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막9:38-40 모두 스크랩 글
우리보다 나은 사람
막9: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in thy name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본문 해석
▲'예수님'인가, '우리'인가?
앞 장면 막9:14~29 에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믿음과 기도가 부족함을 질책 당한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참으로 옹졸한 태도를 보입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 :38
여기에서, 요한은 ‘우리’라는 말을 4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보았고, *we
그는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고, *us
‘우리’는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we
왜냐면 그는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요. *us
38절 한 구절에서 ‘우리’를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개교회주의’나 ‘개교단주의’에 빗댈 수 있겠습니다.)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공동체에 속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양떼>들인 것이지,
<‘우리’의 양떼>가 아닌 것입니다.
공동체의 유일한 목자는 그리스도이시고,
나머지 우리 모두는 그분의 양떼일 뿐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속해 있는 이유는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서이지,
‘나’ 혹은 ‘우리’를 따르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공동체에서 ‘우리’가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고,
금방 분열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공동체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를) 막지 마라.” :39
이렇게 말하면 ‘차별주의’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나
후진국에 갈수록 ‘교단/교파 국수주의’가 쎈 것 같습니다.
선진국에 갈수록 ‘교단/교파주의’ 장벽이 낮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앞 구절에서,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37
라고 하시면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셨습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나’를 혹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가? 입니다.
교회는 항상 열려 있도록 요청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만을 혹은 ‘저희’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고후5:15
교회는 독점되어서도 안 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오니,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제가 도와주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모세 때 모세의 영을 70원로에게 나누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70원로에 속하지 않은 엘닷과 메닷이란 사람도 영을 받아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와서 모세에게 말합니다.
“엘닷과 메닷이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모세여,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즉 예언을 하고 있는 엘닷과 메닷이란 사람에게 문제가 아니고,
그들을 시기하는 여호수아가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자신의 문제를 남의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모순되는 말씀
그런데 눅11:23에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gather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scatter 자니라”
라는 말씀 있습니다.
이런 모순되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막9:40과 눅11:23은 맥락이 다르다.
막9:40은 제자들의 태도를 일컬어서 말씀하신 것이고,
눅11:23은 바알세불과 예수님을 한통속으로 매도하지 말라는 지적이십니다.
마가복음에서 그는(낯선 사람)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고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난입니다.
당연한 말씀이죠.
맥락을 자르고 그 구절만 떼서 보면 모순이지만,
문맥으로 보면 당연한 말씀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보다 나은 사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막9:40
여기서 '위하는' 이 헬라어로 휘페르 ὑπέρ 인데 *영어성경에 for 또는 on으로 번역
이 단어는 above, hyper (더 위에) 로도 번역됩니다. 원래 전치사가 여러 뜻으로 번역되죠.
헬라어로 휘페르 ὑπέρ 가 above(위에) 뜻으로 번역된 구절이 마10:24절입니다. ↙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휘페르) 못하고,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휘페르) 못하나니'
그렇게 above로 번역해서 본문을 보면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보다 위의 사람이니라'
즉 '우리 보다 수준이 높은 자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해석을 하는가 하면,
지금 제자들은 다분히 '시기, 질투'하는 상황입니다.
앞서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으나 9:17~29
예수님의 제자 그룹이 아니면서도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면서 9:38
제자들이 그것을 금하였다는 것은,
그 속에 다분히 '시기, 질투'도 포함되어 있는 상황이지요.
그때 예수님의 반응은
'우리를 위하는 for 자니라' ... 그 사람이나 제자들이나 똑같은 수준이 되지만
'우리보다 나은 above 자니라' ... 상대방을 더 추켜세워주는 워딩을, 예수님이 구사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교파장벽주의, 신학적 정통주의 등으로
타교파, 타신학 사람을 무시하고 깎아내리기 쉽지만
본문에서 예수님의 입장은,
그저 '동등하게' 대우하라.. 가 아니라
'더 존중하라'.. 입니다.
