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인물(제42강) 찰스 피니 교회사인물 (imr.co.kr)
▣ 찰스 피니
‘현대 부흥 운동의 아버지’ 찰스 그랜디슨 피니
(Charles Grandison Finney,1792-1875)는
1792년 미국 코네티컷주 리치필드 카운티 워렌에서
평범한 청교도 농부였던 아버지 실베스터 피니와
어머니 레베카 라이스 피니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별로 믿음이 독실한 편은 못되었는데,
영국 소설가의 소설을 애독했던 아버지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따라
일곱 번째 아들의 이름을 찰스 그랜더슨이라고 지었다.
기록에 의하면 피니는 성장하면서 집안에서 기도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으며,
성경도 29살 때 법률에 나오는 모세오경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읽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가족은 살고 있던 곳의 땅값이 자꾸 오르자
피니가 2살이 되던 해 땅값이 싼 뉴욕 주 서부로 이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피니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 성악, 첼로의 기초는 물론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등 고전어와 법률에 관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아,
평판이 좋고 키가 188cm나 되었던 피니는 총명하고 유망한 청년으로 성장하게 된다.
1812년 피니는 예일대학 진학을 꿈꿨으나 가정 형편으로 어렵게 되자
2년 동안 교사생활을 하였다.
1818년에는 한 법률사무소에 들어가 법률공부를 시작하는데,
피니가 공식적으로 변호사 자격을 언제 얻었는지는 불확실하나
그는 정기적으로 지방 치안판사 법원에서 소송 사건을 다루었다.
▲피니는 29살이 될 때까지 교회의 설교 내용 같은 것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자주 목회자와 논쟁을 했으며
교회 청년회에서 기도를 해 주겠다고 하면,
기도응답 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비꼬면서 거절하곤 했다.
그러나 피니는 그가 즐겨 읽는 법률 서적들이 대부분 성경에 높은 권위를
두고 있음을 주의 깊게 보고,
자신의 학문적 발전을 위해 성경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나가던 피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종교인들의 문제가
결코 성경 때문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었고,
성경이 명백한 하나님의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갈수록 구원에 대한 갈망과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니는 자신이 구원을 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성경을 읽다가도 사람들이 들어오면 성경을 법률서적 사이에 아무렇게나 섞어 놓았다.
마음이 괴로워 기도할 때조차도 혹시나 밖에서 사람들이 들을까 하여
열쇠구멍을 종이 같은 것으로 막고 소리 죽여 기도했다.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했으나 여전히 답답하고 괴로울 뿐이었다.
▲그러던 중 1821년 10월 어느 아침, 피니는 그의 사무실에서
빛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29세
피니는 당시의 회심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나는 주님의 발 앞에 쓰러져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회개를 다하였다.
나는 주님의 두 발을 나의 눈물로 온통 다 적시어 놓았다.”
“성령이 내게 임하셨을 때 마치 전류의 파장이 내 온몸을 꿰뚫고 흐르고
또 흐르는 듯 하는 느낌을 받았다. 성령의 사랑이 내게 밀려 왔다.
성령의 파도가 계속 밀어닥칠 때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마치 다메섹 도상의 사도바울과 같은 이런 영적 체험 후 피니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피니는 장래가 촉망되는 변호사 직을 버리고 장로교 목사가 되기로 작정한다.
▲31살이던 1823년 피니는 세인트로렌스 장로회의 배려로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담임이던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의 조지 게일 목사의
문하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노회로부터 회중 앞에서 설교할 수 있는 강도사 자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장로교 전도목사로 안수 받았다. 당시에는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피니는 서부지역 여선교회의 후원을 받으며
뉴욕 주 북부 지역 정착민을 상대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그의 열정적인 설교에 놀라운 부흥운동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그로부터 50년 동안 그는 미국 전역은 물론 영국, 스코틀랜드 등지를 다니며
부흥회를 열었고, 19세기 신앙부흥운동의 중심인물로 활약하게 된다.
▲피니가 말씀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많은 역사가 일어났다.
