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아는 만큼 사랑한다 요일3:5~6, 골1:15~20 17.04.02.스크랩,녹취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손양원 목사님의 외모 에피소드
우리 교인 중에 100세가 넘는 교인이 있습니다.
여자 장로님이신데 지금은 많이 노쇠하셔서 요양원에 계십니다.
제가 얼마 전에 찾아뵙고 왔는데요.
그 연세와 건강에도 정신은 또렷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이제까지 내버려두는지 모르겠다’고
‘매일 밤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는데 지금까지 응답하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하나님이 나를 잃어버리신 것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humor
그러면서도 과거 이야기들을 선명하게 술술술 풀어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100년을 살아오면서 여러 목사님을 만나왔는데
그중에" 고 손 양원목사님이 최고의 목사님"이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에게 들은 설교가 많은데 그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설교가 있는데
"기왕에 죽으려면 주를 위해 죽읍시다"라고 말씀하셨고
그게 당신말씀에 기억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분이 그렇게 훌륭하고 말씀은 좋은데 볼품은 없었습니다.
키도 작고 생김새도 별로였어요. 어필될 만한 게 없었습니다.
우리 손 양원목사님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주 기철목사님과 함께
참 위대한 목사님이지요.
그분은 여수에 있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있는 애양원에서 목회를 했고요
그리고 신사참배의 요구를 거부하여 몇 년 동안 감옥에 갇혔고,
그리고 여수 순란 사건이 있을 때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 청년을 아들로 입적해서 키웠습니다.
그리고 또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공산군이 여수까지 밀고 내려왔을 때
성도들은 공산군이 그냥 두지 않을 테니 피하라고 말씀드렸을 때
"내가 어떻게 아픈 교인들을 두고 가겠느냐?” 해서
끝까지 그 교회를 지키는 바람에 순교를 당하셨죠.
그래서 이 손목사님을 가리켜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명으로
우리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훌륭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인격과 영성은 이렇게 뛰어났는데
외모는 백세 넘은 장로님 말씀대로 아주 볼품이 없었나 봅니다.
하루는 그분이 다른 교회에 부흥회를 초청을 받아 가방을 들고 가면
교인들이 그분을 맞으면서
"손목사님은 어디 계십니까? 언제 오십니까?”
이렇게 같이 물었답니다.
목사님은 “제가 손 양원입니다." 말씀드리시면
‘장난하지 마시고 당신같은 사람이 어찌 그 유명한 손목사님이라고 그럽니까?’며
혼을 냈다는 것입니다.
손목사님의 사환이 먼저 준비하려고 왔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랬기에 나중에 진짜 손목사님의 모습을 알아보고
또한 그분의 설교를 들어보고 나서는
더 깊이 감동을 받고 존경을 했던 것이지요.
처음에는 볼품없는 외모로 인해서
그 대단하던 목사님이 고작 저거야 하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부흥회가 시작되면 감화되어서 그 분을 떠나지 못하고
말씀을 계속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그 내면이 형편없는 사람인지
또는 외모와는 달리 고매한 인품을 가진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보아야 실수를 하지 않게 되죠.
외양과 내면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아보지 못해서 나중에 낭패 되었던 경험이
누구나 한 두 번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분이 어떤 분이지 제대로 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분에 대해서는 다 알 수 없지요.
인격이란 것이 본질상 그렇습니다.
부부로 인연을 맺어서 60년을 넘게 산 사람들도 가끔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아내를 도무지 모르겠다’ 그것이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더욱 더 불가능한 일이지요
하지만 알 수 있는 만큼은 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알아보는 과정이다 ..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5-6절 말씀입니다.
요일3: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새번역)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으며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그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알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머물러 있다’는 이 말과
‘죄를 짓는다’는 말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을 가리킨다는 사실에 주목을 했지요. *현재진행형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죄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적이고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으면
죄짓는 상태에 지속적으로 계속 머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 육신이 연약해서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만
그러나 죄의 노예상태로 사로잡혀 있지 않게 되지요.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시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이 말씀을 다른 각도로 볼려고 합니다.
6절에 마지막 구절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 죄를 짓는 사람마다"란 이 말은 '지속적으로 죄를짓는 사람마다'
'습관적으로 죄를짓는 사람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알지도 못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다"는 단어와 " 알다"는 단어에 잠시 주목을 해봐야 합니다.
여기 '보다'는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2가지가 있고요
하나는 '블레포' 동사인데 Look, See,
영어로 육안으로, 눈으로 보다란 단 어이고요
그런데 또 다른 단어는 '호라오'란 단어인데
영어로 번역하면 perceive, realize 입니다.
이 단어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알아 보는것을 말하는것입니다.
