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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살다

LNCK 2019. 5. 12. 21:17

십자가를 살다                        마5:38~42                     19.03.03.출처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제자들에게 더 나은 의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드신 5번째의 예는 <복수>의 예입니다.

 

깨어진 세상에서 상처 난 인간들이 서로 얽혀 살다보면

상해나 상처를 입히지 않을 수 없구요,

그 피해가 억울하다 싶을 때면 당한 만큼 갚아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복수하고자 할 때, 몇 가지 지침을 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 율법의 가르침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시지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38


이것은 율법의 어느 한 구절을 본문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복수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들에 대해 핵심을

이에 두마디로 요약을 하신 것이지요.

 

그 중에 한 율법의 말씀을 보면 출애굽기에 오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자를 다치게 하였는데

   낙태만 하고 달리 더 다친 데가 없으면 가해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반드시 배상금을 내되, 배상금액은 재판관의 판결에 따른다.


   그러나 그 여자가 다쳤으면 가해자에게는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한다.

 

자신이 당한 상해만큼 되갚으라는 말이죠.

이것을 '렉스 탈리오니스' (동종상해법)이라고 부릅니다'lex talionis'

같은 종류의 상해만큼만 갚아주라는 말이죠.

 

어릴 적에 세계사에서 봐온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원칙이기도 합니다.

지금 보면 참 잔인한 법이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격한 몸싸움을 하다가 의도치 않게 상대방의 이빨을 세 개를 부러트렸으면

나중에 재판장에 가서 재판관이 상해를 잎인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 판정을 하면

그 사람은 그냥 상대방이 멀쩡한 상태에서 이 세 개를 부러트리는 것을

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이 법이 글자그대로 실행되었다면

한 동네에 똑 같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둘씩을 짝이 생겼겠죠.

눈 다친 사람, , 손잘린 사람 둘, 이 부러진 사람 둘, 발 짤린 사람 둘

이 얼마나 잔인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랍니까.

 

▲하지만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이 법은 복수를 제한 하는 법입니다.

당시에도 보복은 피할 일이고 가장 좋은 것은 그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이라는

그런 믿음은 당시 사람들에게도 있었습니다.

 

다만,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는 경우,

꼭 복수해야 되겠다는 경우

그런 경우에 당한 만큼만 갚으라고 허락한 것이지요.

 

정신적인 피해도 그렇고, 신체적인 피해도 그렇고

재산상의 피해도 그렇고요, 당한 피해가 심각하고 또한 피해당한 것이

너무도 억울하면 복수의 감정이 생기지요.

 

복수의 감정이 마음을 압도하게 되면 내가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주고 싶습니다.

상대방이 내 이를 하나를 부러트리면 나는 세 개 쯤 부러트려야 직성이 풀리지 않습니까?


'목사님은 저렇게 잔인한 말씀을 하시나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아직은 억울해서 흔히 하는 말로 미치고 팔작뛸 정도로

억울한 일을 당해본 일이 없는 분들입니다.

 

사실 저도 그토록 복수심에 사로잡힐 정도로 억울한 일을 당해 본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이 무엇이 있는지를 한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상황이 조성되면 자신도 그토록 강렬한 복수심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 창세기를 끝내고 시편을 읽고 있는데요,

시편 55편에 보면 다윗이 함께 밥을 같이 먹고 함께 예배 자리를 드나들던

가까운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한 후에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머무르는 곳 그곳에는 언제나 악이 넘쳐나는 구나

   죽음아 그들을 덮쳐라,

   산채로 그들을 음부로 데려 가거라.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도 복수심에 사로 잡혀서 저주를 퍼부었다면,

그럼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그건 잘못입니다.

누구나 복수심에 압도되면 자신이 당한 만큼 그것 만큼 갚아주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꼭 복수해야겠다면, 당한 만큼만 갚으로 얘기를 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살인, 간음, 이혼 그리고 맹세에 관한 율법들을 차례로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율법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면, 여기까지만 해라

아무리 망가져도 이 선은 넘지 말라, 하고 주신 기준선을 그은 것입니다.

 

아무리 미워도 목숨만은 해치지 말라는 것이고요

성적욕망이 아무리 너를 흔들어도 간음만큼은 하지 말라는 것이고요

결혼관계를 유지하려고 아무리 노력하는데도 안 되면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하라는 것이고요.

맹세했다면 그걸 지키라는 것이지요.

