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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숨바꼭질

LNCK 2019. 5. 21. 16:01

◈하나님의 숨바꼭질                       마6:1~18, 엡4:6           19.04.28.출처




숨어서 보시는 하나님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영성 생활의 3가지 도구

즉 구제, 기도, 금식

이 세 가지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시면서

오늘 읽은 말씀에서처럼 후렴처럼 반복하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숨어서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1) 구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마6:3~4에도 나와있고,

2)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6:5절에도,

3) 금식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18절에도

숨어서 보시는 하나님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6: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옛날 개역에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그렇게 말씀하셨고요.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것을

막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God who is working behind the scene

그렇게 번역했고요

 

대부분의 영어성경에는 God who works in secret 라고 번역했습니다.

 

▲자, 예수께서는 왜 이 말씀을 거듭 반복하실까요?

동일한 말을 세 번 이상 거듭 반복한다는 말은, 그 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숨어서 은밀하게 막 뒤에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특별히 오늘 강조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이 본성,

숨어 있는, 은밀하게 일하시는, 막 뒤에서 일하시는 이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의 활동양식을 알지 못하면

영적 생활에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첫째는,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 상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측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려면 그리심 산으로 가야 됩니까,

시온 산으로 가야 됩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시온 산에 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그리심 산으로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엇갈리는 주장속에서 이 여인이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만나서 이렇게 여쭌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인데요.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4:24

 

이 무엇입니까?

우리말에서 은 귀신이나 혼령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은 전혀 다른 뜻입니다.

히브리어 루아흐 는 숨, 공기 라는 뜻이고

헬라어 프뉴마 는 바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이시다 라는 말은

은유로써, 하나님은 바람 같은 분이다,

하나님은 공기 같은 분이다, 하나님은 숨같은 분이시다!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뜻이지요.

 

그렇기에 하나님을 만나러 어디 갈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어느 장소로 가느냐가 아니라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람을 느끼려면, 눈을 감고 내 감각을 활짝 열어놓으면

없는 것같은 바람이 느껴지는 것처럼,

어디서라도 하나님께 영적으로 집중하면, 영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라는 말은

영이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오직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그런 기능으로서 영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말씀을 드렸죠.

영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영적인 주파수를 맞추어야만 합니다.

 

마치 눈을 감고 예민하게 바람을 느껴보려고 하는 사람처럼

우리의 영을 통해서 영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도록

힘써야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영성 생활에서 승패는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영적 주파수를 맞추고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이는 듯이 살아가는 것,

이것이 영성생활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이것이 예배 중에 우리가 노력해야 될 노력입니다.

 

하지만 예배시간에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풀타임 워십퍼 전임예배자로 부름받았습니다.

그것을 바울사도는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라고 말씀했지요.

 

가정, 직장, 사회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늘 의식하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언제 어디서나 예배를 드리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자를 보고싶어 하십니다.

그런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첫 번째 조건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 ‘하나님은 숨어서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막 뒤에 있는 분처럼 그렇게 일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요.

전자파가 그 한 예입니다.

우리가 늘 사용하는 이 스마트폰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눈에는 지금 스마트폰밖에 안 보이지요.

하지만 사실은 이 스마트폰으로 수많은 전자파가 오고가며 교신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앉아있는 이 예배당안에

오고가고 있는 전자파를 눈으로 볼 수 있게 한다면

아마 여러분은 이 자리에 앉아있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현존에 적응되어서

늘 그 분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영성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 사실에 적응되지 않으면, 예배시간에만 하나님을 생각하는데

(아니 사실은 예배시간에도 다른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요)

그렇지 않고 예배시간과 아울러, 삶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실을 거듭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숨어서 막 뒤에서 은밀하게 일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어떻게 활동하시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적응되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운데 역사하십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 바울사도는 더할 수 없이 분명하게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4:6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오,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말을 로 바꾸어서 읽어보십시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시오, 내 위에 계시고, 나를 통하여 계시고

내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자 이렇게 로 바꾸면 좀 실감나지 않나요.

내 존재 전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내 존재 안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물질이라면, 내 밖에 있으면 밖에 있는 거고

안에는 안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내 안에도 계시고 내 밖에도 계십니다.

마치 내 밖에도 공기가 있고,

제가 쉬는 숨을 통해서 내 속에도 공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가 되시는지요.

정말 온 우주에 창조자이신 전능의 하나님께서

여러분 위에 계시고, 여러분을 통하여 계시고

여러분의 안에 계신다고 여러분은 정말 믿으십니까?