죄 가운데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지'(호라오 perceive)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뜻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그를 보지도(호라오) 못한 사람이고 알지도(기노스코) 못한 사람입니다 요일3:6
또 "알다"라는 말의 헬라어는 기노스코 란 말인데
지식으로 알다란 뜻도 있지만 체험해서 알다 그런 뜻도 있어요
이 단어의 배경에는 히브리어 '야다'인데, 우리 말로 번역하면 '체득한다'입니다.
체득이 무엇입니까? '경험해서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요일3:6
그리스도를 체험해서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지속적으로 죄짓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다.. 그런 말입니다.
자 그렇게 보면 요일3:6절에서 사도 요한이 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지속적으로 사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하면 그분안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알아 보면 됩니다.
예수님은 마치 허물 망원경으로 우주를 보는데
알아 보면 알아 볼수록 신비하게 들어나는 이 우주처럼
알면 알수록 어마 어마한 부분이 들어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는 만큼 그분을 믿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지요.
손 양원 목사님의 외모를 보고 실망한 사람들이
그분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 나서는 모든것을 제쳐두고
그분이 천국갈때 까지 졸졸 좇아다니면서
한 말씀이라도 더 들으려고 애를 썼던 것처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나면
그분 옆에 머물러 있고 싶어집니다.
그러지 말라고 막고 뿌리치고 말려도, 뿌리치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그런 분이십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예수님을 그렇게 친밀히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에게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 만큼 존재로 안 것처럼
그 분에 대해서 충분히 아셨기 때문에
그 분은 신사참배를 하라는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감옥살이를 선택했고
그리고 피난가라 해도 순교를 선택하셨던 것이지요.
두아들을 살해한 살인범을 아들로 입양할 정도로
손목사님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가는 곳마다.
"기왕이면 죽을바에야 예수님을 위해 죽으십시오 "
그렇게 외치고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기노스코) 있게 되나?
자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질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분인가 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는가요?
어떻게 하면 그분을 만나보고 체험, 체득할 수 있겠는가요?
이 질문에 대해 2가지 대답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우리보다 앞서 그분을 만나보고 체험한 분들의
증언들을 읽어보고 묵상하는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경안에는 메시야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고요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결국 결론이 이르는 역사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보고 체험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두루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런 사람중의 하나이지요.
그가 요한일서 서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 씁니다.
'이 말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이라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고 지켜본 것이고 들은것 이고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이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가 그분을 보았고... 어쩌면 대단한 특권을 가진 사람이죠
그분을 친히 만져 보았고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한없이 지속되는 인류역사에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태어나서 예수님을 직접 보는 영예를 얻었으니
이게 보통특권이예요?
그런데 제자들이 부여받았던 특권을 부러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지요
'아 그때 내가 태어나서 직접 그분을 만났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 믿을텐데..'
그건 오해이고 그건 착각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육안으로 예수님을 보는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누구인 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3년이나 가까이에서도 지켜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었지요.
반면에 그분을 육신적으로 보지 못했지만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그 믿음으로 구원받은 분은 더 많이 있어요.
정말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알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라는 제자가 있지요
부활 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났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어요
나중에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았다고
다른 제자가 말하자, 도마가 제자들의 말을 의심하면서
'내가 그분의 상처를 보지 않고는믿지 못하겠다'고 말을 했어요.
며칠이 지나서 제자들이 함께 하시는 자리에 예수님이 오셨지요.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시면서 "나를 만져보고 믿으라"고 말씀하셨지요.
그 순간 도마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 보았어요.
만져보라는 상처를 내어주는데도 만져 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동안 그 누구도 예수님에 대해 말하지 않던 고백을 합니다.
그고백이 무엇입니까?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것은 모두 성부 하나님에게만 드렸던 고백입니다.
여기서 도마는 유대인으로써 상상할 수도 없는 신성모독죄를 짓고 있는 거예요.
감히 사람에게 '주님, 하나님!'이라고 하니
하지만 나중에 그게 사실임이 드러 났지요.
지금 도마는 신성모독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순간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 차리고 있는 거예요.
그분의 외모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정체를 알아 보는 거예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분이 살아계실 때 예수님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보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는데 있어서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그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었습니다.
메시아의 외모에 대해서 구약성경에서는 예언이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그는 고난의 종에 관한 노래에서는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사53:2
그동안 예수님이 나오는 영화에는 모두 미남배우가 예수님 역할을 맡지요.
이 예언들이 사실이라면 모두 미쓰캐스팅이 된 것입니다.
관객들은 주연배우를 보려고 영화괸에 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같은 값이면 미남배우들을 써서 예수님 역을 맡기겠지요.
예수님은 손 양원목사님과 비슷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내면을 볼 수 없었던 안목이 없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헷갈려겠어요!
눈에 보이는 것과 그분의 내면이 일치하지 않으니까요
공생애 당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어요.
또한 그들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활동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했어요. 신약성경도 아직 없었으니까요.
영원히 다스릴 예수 그리스도도 알지 못했어요.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믿을 만한 증언들로 인하여
그 모든것들을 알 수 있어요.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그 미래에 대해서도
당시 그들은 알지 못했어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 믿을만한 증언을 통해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있어서
우리가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공생애 당시 살았던 사람들보다요!
