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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 열릴지어다!

LNCK 2019. 3. 8. 21:08

 

에바다 열릴지어다!’             7:31~35                        여러 글 취합

 

평소에 거의 관심 없이 힐끗 보고 지나치던 본문을

늘 이렇게 힐끗 보고 지나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 번 여러 자료를 검토하며, 본문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7: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무리를 떠나사

 

7: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설교자들은 이 대목을 보통 두 가지 이유로 해석합니다.

 

1) 그 환자, 장애우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의 의료기록, 이런 것도 오늘날에 비밀에 속합니다.

또 조용히 비공개로 치료 받기를 원하는 그런 분들도 많습니다.

 

2) 너무 불신 세상에 물든 사람들과 가까이 접촉된 상태에서는

이 장애우의 치료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격리해서, 일단 세상과 좀 차단을 시킨 후에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치료하셨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둘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본문을 해석하는 결정적 한 방은 아닌 것 같습니다.

 

 

기이한 치료 방법

 

7:33b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손가락은 하나님의 능력 power of God 을 상징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손가락은 구약에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쓰신 손가락이기 때문입니다.

 

8:19에도 10가지 재앙이 나타나자, 애굽의 마술사들은 바로에게

이것은 하나님이 손가락입니다.. 라고 보고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란 뜻입니다.

개역에는 의역해서 "하나님의 권능입니다"로 번역했는데,

영어성경은 거의 다 직역해서 "하나님의 손가락입니다 finger of Gd"으로 번역했습니다.

 

시스티나 성당 천정벽화에 보면, 하나님과 아담의 손가락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작가인 미켈란젤로가 하나님의 능력의 전가(임파테이션)를 상징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11:20에서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신구약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유사하게 단5장에,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글씨를 썼습니다. 관련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기이한 방법으로 보이나,

유대인인 제자들은, 크게 이상하게 생각 안했을 것입니다.

대신에 ,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의 혀에 손을 대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에 손가락을 대신 것과 마찬가지로, 혀에도 손을 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안수해 주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혀에.

외과수술 할 때, 환부만 째고 수술합니다. 온 몸을 다 수술하지 않듯이,

예수님의 안수기도도, 그 환부에만 외과수술적으로 하시는 거죠.

 

"침을 뱉으시며"

가장 난해한 구절입니다.

몇 군데 주석서에서도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침뱉음에는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경멸의 침과 2) 사랑의 침입니다.

본문에서는 사랑의 침뱉음이죠.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액체를 다 쏟아부어주셨는데, '4가지 액체'라고 합니다.

피, 땀(흘리시며 기도), 눈물..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는 '침'입니다. 

동물들도 사랑하는 새끼에게 침을 자꾸 발라주지요.

사람들도 가까운 연인 사이에는 간혹 자기 침을 상대방에 바르는 장난을 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난해구절의 해석에는

-그 침에 무슨 치료 효과가 있어서 그러셨다,

-그 장애우에게 침 뱉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안수하시는 자기 손에 뱉으신 거다,

-또 실제로 침을 뱉으신 게 아니라, '성령을 받으라'는 식으로 숨을 불어넣으신 게

 침 뱉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등의 여러 갈래의 해석이 있지만,

 

우리가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침'을 1) 경멸의 의미로만 고정해서 보기 때문입니다.

2) 사랑의 의미도 있다고 생각하시면, 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이 주인공은 귀만 막힌 게 아니라, 말도 잘 못했습니다.

그런데 농아들은 말도 잘 못한다고 합니다.

 

, 귀로 듣지 못하는 사람은, 말도 정확하게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귀로 들은 말을, 입으로 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귀가 열리면

입은 자동적으로 틔어진다는 뜻도 됩니다.

      

    

탄식하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냥 고쳐주시면 되지, 왜 탄식하며 고쳐주셨나요?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다른 곳에서 탄식하며 고쳐주신 적이 없습니다.

         

마치 아들이 상처가 나서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습니다.

며칠 지나서 붕대를 풀어보니, 아직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았습니다.

그 때 에휴!’ 하며 한숨 쉬거나 탄식할 수 있겠죠.

 

예수님이 탄식하셨다는 것은, 예수님도 뭔가를 실망했다,

다시 말하면 뭔가를 기대하셨다는 뜻도 됩니다.

