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특별한 대면을 가진 결과 눅5:1~11 스크랩글 정리
본문 눅5장 게네사렛 호숫가 사건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요1장에서,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전도해서
예수님을 만나 뵙게 합니다.
요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42.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1장 상황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눅5장에서, 베드로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눅5:11
그러다가 나중에 12사도로 임명 되는데요.. 눅6:13
쉽게 말해서, 처음에는 건성으로 예수님을 만났다가, *요1장
두 번째는 회개를 통해,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서 *눅5장
그 후로, 그물을 버려두고, 생업을 버려두고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삶을, 인생 이모작을 새로 시작하게 되는데요..
그렇다면 베드로가 왜 요1장 상황에서는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요1:42
라는 예수님의 귀한 말씀을 듣고도,
그물을 버려두고 적극 예수님을 따르지 않다가,
본문 눅5장에 이르러 비로소
그물을 버려두고 적극 예수님을 따른 것일까요?
그 이유는 눅5장 상황에선 특별한 베드로의 고백이 나옵니다.
눅5: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가 뭘 잘못했으며,
자기가 무슨 죄인이었다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눅5: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소문나면서,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상황입니다.
그날도 게네사렛 호숫가로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왔다 pressed’는 본문의 표현은, 원어로 ‘서로 밀쳤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밀칠 정도로 예수님을 따른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라고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5:1
왜냐면 예수님이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셨습니다.
그건 말씀을 가르치시려고 stand by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군중들이 서로 앞자리, 요즘말로 S석을 차지하려고
서로 자리다툼을 하고, 밀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열중하고 있는 일은, 그물 씻기입니다.
▲5:2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물론 베드로는, 지금 그물을 빨리 씻어놓고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적극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기 보다는
그물 손질하면서 구경하는 자세인데요,
그렇게 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강단용으로 쓰려고 배를 빌려달라고 <부탁>하신데’ 있습니다.
▲5:2~3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청하시고’라고 번역된 단어는,
보통 영어성경에 asked 로 번역하는데,
KJV성경은 특이하게 prayed (기도하다) 로 번역했습니다. *헬, 에로타오
그러니까 ‘간곡히 요청하다 beseech’ 이런 뜻입니다.
※‘에로타오’가 ‘간곡히 요청하다 beseech’는 의미로
쓰인 곳이 마15:23, 막7:26 등입니다.
물론 배를 밀어달라고 부탁하는 입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명령조로 말씀하실 수는 없고,
겸손히 요청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만,
지금 분위기가 베드로가 갑이고, 예수님이 을입니다.
예수님이 ‘간구하신 prayed (KJV)’ 상황에서,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어쩌면 말씀을 들으려고 서로 밀치는
군중들 틈에 끼어있었으면, 더 좋았을 뻔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런 상황을 구경하면서, 그물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부탁하자, 비로소 자기 몸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이전에 안드레의 전도로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지만,
아직은 수동적입니다.
그래서 그 ‘갑’의 자세를 회개하면서
나중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았을까요?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군중을 가르치신 다음,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깊은 물은 언제고 위험합니다.
갑자기 풍랑이 일 수도 있고요,
보통 고기잡이가 다 그렇듯이
갈릴리 호수도 아침나절에는 고기를 잡을 가능성이 없고
밤에 그물질을 해야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내리라 하셨고,
그 결과 배 두 척이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습니다.
순종이란 자신의 지식과 사고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대방을 향한 사랑과 권위에 대한 신뢰로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고기를 잡는 어부가, 자기 경험과 판단을 제쳐놓고
목수 출신인 예수님의 권고에 따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을 듣고
들은바 대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해야 된다.. 이것이 본문의 주된 논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5: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복음 선포를 비롯한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쌓아 온 경험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지만,
실제로 그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참고로, 이 대목에서 인간은 본능상 '사업이 잘 되고, 지금 하는 일이 번창하게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는데, 그건 아전인수 격, 동상이몽의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 본문을 기록한 성령님의 의도는 '그랬더니 대박난다'가 아닙니다.
혹시 대박이 났다 하면, 그것은 물고기를 많이 잡는 '전도의 대박'이지, '금전적 대박'은 아닙니다.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간혹 신앙인의 길을 가다가, 즉 신자로서 살아가다가
무슨 연유인지,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신학교를 나와서 사명자의 길을 가다가도,
그 길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요1장의 베드로 상황입니다.)
