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sWPWNHBlunQ
◈예수님의 모습 계1:13~15 스크랩, 정리
<부제 ; 예수님과의 거리를 좁혀야!>
신구약 성경을 통털어서
예수님에 대한 묘사를 가장 자세히 한 구절을 들자면
사람들은 계1:13~15절을 꼽습니다
예수님의 ‘속성’은 이사야 53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장차 고난받는 메시야로 오실 것이 자세히 나오죠
그렇지만 본문 계1장은
천상에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외모)을
가장 잘 설명한 구절이라고 사람들은 얘기합니다
여기 예수님의 ‘모습(외모)’에 대한 묘사가 자세히 나와요
예수님의 옷, 금띠, 머리털, 눈, 발, 음성
이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이 시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지금 사도요한은 편히 쉴 만한 늙은 나이에 밧모 섬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유배를 갔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쉽고 편한 길을 주시면 좋을 터인데
젊은 나이도 아닌데, 연세가 거의 90세인데
(다른 사도들은 앞서 다 순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밧모섬에
로마제국에 의해 유배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보면 굉장히 절망적이고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그 밧모섬에서
예수님을 만나뵌 것입니다
늘 예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께 기도하고 하셨지만
자기가 환상 중에 보니까,
예수님의 발이 자기 코 앞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님 바로 앞에 있는 것이었죠
◑<신앙생활은 예수님과의 거리다!>
맞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의 거리다!>
예수님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아무 근심, 걱정, 염려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거리가 멀어질수록
근심, 걱정, 염려가 가득해집니다
‘호스피스 설교’는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정리하시는 분들이
좀 더 잘 정리하시도록 도와드리기 위해서
(신앙적, 영적인 부분들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내가 예수님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한 달 남았다’ 그래도
콧노래 부르며 찬송하며 다닙니다
주님과 거리가 가까울수록
자기가 직장에서 실직하더라도
자기 자녀가 비통한 일을 당하더라도
세상의 그 어떤 환란, 풍파, 역경이 닥쳐도
그게 전혀 환란, 풍파, 역경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환란, 풍파, 역경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것은 실재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과 거리가 아주 가까운 사람은
본문의 사도요한처럼,
자기 바로 코앞에 예수님이 발에 끌리는 옷을 입으시고
서 계시는 그런 체험을 하는 사람,
꼭 그렇게 환상가운데 예수님을 보지 못하더라도
기도가운데 자기 마음에 성령충만해서
예수님과 아주 가까워진 사람은
실직을 당해도, 정리해고를 당해도,
병원에서 무슨 판정을 받았다 해도..
뭐 어떤 노후에 아무 재산이 없어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자기가 노후 준비를 철저히 하고
몸이 건강하고, 또 노후에 쓸 돈도 넉넉하고
자녀들도 다 잘 되었다 하더라도
주님과 거리가 멀어진 사람은
인생의 불안, 염려, 공포, 실망, 원망,
이런 것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목적은
예수 믿으면 갑자기 부자가 된다, 예수 믿으면 갑자기 불
치병이 낫는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이 있기는 있습니다 부수효과로 생길 수는 있겠죠
안 생길 수도 있지만, 장담은 못합니다
부수효과라서 있어도/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이 주는 게 뭐냐?
영혼 구원에서 오는 확신, 사랑, 믿음, 평안 등입니다
당장 다음 달에 ‘사형선고’를 받는다해도
자기 마음에 확신, 담대함, 평안이 생기니까
거기에 따르는 <부수효과로> 몸도 건강해지고
또 사업적으로 경제적으로 윤택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은총들이 어디서 온다고요?
본문의 사도요한 같이 예수님이 자기 코 앞에 계신다
내가 예수님과 아주 연합되어 있다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고 있다
이 사람만 그런 평안, 확신, 담대함, 믿음 등이 생깁니다
▲여러분, 소리소문 없는 환란이 더 무섭습니다
그러니까 1~3세기 3백년간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의해서
무자비한 탄압과 핍박을 받았는데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런 시간보다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이
마귀로부터 더 큰 환란과 유혹을 당하고 있다...