어느 날 피니가 뉴욕 주에 위치한 소돔(Sodom)이란 마을에서 집회를 시작하고
15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모두 앉은 자리에서 땅바닥으로 엎드려
기도하고 울부짖었다. 당시 모습을 피니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양손에 칼을 쥐고 휘둘러도 그들을 그렇게 재빨리 넘어지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넘어지기 시작하여 2분도 채 못 되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저앉거나 엎드려 기도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한번은 피니가 뉴욕방직 공장을 견학할 때, 일하던 한 여성이
피니가 다가가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푹 쓰러졌다.
그 여성은 바로 그 자리에서 눈물로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
그 순간 마치 화약이 폭발하듯 그 방에서 일하던 모든 사람들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자 그 공장의 주인은 “공장 일보다 영혼 구원의 일이 더 중요하다”며
그 날로 공장 문을 닫고 피니를 초청해 공장에서 부흥 집회를 열었다.
공장주는 모든 직공들이 집회에 참석하도록 했으며
며칠이 지나자 모든 직공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
▲이외에도 피니의 사역과 관련해 여러 유명한 일화들이 많은데,
한번은 피니가 유티카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
그 지방의 장로회 노회도 모였다.
당시 피니의 사역을 못 마땅하게 여긴 한 원로급 목사는
피니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격렬한 비난의 연설을 했다.
집회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은 이에 깜짝 놀랐으며
모두 나쁜 영향을 염려해 울면서 기도했다.
그 다음날 아침 그 늙은 목사는 침대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앤 월프란 곳에 갔을 때는, 그곳의 교회가 운영이 어려워 술집을 경영하던
사람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상황이 험악했지만,
피니는 매일 이른 아침 숲속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하지 않고는 그 상황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니의 설교에 그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국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로 마을 사람들은 교회당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었다.
로체스터 시의 경우 피니의 부흥회 영향으로 몇 년 사이에 인구는 3배나
증가했으나 범죄율은 3분의 1로 줄었으며, 당시 세속화와 범죄의 온상이었던
극장들이 모두 문을 닫았고 다시 극장이 세워지기까지 7년이 걸렸다고 한다.
피니는 뉴욕이건 필라델피아이건 일단 부흥회를 시작하면 일년 이상 계속했다.
그의 설교는 능력이 있어 청중들로 하여금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들었다. 피니는 뉴욕에서만 7년 동안 대집회를 가졌다.
뉴욕 주 로체스터에서 가진 전도 집회 때는 전체 시민의 1/10이 회개했고,
1831년 한 해 동안에 십 만 명의 성도가 회심을 체험하는 기적을 낳았다.
▲당시만 해도 여성들은 회중 앞에서 공중기도를 할 수 없었는데,
피니는 예배시 여성들을 회중 앞에서 기도와 간증을 하게 했으며,
회심자들을 강단 앞으로 불러 세워 간증을 하도록 했다.
물론 많은 비난과 반대에 부닥쳤지만, 피니는 이같은 일련의 새로운 시도들을
‘새로운 수단’이라 부르며 진행해 나갔는데,
이를 통해 여권신장운동, 반 노예운동, 형무소개혁, 금주와 절제운동 등 수많은 사회개혁 운동을 촉발시키게 된다.
여성이나 흑인을 남성이나 백인과 함께 대학 강의실에 수용하기 시작한 것도
피니 때부터였다. 한 사람의 헌신된 사역자의 영향력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피니의 자유분방한 예배방식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반대 세력은 피니에 대한 거짓 풍문을 퍼뜨렸으며
피니의 활동을 정탐해 방해공작을 했다.
적지 않은 교회가 그에게 강단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의 반대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피니와 그의 동역자의 화상을 만들어 불태우기까지 했다.
예배 모임 중에 소란을 피우기도 했고 음모와 거짓말과 거짓 보고가 난무했다.
하지만 피니는 수많은 반대와 조롱과 핍박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그의 뒤에는 늘 주님이 함께 했다. 피니가 그토록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으로부터, ‘반대 세력들이 결코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응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방해 공작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피니의 부흥운동은 불길처럼 타오르게 되었다.