여러 가지 표면적 이유가 있겠지만,
그 속을 깊이 따지고 들어가 보면,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아직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난 체험’이 있는 사람은,
잠시 실족할 수는 있으나
오래도록 하나님을 떠날 수는 결코 없습니다.
혹시 하나님을 오래 떠난 분들이
자신이 실족하게 된 표면적 이유를 여러 가지 댈 수 있으나
(자신의 타락, 교회에 대한 실망, 가족에 대한 실망 등)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면, 본문에서와 같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체험이, 주님 앞에서 회개한 경험이,
그의 일생에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받거나, 하나님을 체험하거나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게 되면
나오는 첫 번째 반응은 자신이 부당한 죄인이라는 깨달음입니다.
베드로가 정말로 주님께 떠나달라고 한 걸까요?
진심으로 그랬다기보다 그만큼 죄와 흠 투성이인 자기 모습이
주님께 누가 될만큼 어울리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에 나온
겸손한 말이겠지요.
베드로가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한 이유는 아마 2가지일 것입니다.
1) 자신이 처음부터 설교를 듣지 않고, 그물을 정리하며 구경한 것
2)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라 할 때, 큰 확신이 없었던 점
본문에서 베드로가 회개하며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이사야 6장의 이사야 선지자의 체험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으로서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사6:5)
환상으로 주님을 뵌 이사야의 탄식입니다.
엄위와 영광이 가득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그는 먼저 자기의 죄와 비천함을 떠올리며 당황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직분, 소명으로 부르실 때
그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부당함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게 되면
이렇게 인간은 누구나 한없이 보잘것없는 자신을 보게 되고,
자신이 죄인임과 자기의 자격 부족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이런 부당함의 고백이 합당함으로 변하게 된다는 엄청난 사실입니다.
이렇게 회개를 통해,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된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인정과 사명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비전이요, 사명'입니다.
▲5:10b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하나님은 우리의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부당함을 진솔하게 고백하기 때문에
우리를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대예언자로,
사울을 바울 사도로,
시몬을 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참어부 베드로로 만드십니다.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나서, 그 주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엎드린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새 존재가 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자발적으로 회개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사면초가처럼 찾아온 큰 환란을 통해서, 비로소 사람들은 회개하게 되는데요,
그때도 그 환란이 은총인 것은, 그때 <회개>한 것을 통해서,
환란이란 문제 해결은 물론이요, 더 중요한 <사명>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소명calling이나 사명mission도 못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눅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어떤 분의 간증입니다.)
2006년도의 기억입니다. 연수로 캐나다 토론토에서 지낼 때입니다.
그곳 대학교에서 강의도 들었고, 영성 프로그램에도 참가했습니다.
유학생활이었지만, 공부만 하는 것이니 조금은 편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신학교 교학처장으로부터 메일이 왔습니다.
앞으로 신학교에서 강의를 해야 할 것 같으니 준비를 하라는 메일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강의를 듣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은 큰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앞으로 강의를 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부족한 저를 강사로 불러주신 은혜에 감격해서,
저는 더 열심히 연구하고, 강사로서의 길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에게
갑자기 주님께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무 놀라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그런 큰일을 할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부르심에
너무 감격스럽고 영광으로 생각되어
우리는 보다 최선을 다하게 되는 면이 또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명자로 불러주신 주님 은혜에 감격해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예를
사도바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바울 사도 역시 자신의 소명을 이야기하면서
자기의 자격 없음을 솔직히 토로합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15:9~10
주제를 한 마디로 함축하면
1) 참 신자가 되려면
회개를 통한 주님과 인격적 만남이 중요하며,
그 회개도 주님이 찾아가시고, 주도하시는데
회개한 자에게는, 소명 또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사람 낚는 어부 fishers of men'가 됩니다.
2) 사명자/주님의 종은, 자기가 잘 나서, 자격이 있어서 되는 게 아니라,
주님이 불러주시니.. 점점 다듬어져 나고, 점점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이사야, 사도바울이
기둥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종들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잘 나고, 그럴만한 능력을 타고나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주님이 불러주시니, 회개하게 되고
또한 회개한 자에게 주님이 사명을 맡겨주시니..
그 은혜에 감격해서, 점점 주의 종으로 만들어져 가 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