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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하지 말라

LNCK 2019. 4. 11. 20:14

 

살인하지 말라                       마5:20~22                     19.01.27.스크랩, 녹취

                                                                      *원제목 : '더 나은 의'(2) 


◑본문 해석

 

마5:20~끝절인 48절까지

예수님은 6가지의 구체적 상황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서

더 나은 의가 어떻게 나은 것인지 설명하십니다.

 

살인, 간음, 이혼, 헛맹세, 악한 자 대적 말고, 이웃 사랑 등의

여섯 번에 걸쳐 예수님은 똑같은 어귀를 반복하시는데

 

이렇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하기를 ~~라고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마5:21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에 씌어있기를 이렇게 이렇게 되어있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율법을 구약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성경 두루마리 책도 흔하지 않았고요.

그걸 개인적으로 구입하려면 상당히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대개는 회당에 하나 비치해놓고

안식일에 모여 예배드릴 때

한 사람이 읽어주면 그걸 듣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기에 유대교 신자들 대부분은

그냥 들어 아는 대로 믿은 것이죠.

그러니 율법에 대한 지식이 정확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인들도 성경지식이 정확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미국인들이 성경말씀이 아닌 것을 성경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몇 개 있는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들이 성경에 있다고 알고 있답니다.

 

이렇듯 성경을 제대로 한 번도 읽어보지도 않고

자신을 좋은 신앙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고,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실은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전해 들은 대로, 전해 받은 대로 믿고 살았던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그 전해 들은 대로 믿고 사는 그것 중에

첫 번째 예를 드는데 이렇습니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21

 

여기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 중 6번째 계명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은

십계명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후대에 전해져 내려오면서 붙여진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어느 구절을 구체적으로 인용하신 것이 아니라

살인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전해 들은 말씀을 얘기하신 것이죠.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이 말은 아주 도발적인 표현입니다.

 

모세와 그 이후에 전해져 온 수백년의 전통에 대해서

자신을 마주 세우는 것이죠.

 

만일 제가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됩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아마 여러분은

제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과 같은 레벨의 존재로

제 자신을 추켜세웠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거기에 있었다면

예수님이 더 말씀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소동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이 말은, ‘모세와 그 이후에 이어진 유대교의 그 수백년의 전통에 대해서

내가 그 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2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5: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1) 성내는 사람

<새번역>에서 성내다로 번역했는데

<개역개정>노하다가 더 좋은 번역으로 여겨집니다.

 

성내다로 번역하면

일시적으로 성질 tempter을 내는, 확 터트리는 것을 뜻하기 쉬운데

지금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분노를 마음에 품고 있다가 그걸 표출하는 것을 뜻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2)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여기서 얼간이는 원어 아람어 욕설 라카입니다.

이 아람어를 제대로 번역하려면

목을 긁어서 가래침을 뱉을 때 나오는 소리입니다. 의성어죠.

우리말로 카학쯤 돼죠.

 

그리니까 마치 상대방에게 가래침을 뱉고 싶은 심정으로

말하는 것이죠. 아주 강도가 센 욕설입니다.

그 말을 거룩한 성경에 그런 심한 말을 쓸 수 없으니까

얼간이로 순화해서 쓴 것이죠.

 

3)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바보는 헬라어로 모래인데

지능이나 능력이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인간으로서 결함이 있다는 욕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바보는 욕도 아닙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극혐이라는 말을 잘 씁니다. *극도로 혐오스럽다

정말 쉽게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립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걸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다른 사람에 대해 가지는 악한 감정이

살인의 뿌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인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쌓여있는 분노가 점점 커져서

살인이 나오는 것이죠.

 

얼마 전 한국에서 우울증 치료로 존경받던 정신과 의사가

자기가 치료하던 우울증 환자에게 살해당하는 가슴아픈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이 의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그가 분노를 쌓아왔던 것이죠.

이 사건은 오늘날 분노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많은 예 중의 하나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인간으로서의 절대적인 가치를 부인하는 것도 역시

살인의 원인이 됩니다.

 

라카라는 욕은 너는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래(바보)’너는 인간으로서 함량미달이야입니다.

 

이 두 욕 모두 상대방의 존재가치를 부정하고 인격을 모독하는 발언입니다.

이렇듯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심을 망각하면

살인은 너무도 쉬운 일이 되고 맙니다.

 

게다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혹은 이 사회에 해로운 존재라고 규정을 하게 되면

살인은 끔찍한 범죄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될 일인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저는 작년 가을에 독일을 방문했다가

히틀러 나치 정권이 세운 첫 번째 집단수용소인

다카우 수용소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히틀러 정권의 그 무자비한 만행과 학살은 참으로 공포스러웠습니다.