▲한번은 콜롬비아 노회에서 피니에 대한 거짓 송사만을 믿고
특별 위원회를 구성했다.
피니를 심문함으로써 그의 집회를 방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조사 위원 중 한 목사님이 이때 피니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요청대로 피니는 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다.
그 목사님은 피니의 설교를 듣고 노회에 통보하기를
“피니의 설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더 이상 피니를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피니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피니를 방해하면
하나님과 맞서 싸우는 결과가 될 것이다.” 하고 경고했다.
이로 인해 콜롬비아 노회에서는 피니를 반대하는 소리가 없어지고
피니의 복음 전하는 일에 협조를 했다.
결국 그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약해졌으며
오히려 그를 지원하는 세력은 더 강해졌다.
이를 통해 미국에서 일어난 제2차 대각성운동은 피니를 통해 절정에 이르게 됐다.
피니의 부흥집회가 절정에 달했을 때는 불과 몇 달 만에
100,000명의 사람들이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1832년 일생동안 그를 괴롭혔던 재발성 호흡기질환에다가 콜레라에 걸려
여행을 할 수 없게 된 피니는, 뉴욕을 중심으로 사역을 계속하게 되는데,
1835년에는 새로 설립된 오벌린 학교의 신학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의 설립자가 파산해버려
학교는 부채를 떠안게 되었고, 피니 역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피니는 그같은 상황을 모두 하나님께 아뢰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
며칠후 하나님께서는 한 독지가를 통해 몇 달치의 생활비를 보내주셨고,
그 이후로도 피니의 모든 필요를 어김없이 채워주셨다.
뿐만 아니라 학교의 부채도 그의 저서가 영국에서 엄청나게 팔리면서
그 돈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후에 그는 15년동안 오벌린대학의 학장으로 봉직하면서
수많은 후진들을 양육해 내는데,
오벌린대학은 세계적인 기독교 영향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피니는 오벌린에 정착한 후, 신학교에서 후진들을 양성하면서 동시에
학교의 허락 하에 방학 때마다 부흥집회를 인도하였으며,
또 이때 여러 중요한 논문들과 저술들을 완성하게 된다.
▲찰스 피니가 이처럼 오벌린대학의 학장으로 있을 때,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의 두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미국에서 태어나,
이 위대한 사역자 찰스 피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고 있었으며,
피니가 두 번 영국 선교여행을 하며 부흥운동을 일으킬 때,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경을 전하다가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토마스목사는 물론,
중국에 머물면서 성경을 우리말로 최초로 번역한 존 로스 목사 역시
영국에서 태어나, 찰스 피니의 소문을 들으며
부흥운동의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 사명자로 훈련받고 있었다.
▲변호사요 목사이자 신학 교수였던 피니는 일생동안
확성기도, 대충매체도 없던 시대에
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이끌었던
19세기 신앙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이다.
통계에 따르면 피니의 집회에서 회심한 사람 중 90%이상은
계속해서 변화 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는 그가 회심한 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변화된 삶을 위한
성화(聖化)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피니 자신의 삶도 하나님의 온전한 임재 가운데 거하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그 격렬하고 도전적인 말투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회개했던 것은 피니 자신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피니는 첫 부인 리디아 앤드류즈와 사이에 8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내와의 사별로 두 번 재혼하였으나
그는 훌륭한 아버지이자 충직한 남편으로 살았다.
1875년 어느 평온한 주일, 83세를 일기로 19세기 위대한 부흥운동가 찰스 피니는
오벌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찰스 피니의 대표적인 저술인 <신앙부흥운동강의>에 보면,
“부흥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라고 쓰고 있다.
여러분은 평소에 부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찰스 피니의 말대로 부흥은 형식적인 종교생활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 반대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하고,
게으름을 부리고, 세상일에 더욱 마음을 빼앗길 때,
우리의 신앙은 퇴보하고 침체되는 것이다.
개인이든 교회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기 시작할 때,
이미 우리 가운데 부흥은 시작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은 부흥의 길목에 서 있는가?
아니면 퇴보와 침체의 길목에 서 있는가?
아무쪼록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결단을 통해,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우리 교회 가운데 새롭게 시작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