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길 마5:17~48 19.03.24.출처
우리는 지난 몇주일동안 더 나은 의라는 제목으로 마태복음 5장 17절부터48절까지
말씀을 하나씩 묵상해 왔습니다.
그동안 이말씀을 들으시면서 여러분 어떻게 느끼셨나요?
은혜 많이 받으셨나요?
지난주에 속장 사랑방에서 속장님 한 분이 그러십니다.
'요즘 목사님 설교 때문에 아주 괴롭습니다.'
목사인 저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그리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거듭거듭 '너는 함량미달이다 너는 불합격이다'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아마 제가 산상설교를 차례로 설교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괴로움을 참아가면서 설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자신있게 나 이렇게 하고있다고 자신 있게 설교할 수 있는 주제도
굉장히 많거든요.
이 말씀이 우리에게 들이대는 칼날을 피할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과대평가했다' .. 이렇게 무시하는 방법도 있구요,
-'나는 제자가 될 마음이 없다, 나는 그냥 교인으로만 살 것이다' .. 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또 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그런 것도 이 말씀에 칼날을 피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진실하게 믿으려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 앞에 겸허하게 서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게 될 것이구요.
그럴때면 자신을 향한 칼날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날카로운 칼날이 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기준이 너무 높다는 것이구요
다른 하나는 우리의 본성이 너무도 심하게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살펴본 6가지 예에서 본 것처럼,
율법은 우리가 넘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하는 반면
예수님은 우리가 지향해야할 최대한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의 죄된 본성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제시하신 기준이 우리에게는 높아도 너무
높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말씀은 좋은데 뜻은 좋은데 우리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왜 예수님은 우리의 수준을 뻔히 아시면서 또 이렇게
과도한 요구를 하시는 것일까요?
그 분이 하신 말씀에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도 있지요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다시 한번 읽어 볼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다.“
유대인 소년들이 치루는 성인식을 '바 미쯔바'라고 부르는데요,
'바 미쯔바'를 할때 유대인 소년들은
'제가 이제 평생 율법의 멍에를 메겠습니다' 라고 서약을 합니다.
이 말씀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은 질병이나 생활고로 인해서
수고하고 짐진 사람들이 아니라,
율법의 멍에와 짐아래서 수고하고 지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의를 얻기 위해서 밤을 세워서 율법을 연구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기위해
수고하고 애쓰던 사람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를 얻지 못해서
내적으로 고심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예로 든다면 니고데모와 바울을 예로 들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부르지요.
그는 율법연구와 실천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습니까? 묻지요,
사람들에게 그는 밝은 대낮에 사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율법의 멍에와 집에 눌려 신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회심하기 전에 바울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율법교육을 받았고 그 자신의 말대로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율법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영혼도 역시 캄캄한 밤과 같았습니다.
율법에 대한 치열한 ?이 그의 영혼을 지치게 할 뿐,
그가 추구했던 의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율법의 멍에에 짓눌려 신음하던 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해법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율법의 멍에와 짐에 지친 사람들에게
그것을 벗어버리고 당신이 제시하는 멍에와 짐을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이 맞다면 그분이 제시하는 멍에와 짐은 율법의
짐보다 더 가벼워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동안 우리가 함께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의 짐이 율법의 짐보다 더 무겁습니다.
무거워도 많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지금 우리를 적잖이 헷갈리게 만들고 계십니다.
율법의 멍에와 짐보다 더 쉽고 가볍게 해 주시려면
율법보다 더 낮은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율법보다 더 낮은 기준을 제시하시 하셨다면 이랬을 것입니다.
율법은 살인하지 말하고 했는데 나는 말한다,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율법은 간음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말한다, 네 욕망대로해라
율법은 이혼하려면 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라고 했는데,
나는 말한다, 네 하고 싶은대로 해라.
율법은 맹세를 했으면 꼭지키라고 했는데 나는 말한다. 그럴 것 없다.
율법은 보복을 제한했는데, 나는 말한다, 분이 풀릴 때가지 보복하라.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나는 말한다, 그럴필요 없다.
어떻습니까? 정말 쉽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이런 것 아닙니까?
요즘 미국과 한국에서 뉴스를 장식하는 사건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재벌들의 갑질, 한국연예인들이 보여준 추행, 미국 연예인들의
입시부정 사건, 정치인들의 부정, 그리고 무차별적인 범죄와 테러
이 모두가 자신의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산 결과입니다.