열려있어야 되는데, 닫혀 있다는어떤 답답함이 묻어 있습니다.

 

그저 이 한 명의 일회성, 단발적 치료로 끝내시는 게 아니라

예수님은 뭔가 이 치료를 통해서, 탄식하시며

동시에 뭔가를 기대하셨을 것이다.. 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탄식하시며고쳐주셨으니까요!

 

 

에바다 왜 아람어?

 

에바다는 열릴지어다!’라는 말인데,

아람어입니다.                *아람어의 헬라어 음역입니다.

 

신약성경은 주로 헬라어로 씌여졌습니다.

(참고로, 예수님이나 제자들은 아람어나 히브리어를 주로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헬라어로 열릴지어다하고 기록하면 될 것을

왜 굳이 이 대목에서는 아람어로 기록했을까요?

 

참고로, 그 외 아람어로 기록된 말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15:34

 

아겔다마’ ‘피 밭1:19

마라나타’ ‘주여, 오소서고전16:22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5:41

골고다’ “해골15:22

겟세마네’ ‘감람유를 짜는 틀26:36, 14;32 등입니다.

 

다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아람어를 쓴 것은 뭔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한국어로 글을 쓰다가

뭔가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영어나 한문을 쓰거나, 그걸 한글과 병기하죠.

 

그러니 뭔가 마가복음의 저자는

강조하고 싶은 겁니다.

이 본문의 내용을!

또는 에바다 (열려라)’는 말을!

 

막7: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그러니 예수님은 함성을 지르신 것입니다. ‘에바다하고 속삭이신 게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이 말은, 하늘까지 들리도록, 온 천하에 다 들리도록

고함을 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특별히 아람어로 기록했고요!

 

그러니 이 한 명에게만 열려라하신 게 아니라

온 유대 사람을 향하여

아니 오는 세대에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에바다- 열려라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앞에 나오는 사람을, 그렇게 열리도록

고침 받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뭘 열려야 합니까?

뭐가 닫혀 있다는 겁니까?

 

 

본문의 정황, 배경

 

이 사건 직전 막7:24~30에는 예수님이 시돈 (이방) 땅에 가셔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곡한 부탁을 들으사

그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 본문을 기록한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다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 단락의 성경해석

 

그 다음에 두로와 데가볼리(다 이방지역)를 거쳐 갈릴리로 돌아오셔서

이 본문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신 기사가 나옵니다.

 

원래 성경에는 장절 구분이 없습니다.

이 두 사건을 하나의 단락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또 원래 이어져 있기도 하고요.

 

그렇게 볼 때, 본문은 그저 단순히 한 병자, 한 장애우를 고쳐준 사건이 아니라

-눈 먼 유대인,

-말 못하는(더듬는) 유대인의

그 영적인 질병을 고쳐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한 명의 장애우, 그의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시기 위한 것이라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 하며 고함지르시며

그렇게 장황하게 기록할 필요가 없겠지요

 

사실 이 단락의 전후에

, 바리새인들의 집요한 공격이 나오니까요. 7:1~23, 8:10~21

그런 바리새인, 광범위하게는 유대인의

선민사상, 우월의식, 자기민족만 구원받는다는

그런 귀 먹고, 말 더듬는 상태에서 고침 받아야 함을, 암시하신 것으로 봅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저 병고쳐 주신 것, 마치 병원의 의사처럼,

그 치유를 목적으로 이 단락을 마가가 기록한 것이라면,

예수님이 3년반 공생애 동안 모두 몇 명을 고쳐 주셨을까요?

어림잡아도 약 1100일이 넘습니다. 거의 매일 1명씩만 고쳐주셨다고 해도

1,100건입니다. 사실은 그보다 몇 배 더 많겠지요.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11건만 그 사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뭔가 단순한 치료 목적이라면, 수 십 건을 기록했을 터인데

뭔가 그 치료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겁니다.

치료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단순한 육신의 치료 이상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은 영혼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단순한 육신의 치료는, 이 세상에 국한 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영원한 영생입니다.