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입니다
사람이 외적인 환란과 핍박을 당하거나, *초대교회처럼
질병이나 궁핍을 당하면
또는 중환자실에 누워있으면
자기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주님과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연세가 80~90이 되도록
몸이 건강하고, 먹고 사는 게 편안하면,
이러면 100명 중 98명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아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늙어서 자기 몸이 아프다든지
아니면 가정에 문제가 생겼다든지
그래서 가정과 헤어져서 요양원에 가 있는 것,
어쨌거나 그런 분들도 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야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히면서
그 인생의 마지막 때를 잘 살아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지
‘아~ 나는 요양원에도 가지 않아
나는 몸도 건강해
나는 먹고 살 돈도 충분해
집도 있고, 우리 자녀들도 다 잘 살고 아무 걱정 없어!’
이렇게 하다가 갑자기 변을 당하게 되면
아무런 준비 없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사람이 과연 축복된 인생이었느냐? 의문입니다
그런데 백 명 중 1~2명은 그런 분이 계십니다
정말 신앙생활 잘 해서, 늙어서도 건강하고 유족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잘 살다가
편안하게 소천하시는 그런 분들도 있기는 있는데
많지는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실 분들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평안하게 신앙생활 경건하게 일생을 믿다가
평소에 다 회개를 했기 때문에, 회개할 것이 없이
편하게 소천하시는 그 분이 제일 좋고,
그러나 확률적으로 이런 분은 극소수이고
나머지 하나님께서 천국에 데려고 가실 분들은
고쳐서 데리고 가십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환란을 주시고, 몸이 병들게 하시고
집안에서 어려움을 당해서, 저 멀리 쫓겨나게 하시고
그걸 우리는 은총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 없이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것이 과연 복이겠느냐... (아닙니다)
자기가 시험 준비를 잘 한 학생은
시험 보는 것이 두렵지 않지만
평소에 시험 준비를 안 하고, 그냥..
대부분 사람들은 ‘시험’ 준비를 안 하고 삽니다
그게 (장례식) 남의 일로 여기지
자기 일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 시험 준비 안 하고 살적에
항상 사람은,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아 살다가
갑자기 시험을 딱 치게 되었을 때
굉장히 곤란한 일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그것을 한탄, 낙심, 한숨 쉬지 마시고
그것을 다 ‘주님이 내게 주신 은총의 기회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이시면
그것이 성경적인 관점입니다
◑본론
사도요한이 예수님을 코 앞에서 만나뵙게 되니
예수님의 모습은
▲1. 예수님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그 분은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으셨다’ 계1:13
'발에 끌리는 옷'은 제사장의 의복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은 대제사장 이십니다
대제사장의 옷에는 에봇(조끼)이 있고
그 에봇에는 흉패(에이프런)가 있는데
그 흉패에 12보석이 달려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합니다
즉 대제사장은 12지파를 가슴에 품고
지성소로 나아갔으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백성들, 영적인 12지파를 품고 계십니다
성경구절에 ‘예수 안에’라는 말씀이 종종 나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예정되었고
‘예수 안에서’ 구원받았고
‘예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예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아까 서두에 <예수님과 거리가 중요하다> 그랬는데
예수님 가슴 안에 쏙 들어가 있으면
그거야 (거리상으로) 만점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님의 제사장 되심,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 모두를 예수님 안에 품으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뭡니까?
