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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되지 않는 삶의 본질 P2 / 존 파이퍼

LNCK 2019. 2. 9. 21:04

 

낭비되지 않는 삶의 본질 P              빌1:20~21          출처          P1        P3

The Essence of Unwasted life

 

왜 우리가 존재할까요?
의미 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의 존재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이 설교제목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낭비되지 않는 삶의 본질’ The Essence of Unwated life

 

‘정말로 중요한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성경을 보겠습니다.

 

12:15-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도로 찾으리니 required back'은   *눅12:20 '아파이테오'

헬라어로 ‘영혼을 너에게 빌려줬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되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거죠. 돈을 비유로 하면, '원금 상환'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네가 너의 영혼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내가 너에게 영혼을 준 목적이 있다.
내가 너의 영혼을 되찾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12:20-21


이와 같이 낭비된 삶이 있습니다.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것은 그저 평범한 일들입니다.
악한 일이 아닙니다.

 

그는 누구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마약을 하지 않았습니다.
술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즐거워했을 뿐입니다.
먹고 마시며 자기가 쌓아 놓은 것 위에
퍼질고 앉아 즐기고 있었을 뿐입니다.

 

▲바울은 낭비되지 않는 삶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고전15;17-19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내가 살기로 선택한 삶은 어리석고 우습기까지 하다 ridiculous!"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미국의 크리스천은 많지 않습니다.

대신에 미국사람들 대부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70년 후에 죽었다가 깨어나 보니
만약 그런 것(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해요?"

 

당신이 죽은 후에 깨어나서, 심판대를 통과한 후에, 자신의 삶을 평가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내가 완벽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은혜로 그건 꽤 괜찮았어! 너무너무 천만 다행이야!”

 

아니면 이렇게 말할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나는 삶을 낭비했어”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낭비되고 불쌍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말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차라리 먹고 마시다가 내일 죽자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있습니다.

 

상급과 심판이 있음을 인식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삶을 다르게 살게 됩니다.

 


▲자, 낭비되지 않는 삶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빌립보서 1장 20~21절입니다.

이것은 저에게 아주  중요한 본문입니다.
제가 28년 전에 베들레헴 교회의 목회자 후보로서 선을 뵈일 때
이 설교를 했습니다.

 

이본문은 오랜 세월동안 저에게 구심점이 된 본문입니다.
지금도 이 본문은 저에게 큰 심정적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삶의 사명을 진술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1:20-21)

 

‘존귀하게 magnified’를 ‘영광을 드러내다, 높이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의 헬라어도 ‘메가’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요.

 

이런 의미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내 몸 안에서
내가 죽든 살든 그리스도가
위대(메가)하게 보이게 하려 한다'
 
그것이 낭비되지 않는 삶입니다.
당신과 내가 이 지구 상에서 몇 년을 보내는 것은
형태는 다양하지만 궁극적으로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사실 그대로  존귀하게, 크고 위대하게 보이시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63편 3절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생명, 내 인생보다 나으므로’

Because thy lovingkindness is better than life

진실로 그렇게 믿으십니까?

 

바울이 빌1:21절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함께 본향에 있을 것이므로
죽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라면! 심지어 죽어도 그게 자기에게 더 좋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그 어느 것보다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더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라고
말했습니다.

*한글 성경에 번역이 확 다가오지 않은데

영어는 분명합니다. thy lovingkindness is better than life

'주의 인자하심이 내 생명보다, 내 인생의 어느 것보다 더 낫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은
땅 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낫습니다.
가볍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난 토요일에 12살인 딸과 데이트하며 피자를 먹고 있었습니다. *한국나이로 14세
저는 부활절 메시지를 전하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다 저는 창밖을 내다보며 우연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재림하셨으면 좋겠어!”

 

왜 그런지 모르지만 저는 정말 그런 기분이었어요.
아마도 부활절을 앞둔 부담감 등 때문이었겠죠.

 

딸은 전혀 좋아서 웃지 않았어요. 대신에 딸은 매우 진지하게 말했어요.
“아빠, 나는 결혼하고 싶어요!” (제 결혼 전에 재림하시는 걸 원치 않아요)

 

아직 12살인데 말입니다. 저도 정말 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저도 어서 딸이 커서 결혼하는 것을 원해요.