 

한 번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혼에 대해서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간음한 경우 외에는 이혼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하자

그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럼 왜 모세는 신명기 24장에서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라고

했습니까? 라고 묻지요.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답하십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아내 버리는 것을 허락하여 준 것이지

본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즉 죄성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때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때로 마음과 생각이 분노의 마귀가 되어서 다른 사람을 해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고요

성적인 욕구에 사로 잡혀서, 간음을 탐할 수도 있고요

상황에 따라서 아내를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고요

절박한 상황에 몰리면 맹세로서 피해보고 싶은 그런 유혹도 든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절대로 너머서는 안될 선을 그어 놓은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그 악행을 제한하기 위해서 주신

율법을 악행을 허용하는 율법으로 탈바꿈 시킨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다른 사람을 괴롭혀도 되고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고 그렇게 곡해한 거구요.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다른 모든 음행은 즐겨도 되지만

같이 자지만 않으면 된다고 해석을 한 거구요,

이혼을 억제하려고 주신 율법을 이혼을 허락하는 율법으로

왜곡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맹세를 제한하기 위해서 주신 율법을

맹세를 해도 되는 것처럼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도로에 70마일 제한 이런 사인이 있지 않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언제나 안전한 속도로 운전하되

혹시 과속해야할 경우에도 70 마일은 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70 마일 까지는 달려도 된다는 허락으로 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50마일 제한 구역인줄 알고 달리다가 70마일 사인을 보면

에이 손해 봤네 하면서 확 발고 달리는 것이 우리의 속성입니다.

 

이런 패턴이 복수의 대한 율법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할 수 없을 때

받은 만큼만 갚으라는 복수제한 법을 복수허용 법으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복수는 해도 되는 것, 하나님도 복수는 허락한 것이라고 그렇게

왜곡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나는 말한 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마라.' 마5:39


여기 악한 사람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상해를 입힌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요

맞서지 말라는 것은 보복하지 말하는 말이지요.

 

복수를 전면적으로 금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예를 설명하지요.

우리 잘 알고 있는 말씀인데요.

 

누가 네 오른 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내 주고

너로 고소하여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5 리를 가자고 하거든 10 리를 같이 가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함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마라라. 마5:39~42

 

여기서 예수님은 오른 쪽 뺨을 치거든, 이렇게 말씀을 하시지요.

오른 손잡이가 상대편 사람의 뺨을 치면 어느 쪽 뺨을 맞습니까?

왼 쪽 뺨을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기서 오른 쪽 뺨이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상대방의 오른 쪽 뺨을 치는 것은 손 등으로 올려 치는 것이죠.

   그것이 당시 유대인에게는 모욕을 주는 행위입니다.

 

   손바닥으로 내려치는 것은 공격하는 것이고요.

   손 등으로 올려 치는 것은 모욕을 주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왼쪽 뺨마저 돌려대라 말씀하시지요.

 

   우리 문화에서는 이렇게 하는 것은 저항하는 것이지요.

   어, 쳤어, 여기도 쳐봐. 들이댈 때 하는 행동인데

   예수님은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준 모욕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듯이지요.


또 유대인들에게는 겉옷이 밤이 잠을 자는 잘 때 사용하는

이불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겉옷을 빼앗지 못하게 그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옷을 걸어서 고소하는 사람, 이렇게 얘기를 했지요.

오늘에야 남이 입던 옷을 두고 누가 고소하겠습니까?

 

거저 준다고 해도 사양하겠죠.

검색해보니 3천만 달러 짜리 속옷도 있더라구요.

1백만 달러 2백만 달러 속옷도 있고요

    

혹시 그런 것이라면 고소해볼만 하지만

보통사람들의 속옷이야 누가 고소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이 입던 속옷은 통옷으로 입던 옷이었고

그 당시에 물자가 굉장히 귀하던 시기에 속옷도 매우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속옷을 걸어 고소하면 겉옷까지 벗어 주라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 다음에 '누가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거든' 이라는 말씀은

로마의 지배아래 있었던 때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누가는 로마 군인을 말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사람이나 군부 독재시절에 살었던 분이라며

군인이 아무나 끌어다가 일을 시켰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럴 경우 순순히 따르고 시키지 않은 일까지 해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구하는 사람에게 있으면 주고 빌리려는 사람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덧붙이시지요.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모욕을 주거나

고소하거나, 강압적으로 위협할 때, 그냥 받으라는 겁니다.

그러니 선의로 누군가가 나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고나 빌리려 할때

응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지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또다시 나보고 어쩌라고, 이런 반응을 느끼게 됩니다.

앞에서 본 네 가지 말씀과 마찬가지로 이 말씀은

요즘 세상에서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의 본성에도 맞지 않습니다
.