왜들 그렇게 살아갑니까? 그게 제일 쉽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을 가볍다고 하실 때
그 분이 생각하신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이 다
짐작은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미칠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을 제시하면서도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당신의 짐은 더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에는 필시 다른 뜻이 담겨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일 까요?
예수님은 왜 이토록 높은 기준의 의를 제시하시면서
당신의 멍에가 율법보다 더 가볍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우리는 팔복을 묵상하는 중에 의에 대해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다시 보지요. 마 5장 6절에
“의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여기서 말하는 의는
내가 스스로 선행을 쌓아 올리는 그런 의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죠.
만일 그런 것이라면 의의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많은 의를 이루기위해 분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스스로 의를 쌓아서 하나님의 커트라인에 들려고
분투했던 사람은 복을 누리기 보다 도리어 화를 당했습니다.
니고데모와 바울이 그 증인입니다.
▲스스로 의를 쌓아 올리려는 사람들(율법을 행함으로 자기 의에 도달하려는 사람)은
둘 중의 한 가지에 화를 입습니다.
1) 첫째는 그런 노력은 위선에 빠지게 만듭니다.
스스로 의를 쌓아 올리기 위해서 노력하면
겉으로는 거룩하고 의롭게 보이지만 내면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상태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을 속이고 결국 자기 자신도
속에는 지저분한 것이 가득 차 있으면서도 나는 의롭다고 착각합니다.
2) 둘째로, 그런 노력은 영적 패배감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하게 되는 사람이 이 길로 가게 됩니다.
그들의 경건의 겉모양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위선적인 상태를 그대로 두고 볼수 없습니다.
내가 겉으로 쌓은 의만큼 내 속에도 그 만큼의 의가 쌓이기를 원하는데
그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이 되지 않을 때
정직한 사람들은 희망이 없는가보다, 이래가지고는 안되나보다라는
패배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 진실, 즉 스스로 의를 쌓아가지고는 아무런 일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 모든 이유는 , 그 모든 것의 근원에는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지고 그로인해서 내면세계에 가장 중요한 자리가
비어버리고 그로 인해서 온갖 무질서가 발생하고, 삶의 온갖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선하고 거룩하고 의롭게 살기는 바라지만 그럴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고 우리의 내면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잡히고 우리의 내면에 상태가
바로 잡혀야 만 우리가 행동을 고칠 수가 있는데
그건 그대로 두고 행동만 고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스스로 의를 쌓아 올리려는 사람들이 불행한 가장 중요한 까닭이지요.
대지에서 뿌리 뽑힌 나무에 상태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가끔 걷는 산길에 보면 아름들이 나무가 폭풍에 쓰러져서
눕혀져 있는 것을 봅니다.
뿌리가 뽑혀있는데도 몇 년을 두고 보면
봄이 되면 새순을 내고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열매도 맺습니다.
그 모습만 보면, 그 가지만 보면, 그 꽃과 나무만 보면
그 나무는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 나무는 뿌리가 뽑혀 있기 때문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나무를 살리고 싶으면 그 뽑힌 나무를 다시 대지에 심어야합니다.
그 다음에 잘 가꾸어서 그 나무속에 있는 죽어가던 생명력을 되살려 주어야합니다.
그러면 다시 새 순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만일 뿌리 뽑힌 채로 그대로 두고 가지를 가꾸고 꽃을 가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가꾸는 사람 자신도 머지않아서 지쳐서 포기하게 될 겁니다.
뿌리가 뽑혀서 나무가 속에서부터 썩고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가지를 잘 가꾼다 해도 결국은 죽어버리고 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대지에 뿌리를 둘 때에
비로서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대지에서
뿌리 뽑힌 우리의 존재를 다시 하나님의 대지에 심는 것입니다.
'의의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란 말은
하나님의 대지에서 뿌리 뽑힌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금 그 대지에 심겨지기를 소망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나무가 뿌리 뽑힌 상태로 오래있으면 나무안에 해충이 번지기 시작합니다.
참 신기하지요. 우리 눈에는 겉에서 들어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나무 속에는 이미 해충이 득실 거리기 시작합니다.
그 시간이 지속될수록 점점 더 썩어가는 것이지요.
그것처럼 하나님의 대지에서 뿌리 뽑힌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의 내면에는 죄의 독소가 퍼집니다.
그 시간이 지속 될수록 죄의 세균은 점점 더 깊이 더 널리
침투합니다. 하나님에게 눈을 뜨고 나면 그 상태를 그대로
눈을 뜨고 볼수가 없게 됩니다.
