기억에 청원들이 있습니까?
종이 조각들에 적혀져 15년 동안 그대로 있어왔을 수도 있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저는 주님을 가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 가운데 수 년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한다고요.
왜냐하면 낙망하는 것은 바로 모든 기도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제가 전체 성경에서 가장 슬픈 구절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것입니다. 눅18장 8절
“내가 너의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
자, 왜 그것이 그렇게 슬픕니까?
예수님께서는 방금 막 비유를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왜 그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하는지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들을지어다! 내 아버지께서는 신실하시노라! 나의 말은 진실하노라!
그분께서는 너희가 일에 대해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기꺼이 해 주려고 하시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있노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받을 것이니라!
두드리라, 그리하면 그곳이 네게 열릴 것이니라! 찾으라, 너희는 찾을 것이니라!“
그리고 주님께서는 멈추시고 계속하십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다시, 내가 돌아올 때, 이것을 믿는 누군가를 내가 찾겠느냐?
누군가 내 말에 따라 나 곧 말씀을 받아들이겠느냐?”
우리는 그토록 많은 의심을 쏟아냅니다.
단지 절대 확실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뿐 아니라
우리는 그토록 많은 의심을 쏟아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약속들을 붙잡지 않을 때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왕국의 진전에 대한 아무런 열정도 가지지 않거나,
혹은 우리가 어찌하든 그것이 진전될 수 있다고 느낄 때인 것입니다.
육체의 힘에 의해, 지성의 힘에 의해, 교회 조직의 힘에 의해 말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의 백성들을 위해, 여기 주님의 사랑하시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에게 기도와 간구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
주님, 그들이 보게 하시옵소서.
침노하고 맹렬히 밀어내며 전투가 승리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 가장 연약한 자, 가장 유능하지 못한 시온의 가장 작은 지파 중
가장 작은 사람이 12지파의 가장 위대한 전사보다
더 많은 승리를 얻을 수 있음을 보게 하시옵소서.
기도함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함으로 주님의 권능을 자랑하고
육체에 어떤 자신감도 두지 않음으로 말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