▲2. 둘째로 우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분의 <체험>을 통하여
그분을 알아 봅니다.
육신을 입고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승천 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승천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은
우리가 닿을 수 없는 먼 공간으로 갔다는 애기가 아니라
육신을 입고 인간의 차원으로 오셨던 예수님이
다시 하나님 차원으로 옮겨 가셨다는 뜻입니다.
영은 계속적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영은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영으로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영은 우리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역사를 일구어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있고 느낄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변화(체험)가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우리 일들 중에 일어나는 변화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 중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 하나님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마음을 만지신다는 것이지요.
불신의 마음이 이유 없는 변화를 받아 믿어지게 되지요.
수십년 동안 뭉쳤던 분노를,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녹아집니다.
자신을 괴롭히고 이웃을 괴롭히게 했던 내면의 상처가 치유받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육신을 만질 때 우리 육신의 질병이 치료됩니다.
기도하는 중에 배운적이 없는 언어로 기도하게 됩니다.
이기적으로 이기적으로 움직이던 마음이
다른 사람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됩니다.
전에 없던 거룩한 열정과 거룩한 생각이 생겨 납니다.
나와 내가족을 위해서만 지갑을 열던 사람이
하나님의뜻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지갑을 엽니다.
늘 괴롭히던 죄로부터 해방이 됩니다.
이웃의 고통이 눈에 보이고 피조물의 신음이 들립니다.
저 창밖에 나무가 흔들릴 때 보고 '아 바람이 부는구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령 바람으로 인한 변화가 우리 중에 일어납니다.
'아! 성령님께서 나를 만지시는구나'
하고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를 위해 활동하십니다.
그 증언이 진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점점 더 알아갑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알면 알수록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되고
그분이 누구인지 더 아는 만큼
우리는그분으로 인해 더 변화됩니다. *주제
▲지난 주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지 않는 이유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항상 머물러 있지 못하는 것
그 믿음의 문제라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에만 잠깐 교회당에 왔다가
일주일 내내 바깥에서 살아가고
또 어떤 사람은 중간중간에 주님에게 나아가지만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생명력이 들어가는 그만큼 오래 머물러있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믿는다는 겉모습은 보이는데
도무지 믿음의 능력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기쁨도, 감사도, 고백도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 대댜수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요.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럼 우리는 주님안에 머물러 살아가지 못할까?'
오늘 우리는 이 사도 요한의 말씀에 따라 이 이유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해서
우리는 늘 주님안에 머물러 있지 못합니다.
물론 알고 있는 분도 있지요.
뭔가 있는게 있으니까 이 자리에 나와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분은 지극히 작은 일부분뿐이지요.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 분에 대해서 '내가 다 안다'고 만족하고 있다는 것은
그분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더 깊이 알고나면
그분에게 깊이 매료되어그분에게서 떠나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알고 싶은 열정이 없다면
그분의 신앙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밀"이라고 불렀어요
비밀 혹 신비는, 다 알수 없는 대상을 가리킵니다.
다 알수 없지만 너무도 매력적이기에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알면 알수록 매료되게 하고
알면 알수록 감격하게 되고
알면 알수록 그분은 점점 더 큰의미가 됩니다.
결국 그분을 제대로 알게 되면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그분은 나에게 절대가 됩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바울 사도는 "나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겠다."
나에게는 "예수님 한분만이 자랑"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골로새서에 보면
바울 사도가 평생토록 예수를 알아가면서
결국 말련의 자신의 비밀을 알아 가면서 언어로 말해 주고 있어요
뭐라고 합니까? 다시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골1:15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16.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십니다. 그는 근원이시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는 그분이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19.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20.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우리가 믿는 분이 이런 분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신나고 흥분했겠습니까?
그분을 우리 각자가 체험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말 그런지 알지요.
아는 만큼 그분을 사랑하게 되지요. *제목
아는 만큼 그분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됩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 이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예수님의 신비를 더더욱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분으로 알고 계십니까요?
여러분 예수님을 찾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정말 중요한 무엇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분으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극히 일부만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우상으로 축소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 모두의 믿음이 거기까지 가야됩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을 얻기 위해 말씀을 읽고 묵상하기를 잊지 마십시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매일 우리 자신을 그분에게 맡기십시다.
더욱 의지하십시다.
자주 그분의 이름을 부르십시다.
그 이름만으로도 역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진실로 그분이 온 우주의 영원한 통치자,
나의 삶의 참된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상황도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도
우리를 불안하게 하 는 문제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분이 우리에게 절대가 되시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작아지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요
세상의 모든 만남 중에서 놓쳐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만남!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주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아 본 사람들만이 목숨을 초개같이 바쳤다면
그분을 한번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인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귀한 만남을 간절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타자 Y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