 

아마도 딴 세상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리는

혹은 전혀 공감이 안 되는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한 것 같은

혹은 하나님이 나에게는 영 무관심한 것 같은

그런 상황에 살고 있는 분들이 우리 주위에 적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은 요즘 읽고 있는 시편에서

다윗이 부르짖는 그런 부르짖음처럼

하나님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혹은 하나님 왜 나를 멀리 하십니까?’ 라고 부르짖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지난 고난 주간에 스리랑카에 여러 교회에서 일어난 테러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로 인해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벌써 350명을 넘어섰습니다.

 

스리랑카에 기독교 인구가 7% 랍니다.

그들은 차별과 냉대와 박해 중에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그것도 부활주일, 고난주간에 모여있었습니다.

 

예배의 순간은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 중에 가장 순수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그런 순간에 테러를 당해 아까운 목숨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이 참혹한 현장을 보면서도

과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거나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곳에 하나님이 계셨다면

그 하나님은 무력한 하나님이거나 무관심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이 정말 우리 가운데 활동하고 계신다면

그 전능의 팔을 뻗으셔서 당신의 임재를 드러내 보여주셨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테러리스트들이 모의하는 그 자리에 불을 내리시든지

그들이 던진 폭탄이 불발탄이 되게 하시든지

아니면 폭탄이 터졌다면, 그로 인해서 상처 입은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하시든지

피해를 입었다면 즉시로 치료되는 그런 기적을 주시든지...

어떻게든 하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수많은 연약한 생명들이 속절없이 희생당했습니다.

 

이 사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안에 계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너희가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전면에 나서 주시기를

전능의 팔을 뻗어주시기를

그리고 즉각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 하나님은 그렇게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막 뒤에서 숨어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은밀히 일을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품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천둥같은 음성이 아니라

바람같이 미세한 음성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강력한 힘이 아니라, 부드러운 손길로 일을 만들어 가십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새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은 무력해보시고

때로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바람이 잔잔할 때, 바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숨어계시는 하나님도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이렇게 묻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전면에 나타나셔서

그 전능의 팔을 휘둘러 원수들을 한 번에 쓸어버리는 일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럼 그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빼곡이 적혀 있습니다.

 

이 기록들만 두고보면, 하나님은 숨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드러내 놓고 일하시는 분처럼 보입니다.

막 뒤에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전면에 나타나셔서 일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아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을 드러내 주셨으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직접 귀로 듣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세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놀라운 일로 역사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기대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생각하니 어떤 시험이나 환란이 다가오면

우리의 믿음이 뿌리채 흔들리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장애를 한 순간에 치워주시기를 구하는데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십니다.

 

막힌 길을 전능의 손으로 확 뚫어주시기를 바라는데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을 좀 제거해 주시기를 원하는데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마음에 병이 깊어져만 가는 자녀를 위해서

한 순간에 좀 이 아이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기도하는데,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배우자, 혹은 자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데

주께로 돌아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너무도 드물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주 낙심하고, 때로는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잘못 읽고, 잘못 이해해서 그렇습니다.

성경은, 한 사람 혹은 한 민족에게 일어난 수많은 일들 중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극소수의 이야기만을 뽑아서 기록한 책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의 기록된 모세의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120년 생애 중에, 그 이야기가 몇 %나 될 것 같습니까?

 

사사기를 읽어보면, 사사기에는 기적들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사사기 전체가 커버하는 기간이 4백년이 넘습니다.

4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에,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아주 극소소만) 골라서

사사기에 적어놓은 것입니다.

 

우리 신약에 4복음서에 예수님 사적이 많이 나와있죠.

그렇지만 3년 동안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아주 작은 일부 사적만 거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전체 사적 중에 몇 %나 될까요?

아무리 많이 잡아도 1%도 안 되게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전체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 사건만 그렇게 선별해서 성경에 기록해 놓았으니

읽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는

항상 (매일같이) 즉각즉각 나타나셔서 전능의 팔로

즉각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처럼 오해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의 일생에도, 사사들이 활동했던 4백년 기간 동안에도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도

하나님이 숨어있는 것 같고,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가 더 많았습니다.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그 동안 제게 일어난 혹은 저를 통해서 일어난

혹은 제가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같은) 일들을

다 기록하라고 하면, 그 분량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마가복음 정도의 분량은 나올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해 놓으면 그 글을 읽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 김영봉 목사가 살아가는 동안에는

매일같이 이런 (기적같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제가 그 동안 보아오고, 경험해 온 것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 합니다.