자신의 내면에 가득 찬, 혼란과 부정과 어두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부정과 어둠과 혼란을 해결할 길을 찾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대지에서 뿌리 뽑힌 상태로 살아가면서
내면의 온갖 혼란과 부정과 어둠이 가득해지면
그 내면에 가득 찬 것이 우리의 눈빛과 말고 행동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그로 인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요
이웃사람들에게 악을 행하게 되고요
자기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고 망가뜨립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지요.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실존입니다. 누구는 더 심하고
누구는 좀 덜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원죄를 앉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원죄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대지에서 우리의 뿌리가 뽑혔다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에게 등진 선택을 한 이후로
그리고 세대를 이어오면서 죄를 거듭 선택한 이후로
인간 존재 안에는 회복될 수없을 정도로 깊이 부패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번에 멕시코 선교여행을 하는 중에
동행한 교우님과 대화를 하다가 원죄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항생제 이야기 인데요, 이 항생제는 인류의 질병 치유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항생제를 너무 많이 남용하게 되면,
항생제에 대한 내성이 생겨서 나중에는 항생제 병균이 듣지 않는 다는 겁니다.
과학의 문외한인 저는 항생제에대한 내성이 생긴다는 말이
제몸에 내성이 생기는 것이라고 오해했었습니다.
의사출신이신 그분과 그 교우님과 대화를 하다 보니까
그 내성은 내 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병균에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제 몸에 침투한 감기 바이러스를 치료하기 위해서
항생제를 먹으면 제 몸의 침투한 그 바이러스의 항생제에 대한
내성이 생기게 되고 제 몸에 침투해있던 바이러스의 생겨진
내성이 공중에 떠다니는 다른 바이러스에게도 퍼진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엔 어떤 항생제에도 듣지 않는 수퍼 박테리아가
생긴다고 하지요. 앞으로 인류에 생존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할 요인 중 하나가
수퍼 박테리아라고 경고하고 잇습니다.
저는 이 설명을 듣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제 몸에 침투했던 바이러스에 내성이 생기면
그 내성이 어떻게 공중에 떠다니는 다른 바이러스에게 퍼진다는 말입니까?
모든 병균은 각각 개체로 작용하는 것 같은데 실은 한 몸이라는 것
아닙니까. 병균 한 개체에 일어난 일이 병균 전체에 퍼진다는 말 아닙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데 그게 사실이라는 것이죠.
▲기독교 교리중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원죄의 교리입니다.
한 사람이 지은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해진다는 사실
그리고 그동안 인류가 쌓아온 죄의 결과가 온 인류에
미치게 된다는 사실이 유물론 적이고 개인주의 적인 사고에 빠져있는
우리들에게는 이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입니다.
내가 남용한 항생제로 인해서 지구에 떠돌고 있는 전체 박테리아에
내성이 번져가는 것처럼, 한 사람이 범한 죄가 모든 인류에게 죄성을 퍼트리는 것입니다.
원죄의 진실은 바깥으로는 뉴스를 곰곰이 읽어보고 안으로는 자신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입니다.
◑1. 이렇게 보는 우리에게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그것이 가장 쉬운 길이지요.
욕심나는 데로 먹고, 돼는 데로 말하고 하고 싶은 데로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분노가 풀릴 때까지 복수하고 미움이 일어나면
속 시원할 때까지 미워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이길을 가고 싶어하고요, 실제로 이 길을 갑니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지요. 타락한 본성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때로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락한 본성이 이끄는 힘이
너무도 강하기에 눈 질끈 감고 그것을 따라갑니다.
인터넷에서 떠다니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 마라
말할까 말까 할때는 말 하지 마라
줄까 말까 할 때는 주라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지 마라
누군가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 방향을 자세히 보고
쓴 아주 좋은 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좋은 일, 선한 일, 바른 일, 의로운 일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그 반대 방향으로 우리를 끄는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가야한다고 하는 끌림이 있을 때
우리의 본성은 갈 필요 없어하고 끄는 것이죠.
무엇인가 먹고 싶을 때, 건강을 위해서는 먹어서는 안 돼, 생각을 할 때면
타락한 본성은 아 운동은 내일부터 하면 돼.
‘맛있게 먹으면 제로 칼로리래!’
‘이런 말을 하면 안 돼지..’ 생각할 때
우리 속에 타락한 본성은 ‘본 때를 보여 줘야 돼! 말 해!’ 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고는 나중에 가슴을 치면서 후회를 하죠.
◑2.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두 번째 길은
<율법의 수준에 머물러 사는 길>입니다.
