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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LNCK 2019. 3. 25. 20:43

www.youtube.com/watch?v=e_zrDuwRKuE&feature=youtu.be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9:30~32                여러 글 취합

    부제: 묻기도 두려운 질문 

    

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1)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는 막8:31~38인데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는 신앙고백 후에 비로소 십자가를 가르치셨으며

              ☞신앙고백 반드시 되어

 

2) 두 번째 수난 예고는 본문 막9:30~32이고,

  

3) 마지막 세 번째 수난 예고는 막10:32~34인데,

예루살렘 성에 거의 이르렀을 때, 십자가를 지시러 올라가시기 직전입니다.

 

 

 

▲질문이 그 사람의 수준

교사 또는 교수의 공통적인 말은

'질문이 그 학생의 수준을 나타내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질문 내용이나, 질문 수준을 들어보면, 그 학생의 학업성취도를 알 수 있다는 건데요.

 

지금 제자들의 질문 수준은, 아주 밑바닥입니다.

대신에 질문할 필요가 없는 것에 대해서, 도리어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는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고'   9:32

반면에 '서로 누가 크냐?' 를 서로 물으면서, 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34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오늘 내가 주님께 던지는 질문은 과연 어떤 것인가요?

우리는 각자 기도 시간에 많은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여쭙기도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관한 것입니까?

-아니면 본문의 제자들처럼, '누가 최고냐, 어떻게 수입이 많을까, 어떻게 편한 길을 갈까?'

내가 던지는 질문들을 통해서, 내 신앙 수준을 다시 한 번 가늠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묻기조차 두려운 질문

 

본문 해석의 키워드로 9:32 '그들이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왜 제자들은 묻기를 두려워했을까요?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예수님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면

두려운 마음이 들겠지만, 당시 십자가 형은 너무 끔찍한 형틀이었으니까요!

그래도 묻기조차 두려워할 필요가 없죠. 남의 일이니까요. 내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제자들이 '묻기도 두려워 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자기들하고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제자들이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많은 신자들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와는 아무 상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자기는 십자가를 질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기독교 신앙이 그저 단물만 주는,

    쓴 물은 예수님이 다 마셔버리셨고요..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부담없이 받아들이는데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이, 제자들의 십자가 수난과도 직결된다는 말씀이

1차 수난 예고 직후에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똑같은 말씀이 마태복음, 누가복음에도 다 나옵니다.  *마16:24, 9:23

공관복음에 다 나오니까,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겠죠.

 

세 번 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직후에 나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버림 받아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져야하는 십자가였죠!

 

    이 설교의 결론은,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신자가 구원을 못 얻는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막8:34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35에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자기 목숨>은.. 자기 영혼의 구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십자가에서 너희도 죽지 않으면, 너희가 살고자 하면.. 잃어버린다.

    구원을 못 받는다는 뜻입니다.

    자기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잃어버려야.. 구원한다 입니다.

 

 

◑'목숨'이 뭔가요?

 

여기서 '목숨'은 영어로 life 로 번역했는데                          *헬라어 '프쉬케'

영어 life 는 우리 말로 '삶, 인생, 생명, 목숨' 등으로 번역됩니다.

 

한글성경은 '목숨'으로 번역했는데, 그 1차적 의미는 '숨이 끊어져 죽는' 것을 뜻합니다.

육신의 죽음, 즉 병으로 죽거나 사고로 죽는 소천을 뜻하죠.

물론 성경에 나오는 '목숨'은 그보다 더 광범위한 뜻이 있습니다.

 

그럼 '혼 soul'은 또 뭐냐?

사람이 숨 쉬는 목숨만 가졌다면 짐승과 똑같죠.

그렇지만 사람은 목숨 말고도, 지, 정, 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숨 + 지 정 의를 가진 인격체' ... 이게 바로 '혼'이요,

'자연인'으로 번역할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 믿어서 구원 받기 전의 상태인 거죠.

 

그래서 십자가를 져야..

곧 '자기'를 영원히 살리는 것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자기'가 구원 받지 못한다고 하니.. 제자들이 얼굴이 노랗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십자가'를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당시에 제자들은 아마 상당히 끔찍히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 형틀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뭐, 우리도 다 자기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그걸 지고 사형장으로 올라가라고?

그래야 구원받는다고?'

   

▲다시 한 번 주제로 돌아가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기점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가르칩니다.

    

그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세 차례나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같은 '인류 구속의 십자가'는 질 필요 없지만,

자기 십자가를 져야 된다... 그래야 너희 영혼을 구원한다.. 를 예수님은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수난과 부활 예고를 거듭 듣고도, 거기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에 누가 가장 높은지에 대하여 말다툼을 합니다.

 

 

◑적용

 

▲'자기 목숨'을 버리면 얻는다.. 에서 '목숨'이란?

우리 각자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게 있습니다.

 

1) 숨 쉬는 목숨.. 그건 건강이죠. 늙으면 건강(목숨)을 정말 목숨 걸고 사랑합니다.

 

2) 젊은 청년 때는 '애인' .. 이걸 목숨처럼 사랑하는 청년들이 있죠.

남자 청년도 애인을 사랑해서, 군대에서 애인이 변심하면 탈영이나 자살도 불사합니다.

여자 청년도 애인을 사랑하면, 전화기를 늘 손에 쥐고 계속 안절부절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은.. 그걸 버리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현재적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안정된 삶이며

미래적 구원은.. 영원한 천국 영생인데, 둘은 하나입니다. 연장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즉 현재적 구원을 받는 사람이, 미래적 구원도 받습니다. 못 받으면 못 받습니다 vice versa

 

 

3) 중년 때는 주부에게는 '자녀'

중년남성 에게는 '사업, 성공' .. 이게 자기 '목숨'이죠. 목숨 걸고 전념합니다.

