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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0장, 아브라함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하심

LNCK 2019. 2. 8. 17:36

<개요> 

창세기 12~25장의 <아브라함의 행적>을 장별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12장에서 은혜로 부름받아 하나님을 믿고 따르게 된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의 성장(=성숙, 온전, 완전)의 여정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 클라이맥스는 22장에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바친 것이 됩니다.

 

본문 창20장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앞에서,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속이는 장면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완벽하고 완전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는 연약하고, 실수하고, 곁길로 빠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로,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계속 아브라함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니까 본문(아브라함의 실수)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어떤 실수를 해도 결국은 용서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더라는 방종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토록 보잘것없고, 불가능한 자들에게 은혜로 찾아오셔서

오직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지혜와 당신의 사랑으로 그들을 건져 내시더라는 은혜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설교 두 편을, 아래에 스크랩했습니다.

전편은 쉬운 내용이고,

후편은 어려운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하심    창20장 1~7     2013.07.28. 출처

 

서론

 

창세기 20장에는 아브라함의 약함하나님의 강하심이 대비되어 있습니다.

어떤 설교학 교수가 설교의 목적이 하나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존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20장이 기록된 목적도 역시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도 거짓말을 했고, 창세기 20장에도 거짓말을 했는데

거짓말의 내용이 동일합니다.

자기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말해서 잘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아내를 빼앗기게 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창세기 12장과 20장에, 거짓말의 내용은 동일해도 나머지는 다릅니다.

장소가 창세기 12장은 애굽이고, 20장은 그랄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은 바로 왕이 나오고, 20장은 아비멜렉 왕이 나오며

창세기 12장에는 롯도 같이 있었지만, 20장에는 롯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가 다릅니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12장과 20장에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반복했느냐?

거짓말을 반복한 중요한 이유가 창세기 20장 12~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창 20:12~13).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 자신의 아내 사라와 언약을 맺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오라비라 하고 또 나는 그대를 누이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 누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내를 아내라 하지 않고 누이라고만 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죽지 않으려고 자기 아내를 가는 곳마다 누이라고 하자는 언약을

출발할 때부터 맺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그런 거짓말을 동일하게 반복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12장과 20장 사이에는 20년 이상의 간격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은 75세이고, 20장에서는 100세 가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 혹은 ‘마므레’라고 불리는 곳에 살다가

블레셋 족속이 살고 있는 그랄로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랄로 내려간 이유는 그가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에

좋은 목초지를 찾아 옮겨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에게 관심을 보여 사라를 취한 것입니다.

당시 사라의 나이는 90세이었습니다.

 

90세에도 아름다워 보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이 꼭 사라의 육신적인 매력이 이끌려서 사라를 취한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는 왕들이 다른 지역에서 큰 집단이 들어오게 되면

그중에 여자를 취하여 그들과 화친을 맺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를 취하려고 했던 것도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히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거짓말을 했고, 다시 한 번 사라를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동일한 죄에 빠졌으며,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어떻게 대하시고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가를 생각하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아브라함의 연약함

 

아브라함은 지난 20년 동안 하나님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했고,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기도 하셨으며

갖가지 은혜를 많이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연약하고 어리석은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왜 이런 죄를 반복했느냐? 네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창 20:11).

 

아브라함은 자신이 죽을까 봐, 거짓말을 해서 자기 아내를 위험에 빠뜨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비겁함이 거짓말을 낳게 되었고

거짓말은 결국 아브라함을 더 큰 위험과 죄로 이끌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방패라는 말씀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니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시 118:6).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시 34:4).

아브라함은 기도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겨났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십니다.

 

▲둘째, 아브라함이 자신의 경험을 쉽게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창12장에도 거짓말을 하다가 애굽 왕 바로에게 심하게 책망을 듣고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결론은 동일합니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 교훈을 받을 줄 모르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교훈을 받지 않기 때문에 동일한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사기를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방 나라 사람들을 들어 징계를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동일한 죄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순환이 열 번 이상 반복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과거에 실수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잘 검토해서

다시는 동일한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망각능력이 굉장히 좋은 것 같습니다.

6‧25를 겪은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공산주의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눠쓰자고 하는 공산주의가

말로는 좋은 것 같아도 실제로 공산주의 나라들은 대부분 망했습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가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셋째, 아브라함이 영적인 생활을 게을리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영적인 거성이라 할지라도 경건생활을 게을리하면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다윗 같은 사람도 경건생활을 게을리하고 지붕에 올라가서 거닐다가 목욕하고 있는 밧세바를

보고 시험에 빠져 간음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간접 살인했습니다.