내가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의 품 안에 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이 사실을 날마다 확인하고 재확인하는 과정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약간만 기도를 게을리하거나 경건생활 게을리하면
예수님이 나를 돌보시지 않는 것같고
예수님이 내게서 멀리 떨어지신 것 같고
그럴 경우 꼭 나타나는 현상이 불평, 불만이 생깁니다
예수님께 막 항의하기도 하고, 대들기도 하고
예수님께 딜deal 하고, 협박하기도 하고
‘나 예수 안 믿을 거에요’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그런 모든 것이 예수님과 거리가 멀어진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란과 고초를 주시고
또 노후에 몸이 병들게 하시고, 괴롭게 하시는 것은
주님께 가까이 오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품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란과 고초를 주시고
또 노후에 몸이 병들게 하시고, 괴롭게 하시는 것은
주님께 가까이 오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품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
대제사장이신 그 분을
그 품안에서 뵙게 되시는 은총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2. 가슴에 금띠 :13b
가슴에 금띠를 띤 사람은
고대근동 지역에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초림 때는 누더기에 흠모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오셔서
이 세상의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으로 사셨지만
재림 예수님은 가슴에 금띠를 띠신 영광의 왕으로
만왕의 왕으로서 이 세상에 재림하실 것을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읽어내게 됩니다
초림 때는 구원을 이루시려 오셨지만
이제 아프로 재림 때 오실 예수님!
또는 우리가 죽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만나게 될 그 예수님은
우리 구원을 주시러 오시는 분이 아니라
당당한 왕으로서, (두려운) 심판자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얘기가 있죠
시험 준비를 착실히 한 학생은
시험이 기다려집니다
왜냐면 시험봐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상도 받고
어머니께 선물도 받을 것이고
시험공부를 철저히 해 놓으면 시험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시험시간이 기다려지는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이 시험공부를 게을리했을 적에는
시험(최후심판대)이 두려워지는 거죠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에 다 시험을 치게 되어 있습니다
시험준비를 좀 빨리 했으면 좋았을 터인데
그러나 빨리 못했다 하더라도, 지금 남은 시간만이라도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신 시간입니다
시험공부 좀 철저히 해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만날 그 분은
누더기 옷을 입으신 말구유에 태어나신
불쌍하고 처량한 아기 예수가 아니라
가슴에 금띠를 두르신 만왕의 왕으로서 심판주로서
우리가 그 분을 뵈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남은 시간만이라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시험준비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14
거의 90세가 되어서 밧모 섬에 가서
노후를 보내게 되었을 때,
어떤 면에서 인간이니까 좌절감, 약간의 실망감을
길지는 않더라도 짧게라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사도요한 앞에 나타나 주신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눈을 떠 보니까
자기 발 앞에 예수님이 끌리는 옷을 입으신 예수님이
서 계셨을 때
그 예수님과 맞딱뜨려졌을 때, 그 느낌, 그 분위기
그게 어떻다고요?
걱정이 물러가고, 근심이 물러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물러가고
심지어 죽음에 대한 편집 불확실성까지 다 날아가 버리고
오히려 그 입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됩니다
17절에 ‘그 분을 보는 순간 나는 죽은 사람처럼
그분의 발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내게 오른 손을 내밀며 말씀하셨습니다'
17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주님을 뵈면 너무너 두렵고, 너무나 엄위하시고
너무나 크시고, 너무나 놀라운 분이시라서
거의 경외감이 생겨서 거의 죽은 자같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두려움만 있느냐? 아닙니다
100%의 두려움이 있지만
100%의 평안, 기쁨, 성령충만, 희락이 동시에 있습니다
두 개가 같이 공존하는데
여기서 특별히 기억해야 될 말씀은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다’ 계1:17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다’ 계22:13
우리가 ‘마지막’을 모릅니다
끝을 모르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모르고 다 모르는데
예수님은 끝을 알고 계십니다
‘나는 마지막이다’
내가 마지막을 다 알고 있으니까,
너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지(未知)의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는 세계로 가는 게 아니라
‘나는 처음도 되지만 나는 마지막이다’
‘나는 마지막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걱정하지 말라
평안할 지어다’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불안, 불만, 불평
뭔가 가슴이 답답한, 뭔가 밥맛이 없는..
특별히 누구에게 원망을 하고,
이런 모든 것이 다 무슨 원인입니까?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와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환란과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
이유가 뭐라고요?
거리를 좁히라는 것입니다
내 품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왕이요, 선지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날 그 예수님은
심판의 왕이심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시험준비를 평소에 잘 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