저희가 거기 방문한 날이 하필 날씨가 좋지 않기도 했지만

그 수용소 자리에서 과거 그 때 기억을 생각하면, 정말 끔찍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지도 모르는 개스실 중간에 서 있는데

치가 떨렸습니다.

거기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옮겨서 불태우는 화장터를 둘러보고는

차마 숨을 제대로 쉬기가 어려웠습니다.

 

히틀러와 그 수하들은 어떻게 이런 끔찍한 야만적인 행위를

계속할 수 있었을까요?

그 당시에 독일 국민들은 어떻게 이 야만적인 광기의 정책에

동조할 수 있었을까요?

 

히틀러 정권이 유대인 같은 소수민족들과 동성애자들 같은 소수자들을

존재가치가 없는 사람들, 혹은 이 사회에 암적인 존재들로 규정하고

선전선동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이토록 위험하고, 무서운 일입니다.

(살인을 서슴지 않게 됩니다. 아무 죄책감도 없이)

거기에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지는 분노까지 합세하면

광기가 발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훌륭한 교육을 받은 의사와 과학자들이

거기에 수용된 사람들을 산 채로 의학실험을 했던 기록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들이 그런 산 채로 생체실험을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 유대인의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놀라운 일은

히틀러의 정신을 회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독일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특정한 사람들의 존재가치를 부정하거나

사회악으로 규정하는 야만적인 경향이

미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과거의 세계 1, 2차 세계대전 같은 야만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극단주의적 테러리스트뿐만 아니라

미국, 필리핀, 브라질, 독일에서 또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 (민간인에 대한 테러) 경향이 점점 거세지고 있습니다.

 

그 잔인무도한 살육은 결국 한 인간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경향은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도 (작으나마) 있다는 것입니다.

 

2.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악한 감정과 언행 자체가

살인과 다를 바 없는 해를 끼치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굳이 살인까지 비화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하거나

그 사람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말과 행실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즘 인격살인혹은 영혼살인이라는 말을 붙여 부릅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동안 살아오면서

누군가로부터 잊을 수 없는 분노의 눈빛, 이런 것을 받아보셨을 것입니다.

 

-그 살기어린 눈빛

-혹은 벌레보는 듯한 눈길이

자기 기억 속에 남아있어서

잊을만 하면 다시 생각이 나서

그 과거의 고통을 현재화 시키는 그런 경험!

여러분도 한 번쯤은 해 보았을 것입니다.

 

분노를 담은 말은 더욱 그렇습니다.

분노가 내면에서 일어날 때

이를 꽉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참아야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억울한 일을 당해서 분노와 울화가 치밀어오른 상황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내 입술 언저리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 앞에는 문지기를 세워주십시오141:3

 

다윗은 분노에 사로잡혀 하는 말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경험했던 것이죠.

자신도 그런 날카로운 말을 다른 사람에게 했던 적도, 들었던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분노의 상황에 처해서 말로 실수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이렇게 절절하게 기도한 것이죠.

 

바울사도 역시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분노를 계속 품지 말아야

에베소서 4:26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분노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분노를 마음에 품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삐뚤어진 마음은 누군가를 미워하고

분노를 계속 자기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을

은연 중에 즐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 분노가 나를 삼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나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던 악을

내 속에서 끌어냅니다.

 

그렇기에 분노를 품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해가 지기 전에, 그 분노를 어떻게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속에 쌓아둔 분노가 너무 오래동안 단단히 뭉쳐있어서

그 뿌리가 너무 깊어서

해결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미워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도 있어요.

누구든 걸리기만 해봐라는 심정으로 살다가

빌미가 주어지면 그에게 분노를 쏟아버립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런 사람 한 둘은 만났을 겁니다.

아직 한 번도 못 만났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예상하십시오.

내가 그 사람에게 행한 잘못은 1인데,

그 사람은 100정도의 분노를 쏟아붓는 일이 일어나는 거죠.

 

그럴 때면, 그 분노로 그 사람에게 맞대응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 마련이죠.

하지만 그렇게 맞대응하면, 그 사람에게서 더 크고 흉한 분노를 끌어낼 뿐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그냥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혜롭습니다.

 

그는 자기 속에 뭉쳐있는 분노로 인해

누군가를 미워하고, 그에게 쏟아붓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불쌍한 상황입니까.

 

그런데 그 사람 자신은, 자신이 그런 상황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그 응어리진 분노를 풀어낼 수 있는데,

그럴 용기가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평생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살면서

곁에 있는 사람들을 찌르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억울해도 그냥 당해 줄만 합니다.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물론 쉽지 않습니다. 당한 만큼 갚아주고 싶지요.