 

베드로도 주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있을 때 대제사장의 계집종에게조차 거짓말을 합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는 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모세도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반석을 가리키라고 하셨는데

두 번이나 때리는 바람에, 물은 나왔지만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성도라 할지라도 경건생활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창20장에 아브라함이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어려운 시험이 오게 된 것입니다.

 

▲넷째, 문자상으로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단이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세상 모든 민족이 복 받게 될 아브라함의 씨를 생산할 여인입니다.

아브라함이 다른 여인에게서 자식을 낳아도 그것은 아브라함의 씨가 아닙니다.

오직 사라에게서 나오는 자식이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예수님이 나오시게 되고,

예수님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지금 사라를 어떻게든 망가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왕의 첩이 되게 하든지 아비멜렉의 첩이 되게 하든지

사라에게서 태어나는 자식이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창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의 의미를

사단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자, 이제는 아브라함의 후손 중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도록 역사했습니다.

그러던 중 유다가 다른 동네에서 바람을 피우는데, 누군지 몰랐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의 며느리 다말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볼 때는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유다의 자식으로부터 여자의 후손이 나와야 했기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설명하는 중)

 

그리고 ‘여인의 후손’이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니까

이제는 사단이 다윗 지파에 속한 왕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습니다.

남 왕국 유다의 일곱 번째 왕인 아달랴는 아합의 딸이었는데

다윗의 후손들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아스를 살려주셔서 다윗의 후손이 계속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왕국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을 아각 사람 하만이라는 자가

다 몰살시키려고 했을 때도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하만과 아각 족속이 도리어 몰살당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고 하니까 헤롯 대왕이 근처에 있던 두 살 아래 어린아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벌써 예수님을 애굽으로 피신가게 하셔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사단의 목적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의 대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사라는 여인의 후손을 낳을 여자였기 때문에 사단이 역사해서

아비멜렉의 첩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좌절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아브라함의 거짓말은 작은 거짓말 같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대재앙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기고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사단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사라는 열국의 어미가 되고 아브라함이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낳고

그 후손이 하늘에 별처럼 바닷가에 모래처럼 번창하리라는 언약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딤후 2:13).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마음도 바꿀 수 있고 행동도 바꿀 수 있으며 육신도 고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밤에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창 20:3).

 

꿈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개꿈은 지저분하고 비논리적이고 기억하려고 해도 생각나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꿈은 깨끗하고 메시지가 분명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꿈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횟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경을 다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다 말씀하셨기 때문에 꿈으로 많이 말씀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매일 하나님이 꿈으로 말씀하신다고 하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그 꿈에는 하나님이 주신 것도 있을 수 있지만 마귀가 준 것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꾼 꿈이라도 다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비멜렉의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사라는 남의 아내니 건드리면 네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아비멜렉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잠 21:1).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도 바꾸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바꿀 수 없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능히 마음을 바꾸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도 바꾸십니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창 20:6).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려고 하다가 하나님이 막으셔서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행동도 지배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율의지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자율의지를 빼앗지 않으시면서도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시는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창20:17~18절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도 지배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아내와 그 종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기도하니까 다시 태가 열려 자녀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시 113:9).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시 62:11).

 

하나님은 또한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했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지자라 하시고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아비멜렉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큰 재물을 주셨습니다.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노비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창 20:14).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으로부터 양과 소와 노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사라 덕분에 은 천 개도 받았습니다.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창 20:16).

 

아브라함이 부자가 된 것은 순전히 사라 덕분입니다.

애굽에 가서도 사라 덕분에 부자가 되었고, 그랄에 가서도 사라 덕분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사용하실 뿐 아니라 큰 재물도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능력과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능력과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창세기 20장의 교훈

 

창세기 20장에는 아브라함의 약함과 하나님의 능력이 대조되는데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째, 사람은 높이 올라갔을 때 조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창19장에 아브라함은 기도를 통해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는 가운데 자신의 조카 롯을 건져냈습니다.

기도로 승리한 것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승리를 하고 곧바로 창20장에 큰 죄를 지어

하마터면 아내를 잃을 뻔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자꾸 높이면 나중에 남는 것은 고꾸라지는 것밖에 남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자꾸 높이지 마시고 높이 올라갔다고 생각될 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등산도 올라갈 때는 잘 올라가다가 내려갈 때 고꾸라져서 다친 사람이 많습니다.

계단도 올라갈 때는 잘 올라가다 내려갈 때 넘어져서 다리를 다칩니다.