자기 '돈'일수도 있습니다.

 

요즘 우스개소리로 들리는 말은 '돈에는 부모도 형제도 없다'는 말입니다.

'돈이 피보다 진하다'는 말도 하는데요... 그게 '자기 목숨'이란 말이죠.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자아의 죽음을 택하라..

그래서 '너는 자식 우상이나 애인 우상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고 했을 때

우리는 이 질문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본문의 제자들처럼

그런 것은 '묻기도 두려워 하거나' 아니면 '아예 거기는 안 쳐다보고

외면해버리고, 다른 것을 쳐다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구원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막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추구, 보호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오늘 우리는, 본문의 제자들처럼, 내가 져야할 십자가를 곰곰히 묵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묻기도 두려워하거나, 아예 다른 것을 쳐다보고 있습니까?

 

        

 

 

▲‘차라리 모르는 것이 좋다는 식의 제자들

 

오늘 얘기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가로질러 가시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주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이고,

이 가르침은 당신의 미래와 관련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승, 주님은 너무도 중요한 가르침을 주시고자 하시는데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고 묻지도 않습니다.

 

목회자가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제자양육을 할 때도

어떤 것은 성도님들이 잘 알아듣는데,

어떤 내용은 성도님들이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설교자가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아직 알아들을 수 없어서 못 알아듣는 것과

알아듣고 싶지 않아서 못 알아듣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아직 알아들을 수 없어서 못 알아듣는 것은

제가 이해를 해줘야 하고

알아들을 수 있도록 더 노력을 해야 하며 기다릴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알아듣고 싶지 않아서 못 알아듣는 것은 이와 다릅니다.

 

그런데 알아듣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언뜻 생각하면 알아듣지 못하면 답답하고

그래서 우리는 알아들으려고 애를 쓸 거라 생각하지만

 

우리는 상당히 많이 알면서도 모른 체하거나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것이 영 꺼림칙하면

아예 알고 싶지가 않고 알아들으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다.

 

본문의 제자들이 바로 그러했지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듣지 못했는데

문제는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는 겁니다.

 

그 다음 장면을 보면 

주님은 천국 여정과 당신이 죽게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누가 첫째가는지를 논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싫은 것,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애써 외면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무의식적인 절연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말은 입에도 담지 말라고 하고 그런 것은 생각지도 말라고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의식에 올라오지도 않도록 무의적으로 그 생각을 자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주님께서 나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데,

듣고도 못들은 척하지는 않는지.. 사실 성경에 그런 말씀이 많습니다.

소위 '내가 건너 뛰는 말씀!'

 

알고도 모르는 척하지는 않는지,

내가 아니라 남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고의적으로 외면하지는 않는지,

이런 것들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오늘이 되기 바랍니다.

 

기대, 각오  

미래를 대비하는 마음가짐에 대한 것으로서

하나는 <기대>이고, 다른 하나는 <각오>입니다.

 

<기대>는 선, 곧 좋은 것이 있을 거라는 마음가짐이고,

<각오>는 악, 곧 나쁜 것이 올 것을 대비하는 마음가짐인데

그런데 그 결과가 아주 큰 차이,

그야말로 천양지차天壤之差입니다.

 

한 번 그 차이를 보겠습니다.

(좋은) 기대를 했는데 기대와 정반대의 결과가 나옵니다.

 

반대로 최악을 각오를 하면 그 결과는 어떨까요?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이미 그것을 각오했기에

허둥대지 않고 침착할 거고,

 

최악이 아니고 차악의 결과만 나와도 다행이라고 할 것이며,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오면 너무도 기쁘고 행복해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몸이 안 좋아 병원을 찾았더니 암이 의심된다는 말을 듣고

최악의 상황을, 그러니까 말기 암을 각오하였는데

전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면 날듯이 기쁘고 너무도 행복할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일에도 최악을 각오하면 불행을 잘 관리하고

행복을 잘 살아갈 수 있는데

 

신앙적인 일에 신앙적으로 각오를 하면

더더욱 인생을 잘 살아갈 뿐만 아니라 영생을 잘 살아가게 되겠지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는 기대는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고

반대로 안 좋은 것을 각오해야 하고

 

하나님의 더 큰 일을 하려고 하면

인간적으로는 최악을 각오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그런 의미에서 신앙 목표로 상정해 두는 거죠.

그러면 만사가 (어떤 의미로) 편해진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악을 각오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선을 기대하며,

더 지혜로운 사람은 늘 최악을 각오하고

더 어리석은 사람은 늘 최선을 기대하지요.

 

 

 

 

 

 

 

 

 

  ..........................

 

 

 

묻기도 두려운 질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기점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본격적으로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세 차례나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수난과 부활 예고를 거듭 듣고도,

누가 가장 높은지에 대하여 말다툼을 합니다.

 

제자들은 수난 없는 부활, 시련 없는 행복과 기쁨만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세상의 길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였고,

아직은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지 못한 채,

자신들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합니다.

 

예수님의 기준과 시각으로 자신을 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눈으로 그분을 따르려 한 것이지요.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습니다.”(9:32)

 

그들은 사랑에 젖어들기보다는 자기 생각과 욕구에 몰두해 있었기에

두려움이 앞섰을 것입니다.

 

메시아이신 분이 수난 당하시고 죽으시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만한 믿음과 사랑이 없어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 그 중에서 제자들의 태도와 관련한 묘사는

우리 자신과도 관련시켜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