그게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지옥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맞대응하는 것은, 그 사람이 사는 지옥에

내 발을 같이 담그는 일입니다.

내 발을 담궈서 그를 지옥으로부터 끌어내는 능력이 내게 있다면 상관없지만

그와 함께 그 지옥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모든 인간은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절대적인 가치로 대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이 믿음은 기독교 신앙에서 나왔죠.

무신론적인 사고방식에서는, 즉 신을 부정하면

인간을 동물과 다르게 취급해야 할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3가지 점에서 인간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합니다.

그것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삼위일체적 근거라고 부릅니다.

모든 사람이 존귀한 이유입니다.

 

1) 사람은 누구나 성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2) 성자 예수님이 그 사람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셨다.

3) 성령께서 그 사람과 함께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이 세 가지 조건이 다 충족되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1)번과 2)번만 충족되었습니다.

다만 자기가 인정하지 않을 뿐이죠.

자기가 인정하지 않아도 그 사실은 변치 않습니다.

 

그렇기에 믿는 사람이든/믿지 않는 사람이든

절대적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존귀합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서 너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라고 모욕을 주거나

너는 인간이 되기에는 함량이 부족해라고 무시한다면

그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과 그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언행입니다.

 

만일 누가 여러분의 자녀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시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눈빛이나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누군가를 비참하게 만들 때

그를 지으신 성부 하나님과 그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일에 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목숨을 끊어야만 살인이 아닙니다.

목숨은 살아있어도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살인입니다.

 


chargable offence (법에 고소할 만한 건수)

 

5:21."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22.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율법과 유대전통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것은 재판에 넘겨져야 할 중대한 사안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퍼붓는다고 해서

재판에 넘겨지지는 않습니다.

혹은 다른 사람의 자존감을 심하게 상처내는 그런 말이나 행동을 했다고 해서

누가 법적으로 잡아가지도 않습니다. *유대사회 법

만일 그렇게 했다면, 모두가 잡혀갈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분노를 퍼붓고 욕설로 모욕을 주고

그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말과 행동도 역시

죄라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 율법에 재판에 넘기도록 규정하지 않고 있다고 해서

그런 행동은 해도 된다고 .. 오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chargable offence 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에 고소할만한 정도의 건수를 뜻합니다.

 

   율법은 분노하는 것, 욕하는 것을 chargable offence 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것도 chargable offence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너무도 타락해서

   그런 것까지 다 모두 법으로 재제하면

   지구 전체가 교도소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까지는 charge 하지 않겠다고, 법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우리가 죄가 아닌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지는 모든 악의

다른 사람에게 던지는 모든 악한 눈빛

다른 사람에게 던지는 모든 악한 말과 행동,

그것 모두가 다 죄인줄 알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이 모든 것을 묵인해주기로 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여전히 그게 죄라는 것이죠.

 

이 말씀에 대해서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좀 과하다, 말이 지나치다, 우리보고 어쩌라고?’라고 생각하시죠?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1) 우리가 원래 이런 정도로 살도록 지어진 존재들이 아닌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우리 생각이, 이 세상에서 보고 듣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인간은 당연히 그런 존재라고 우리는 포기하고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간이 그런 수준으로 살도록 지어진 존재들이 아니다를 말씀하십니다.

 

2) 또 하나는 우리가 그런 데서 벗어나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가 부활에 참여할 때, 우리는 온전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만

 

이 땅에서 현재 살아가는 동안 믿음 안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변화를 통해서

우리는 그렇게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결코 완성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순간순간 우리는

온전히 거룩한 상태가 될 수 있지만

그 상태로 항상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우리가 참여할 때나 가능합니다.

지금 이곳에 사는 동안 우리는

정말 늘 성령충만을 살려고 해도 때로는 넘어지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분노에 사로잡히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절대적 가치를 망각하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죄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일로 인해, 우리를 잡으러 오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그렇게 넘어질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스스로 자기를 고발하며, 회개해야 됩니다.

 

그럴 때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새로 빚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점점 더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 앞에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되시기 바랍니다.

 

특히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얼음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거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타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며,

본문처럼 라가나 바보라고 경멸한 적은 없습니까?

분노와 무시의 말을 던진 적은 없습니까?

낯선 이들은 물론이요 특히 가까운 식구들에게 그리한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 회개하십시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창조하신 우리 이웃을 너무 하찮은 존재로 무시한 것에 대해서

그럴 어떤 존재로 변화시킬지를 소망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회개하십시다.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이 지으신 절대적인 존재로,

예수께서 생명을 드리고 사신 거룩한 존재로

성령께서 거하시기 원하시는 성전으로 대하도록

성령님의 도움을 의지하십시다. 그 첫걸음은 바로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더 나은 의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