사람은 높이 올라갔을 때 조심해야 됩니다.

 

▲둘째, 성도들은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잠깐의 위기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위기를 초래하고

더 많은 죄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 데 이르느니라” (잠 13:5).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잠 30:8).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합니다. 남의 돈을 빌려가도 갚는 사람보다 떼어먹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사 26:7).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 (시 112:4).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하면 되고, 실수했으면 실수했다고 하면 됩니다.

 

저는 군대생활을 공군 장교로 했습니다. 그런데 장교들은 병사들이 먹는 짬밥을 못 먹고

돈을 주고 밥을 사서 먹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훈련받을 때 먹었던 짬밥이

너무 먹고 싶어서 식당에 가서 한 그릇 먹고 있었는데

사령관님이 순시를 와서 제 앞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얼른 경례를 하니까 왜 여기서 밥을 먹고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훈련받을 때 먹던 짬밥이 너무 먹고 싶어서 먹고 있다고 하니까 그냥 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대대장님이 저를 부르더니 정직하게 말해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거짓말은 인생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정직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셋째, 성도들은 인생의 위기와 환란이 와도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시며 큰 도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46:1).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시 115:9).

 

결론

 

창세기 20장에는 하늘과 땅이 대조되듯이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거짓말하는 아브라함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인간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인간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의 조상이 이런 수준인데 우리 수준은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아브라함보다 낫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 항상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야 합니다.

둘째, 존귀하신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해야 합니다.

언어나 삶이나 예배를 통해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주시고 큰 도움이 되어주실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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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그리고 죄와 은혜      창20:1~18         출처, 정리

 

김성수 목사 창세기 56강

 

앞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그 속에서의 롯의 처신에 대해 상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속되는 경고를 무시하고 무서운 심판의 불 속에서도

자기가 누리던 세상의 쾌락과 안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지체하며,

 

안목의 정욕의 마지막 보루인 소알을 놓지 못했던 롯의 불신앙은

결국 모압과 벤암미라는 하나님의 대적들을 출산하는 것으로

후대들에게 부끄러운 본보기가 되고 그렇게 부끄러운 모습으로 성경에서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소돔의 심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시던 그 곳으로

아브라함을 이끄시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불길을 직접 목도케 하셨습니다.(창19:28)

아브라함은 그 곳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철저한 심판에 대한

확실한 교훈을 얻었을 것이며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손들을 주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을

전율 속에서 절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19장에서의 아브라함은 롯과 대조가 되어, 훌륭한 언약의 백성으로 등장합니다.

 

심지어 소돔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을 막아서서

목숨을 걸고 중보의 기도까지 올리는 그런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 20장은 그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에 환호했던 우리를

또 다시 아연실색케 합니다. 오늘 본문 속의 아브라함은 마치

‘바보는 불에 데어 싸맨 손가락을 또 다시 불 속에 집어넣어 본다.’는

영국의 작가 키플링의 말처럼, 그 바보 같아 보입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지 않는 죄인들의 말로가

어떻게 처참하게 끝이 나는지를 금방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내년이면 약속의 자손 이삭이 사라의 태를 통해 태어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도 받아놓은 사람입니다.

그 말은 그 때 이미 사라의 배 속에 약속의 자손인 이삭이 들어 있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25년 전 애굽왕 바로에게 자기 아내를 팔았던 때와 똑같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넘깁니다.(아비멜렉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애굽의 왕을 바로라 부르듯이 그랄의 왕을 총칭하는 단어)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파는 아브라함에게는 명년에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해

약속의 자손을 주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소중하게 여겼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기 아내 사라를 지켰을 것입니다.

 

사라가 없으면 그 약속은 지켜질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는 그저 자신의 안전과 안일만을 챙기고 있는 어리석은 소인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성경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실수를 통하여 성경의 독자인 교회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 싶은 것일까요?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하시기 위해서는 이 창세기 20장의 에피소드가

어떤 맥락을 타고 흐르고 있는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예식을 보았습니다.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그림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 쪽에서의 그 어떠한 것도 근거하지 않은 하나님의 쪼개짐에 의해 완성된다는

은혜 언약의 밑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6장에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스마엘이라는 인간의 산물(産物)을 하나님 앞에 제시했고,

하나님은 13년간 침묵하심으로 그들의 행위를 나무라셨습니다.