그보다 더 많은 시간,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시간동안에는

저는 하나님의 부재absence, 때로는 하나님의 침묵을

때로는 하나님의 인내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제게 행하신 그 일들을 기억하기에

그 하나님이 없는 것 같고,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 같은 기간 동안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숨어서 일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 같고, 관심 없는 것 같고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 같은 상황에 적응되지 않으면

이 숨어있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영성생활에

결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숨어계신 것은 아닙니다.

숨어 계신 것처럼 우리에게 느껴질 뿐입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고 소통하는

그러한 사이였습니다.

 

문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면서 바뀌어졌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죄를 범한 후에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힘 없는 소통이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는 뜻입니다.

 

그 이후로 인간에게 하나님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인류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을 위해 일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바라는 대로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 주지 않으실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나오는 지니처럼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나타나셔서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해 주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사라져주기를 바랍니다.

평소에는 신경쓰여서 못 살겠고

어려울 때는 아쉬운 것, 그것이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우상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요구와 바램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시고

당신의 계획과 섭리를 따라 움직이십니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모르는 존재이고,

하나님께서는 영원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무엇이 좋은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참되게 아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맞아떨어질 때도 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일입니다.


절대 다수의 경우에는,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바라는 것과
하나님이 의도하는 것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우리의 요구와 하나님의 뜻이 일치할 때 일어나는 일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영적 체험일수도 있고, 죽을 병에서 고침 받는 경우일수도 있고

꽁꽁 뭉쳐있던 분노 덩어리가 녹아내리는 것일 수도 있고

될 수 없는 일이 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우리에게 가끔 일어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가운데 정말 역사하고 계심을

확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기적을 통해

영적으로 깨어나서 그런 기적 없이도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비유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와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러한 모습입니다.

 

친구들끼리 숨바꼭질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서로 이기려고 꽁꽁 숨겠죠.

 

하지만 삼촌이 어린 조카를 데리고 숨바꼭질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조카가 술래가 되고, 삼촌이 숨습니다.

그 삼촌은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처음에는 숨고서 조카가 찾는 일을 지켜보겠죠.

 

그러다가 찾지 못해서 조카가 지칠 때 쯤이면 슬쩍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신을 찾게 만들지요.

 

이 삼촌이 원하는 것은, 숨어서 조카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조카가 삼촌을 찾아내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싶어 하는 것입니다.

 

삼촌이 술래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뻔히 조카가 보이는데도

못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것도 딱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찾아내지 못하도록

꼭꼭 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아내고,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찾다가 지칠쯤 되면 슬쩍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식어질 때

나 여기있다, 걱정마라하고 보여주는 신호입니다.

 

그래서 기적은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늘상 그 기적을 보고 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숨어있는 삼촌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삼촌이 여기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고 노는 어린아이처럼

 

우리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야 됩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영적생활(성숙한 신앙)이란 간단히 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듯이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가 그렇게 살았다고 말합니다.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제가 모세처럼 살아가길 원하겠습니까?

그렇게 반문하면서 포기하려는 분이 계십니다.

 

아닙니다. 모세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이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즐기는 사이에,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 위에 계시고

우리를 통하여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동안 살아오시면서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혹시 그런 기적을 다시 경험하고 싶으십니까?

그 바란 대로 필요하면 주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바라시는 것은

그런 경험을 근거로해서, 그런 기적이 없어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매일 매일 그 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나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는데요?

나한테도 그런 기적을 보여주시면 좋겠네요.

그러면 나도 하나님과 숨바꼭질을 즐길 수 있을텐데요

그렇게 말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것이 필요하면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요 그런 기적이 우리에게 영영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분의 죽음과 부활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기적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살아계신다고 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사소한 기적들이 없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숨어계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혹시 이런 저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분명하게 믿으라고 하시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이 숨바꼭질을 즐기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정말 재미있고 신나는 놀이입니다.

 

권태로운 일상이 한 순간에 뒤바뀌는 그런 일입니다.

축 쳐져 있던 어깨가 들썩이게 만드는 놀이입니다.

 

숨어있는 삼촌의 머리카락을 보고

혼자 좋아서 벙긋벙긋 웃으면서 뛰어가는 조카처럼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그 숨어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경험하고

그분을 찾아내는 그 기쁨은

다른 것으로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그렇게 하나님과 숨바꼭질을 즐기다가

때가 되면 그 하나님과 함께 더불어 영원한 춤을 추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르시는 이 영적 생활입니다.

 

부디 이 놀이터에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한 번도 이 놀이터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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