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절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P1 롬1:21~25 스크랩
존 파이퍼
※아래 설교를 영-한 자막으로 들어봐도 뭔 내용인지 도무지 파악하기 어려워서
(번역은 잘 되었으나, 내용이 사변적이라서)
한번 찬찬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잔 가지는 건너뛰었습니다.
▲시작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집회 둘째 날
또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과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바울은 말하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자기들의 목을 내놓았다’ 증거한 말씀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롬16:3~4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그처럼 저도, 누군가의 생명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또한 성경은 말씀하기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롬16:20
오 주님은 얼마나 선하신 우리의 목자이신지요!
오 평강의 하나님, 제가 이 시간 기도드립니다.
당신은 저희를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양떼의 대목자장이신 주님이시여
영원한 언약의 피로써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무장시키셔서
하나님의 모든 선한 뜻을 행하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하게 하소서.
주님은 모든 영광을 영원히 세세에 받으시옵소서..... 아멘!
◑은혜의 절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어제 설교를 잠시 복습하겠습니다.
어제 빌1:20절을 나누면서, 제가 강조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이번 사흘 집회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존귀함과 하나님의 영광이
십자가로 절정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제가 그 내용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지금 그것을 강조하려 합니다.
엡1:3절 이하의 본문에서
‘은혜의 영광이 그 영광 중에 최고점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The glory of grace is the apex(the highest point) of glory!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 glory of His grace 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예정되었습니다.
그 일이란 바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일’입니다. 엡1:6
여기서 '은혜의 영광'이란
이어지는 7절에 나오는데요,
그것은 은혜의 최고의 측면인 '죄사함'이요,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장 생생하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강력하고 충만하게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하시고 일하실 때
그 모든 영원 가운데 하나님 사역의 가장 중심에는
바로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사건)를 위해, 우주가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제 설교 주제였고, 우리가 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빌1:20~21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우주의 종말을 가져오는 대 사건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성취 이후로, 우주의 종말이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충만하게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영광이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것을 보았다’고
성경에 나옵니다. 요1:14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작은 글씨 녹음 안 함)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지금 나타나 보여지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가장 충만하고 가장 높은 ‘은혜의 영광’의 나타남은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라고 말씀하신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우주는 지금 그 순간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존재하고 운행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그 ‘(구원사역의) 완성, 즉 재림’을 위하여 운행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영원 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지나간 과거, 영원의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그 순간(골고다 십자가 사건)에 주의하지 않으셨던 적이 없습니다.
아래 구절을 보십시오.
딤후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and His purpose and grace which he gave us in Christ Jesus before the ages began.
이 말씀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온 정신이, 창세 전부터, 거기에 영원토록 집중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여러 생각을 품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항상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계획은, 그리스도가 은혜로운 분으로 존귀하게 되시고
그분 안에서 우리가 죄사함, 믿음, 구속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생각 속에 영원 전부터 있었습니다.
▲또 다른 구절을 보겠습니다.
제가 최근 몇 달 사이에 묵상하며 크게 감동받았던 구절이었습니다.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이것은 마지막 때의 모습입니다.
이 구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어린양의 생명책’이 나오고,
거기에 우리 신자들의 이름은 창세 전에 기록되었습니다. *before
그 책의 이름을 눈여겨 보십시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
그 책은 이 세상이 있기 전, 그러니 창세전부터 존재해 있었고,
우리 성도들의 이름도, 거기에 창세전부터 기록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book of life of the Lamb
slain before(헬, 아포) the foundation of the world.
*참고로, 우리 개역성경은 ‘창세 이후로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 로 설명하는데,
설교자는 ‘창세 전부터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로 해석합니다.
헬라어 전치사가 ‘아포 off’인데, 둘 다 해석이 가능합니다.
넓게 보면, 둘은 똑같은 의미입니다. ‘영원 전부터~’
그리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때가 되자, 마침내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그 계획하신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하나님의 목적의 중심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분명한 나타내셨는데요
그래서 우리가 그 분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요,
그 하나님의 영광의 정점 꼭지점은,
바로 그가 죽으신 순간, 즉 십자가에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창세 전부터 계획되어온 모든 것을요!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는 말은
‘나는 우주가 창조된 목적을 성취했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므로 우주가 창조된 목적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은혜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찬양의 대상이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의 영원한 찬양의 대상이 되실 것입니다.
엡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영원 속에서, 그 은혜의 영광의 깊이를 측량하며
영원을 보낼 것입니다.
즉 우리는 천국에서 ‘어린양의 노래, 어린양 찬양’을 영원토록 부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추하고 죄악된 날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죽임 당한 어린 양의 존귀함을 찬양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죽임당함을 영원히 노래할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찬양은 ‘어린양을 찬양’입니다.
계5:8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계5: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우리도 장차 천국에서
죽임당하신 어린양을 영원히 노래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모르고,
무슨 은혜로 어떤 은혜로 구원받았는지도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무슨 빚을 져서, 이 생명 영생을 얻었는지, 우리가 모를 것입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과
그의 은혜이 풍성함이
다른 어떤 곳보다
거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잘 집약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빌1:20~21절 말씀처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삶을 살아야’ 하고
또한 그것이 한 번 뿐인 내 인생을 가장 의미있게, 후회 없이 사는 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결국은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게 되는데요,
여러분 하루만 지나서 밤에 자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 날 여러분의 하루가 무의미했다면.. 그건 자신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이요,
만약 그 날 여러분의 하루가 감동적이었다면.. 그건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 인생을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아니고,
그건 하나의 부수효과이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하는 목적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그 분이 그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그 일이 창세전부터 영원히 계획된,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그렇게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며 살아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이번 집회의 주제인 ‘낭비되지 않는 삶 unwasted life’인데,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그래서 다 낭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타고난 본성은, 그리고 우리의 실제 삶은
그리스도를 가장 존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빌1:21참조
만약 깊은 변화(*radical conversion)가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마땅히 살아야 할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히 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빌1:20
▲우리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보다는,
‘다른 피조물’을 더욱 존귀히 하는 삶을 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부패성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부패성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있죠,
타락 depravity, 부패함 corruption, 타락 fallenness,
우리의 부패성, 전적 타락의 핵심은,
우리가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욱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롬1:25
They worshipped and served the creature more than the Creator!