 

그리고 17장에서 하나님의 할례 언약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엘샤다이 코람데오’라는 말씀을 통해

‘내 백성아 너희는 전능한 내 앞에서 너희를 부인하고 나에게 항복하고 순종하라,

그게 너희가 온전케 되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은혜 언약의 핵심 내용을 전제하신 후에

아브라함과 그의 모든 식속들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할례는 쪼개짐이라는 뜻이라 했지요?

 

그러니까 17장의 할례 언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쪼개짐에 의해 완성이 될 것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심과 동시에

그 하나님의 쪼개짐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들의 몸에 새겨진 흔적처럼 전가 될 것임을 주지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언약의 자손의 탄생에 관한 인간 쪽에서의 근거를 기각시키시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언약의 자손을 탄생케 하실 수 있음을 반복하여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러한 할례 언약을 받아 들고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비웃었습니다.

 

(창17:15~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아내 사래를 이제 사래라고 하지 말고, 사라라고 하여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겠다.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

 

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18장으로 넘어오면 사라의 비웃음이 이어집니다.

 

(창18:10~15)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장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들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고, 사라는 월경마저 그쳐서,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난 사람이다.

 

12 그러므로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13 그 때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가 웃으면서

'이 늙은 나이에 내가 어찌 아들을 낳으랴?' 하느냐?

 

14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다시 너를 찾아오겠다.

그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15 사라는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였다.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인 이삭의 출생에 관한 약속과 그의 출생이 인간적인 조건과

상황 속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임이 반복하여 제시가 되고

21장에서 드디어 이삭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21:1‐4)

 

인간 쪽에서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일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의해

성취가 된 것입니다. 이삭이 태어났을 때의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였다는 것은

인간적인 불가능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창조가 일어났음을 강조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20장)은 바로 그 인간 쪽에서의 불가능함에 대한 선언과 증거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한 이삭의 탄생 사이에 들어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약속의 자녀는 아브라함의 인간됨이나 아브라함이 내어 놓은 신앙의 성숙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창조케 됨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아브라함의 실수가

이삭의 탄생 바로 앞에 확인도장처럼 등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 하면,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아비멕렉의 이야기는

창12장에서 시작된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부터 시작하여 이해를 하면 쉽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12장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언약들이 (12:1~3)

아브라함의 파렴치함 속에서 하나하나 다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막연하게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고

그가 복의 근원이 되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후반부를 보면,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를 해 주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20: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그런데 아브라함이 무슨 대단한 신앙의 경지에서 그렇게 하나요?

그가 복의 근원의 역할을 보여준 때는, 자기 아내를 팔아먹는 파렴치한 행동을 한 그 때였습니다.

 

무엇을 보여주는 것인가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열심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성취되는 것임을 알기 쉬운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언약은 창15장에서 후손으로 이어집니다.

 

(창15:4~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5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인데

그 민족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에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조금 더 밝게 나타났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후손이 배 속에 들어 있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팔아먹는 믿음의 조상의 실수가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라가 풀려나고 21장에서 이삭이 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후손도

아브라함의 노력이나 자격, 열심 등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계시는 17장에서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창17:5‐8)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

 

6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너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너에게서 왕들도 나올 것이다.

 

7 내가 너와 세우는 언약은, 나와 너 사이에 맺는 것일 뿐 아니라,

너의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도 대대로 세우는 영원한 언약이다. 이 언약을 따라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너의 자손의 하나님도 될 것이다.

 

8 네가 지금 나그네로 사는 이 가나안 땅을, 너와 네 뒤에 오는 자손에게

영원한 소유로 모두 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창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큰 민족과 나라는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후손에서 시작하여

열왕으로 나라들로 번성케 될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열국의 아비와 믿음의 조상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거기서의 ‘열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믿음의 조상’ 또한 교회의 조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이 태어나지 않으면, 그 모든 약속은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상황에서 이삭의 어머니 사라를

그랄 왕에게 주어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삭과 그 이삭으로 말미암게 되는 열국처럼

허다한 무리인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탄생케 된다는 은혜의 복음이

이 20장의 에피소드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어서의

인간 쪽에서의 불가능함과 무력함,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이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고전1:26‐29)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27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9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시는데 있어서 인간의 지혜나 재능이나 열심 등을 들어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일을 하심으로 인간 쪽에서 내어놓는 모든 것들을 기각시키시고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잘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전부 바보 천치에다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먼지만큼이라도 자신의 자격이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 세상의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멸시받는 것, 없는 것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어떤 실수를 해도 결국은 용서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더라는 방종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토록 보잘것없고, 불가능한 자들에게 은혜로 찾아오셔서