선으로 무엇을 달라는 사람, 혹은 빌리려는 사람에게는

혹시 응할지 몰라도

 

악의적으로 의도를 가지고 나를 모욕하는 사람, 나를 고소해서

내가 내 무엇을 빼앗으려는 사람 혹은 위력을 행사해서

나를 억압하려는 사람에게 그냥 당해주라니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 본성에 맞는 아니고요, 생각해보면 이게

옳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받은 모욕을 베로 갚아주어서 버릇을 가르치고

시시비비를 가려서 정의의 심판을 받고

불의의 저항해서 싸우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믿음의 테스트에 앞에 서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받은 모욕을 되갚아 주고 고소하는 사람을 대항해 싸우고

불의한 억압에 대해서 같은 방식으로 대항하기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념과 철학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논리와 지성과 경험에 부합할 때만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의 신념을 따르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긴다는 말은

내게 불합리해 보이고 부조리해 보이고 정의에 원리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내가 다 알지 못하는 깊은 뜻이 그 말씀 안에

숨어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 멀리 지평선 너머까지 보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지평선 저 너머까지 보시는 분이 가라하면

우직하게 가야한다는 것이지요.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다면 그분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도 우직하게 실천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도 제자가 추구해야할 높은 이상을 제시하십니다.

그 이상이 너무도 높기에 믿는다는 우리 조차도 이 말씀에

언제나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살아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가 제자로서 살아가기를 추구한다면

이 말씀을 언제나 순종할 수 있도록 추구하고

기도하고 애써야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우직하게 순종할 때, 아 정말 예수님의 말씀이 옳구나

하는 깨닳음을 얻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우리가 진실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지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시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은 일대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나

적용할 말씀이지 한 조직과 조직, 한 단체와 단체, 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에서는 적용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이것도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인 관계와 집단적인 관계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한 개인이 따라야 하는 진리라면 집단도, 나라도, 따라야 합니다.

다만, 나는 그저 내가 확신하면 결심하고 따를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한 교회가 한 조직체가 혹은 한 나라가 이 말씀에 순종하려면

거기에 소속된 사람이 다 동의해야 되기 때문에 한 조직체가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에 순종해서 이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입증한 예가 몇 번 있었죠.

 

지난주에 100주년을 지낸 삼일 운동이 그 예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삼일 운동을 삼일절을 삼점일절이라고 부른답니다.

 

삼일운동이 뭣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도 모른다는 거죠.

삼일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구가 1.3프로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미 독립선언문에 배어있는 비폭력 정신과 삼일 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전국에 잇는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비폭력적인 저항운동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한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원칙으로 인해서 수많은 생명이 희생이 되었죠.

이 운동은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에 한국 국민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인지 보여주었습니다.

폭력으로 무섭고 강한 것을 보여주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폭력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무섭고 강한 민족인 것을 보여주는 것, 이건 쉬운 일이 아닌데요.

그것이 삼일운동의 의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오랜 식민통치로부터 인도를 독립시킨, 마하트마 간디가

이 말씀에 깊이 영향 받았다는 것 아마 다 아시는 일일 것입니다.

간디는 생전에 내가 만일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실망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예수의 제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할 만큼 이 특별히 산상설교의

이 말씀에 깊이 감화가 되었습니다.


간디가 인도 국민들을 인도해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만들었던 그 힘도

역시 모든 폭력과 모욕을 그대로 흡수하는 비폭력적인 운동을 통해서

인도를 독립시킨 것입니다.

 

미국에는 마르틴 루터 킹 Jr. 목사님이 그 예입니다.

그는 흑인민권운동을 주도하면서 철저히 비폭력적인 원칙을 지켰습니다.

그것이 당시 함께 활동했던 무슬림 민권운동가였던 말콤 엑스와 결국

결별하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말콤 엑스는 어떤 수단이라도 흑인의 인권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인 반면

킹 목사는 비폭력의 원칙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근본적인 차이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근본적인 차이이기도 합니다.

킹 목사님은 그로 인해서 젊은 나이에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지킨 원칙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정의감을 내려놓으라는 뜻이 아니고,

불의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묵인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비겁하게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라는 뜻도 아닙니다.

 

삼일운동의 민족대표들도, 간디도, 마르틴 루터 킹 목사도

누구보다도 정의감이 투철했습니다.

불의에 대해 누구보다도 분노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힘으로 정의를 실현하기를 포기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진정한 정의는 오로지 사랑을 통해서만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한계적인 시각에 정의와 사랑은 서로 모순되고

대립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정의를 포기하는 것이고

정의를 실현한다는 말은, 사랑을 잠시 유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더 큰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고요

한편에서 부르짖는 정의가 다른 편에는 불의가 되기도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에게 있어서 정의와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정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사랑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우리에게는 정의를 품은 이 사랑이

이해되지도 않고요, 실행하는 것은 더욱더 어렵습니다.

 

정의를 행하려면 사랑을 희생시켜야 하고,

사랑을 행하려면 정의를 위반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기에 우리는 정의와 사랑 사이의 분별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에 우직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랑을 통해 정의가 실현됩니다.