‘더 좋아한다’ preferring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의 영광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우리 부패와 타락의 핵심 요인입니다.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인간적 매력, 물질적 풍요, 삶의 재미..
이런 것들을, 우리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보다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하나님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 악함의 본질적 핵심문제입니다.
▲우리는 종종 ‘율법을 어긴 것’을, 우리 부패성의 근본 문제라고 여기는데요,
저는 어릴 적부터 성경에서 ‘하라/ 하지 말라’고 명하신 계명들을
외적으로 지키는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환경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 율법/계명 준수의 문제가
우리 신앙을 내적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율법을 어긴 것, 이것도 문제이지만,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닙니다.
왜냐면 성경에 가장 큰 계명,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율법을 지키라’ 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당신은 하나님 그 분을 더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더 사랑하십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14:15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더 좋아하는 가?’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계명 준수라는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시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부패성을 정의할 때,
그건 ‘율법을 어기기 때문’이라고, 저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저 억지로, 외적으로 율법을 행한다면
그게 전적 타락, 인간의 부패성에서 해방된 게 아니고,
타락성과 부패성은 자기 속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렘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그때 상황 역시,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좋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좋아할 웅덩이를 파는 것입니다.
물을 가두지도 못할 웅덩이요.
요즘으로 말하면 이런 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맛보니.. 별로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합니다.
대신에 티비를 보니, 만족을 줍니다.
인터넷을 하니까, 만족을 줍니다.
그 외도 음식, 성관계, 친구, 결혼, 자녀, 돈, 명예, 성공이
자기에게 만족을 줍니다.
그 외에도 휴가, 여행, 더 넓은 마련하기, 멋진 자동차를 구하면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버리고,
물을 저축치도 못할 웅덩이를 계속 파고 또 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부패성이요, 전적 타락입니다.
타고난 본성이 그렇다는 것이요, 예수를 믿어도 이 본성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믿기 이전과 강도의 차이가 있겠지요.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자기 가족보다 더 우선해서 사랑해야 함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마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요3:19에도 인간의 부패성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성경은 ‘빛이 세상에 왔으나, 우리가 그 사실을 몰랐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빛이 왔으나, 우리가 그 빛을 좋아하지 않았다’ 라고 말씀합니다.
왜냐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죠!
제가 잘 사용하는 예화입니다.
어느 여인이 눈에 병이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물이 희미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명확히 보이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보니까 그의 양장 옷깃에 브로치가 달려있었습니다.
브로치가 반짝반짝 빛나는 윤기가 있었고, 촉감도 부드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녀는 어둠속에서, 그걸 ‘검은 보석 브로치’로 여기고
만지작 거리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강렬한 햇빛이, 어둠 속에 살던 그녀에게 환하게 비쳐졌습니다.
(그녀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복음으로 눈이 떠 져서
자기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옷깃을 내려다보니, 그건 보석이 달려있는 게 아니라
시커먼 바퀴벌레였습니다.
자기가 달고 있어서 정말 좋고 멋지다고 여겼던 그 브로치는
사실은 자기를 파괴하는 더러운 바퀴벌레 임이 밝혀졌습니다.
어둠 속에 있을 때는, 그것도 모르고 그걸 오히려 좋아했던 것입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할 때는요!
그 바퀴벌레를 오랜 세월동안 어루만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외모를 더 빛내주는 브로치라고 여기고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비춤 받고는,
그 바퀴벌레를 과감히 떼 내 버려야 합니다.
그걸 ‘성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합니다. 요3:19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사랑합니다. 롬1:25
여기엔 그저 외적 행동만 말하지 않습니다.
지성, 감성, 의지 모든 것이.. 우리는 하나님보다 여러 우상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타락성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기 우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거듭해서 죽이고, 또 죽여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보고 ‘자기를 죽은 자로 여기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명합니다.
자기가 구원 받았다고,
한 번 자기 육신을 죽였다고,
천국 해변에 당도할 때까지 아무 탈이 없는 게 아닙니다.
우상은 매일 우리를 엄습합니다.
우리는 매일 우상숭배자가 되거나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매일!
▲이 ‘인간의 부패성, 전적 타락성’과
‘하나님의 영광’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는 거야, 당연한 거죠.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입니다.
롬3:23절의 이유는 롬1:21~23입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바울이 말씀한 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죠? 3:23
사람들이 그것을 (엿바꿔 먹듯이) 팔아먹어버렸다는 것입니다. *traded, exchanged :23
*옛날에 못살 때, 동네 아이들이 엿장수 가위소리가 나면,
집에서 솥이나 남비 등을 쓸 수 있는 것도, 갖고 나와서 엿 바꿔 먹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23절의 이해를 돕기 위한 예화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물로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보물을 우리 각자가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부터, 그것을 팔아먹었으며
또한 우리들도, 그 다 팔아먹고 쬐끔 남은 그 형상, 그 형상의 그림자마저도
다 우상과 바꿔먹고,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다음 설교에서, 저는 우리가 바꿔먹고 팔아먹은 우상 20가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타락한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만 지적했는데,
그 어떤 해결책, 즉 복음에 대해서는 다음 설교를 들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