타락한 본성이 이끄는 힘을 분별하면서
과하지 않게 적당한 정도로 죄를 즐겨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우 현실적인 선택이지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타락한 본성까지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과도한 기대만 접는다면
이렇게 사는 것이 제일 현명한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힘쓰는 사람을
‘교양인, 인격자’ 라고도 부릅니다.
이 길이 제일 안전하긴 한데,
이런 방식으로는 사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두 번째 길을 선택하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상태에서 어떻게하든지 무리 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노력이 어느 지점까지는 통합니다.
그런데 그 지점을 넘어가면, 통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교양인도, 존경받는 인격자도
자신의 이익과 안전이 심하게 위협받는다 싶으면
금방 타락한 본성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이 세상은 점점 타락해갈 뿐입니다.
◑3. 거듭나는 길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제 삼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우리 존재의 뿌리를 하나님의 대지에 다시 심는 길입니다.
의롭게 되고, 의롭게 사는 일에 있어서
자신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두 손들고 항복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그분의 대지에 심어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의 존재를 당신 안에 품어주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향해, ‘내 딸아, 내 아들아!’ 라고 불러주시고요
우리는 그분을 향해 ‘아빠(아바)’라고 부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서 깨어진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 분의 빛이 우리 내면에 임하여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 분의 사랑이 우리 내면에 흘러들어와
따뜻한 온기를 채웁니다.
그 분의 진리가 우리의 내면을 채웁니다.
그 분의 거룩함이 우리에게 비춰서
부정한 것을 감춥니다.
그럴 때야 비로소 우리는
마음 깊이 안식을 느끼고 평안을 누립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안긴 것처럼
혹은 객지를 떠돌던 나그네가 고향집 안방 아랫목에 누운 것처럼
참된 안식과 기쁨을 누립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나서 발견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발견했던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수 십 년 동안 구하며 찾았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그동안 그들을 잠 못들게 했던
그 모든 꿈과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율법을 추구하면 할수록
오히려 깊어져만 가던 내면의 어둠이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 안에 흘러들어온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와 정의가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흘러나옵니다.
과거에는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만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어렵지도 않고, 어색하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사는 것이 더 편하고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왜 당신의 멍에와 짐이
율법의 멍에와 짐보다 더 가볍고 쉽다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이제 좀 이해할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도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이제는 여러분께 좀 분명해졌기를 바랍니다. 마5:20
예수님은 율법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하셨습니다.
인간의 죄성을 생각할 때는 도무지 미칠 수 없는 높은 기준입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더 가볍고 더 쉽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죄성을 치유할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지만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는 도덕률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거듭난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성령의 능력안에서 자기 죄성을 치유받고, 또는 이미 받은 사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지향할 수 있는
그 높은 이상을 주신 것입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의를 갈망하고
그 의로움을 입은 사람만이
꿈꾸고 바랄 수 있는 높은 이상입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본다면 ‘더 나은 의’라는 제목으로 살펴본
마5:17~48절까지의 말씀은
적어도 우리에게 3가지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1.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새삼 느끼고 자각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산상설교는 우리의 죄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요, *이런 주장 지금도 많음
그렇게 말할 만한 요소가, 이 말씀 안에 담겨 있습니다.
진실하게 이 말씀 앞에 선다면 누구나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라고 인정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예수님의 의도 중 하나였는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자신의 의에 대해서 자고하면서
스스로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도록 주신 말씀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둘째로↓
2.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로 지어졌고
얼마나 고귀한 존재로 부름 받았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에 물들어 있고,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떨어진 그런 존재인 것은 맞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앞으로도 그 상태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귀한 존재로 지으셨고
또한 그런 존재로 회복시키셨고,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 새하늘과 새땅이 임할 때
우리는 그 완전한 존재로 회복될 것입니다.
백조로 지어진 우리가
자신이 오리 인줄 착각하고 뒤뚱거리면서 땅만 짚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날개를 활짝 펴서 공중으로 비상할 수 있는
시도를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3. 셋째로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백조처럼 비상할 수 있는 길을
예수께서 열어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자가 되라는 부름은
오리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서
그 모습대로 살아가라고 하는 부름입니다.
날개를 펴서 하늘로 비상하는 기쁨과 만족은
땅만 파고 살 때 경험하는 기쁨과 만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그 길을 열어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지으셨고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존재가 되도록 부르셨는지를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부름에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비록 부족하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깨우쳐주신 대로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연습을 하십시다.
주님께서 날아오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해보였던 일들이
이루어지는 기적을 우리 자신 속에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타자 Or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