 

킹 목사님이 이 점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힘은 통제할 수없고 남용되기 쉽다.

반면에 힘이 없는 사랑은 감상적이고 무력하다.

최고의 힘은 정의가 요구하는 것들을 만족시키는 사랑이고

최고의 정의는 사랑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바로잡는 힘이다.’

 

킹 목사는 지금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표현하기도 어렵고 실행하기는 더욱 어려운

이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진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표현하려고

지금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어보면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정의와 사랑의 깊은 차원을

킹 목사님이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다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정의는, 참 정의가 아니고

우리가 아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정의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고

진정한 사랑은, 정의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그것을 구분할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눈 질끈 감고 예수님의 말씀에 무턱대고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머리로 납득되는 진리는, 차원이 낮은 진리입니다.

정말 심오한 진리는, 머리로 납득되지 않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체험으로만 납득할 수 있습니다.

 

정의를 품은 사랑도,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의 행동의 원리였습니다.

억울하게 모욕을 당해도 예수님은 되받아 치지 않았습니다.

 

무고하게 고소를 당해도 그분은 그대로 당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 분은 도살장에 끌려간 어린양처럼

묵묵히 그 모든 모욕과 고난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오르십니다.

 

온갖 질병을 고치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셨고

죽은 사람까지 살려냈던 그 분이

무력하게, 무참하게 그리고 묵묵히 그 모든 모욕과 고소와 폭행을 흡수하셨습니다.

 

오늘 제자들에게 하신 그 말씀을

예수님이 실제로 그대로 살아내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때나 지금이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분과 함께 동거동락했던 제자들도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십자가를 보고 있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정의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일 정의로운 분이라면

모든 인간에게 각자의 죄과에 따라 심판하셔야 마땅했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그 분은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도

다 용서해주셔야 했습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둘 중 하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다른 방법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죄에 대한 그 분의 정의와

인간에 대한 그 분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두 가지 메시지를 듣습니다.

 

1. 첫 번째 메시지는 너는 영원히 멸망받을 죄인이다하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우리의 죄를 향해 고소해 오는 음성을

우리는 듣는 것입니다.

 

그 음성 앞에 우리는

무너져 내려 회개하는 것입니다.

 

2. 그럴 때 우리는 십자가에서 또 다른 소리를 듣습니다.

너는 내 아들, 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해 부르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신비는, 머리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체험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묵상하는 중에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무릎꿇는 경험,

그리고 그 은혜로써 다시 일어나 새로워지는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십자가는 우리를 새롭게 하는 신비요,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체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기를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바라보게 만들어줍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응징할 수 있고

얼마든지 자신을 변호할 수 있고

얼마든지 폭력으로써 제압할 수 있는 그 분이

 

그 모든 힘을 비우고, 무력하고 무참하고 그리고 묵묵히

모든 모욕과 고소와 폭력을 당신의 몸으로 흡수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분이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그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의

모든 죄악을 흡수해 들이고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로 변화를 받으면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고 하는 부름입니다.

 

우리는 두 번째 수정헌법에 따라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는

나라(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당한 모욕만큼 되갚아주고

고소를 당하면 끝까지 싸워이기고

부당한 폭력에 대해서는 폭력으로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총기를 사 두는 것이죠.

 

그런 세상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십자가 형의 인생을 살라고 부르십니다.

 

사랑으로 정의를 이루는 길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상의 현실을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시는 주님,

우리가 닿지 못하는 세상을 아시는 주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차원을 보시는 주님께서

몸소 실천하신 진리입니다.

 

실패한 것 같으나 진정한 성공이었고,

절망인 것 같았으나 진정한 희망이었고,

패배인 것 같았으나 진정한 승리였던 십자가는

예수님의 오늘 이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명합니다.

 

그 십자가의 비밀을 알고

그 진리를 믿는다면

우리도 그 십자가의 길을 가기를 소원하면서

그 능력을 받아서 그렇게 살아가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는 수요일에

성회 聖灰 수요일(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을 지킴으로써

사순절의 영적 여정을 시작합니다.

 

사순절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이 기간동안 하루 한 말씀을, 마가복음을 좀 더 자세히 읽어가면서

묵상하도록 그렇게 진도를 짰습니다.

 

이 기간 동안 십자가를 더욱 묵상하고

십자가에 그늘아래서 쉬고

그 능력으로 새로움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힘주시는 대로

십자가를 살아가십시다.

 

세상 지혜를 따라 강하고 지혜롭게 살려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서 약하고 어리석게 살아가십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실 것이고

그럴 때 우리는 와 이거봐라 이게 진짜 진리네!’ 하는

그런 신령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타자 Or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