오직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지혜와 당신의 사랑으로 그들을 건져 내시더라는 은혜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능력이나 열심을 의지하여 자랑하지 말고,

불가능한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뜻에 오롯이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라는 것이

성경 전체의 권고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1:30~31)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31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내는 죄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자랑하는 자로 회복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얻어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거저 받은 자들이므로

그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은 그가 누구에게 전적으로 순종하고 의뢰하여

살아야 하는 상태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 오롯이 순종하여 사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자신의 안전과 안일을 위해 두 번씩이나 아내를 팔아먹은 아브라함,

심지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사라의 태중에 있었음에도 서슴없이

그랄 왕에게 아내를 주어버린 아브라함의 불가능하고 무력한 모습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오직 당신의 은혜로 우리 안에 새 창조를 시작하신 것이고

홀로 그 창조를 완성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러한 전적인 무능력, 즉 전적인 타락과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확실하게 깨닫게 될 때

우리 안에서는 자랑이 없어지게 되고

오직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영광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항복과 순종이 나오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서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는

진짜 사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못나고 불가능하고 여전히 반복적이며 의도적이며 계획적으로 죄를 짓는 그러한 우리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롬5:8) 찾아오셔서 약속의 자녀로 삼아 주신

우리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의 깊이를 아는 만큼

우리는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있게 되고 순교의 자리까지 낮아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유일한 의무요 표지는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거룩이며 그게 바로 순종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세요.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아닌 망나니에 불과합니다.

그는 21장에서 태어날 이삭이 없으면 열국의 아비도 믿음의 조상도 될 수없는 가련한 티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에게 은혜로 주어지게 될,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탄생케 하시는 약속의 후손 이삭이 태어나게 되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열국의 아비,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약속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지옥의 땔감에 불과한 자들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만족과 쾌락을 위해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내까지도

수시로 팔아먹을 수 있는 그런 파렴치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약속의 후손을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를 건져 내셨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자녀가 되리라’는 당신의 약속을 성취해 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상기(想起)해 보세요. 잘못은 아브라함이 했는데 하나님이 아비멜렉을 혼내십니다.

 

아비멜렉은 자기 말대로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행하는 자였습니다.

자기가 아브라함에게 속아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침 일찍 이러나 그 일을 바로잡는(8절) 경외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 하였도다’하고

아브라함의 잘못을 나무라는, 아브라함보다 훨씬 도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참에 아브라함을 버리시고 차라리 아비멜렉을 택하셔서 다시 시작하시는 편이 나을 듯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을 선지자라 부르셨고

아브라함이 기도해야 아비멜렉이 살 것이라는(7절)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지요?(12장)

 

하나님은 그 상황에서도 당신의 택한 백성인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지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실수와 실패로 점철된 삶을 사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당신의 약속을 이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죄로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협박을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의 죄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명년에 태어날

이삭 때문에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죄의 결과로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죄를 덮어버리는 은혜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다가 머리를 빳빳이 쳐들고 자신의 능력과 성공을 자랑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 것들이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될 거라고요?

천만에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 주관되고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동방 연합군의 뒤를 좇아가 그들을 쳐부수고

롯과 전리품들을 빼앗아오는 두려움 없는 신앙을 만들어 낸 것이고,

소돔을 멸하러 가시는 하나님을 막아서서 중보기도를 올리는 중보자로 만들어 낸 것이고,

모리아 산에서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완전한 자기부인의 모델로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열심과 능력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삭을 낳기 바로 전에

아브라함이 어떠한 자인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업적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며 ‘나 잘했지요?’하고 자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롬14:7~9)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다 주님이 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은

우리가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머슴처럼 불렀다가 돌려보냈다가 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살라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도가 자기 자신이 인생과 우주의 왕이 되어 살던

그 자리에서 내려와 주님이 죽으라면 죽어야 하고

주님이 가난하라면 가난해야 하며

주님이 병들라 하면 병을 감수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십자가가 섰다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백성이지

주님을 이용하여 나의 영광을 챙기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성숙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자기 부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제발 자기를 증명하려 하지 마세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마세요.

피조물이 유(有)의 자리에서 내려와 우리 자신이 무(無)임을 자각하고 깨닫는

무(無)에로의 창조가 바로 새 창조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힘을 이용하여 자꾸 유명해 지려하고

많이 가지려 애를 쓰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 아니겠습니까?

 

(눅16:15)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요구하지 마세요.

그리고 그러한 일이 자신의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함이라는 거짓말도 하지 마세요.

 

나는 자꾸 부인되고 우리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은혜가 드러나는

참 성도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