 

그렇게 볼 때, 귀 먹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치료하신 사건 기록을 통해

성경이 의도하는 바는,

-육신의 치료와 아울러

-영적인 치료, 영생의 치료

, 귀가 뚫려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입이 풀려서 하나님을 제대로 올바르게 언급하라는 것이죠.

곡해하지 말고요.

 

에바다!” 라고 특별히 아람어를 써서 기록한 것은

그 만큼 꽉 닫혀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요!

물론 그 당시만 그런게 아니라, 매 시대마다 꽉 닫힌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죠.

 

그 닫힌 것 중에 중요한 닫힘은

-유대인의 선민의식, 유대인만 하나님의 자녀요, 유대인만 구원받는다는 특권의식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에바다 열려라!’ 하신 것입니다.

 

귀가 열려 복음을 듣고,

입이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가는, 아니 예수님은, 또한 성령님은

너희는 귀가 열리고, 입이 풀어져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을,

본문에 등장한 한 장애우를 고치는 사건을 도구로 사용해서

에바다! 열릴지어다!’ 라고 외치시는 겁니다.

    

 그 닫힌 이유가 뭐냐, 유대인의 선민의식,

유대인만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는다는

바리새적인 특권의식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깨버리시고, 그들의 그 닫힌 귀,

그 닫힌 입이 열리기 원하셔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 열릴지어다 하신 것입니다

 

 

 

 

종합하면

 

하늘을 우러러’ + ‘탄식하며’ + (고함질러) ‘에바다

위 세 키워드를 종합하면,

 

예수님은 뭔가 가슴에 응어리가 져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그 장애우 한 사람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특히 바리새인들의

귀가 꽉 막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 .. 즉 온 세상을 향하여, 또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탄식하며’ .. 뭔가 응어리진 마음으로, 뭔가를 기대하며

열리라’ .. 닫혀진 것이 열리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적용

 

에파타. 열려라

 

귀먹은 이란, 어떤 이인가요?

귀가 없는 이가 아니라,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입니다.

 

말 더듬는 이란, 어떤 이인가요?

입이 없는 이가 아니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이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다는 것,

그것은 소통하지 않고, 통교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단절이요, 분리요, 친교를 나누지 않음이요,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닫혀있는 까닭입니다.

귀와 입이 닫혀있어 말씀이 드나들지 못한 까닭입니다.

막혀 있어서 흘러들고 흘러나지를 못하는 까닭입니다.

다름 아닌 완고하여 고집부리고 있는 까닭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사실, 우리도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임에 틀림없습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입니다.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입니다.

하고 싶은 말만하고 하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따로 광야로 불러내듯,

여인을 광야로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듯(호세 2,16-25 참조)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당신 손가락을 우리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우리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빵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셨을 때처럼,

하늘을 우러러아버지의 뜻에 의탁하여

숨을 내쉬며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에바타! 열려라

 

오늘날 우리가 열려야 할 부분, 우리의 닫혀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요?

오늘날 예수님이 만약 우리를 바라보시며,

하늘을 우러러 + 탄식하시며 + 에바다, 열릴지어다! 소리치신다면,

과연 그러실 꺼리가 있으실까요? (당연히 있겠지요.) 있다면 무엇일까요?

 

-인종적 선민의식, 인종우월/멸시의식, 아시안과 아프리카인 차별

-민족적 선민의식, 아리안족 우월의식, 한민족 우월의식 등

-교파적 선민의식 (우리 교파, 교단이 정통이고 나머지는 비 정통)

 

-출신학교적 선민의식 (특정 학교, 특정 신학교 출신이 가지는 엘리트 의식)

-도덕적 선민의식 (바리새적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지역적 선민의식 (우리가 서울, 센터에 위치한 교회, 우리가 교단 대표교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개교회주의, 교단주의의 울타리에 갇혀서

마치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들만 하나님을 최고로 잘 섬기고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놓고서도

다른 얘기는 아예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는, 귀를 막아버리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시커멓게 생긴 동남아시아인, 아프리카 인을 통해서 역사하실 수도 있는데

우리는 시커멓다는 이유로, 무조건 쳐다보지도 않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말을 아예 섞으려 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성령사역, 주님의 복음사역은 저 동네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데도,

우리는 이 동네 울타리 안에만 머물면서,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로 잘 섬겨!’

