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적 영적 침체의 3단계: 무관심 왕상 21:3 스크랩, 출처
조엘 비키
불신은 교회가 무관심(indifference)이라는 보다 더 마비된 산채로 침체되도록 이끕니다.
불신은우리가 진리에 관한 모든 관심을 잃어버리도록 유혹합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참된 교리를 듣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담 안에서의 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고전 15:22)에 대한 복음을 듣기 위해서 주의를 기울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핵심 진리를 지키는 일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주권교리는 인간의 책임을 제거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뜻하신 바를 자유롭게 행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에 의존하는 법을 경험적으로 배워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선하신 뜻이 모든 진리의 핵심과 중추이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인간을 참으로 겸손하게 하는 유일무이한 참 종교의 디딤판이며,
다른 교리들이 발원하는 근원이라는 하나님 의 주권교리를 지키는 데
우리는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기독교 핵심 교리들이 충분히 설교되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전에 보여주셨던 사랑, 에덴동산에서의 인간 타락,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완전하 구속, 칭의, 성화, 성도의 견인,
성령의 필요성 등에 관한 교리들이 우리의 삶과 실제로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는 경험적인 교리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까? 아니면 무관심합니까?
우리는 구원에 은혜의 필요성, 무한한 은혜의 충만함,
그리고 구속하는 은혜의 열매가 모든 설교에서 선포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고통과 구원과 감사를 체험적으로 아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설교를 통해 은혜의 표지들, 곧 알곡과 가라지,
하나님의 자녀들과 사탄의 자녀들,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 영적 지식과 세상적 지식,
아이같이 천진한 경외심과 노예적 두려움, 일시적 믿음과 참된 구원의 믿음,
극심한 두려움(약 2:19)과 참된 떨림(빌 2:12),
막연한 뉘우침과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구별해 주는 표지들을 듣기 위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에 전혀 무관심한 상태로 머물러 있습니까?
우리는 참된 교리, 곧 우리가 삶에서 경험할 수 있고
생활 속에 지속적인 영향을 마치는 교리가 우리의 일상과 마음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극도로 냉담하고 분별력을 잃은 경박한 시대에 몸담고 있습니다.
진리를 향한 참된 관심이 놀라울 정도로 급속히 침체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극단적이 부분들은 오늘날 교회의 성도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조차도
점차 뚜렷이 식별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설령 그 차이를 안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감정이나 이성의 미명 하에 그렇게 구분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봇은 아합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왕상 21:3).
나봇은 왕명을 거역했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지만,
솔직히 우리들 대부분은 완전히 무가치한 것이나 사소한 것들 때문에
우리의 유산을 기꺼이 팔아 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 말씀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은혜의 표지들과
실제 역사 속에서 현상적으로 표출된 은혜의 표지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더 이상 귀담아 들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남긴 작품들을 읽는 데 시간과 노력을 쏟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머리를 써 그 차이점들을 애써 연구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차이점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이런 것들을 식별하는 일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갈리오 총독과 같습니다. 행18:12 주1)
사람들은 거의 동물과 같은 수준으로 생활합니다.
단지 일하고 먹고 잠자고 하면서 살다가, 수명을 다하면 죽어서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명성과 삶을 위해 참된 교리를 적당히 변형시킴으로써
영적 침체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교리보다 우리의 자아를 우선시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실제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로 일
상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리를 지루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전에 루터는 ‘교리는 천국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지식적 교리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가운데 깨달아진 영적 교리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루터에게는 교리가 결코 지루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왜 그렇게 느꼈을까요?
그에게 교리가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교리를 몸소 체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유지하는 능력을 가지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
리가 그의 영혼에 주입되었기 때문입니다.
교리를 체험하는 것과 관련해서, 루터는 히스기야 왕과 같이,
‘나는 이것들(교리들) 때문에 산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태도가 과연 여러분의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은 설령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리 준엄한 메시지일지라도,
철저하고 엄중하며,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으며, 세상과의 구별을 외치는 설교를 좋아합니다.
본래부터 우리의 현세적 신념과 무의미한 희망과
거짓된 확신과 거침없는 주장을 선호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스스로를 속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이를 알리요?”(렘 17:9)
라는 말씀의 교훈을 체득한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속지 않는 것보다 속임을 당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빼놓고 아무리 많은 눈물을 흘리며 밤새워 기도한다 해도,
사냥해서 잡은 사슴 요리를 아무리 갖다 바쳐도(창 27:20),
그리고 위선적인 헌물(비록 그것이 아무리 순전한 것처럼 위장된 것이라 할지라도)을 아무리 많이 드려도,
그런 행동들이 결코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눈물과 기도와 회개와 뉘우침과 겸손 이상의 무엇인가를 필요합니다.
그들에게는 견실하면서도 깨어지지 않는 기초가 필요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신 외에 다른 사람과 다른 어떤 것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 속에 경험적으로 불타오르는 참 교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아의 모든 것을 완전히 소멸시켜
그리스도의 모든 것으로 뜨겁게 불타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성령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완전한 경험을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참된 교리가 그들의 영혼 속에 불타오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 영혼의 마음 판에 새겨진 것이 제 자신이 교리와 도장과 펜 자국과 눈물과 행위가 아니라,
거룩한 당신의 교리임을 알 수 있도록 나에게 당신의 거룩한 인으로 새겨 주십시오’
라는 고백이 바로 그들의 탄식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그들의 삶의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성령께서 이루신 교리와 영혼으로 경험할 수 있는
천국의 이슬로 적셔진 교리를 더욱 간절히 추구합니다.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도록 해 주는 그런 진리를 열망합니다.
그들은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의심을 몰아내고, 그들의 영혼을 북돋아 주며,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고, 복음으로 양육하며, 그들의 영혼에 은혜를 베푸는 진리를 갈망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런 진리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여러분의 삶과 희망이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신봉하는 기독교는 단지 가금씩 마음에 떠오르는 일상적인 상념들과
뒤죽박죽되어 버린 형식적 종교에 자나지 않습니까?
아무 힘도 없는 하찮은 종교와 머리에 떠오르는 보잘 것 없는 진리가
여러분의 양심에 만족을 주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영혼을 방치해 두고 육체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마음에 새겨진 참된 진리의 지식을 맛보지 못한 채,
단지 종교의 외면적이 껍질과 형식만으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날마다, 매 설교마다, 그리고 매주 마다 영적 침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냉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참된 진리입니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그분의 저주에 이를 수 있는 지름길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곧장 지옥에 빠뜨릴 만한 영적 침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우리가 처해 있는 심각한 영적 침체의 상태를 직시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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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갈리오 총독 : 철학자 세네카의 동생으로서,
황제 글라우디오 때에 아가야의 총독을 고린도에 있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끌고 왔을 때, 그것을 단순히 유대 종교의 문제로 생각하여 개입하기를 거부했다