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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

LNCK 2019. 4. 23. 19:29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        마5:20              19.01.20  출처

 

예수님은 산상수훈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가장 경건했던 유대교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율법학자는 주로 바리새인들 가운데서

율법에 대해서 아주 전문적인 훈련을 잘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세밀하게 연구하고 철저하게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원했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이들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제자들은 기겁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보다

더 치열하게, 더 세심하게, 더 꼼꼼하게, 더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이 말씀을 제가 묵상하는 중에

제게는 몇 년 전에 방문했던 예루살렘 통곡의 벽

그 옆에서 보았던 유대교인들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은 통곡의 벽 옆에 마련된 좁은 쉘터에서

식음을 전폐하고는, 그 돌벽에 자기 머리를 찧어가면서

율법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몇 주간 동안 계속 그런다고 하고요,

어떤 사람은 몇 달 동안 계속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 율법에 대한 열심에 있어서는 이 사람들을 넘어서긴 힘들겠다

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추구했던 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들이 추구했던 의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서 쌓아올리는 의였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의를 쌓아올려서

하나님의 커트라인을 넘어서려고 애쓰는 것이지요.

 

반면에 예수님이 제시하신 의는 뭡니까?

우리는 이미 팔복에서 에 대해 충분히 살펴보았습니다.

 

이 팔복의 네 번째와 여덟 번째에서 예수님은

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 첫 번째 말씀에서

우리의 존재 상태의 올바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잡히고,

그로 인해 온갖 부정한 것이 들끓던 나의 내면이 정화되고,

 

그 결과로 내가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로 잡히는

이런 내 존재의 모든 상태가 올바라 지는 것이

팔복 4번째 의입니다.

다른 말로 내면적인 의입니다. *Righteousness

 

팔복 8번째 의란,

사회적인 올바름입니다. *Justice

 

내 존재 상태가 올바르게 됨으로 인해서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올바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 세상이 뒤죽박죽 된 것을

어떻게 하든지 바로 잡기 위해서 애 쓰는 것,

그것이 제자들이 행할 입니다.

 

비유하자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는 의는

병든 나무를 잘 가꾸어서

어떻게 하든지 그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자는 것이었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나무의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가 추구할 의는,

먼저 나무의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 병을 고치는 길을 예수님이 열어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의 열매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열매보다 더 나을 수 있는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본문 마5:20절에 근거해서

믿음으로서가 아니라,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습니다.

 

얼른 보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제자들의 의가 더 나아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은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된

믿음 안에서 얻는 의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믿음을 낳는 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리적인 믿음,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먼저 우리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말과 행실 전체를 변화시키는

그런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국뉴스에 보면 기업인들의 비인격적인 행실과

직원들에 대한 갑질이 가끔 보도되는데요.

얼마 전에도 한 기업대표의 폭언, 폭행, 부도덕한 취미생활이 보도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신자라는 소문이 들립니다.

아마 교회에서 그의 사업장에서 축복예배도 드렸겠지요.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이렇게 생활 따로, 신앙 따로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믿음에 있어서 성숙해져야 하겠습니다.

제대로, 진짜로 예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은,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의로 옷 입고

그리고 내면이 거룩해지고

그 내면적 거룩함이 겉으로 말과 행실로 통해 열매를 맺는

그런 진정한 믿음이어야 하겠습니다.

 

의를 낳는 믿음에 대한

진실한 열망이 없다면

괜히 교회 다니면서, 교회 욕먹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고.. 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해서

우리 교회 모든 분들에게 제가 호소드립니다.

 

이번에 산상설교의 말씀을

하나씩, 하나씩 정말 일일이 씹어먹어가면서

제대로 믿도록 힘써 보십시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 모두도 부족하고 허물 많습니다.

그러니 겸손히 마음을 내려놓고

믿음의 방향, 신앙생활의 방향을 제대로 잡으십시다.

 

우리 안에 임한 하나님의 의

결국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제대로 믿어보자는 뜻입니다. 성령님의 인도 아래서요!

 

우리 교인중에는

하나님 믿어서 내가 이렇게 축복 받았다!’

이런 간증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물질적인 축복은

믿음의 잣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덤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 가지고 내 믿음이 제대로 된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교인들은

믿음이 낳은 의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받아서 의롭게 살고자,

변화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가진 의

내 안에 있는지를 늘 살피면서

 

혹시 내게 간증한 일이 있다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바꾸어 주셨다고!’

그렇게 간증할 수 있는

그런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변화가

우리 안에 더 깊이, 더 진실하게, 더 뜨겁게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모하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품어 안으십시다.

 

그 분이 아니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아니면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투성이인 것을!

 

내가 결단해서 할 수 있나요?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녹이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교회를 이 자리에 세워주신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 구원하시는 능력,

그리고 그 의를 낳는(생산하는) 믿음의 능력을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해, 이 교회를 통해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 가지고, 이런 마음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

 

 

▲설교 중간에 나오는 부분

두 주간 전에 저는 며칠 동안 기도원에 가 있었습니다.

제가 참 자주 찾는 기도원인데요

그곳에는 아주 작은 기도실들이 있습니다.

 

그 속에 홀로 앉아 있으면 하나님의 임재가 금방 느껴집니다.

우리 이 예배당도 마찬가지인데요

여러분, 낮에 텅 비어있을 때

밤에도 좋습니다.

 

지나가시다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예배당에 들어오셔서

너무 늦은 시간에는 문이 잠깁니다.

 

오셔서 텅 빈 예배당에 한 번 혼자 앉아서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앉는 즉시 하나님의 임재가 깊이 느껴질 것입니다.

 

제가 자주 가는 그 기도원에

그 기도실에 앉아 있으면

하나님의 임재가 그렇게 가까이 느껴집니다.

 

둘째 날 오후에 그곳에 홀로 앉아서 기도하면서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제가 주님!’ 하고 속삭이듯 불렀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훅 하고 들어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온 우주에 주인이신 위대하신 주님을

내가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친밀하게 친근하게 옆에 계신 것처럼

부를 수 있지?’

 

그러고 나서 한참 동안 그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신비입니다.

도무지 머리로는 생각이 안 되는,

해독이 안 되는 신비입니다.

 

체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 분은, 자신을 열고 초청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통해 오셔서

주님이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삶 전체를 온전히 다스리기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우리의 인격적인 응답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주권을 내어드리는만큼

그분은 다가오셔서 나를 그만큼 다스리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