 

그러나 저는 딸이, 결혼보다 재림을 더 바라는 것을 원했지요.

결혼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얘야, 예수님의 재림이 어떤 것인지 네가 안다면
만일 네가 그 순간을 맛본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거야.
네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열두 살이라 아직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야.

그리스도의 소중함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아직 작기 때문이야“

 

물론 저는 딸이 거듭났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믿어요.
그러나 딸은 솔직했어요.

 

그때 우리 딸처럼, 여러분도 바울처럼은 이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혹시 주님의 뜻에 의해 오늘 밤에 내가 죽게 되더라도

그것이 앞으로 내가 40년 동안 살면서, 장차 가질 어떤 것보다 유익하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바울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제가 여기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여러분이 그 정도로 그리스도를 알아서
그렇게 느끼게 하려는 것입니다.

 

단지 이 말씀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느끼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크리스천이 얼마나 열정적인 radical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완전히 바울 같은 사람이 된다면 말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1:20~21

 

바로 그것이 낭비되지 않는 삶입니다.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삶입니다.

 

낭비되지 않는 삶의 교훈은
돈을 다루는데 있어서, 독신생활을 다루는데 있어서,
결혼생활을 다루는데 있어서, 암을 다루는데 있어서,
강도당한 것을 다루는 데 있어서

예수님이 어느 것보다 소중하다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존귀하게 보여야 합니다.
스스로 질문하십시오
‘내가 이것을 어떻게 해야 예수님이 위대하게 보일까?’
‘ 내가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돈보다 예수님이 위대해 보일까?’

그것이 핵심 질문입니다.

 

‘내가 집을 어떠히게 사용해야 내 집보다 예수님이 소중해 보일까?’
‘내가 직장생활을 어떻게 해야 예수님이 내 직장보다 소중해 보일까?’
‘내 몸을 어떻게 관리해야 예수님이 내 몸보다 소중하게 보일까?’
이것은 쉬운 삶이 아닙니다.

 

이 질문들은 이해하는 것만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행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미국 크리스천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세상적인 것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가죠.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크게, 존귀하게 보이게 해야 합니다.

망원경처럼 말입니다. 현미경 처럼이 아닙니다.
망원경은 거대한 것을 실제에 가깝게 보이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대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망원경입니다.

 

한 1년 전에 누가 제게 머그컵 하나를 선물로 보내줬어요.
거기에 망원경이 그려져 있어요.
저는 왜 그가 제게 그것을 보내줬는지 잘 알아요.
그 머그는 제 책상 앞에 있어요.
그것은 제게 상기시켜줍니다.

 

“오늘 당신의 삶이 망원경처럼 기능하고 있는가요?”
누군가 나의 삶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까?

"그리스도가 그렇게 중요했던 거야? 

작은 별인줄 알았는데, 너를 통해 알게 되었어!

알고 보니 예수님은 거대한 은하, 그 이상 온 우주이셨어!"

 

물론 그것은 쉬운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적의 삶입니다.
우리 인생이 끝나면, 우리는 영원히 그렇게 하게 될 것입니다.

즉 크신 하나님을, 원래 모습 그대로 크고 위대하게, 찬양드리게 될 것입니다.



계:5:11-13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동물들까지 말합니다. 오징어, 벌레, 개구리
날아다니는 피조물들이 노래합니다.
동물들이 말한다니 무슨 말이죠?
이것은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때가 되면 땅바닥의 바위와 돌들까지 외칠 것입니다.
때가 되면 산림의 모든 동물들이 외칠 것입니다.
만물이 만왕의 왕의 존귀함을 입을 열어 외칠 것입니다.

 

우주에 침묵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먼저 시작하면 됩니다.
당신의 삶과 목소리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가 살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위해하게 보이게 하는 거죠.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나타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매 초마다
우주에게 존재하라, 운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침묵하신다면 우주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으로
당신을 존재하게 붙드십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위엄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물을 붙드시고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만물이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주는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설교의 제목

'낭비되지 않는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The Essence of Unwasted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