이것이 성경 또는 예수님의 평소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눅22:37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23:11
이렇게 예수님은 상대방을 동등하게 대하라가 아니라,
평소에 상대방을 나보다 더 존중하라, 높이라는 식으로 말씀을 가르치시고
몸소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날 때, 항상 여분의 비상금을 준비합니다.
그 이유는 항상 경비를 지출하다보면 예상한 금액보다
더 많이 쓰게 되기가 일쑤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원리로 볼때, 우리 편에 속하지 않은 상대방을 대할 때도
내 마음가짐의 밑천을 좀 두둑히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상대방을 동등하게 대한다고 하면.. 사실 무시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무시하지 않으려면, 여행에서 비상금을 두둑히 준비하듯이
상대편 그룹의 사람을 '나보다 더 낫다'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라고 빌2:3절에 말씀하셨잖아요
그를 더 존중하는 태도를 견지할 때...
결과적으로 상대편을 무시하지 않게 됩니다.
상대방을 그저 동등하게 대한다고 하면
실제로는 까딱 잘못해서 무시하기가 쉽습니다.
마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휘페르)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휘페르)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본문에 이어지는 구절은 이렇게 나옵니다
막9: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본문과 같은 흐름입니다.
상대방을 소자로 깔보거나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대방 그룹을 무시해서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까지 심하게 말씀하십니다.
비록 우리 그룹에 속하지 않았다고 해서, 무시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 그룹보다 "더 존중하라"는 말씀이지요.
◑적용
▲세계 기독교는 크게 4대 교단으로 나눕니다.
개신교 Protestant, 가톨릭 Roman Catholic,
성공회 Anglican, (그리스/러시아) 정교 Orthodox Church입니다.
그런데 해외 경험이 많은 분들의 말에 의하면
개신교에 알곡과 가라지가 있듯이
가톨릭, 성공회, 정교회에도 똑같이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교파, 교단에 독실한 신자들도 있고, 명목상의 신자들도 있습니다.
분포 비율은 좀 다를 수 있겠지요.
한국 개신교인들이 가톨릭이 주류인 나라에 가서 놀라는 것은
거기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 독실한 신자가 있음을 볼 때 입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자체적인 부흥운동, 성령운동, 갱신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음도 봅니다. 일종의 자체적 종교개혁 운동이죠.
또한 1965~2002년까지 한국기독교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대천덕 신부님도 *Reuben Archer Torrey Ⅲ
영국 성공회 신부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1517년까지, 즉 1세기에서 16세기까지는 기독교가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개신교가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성경적 신학적 전통’을 계승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른 교파를 ‘형제교회’로 인정하는 가운데
복음선교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서로 동역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개신교회가 가톨릭이나 또는 타종교와 교제하는 것을 끔찍이
터부시합니다. 개탄하며 가슴을 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해외를 가 보신 분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정말 축복 받은 것 중 한 가지가
‘종교전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1990년경 코소보 사태에서 보듯이 유고슬라비아가 결국은
종교로 처참한 내전을 겪었고, 결국 갈갈이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중동에서의 종교전쟁은 2천년 역사를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슬람을 박해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11~13세기 십자군 전쟁 때!
지금도 중동에선 종교전쟁이 최근까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도 결국은 종교문제로 분리되었고
국경인 카슈미르 지역은 세계적 화약고, 분쟁지역으로 꼽힙니다.
아프리카에서도 기독교와 이슬람간의 종교전쟁은
종족간 전쟁으로 알려지기도 하는데, 결국은 종교전쟁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말살시키려고 하는 인종청소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종교전쟁이 없다는 것은, 천만다행이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한반도와 전세계에서 종교전쟁은 피해야 합니다.
종교전쟁은.. 사람들이 자기 종교적 신념으로 목숨걸고 싸우거든요.
한 발의 양보나 물러섬이 없습니다. 결사적입니다!
그래서 세계평화를 위해서
종교지도자들이 서로 인사 나누고, 친목하는 모습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민한 이슈에 더 이상의 논쟁은 피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의 그 의견도 존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