하고 자고, 자만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이웃 마을에서,

어느 젊은이 중심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막 나타나고 있습니다.

21세기의 젊은 예수가 나타나서, 명백한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당시의 바리새인처럼,

 

-그런 일에 깜깜 무소식이거나,

-그런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거나,

-우리 교회 일과 관련 없다고.. 그런 것은 아무 이슈가 안 된다고

딴전을 피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실제로 오늘날 성령의 역사는,

북한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중국에서 불붙을 수도 있고,

우리가 모르는 저 무명의 어떤 시골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마치 종교 귀족처럼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순화어

고자세로 그런 성령의 역사들을, 혹시 판단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쟤는 저게 문제고, 얘는 요게 문제야!’ 하면서요.

 

특히 한 가지, 우리 귀가 막혀있는 사실은

과거에 남수단에서 수 만 ~ 수 십 만의 기독교인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거나 피난을 떠나도 .. 우리는 듣지 않습니다.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최근에 시리아에서 내전이 일어나서, 5백만의 난민이 발생하고

거기에 상당수의 크리스천이 죽거나 피난을 떠나도

우리는 귀가 막혀 있습니다. 듣지 않습니다.

듣지 않으니, 당연히 말도 안 합니다. 혀도 굳은 것입니다.

 

더욱 최근에 가까운 중국에서, 1966년 문화혁명보다 더한 핍박이 일어나서

모든 교회의 십자가를 철거하고, 교회 간판을 다 떼고

모든 교회는 지하로 다시 들어가고, 교회 예배 때 공안이 와서 설교를 실시간 조사하고,

수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체포하고, 수감해도.. 우리는 듣지 않습니다.
말하지도 않습니다.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안 다니고 불신자처럼 살면 되는데,

그러면서도 주일날 되면 또 교회는 안 빠지고 다닙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 중국이란 이름의 아들이 감옥에 갔는데도

한국이아들은,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기도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냥 밥도 잘 먹고, 귀머거리처럼, 벙어리처럼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하늘을 우러러 + 탄식하시며 + 너희들은 제발 좀 귀가 열려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향하여 주님은 오늘도 하늘을 우러러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십니다.

에바다 너희는 열릴지어다!’

    

▲마지막으로 "성도들의 귀가 열리기를" 호소했던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 한 토막을 인용합니다. 

1960년 1월 10일에 전한 "애통하는 자와 그 복"이란 제목으로 설교 중에서

 

"여러분, 조용히 귀를 기울여서 우리 사회의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울음소리,

부모를 잃은 고아들의 울음소리,

남편을 잃은 여러 아내들의 울음소리,

실업자의 울음소리,

고학생(자기가 돈 벌어서 학비 대는 학생)들의 울음소리,

순진한 여성들이 악당의 유혹을 받아서 일생을 그르친 가련한 여성들의 울음소리,

이 울음 소리를 듣고 같이 애통하는 자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됩니까?

 

이 애통하는 울음소리가 문자 그대로 삼천리강산에 사무치건만

이 울음소리를 듣고 같이 애통하는 참된 정치가, 참된 실업가,

참된 공무원, 참된 사회사업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됩니까?

이렇게 볼 때에 우리 사회는 눈물 없는 사회가 아닌가,

이렇게도 탄식할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애통할 줄 모르는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받지 못합니다.

남의 눈물을 내 눈물로 알고 남의 설움을 내 설움으로 알아서

같이 십자가를 질줄 아는 민족만이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남의 죄를 애통하는 자에게 더욱 복이 있습니다."

 

..........................

 

 

참고, 다니엘의 에바다

10:16, 인자와 같은 이가 있어 내 입술을 만진지라

내가 곧 입을 열어 내 앞에 섰는 자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주여 이 이상을 인하여 근심이 내게 더하므로 내가 힘이 없어졌나이다.

 

예수님은 다니엘에게 다가오셔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 입술을 만진지라."

예수님은 다니엘의 입술을 만졌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가 곧 입을 열어."

다니엘은 입을 열어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벙어리 된 자에게 "에바다!"하시면서

입을 열어주셨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다니엘의 벙벙해진 입에 손을 대시면서

("에바다!"하시고는) 그의 입을 열게 해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